모두가 멈춰 있는 그 시공간에서 레비가 물 흐르듯이 키리안에게 다가오더니,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리고 키리안의 귓가에 대고 비웃는 어조로 말했다.
“남의 사생활을 함부로 말하면 쓰나.”
그리고 레비가 두 손가락을 튕기는 동시에 키리안은 얼음 땡 놀이에서 풀려난 아이처럼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엘리야는 어떤 이상한 낌새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는 어떤 일도 없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키리안에게 되물었다.
“응? 키리안, 왜 말을 하다 말아. 레비가 뭐라고?”
키리안은 아까의 방해 공작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입을 열었다.
“이 악마는 -!”
하지만 이상하게도 키리안이 ‘7대 악마’라는 말을 하려고 하면, 마치 재갈이 입에 욱여넣어지듯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아무리 목소리를 내려고 애를 써 봐도 소용이 없었다. 엘리야는 입만 뻐끔거리는 키리안을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키리안은 비비안이 자신에게 해줬던 경고를 떠올렸다.
‘7대 악마들은 흑마법 능력이 여느 악마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뛰어나. 환술이나, 저주를 거는 것 외에도 그들의 능력은 다 파악이 안 될 정도로 무궁무진해.’
레비가 자신에게 어떤 저주를 걸어놓은 게 확실했다. 키리안이 곧바로 레비를 노려보았다.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키리안의 표정을 본 엘리야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레비는 엘리야의 뒤에서 팔짱을 끼고 서서, 그런 키리안을 향해 비웃음을 날려줄 뿐이었다. 그는 엘리야에게 가까이 다가가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엘리, 네 파트너가 나한테 왜 이렇게 적대적으로 대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너하고 얼마나 오래된 동기 사이인지 모르고 말이야.”
키리안은 으르렁거리며, 엘리야의 어깨를 두르려는 레비의 손을 쳐냈다.
“손대지 마.”
그러자 레비의 붉은 두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빛나는 야생동물의 눈처럼 번뜩였다. 그때 엘리야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래, 레비. 전부터 거슬렸는데, 내 몸에 멋대로 손대지 마.”
그 말에 레비는 방금 드러냈던 살기를 순식간에 감추고는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렸다.
“엘리, 너는 너무 냉정하다니까.”
엘리야는 그런 레비를 완전히 무시하고 키리안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키리안. 난 네가 레비한테 왜 이렇게 날이 서 있는지 모르겠다.”
“…….”
키리안은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침묵하는 키리안을 보고 엘리야가 실망한 기색으로 조곤조곤 말했다.
“사실 너랑 파트너 되기 전에 너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긴 했어.”
“저에 대한 소문이요?”
“키리안 너는 악마들에게는 말을 먼저 건 적이 한 번도 없다던데. 굉장히 선을 그어두고 냉랭하게 대한다고.”
“그… 그건…….”
키리안은 당혹스러워하다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맹세코 악마 파트너들에게 악마 종족이라는 이유로 무례하게 대한 적은 없습니다. 그저……․”
“괜찮아. 나는 신경 쓰는 편은 아니었어. 너보다 악마 파트너들을 더 심하게 대하는 천사들은 널리고 널렸으니까. 근데 내가 만난 너는 다정해서, 그게 과장된 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했는데.”
“…….”
“아니었나 보네.”
엘리야는 씁쓸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앞에 살풋 웃어 보이는 라파엘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엘리야는 키리안을 외면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모든 헬퍼는 이런가? 역시 키리안은 내가 헬퍼의 대상이니까 잘 대해준 것뿐이겠지.’
여기까지 생각한 엘리야는 지독한 피로감을 느꼈다. 키리안에겐 무너졌었던 마음의 장벽이 다시 필요하다고 절감하게 되자, 비참함이 몰려왔다. 엘리야는 키리안을 지나쳐가며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됐어. 다음에 이야기하자.”
“엘리야 선배!”
키리안은 급한 손길로 엘리야의 손을 잡았다. 엘리야가 뒤를 돌아보니, 키리안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가득했다.
“엘리야 선배, 이 오해는 풀고 싶어요. 제가 저 악마, 아니 선배의 동기에게 날카롭게 대한 건, 이유가……! 그게-! …….”
엘리야는 오늘따라 키리안이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식은땀을 흘려가며 엘리야에게 뭔가를 전하려고는 했는데 끝까지 말은 해주지 않았다. 키리안은 고통스럽다는 표정을 짓다가 체념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저 악마가 우리가 조사하고 있는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예요. 그러니까 선배가 조심했으면 좋겠어서…….”
그 말을 듣자 엘리야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레비가 왜 유력한 용의자인데?”
그러자 키리안은 이번에도 뭔가 말을 하려다가 결국 물에 잠긴 붕어처럼 입을 뻐금거리기만 했다. 엘리야는 얼이 빠진 얼굴로 그런 키리안을 바라보고 있다가 한 장면을 떠올려 냈다.
그때 기절해 있던 사내의 로브를 벗기기 전에, 엘리야와 키리안 둘 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 사내의 눈은 붉은빛이 돌았다. 그걸 기억해낸 엘리야는 레비의 얼굴을 한번 본 뒤,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키리안에게 말했다.
“설마…… 레비가 악마고, 붉은 눈이니까 그렇다는 거야?”
그 말을 들은 키리안은 곤란하다는 얼굴로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그는 어떤 결심을 한 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요. 맞아요. 그러니까 조심하셨으면…….”
그 말에 멀찍이서 레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나치게 과장한 연극 톤인 슬픈 목소리였다.
“억울해라.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붉은 눈이라고 의심당하네. 악마들 사이에서 붉은 눈은 흔한데 말이지.”
슬픈 연기를 하는 것일 뿐, 명백히 조롱을 담은 레비의 태도에 키리안은 이를 갈았다. 그걸 본 엘리야는 키리안이 잡고 있는 자신의 손을 뒤틀어 빼냈다. 그녀는 싸늘한 눈을 한 채 키리안에게 말했다.
“키리안 너도 내가 말했던 오만한 천사들과 별로 다를 게 없는 것 같다.”
몇 걸음 걸어가던 그녀는 고개를 반만 돌려 한마디를 더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 헬퍼라는 거, 정말 대단하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걸어가 키리안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그렇게 엘리야와 키리안이 서로 대화를 하지 않은 지 삼 일째가 되었다. 이 상태론 숙소에서 엘리야와 함께 있을 용기가 나지 않은 키리안은 오랜만에 바로 발걸음을 향했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게 술을 마시고 있던 키리안의 어깨를 잡고 흔든 건, 비비안이었다.
"키리안, 여기서 무슨 술을 그렇게 마시고 있어?"
"아, 비비안님.“
비비안의 등장에 키리안은 약간 놀란 표정이더니 금세 눈썹이 아래로 쳐졌다. 속상함이 느껴지는 그 얼굴이 시무룩해진 강아지를 연상 시켜 비비안은 웃음을 참아야 했다. 그전엔 잘 훈련된 사냥개 같았던 키리안이 이렇게 변할 수 있을 거라고는 비비안도 예상하지 못했다. 키리안의 옆에 앉으며 비비안이 말했다.
“무슨 일인데?”
키리안은 한숨을 내쉬더니 엘리야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키리안의 이야기를 다 들은 비비안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키리안 네 심정은 알지만……. 엘리야가 충분히 오해할 수는 있었던 것 같다.”
“네……. 저도 압니다.”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술을 홀짝이던 비비안은 장난기를 담아 키리안에게 말했다.
“게다가, 키리안 네가 소문이 돌 정도로 그동안 악마 파트너들에게 냉정했던 건 사실이잖아. 그게 엘리야의 오해를 더 깊게 했을 거라고 생각해.”
그 말을 듣고 키리안은 자신의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키리안은 전 악마 파트너들에게 먼저 인사를 하거나 살가운 말 한마디 붙여본 적이 없었다. 그저 자신은 천사고, 그들은 악마이기에 굳이 어울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키리안이 엘리야를 만나고 난 뒤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엘리야를 보자마자, 그녀가 악마인 건 더 이상 그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비비안은 생각에 깊게 잠겨 있는 키리안에게 말했다.
“회사 방침이 천사와 악마가 화합하자는 방향으로 바뀐 지는 얼마 안 된 건 사실이지. 빠른 시일 안에 악마들을 편견 없이 대하는 건 어려울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비비안이 뜸을 들이자, 키리안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응시했다. 비비안이 진지한 말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네가 엘리야를 진심으로 소중히 생각한다면, 네가 그동안 악마 파트너들을 다르게 대우했던 걸 진심으로 사과해야 해. 그리고 앞으로 정말 태도를 철저히 바꿔야겠지.”
“그래야겠네요.”
키리안은 처연한 얼굴을 한 채 술잔을 집어 들었다.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슬퍼 보이는 키리안의 얼굴은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비비안은 그런 키리안의 얼굴이 참 잘났다고 새삼스럽게 생각하며 술을 따라 마셨다. 키리안이 비비안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비비안님께 궁금한 게 있었어요.”
“뭔데?”
“비비안 선배님은 어떻게 그렇게 악마들을 편견 없이 대할 수 있었던 건가요? 천사·악마 부서 간 중재팀 팀장이시잖아요.”
키리안의 말을 듣고도 그녀는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고 비비안이 천천히 말했다.
“천사·악마 부서 중재팀을 만든 선배가 있었어. 그 선배와 함께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악마에 대한 편견을 많이 버리게 된 것 같아.”
그러고 보니 키리안은 천사·악마 중재팀을 만든 이가 누구인지 그동안 몰랐다. 오랜 시간 동안 그걸 모르고 지내던 자신에게 의아할 정도였다. 키리안은 비비안이 말하는 그 선배가 누군지 궁금했으나 말을 아꼈다. 비비안이 말하기를 꺼리는 게 느껴졌다.
“그 선배야말로 대단한 천사였던 것 같아. 사실 우리는 신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잖아? 이 회사에 들어왔을 때 나는 당연히…… 나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 의문도 없었고, 그저 내려지는 일만 묵묵히 수행했거든.
근데 그 선배는 항상 질문하는 천사였어. 신에게도 질문하기를 서슴지 않았지. 나는 그런 용기를 가진 그를 많이 동경해왔어.”
여기까지 말한 비비안은 키리안을 향해 쓰게 웃었다. 키리안은 왜 비비안 선배가 자신이 존경하는 선배의 이야기를 하면서 저렇게 슬픈 얼굴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비비안은 슬픈 기색을 걷어내고 다시 평소의 명랑한 얼굴로 돌아와 말했다.
“아무튼 엘리야에게 잘해줘. 엘리야가 그래도 너한테 마음의 문을 많이 연 것 같던데. 그 엘리야로서는 굉장히 용기 낸 거일 거야.”
그 말을 듣자 키리안의 눈빛이 변했다. 키리안이 비비안을 향해 진지하게 물었다.
“과거에 엘리야 선배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키리안의 질문에 비비안의 표정이 다시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잔을 들어 남은 술을 탈탈 털어 마신 뒤 말했다.
“키리안, 그때 네가 물었지. 엘리야가 파트너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계기라도 있는 거냐고.”
“네.”
비비안은 입술을 한 번 깨물더니 오랜 시간 동안 뜸을 들였다. 키리안은 인내심 있게 비비안이 먼저 말을 꺼내도록 기다려주었다. 바에서 손님들이 하나둘, 일어날 때쯤 비비안이 말했다.
“사실, 키리안 네가 엘리야의 첫 번째 헬퍼가 아니야.”
그 말을 들은 키리안은 충격을 받은 얼굴을 했다. 그런 키리안에게 비비안이 차분히 말했다.
“그전에 한 명이 있었어. 한마디로 너는 엘리야의 두 번째 헬퍼인 거지.”
“그게 가능한 겁니까?”
“이론적으로는 가능해. 하지만 실제로는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지. 첫 번째로 배정받은 헬퍼가, 상대를 떠나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하니까.”
그 말에 숨겨진 의미를 파악한 키리안이 비비안에게 물었다.
“대체 그게 누구였죠?”
“전에 내가 말한 적 있었잖아. 과거에 엘리야가 항상 1위를 했던 건 아니라고. …그건 엘리야가 라파엘이라는 천사와 파트너일 때였어.”
“라파엘?”
키리안은 그 이름을 듣자 과거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흑마술이 걸린 가루를 맞고 악몽을 꾸던 엘리야가 중간중간 괴로운 목소리로 라파엘이라는 이름을 중얼거렸다. 엘리야가 정신을 차릴 때조차,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을 라파엘이라고 불렀다. 키리안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되물었다.
“저는 설마 아니겠지 싶어서……. 그 천사, 삼 대 천사 중 한 명이었잖아요. 하지만 지금은-”
술 한 잔을 더 주문하던 비비안이 자조적으로 웃으며 키리안의 말을 채갔다.
“시간의 형벌에 갇혀 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