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다음날 아침 리나의 집.
초아를 보내고 다시 깊은 잠에 빠지려는 차에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아이 씨 꼭두새벽부터 누구야?
리나는 좀비 같은 모습으로 침대에서 기어 나와 긴 팔을 휘저으며 바닥을 훑어 겨우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리나/ “네...”
/재민/ “아직 자는 거야?”
잔뜩 갈라진 리나의 목소리와 대조되는 밝은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 니 목소리는 싱그러운 봄날을 닮았다고.. 예전에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너는..’
/리나/ “누구? 정재민??”
/재민/ “어떻게 알았어? 나 번호 바꿨는데. 어제 번호를 하도 흘려서 말이야.”
벌떡 일어나서 시계를 보았다.
토요일 아침 열 시.
이 시간에 왜?
/리나/ “이사님께서 주말에 어쩐 일이세요? 어제 업무 외에 사적으로는 뵐 일 없다고 말씀드렸는데?”
/재민/ “일하자. 나 지금 너 사는 레지던스 주차장에 와있어. 할 일 많으니까 어서 내려와 줘.”
끊어진 전화를 멍하게 바라보던 리나는 머리카락을 뜯을 듯 잡아 쥐었다.
지금? 밑에 와있다고??
정신 차려 권리나.
허튼수작에 넘어가지 말자.
눈에 힘을 바짝 주고 중얼거리며 욕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단정한 바지정장을 갖춰 입은 리나가 주차장으로 나오자 지루한 듯 핸드폰만 만지고 있던 재민이 웃으며 다가왔다.
/재민/ “여기가 직원 숙소야? 내 방도 있어?”
/리나/ “이사님께서 지사장으로 오시게 되면 회사에서 별도의 사택을 구해드릴 겁니다. 아파트든 주택이든 원하는 타입을 말씀하시면..”
/재민/ “여기는? 다른 직원들도 다 여기 산다던데?”
/리나/ “여기는 작은 오피스텔형태의 레지던스입니다. 이사님이 쓰시긴 좁기도 하고, 같은 건물을 쓰시는 건 직원들이 불편합니다.”
/재민/ “쳇. 나만 어디 낯선데 떨어뜨려 놓으려고? 어제 어디서 잤는지는 왜 안 물어봐?”
/리나/ “...바로 올라가시는 줄 알았는데요. 하루 머무실 거였으면 정팀장한테 말씀하시고 리조트에서 쉬셨으면 되는데..”
/재민/ “술을 좀 마셔서.. 시내 호텔에서 잤어. 그리고 나 라엘에서 자는 거 싫어하는 거 알잖아. 사람들이 다 나만 보는 것 같고 직원들도 전부 수군거리는 것 같아서 질색이야.”
/리나/ “그럼 잘 아시겠네요. 이사님이 퇴근 시간 이후에도 같은 건물에 계시게 되면 직원들 마음이 어떨지. 숙소문제 때문에 부르신 거면 정팀장에게 잘 전달하겠습니다.”
/재민/ “아니야, 그거 말고도 할 일 많아! 공부해야지. 올라가면 아버지가 이것저것 물어보실 텐데. 아무것도 모르면 혼나.”
/리나/ “공부요?”
/재민/ “응, 분명 올라가면 거제가 어떤지 물으실 테니까, 관광 가자! 얼른 타. 이거 사적인 거 아니고 분명 공적인 일이니까 절대 도망갈 생각하지 마.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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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나와 재민은 리조트 주변에 조성된 해안 산책로를 따라 걷고 있었다.
/리나/ “라엘에서 부지를 제공하고 거제시에서 조성, 관리하는 방법으로 리조트 주변 해안 둘레 길을 구축하였습니다. 시에서는 주변 땅을 조금씩 더 매입해서 둘레길 조성을 이어가겠다는 방침입니다.”
/재민/ “좋네. 리조트운영이라는 게 그냥 객실장사만 하는 건 줄 알았는데.”
/리나/ “좋은 자연환경이 있는 곳에 멋진 리조트를 지어두더라도 접근성이 떨어지는 위치를 고려하면 2박 이상 장기여행으로 유도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리조트 내 즐길 거리뿐만 아니라 주변 관광지가 다양화되는 것이 저희 리조트운영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승혁 팀장이 지자체와 협력해서 거제지역의 다양한 관광 개발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민/ “역시 똑 부러지네, 권리나. 귀에 쏙쏙 들어와.”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그녀를 칭찬하는 소리에 한걸음 앞서가던 리나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리나/ “이사님.”
/재민/ “응, 왜? 똑똑하다고 칭찬한 것도 사적인 대화로 치는 거야, 설마?”
/리나/ “왜 굳이 여기까지 내려오시려는 거예요?”
/재민/ “그거야 아버지가..”
/리나/ “승혁이한테 들었어요. 굳이 저랑 일하시겠다고 하신 거.”
재민은 잠시 뜸을 들였다.
/재민/ “... 보고싶었어, 리나야.”
반짝이는 바다를 등지고 선 재민의 금발이 바람에 흩날렸다.
햇살을 받아 눈이 부신 재민의 미소가 태양처럼 빛났다.
멀리서 보면 눈부시고 아름다운 태양은
가까이 갈수록 뜨거운 열기로 나를 태워 버리지.
리나는 그저 재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민/ “... 또 떠날 거야?”
재민의 얼굴이 마치 놀이동산에서 신나게 놀다가 맛있게 먹고 있던 사탕을 뺏겨버린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을 때, 다가온 그의 떨리는 손이 겨우 리나의 새끼손가락을 쥐었다.
/재민/ “널 불편하게 하지 않을게. 나 정말 일도 열심히 배워 볼 거야. 네가 싫어하는 친구들도 더는 안 만날 거고. 어차피 여기까지 내려와서 귀찮게 할 녀석들도 아니고 그럴 만한 놈들은 내가 이번에 다 빵에 넣어 버렸...”
리나는 그에게 잡힌 손가락을 뺐다.
/리나/ “그러니까 왜요? 갑자기 왜 그러겠다는 거예요? 그냥 사시던 대로 살면 되는데. 저랑 헤어진 지 벌써 3년이 지났어요. 그동안 한결같은 모습으로 잘 지내시는 것 같더니 갑자기 왜..”
/재민/ “넌..왜 갑자기 날 떠났어?”
/리나/ “재민씨..”
/재민/ “.. 넌 그때 나보다 일을 더 좋아했잖아. 항상 바빴고…. 그래도 난 그런 너를 보는 게 좋았어. 일 할 때 자신감 넘치는 네가 멋있고, 자랑스러웠어. 그래서 널 승진시켜 주고 내가 해야 할 일들까지 맡겼던 거고. 그게 널 더 반짝이게 해주는 거라고 믿었어. 난 가끔 외로워서 너무 힘들었지만.
그래도 너한테만 기대면 바쁜 네가 너무 부담스러워할까 봐 친구들도 만나고 너 귀찮게 하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난 지금도 몰라. 네가 도저히 못 하겠다고, 그렇게 말하고 떠나버린 이유가 뭔지.
그런데 말이야, 지나고 보니 그동안 내가 만나고 헤어졌던 여자는 수두룩한데, 날 떠난 이유가 궁금한 사람은 리나 너뿐이더라.”
리나는 말문이 막혔다.
네 그 친구를 빙자한 복잡한 여자관계들 속에서 내가 얼마나 속을 태웠는지, 네가 가십거리가 되는 게 싫어서 내가 얼마나 더 악착같이 일해야 했는지, 이제 와 그를 이해시키려는 모든 말들이 구차하게만 느껴지는 마음에 차마 말을 아꼈다.
그래, 아무렴 어때,
지금에 와서 뭘 어쩌려고.
/리나/ “이제 아무 상관없잖아요. 그 이유가 뭐든 우리는 한참 전에 이미 끝났고, 나는 재민씨랑 다시…. 그런 만남은 하고 싶지 않아.”
/재민/ “도망가지만 마. 나 정말 일만 하러 올게. 같이 있게만 해 줘.”
리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를 보면 자꾸 마음이 약해지는 자신이 싫었다.
/재민/ “하나만 더…. 아버지가 나를 자꾸 결혼시키려고 하셨었어. 진짜 약혼까지 할 뻔했었고. 그런데 그건 정말 못 하겠더라. 그래서 더 망나니처럼 굴었어, 파혼하려고.
나한테는 그게 너에게 가려는 발버둥이었어. 그런데 살던 대로 살라고? 나 그거 못해, 리나야.”
단발머리가 바람에 엉망으로 날리는 바람에 눈물이 가려져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재민이 다가와 리나의 얼굴을 감싸고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재민/ “이제 갈게. 울지 말고, 3개월 있다가 봐. 내 사랑.”
예쁜 미소로 눈을 맞춘 채 인사한 재민이 사라진 후에도, 오랫동안 리나는 그 자리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