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과 사건, 지명, 인명은 모두 허구임을 밝힙니다.’
12화. 무(無)로 돌아가다.
까마득하게 어두컴컴한 공간이었다.
이질적으로 텅 비고 까마득한 공간엔 박진우만 벌거벗은 채 서 있었다.
‘여기가 어디야?’
저 먼 곳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박진우는 그 불빛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희미한 불빛의 정체는 TV였다. 신식 TV가 아니라 뒷 배가 불룩하게 튀어나온 브라운 관 이었다.
박진우가 다가오자 지지직 거리던 화면이 정상적으로 돌아오며 어떤 영상을 틀어주었다.
그 화면에선 박진우 자신이 스스로 촬영한 지나간 여성들과 관계를 맺은 영상이었다.
‘흐흐흐....’
박진우는 자신과 한 여성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 씰룩거리며 눈썹을 치켜 올리고 있었다.
그때 영상안의 여성이 갑자기 자신을 쳐다보았다.
그 여성이 문득 자신에게 눈을 똑바로 맞춘 채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이야기를 했다.
“넌 천하의 개 쓰레기야”
“뭐..뭐야? 나 보고 한 말이야? 영상 속에 네가 나한테 어떻게 말을 해?”
헐벗은 그 여자가 TV 화면 밖으로 기어 나왔다.
박진우는 뒷걸음질 쳤다.
걸어 나온 여자는 박진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마네킹처럼 서 있었다.
마네킹은 조용히 눈물을 흘리더니 이내 눈물은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눈에서 흐르는 피가 바닥을 적시었다.
“오..오지마 이 년아! 너는 죽었잖아!”
피 눈물을 흘리면서 오는 여성은 몇 년전 박진우를 사랑했던 여성이었다.
하지만 여지껏 그랬듯 박진우는 그녀에게 육체적인 관계만을 요구 했다.
더 나아가 박진우는 관계 장면을 몰래 촬영 한 뒤 인터넷에 유포했다.
그 압박감을 견딜 수 없었던 여성은 자살 했다.
“박진우..다 너 때문이야... 다 너 때문이야..”
여성은 눈물을 흘리면서 한 걸음씩 박진우에게 다가갔다.
한 발자국씩 움직일 때 마다 피바다에 첨벙 거리는 소리가 났다.
여성이 다 ‘너 때문이야.’ 라고 말 할 때 마다 다른 여성의 얼굴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 여성들의 얼굴이 모두 익숙했다. 그 얼굴들은 박진우와 하룻밤을 보내고 난 뒤 고통 속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으...으으으 아아악!! 오지..오지마!!”
“……일어나..”
“으으으으으으!”
“일어나 박진우.”
촤르륵
박진우는 얼굴에 느껴지는 차가운 축축함에 희미하게 눈을 떴다.
두 눈 앞에는 호랑이 가면 사내가 의자 앞에 앉아 있었고, 한연희가 침대에 걸터 앉아 있었다.
‘꿈 이었나..’
온 몸을 움직여 보았다. 하지만 자신의 손은 뒤로 젖혀져 완전히 속박되어 있었고, 양 쪽 다리 또한 따로 의자에 묶여 있었다.
풀어보려고 힘을 주었다. 하지만 강하게 속박 되어 있는 탓에 들썩 거리기만 할 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꿈도... 현실도... 둘 다 최악이다.....’
“강하게 묶어 놨어. 소용없을 거야.”
이범은 팔짱을 끼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박진우는 이를 꽉 깨물고 어떻게든 줄을 풀어보려 했다. 이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파악하고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왜!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옆에 있던 한연희가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박진우... 진짜 모르겠어? 네가 몇 년간 그렇게 사악한 짓을 벌여 놓고도 눈꼽 만큼의 죄책감도 없는 거야?”
“아... 한연희 내가 너 혼전순결 깼다고 이러는 거냐? 너도 좋아 했잖아!!”
한연희는 두 눈에 핏줄이 섰다. 더 듣기 싫다는 듯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박진우의 뺨을 때렸다.
짝!
“이 쓰레기 같은 놈...미안한 마음... 반성하는 기미도 전혀 없어.. 우리가 예상했던 그대로야. 기대를 품었던 게 잘못이다. 그대로 진행하자.”
“뭐? 뭘 진행 한다는 거야? 잠깐..기다려봐 내가 잘못했다.. 돈 때문이라면 얼마든지 줄게.”
이범이 손가락 하나를 튕겼다.
박진우의 왼쪽 엄지발가락에서 불이 피어올랐다.
살이 익는 냄새가 퍼졌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끄아아아아아아악!!!”
“조용히 해. 아직 시작도 안했으니까.”
한연희는 수건을 박진우 입에 물렸다.
“으...으....으으으... 으으으!”
비명소리가 수건에 가로 막혀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막힌 소리만 나왔다.
딱!
엄지발가락의 불이 꺼졌다. 이범이 수건의 입마개를 풀었다. 큰 고통에 얼마나 세게 물었던지. 수건에서는 부러진 이가 몇 개 피와 섞여 튀어 나왔다.
“으...으... 제발 살려주세요. 잘못했..습니다... 연희야 잘못했다. 내가 진짜 잘못했어.. 시키는 대로 전부 하겠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시키는 대로 하거나, 아니면 고통 속에서 죽거나 선택지가 없어. 할 수 있겠어?”
“으..흑흑.. 예 제발 살려주세요.”
가장 끔찍한 고통 화상. 오른쪽 손목이 부러지고 왼쪽 엄지발가락이 불타는 것을 느낀 박진우는 이미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었다.
“진심어린 사과라는 것을 증명해야겠지?”
한연희는 일어나서 박진우의 가방을 뒤졌다. 가방에선 삼각대와 약물이 들어 있었다.
삼각대를 세우고 조절을 했다.
가방에서 삼각대, 약물이 나오자 박진우는 당황했다.
“어..어...”
“네가 나랑 잔다고 하면 들고 올 줄 알았어.. 너의 그 변태 사이코적인 습관이 어디 가겠니?”
한연희가 삼각대를 설치하고 박진우의 휴대폰을 빼앗아 설치했다.
“…비밀번호”
“......”
“말하기 싫어? 다시 시작 해줘”
“아아아아!!!!.. 아니에요. 잠깐 생각한 겁니다! 789012입니다!!”
“진작 그럴 것이지...”
한연희는 삼각대에 박진우의 카메라를 연결했다.
“네가 5년간 저질렀던 모든 짓을 사실대로 이야기 해. 두 번 안 찍는다. 상세하게 이야기 해.”
“응...”
한연희가 말을 마치고 스마트폰 버튼을 눌렀다.
띠리링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동영상 촬영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지난 5년간 의사의 지위를 통해 많은 여성 환자분들에게 접근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불법약물을 사용해 의식이 없는 여성들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를 동영상 촬영을 해서 그들을 겁박하는데 활용을 했습니다.
모든 분들께 죄송합니다. 이후 성실하게 법적 처벌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마치 준비라도 한 것처럼 박진우의 입에선 강물 흐르듯 사죄 하는 문장이 나왔다.
박진우는 한연희와 법적다툼을 하면서 변호사의 권유에 사과문을 읽어야할 상황까지 연습해왔던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써먹을 일은 없었지만.
‘이게 쓸모가 있었네..’
다시 띠리링 소리가 들리면서 동영상이 꺼졌다.
“휴우.....”
박진우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한연희는 한 동안 박진우의 휴대폰을 가지고 조작 했다.
호랑이 가면을 쓴 이범은 그런 한연희와 박진우를 번갈아 가면서 보고 있었다.
“이...이제 시키는 대로 했으니 풀어줘....”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뭐하는 거야 이제 내 휴대폰 그만 만지고 제발 살려줘.....”
“너 한세병원 너튜브로 방금 동영상 업로드 하느라 늦었어.”
“뭐??”
박진우의 표정이 종이 장 구겨진 듯 일그러졌다. 관자놀이에 핏줄이 올라왔다.
한세병원 채널. 너튜브 구독자 100만을 달성한 너튜브 채널이었다.
이 채널은 사람들에게 유용한 건강 정보를 알려주는 것과 동시에, 의사들의 Vlog 일상을 담아있었다. 인기리에 구독자 수가 올라갔다.
이 병원 채널 구독자 증가에는 훈남 의사 박진우의 영향이 컸다.
적당히 유익한 정보와 코믹하게 편집한 동영상들은 모두 조회수 200만에서 300만을 가뿐히 뛰어넘고 있었다.
병원장이었던 아버지는 채널의 관리 권한을 박진우에게 일임했고, 박진우는 이를 통해서 부가적인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한연희가 더욱 힘들었던 것은 이 채널 때문이었다.
뒤로는 데이트 성폭행, 불법 촬영 등 추악한 짓을 저지르면서도 대외적으로는 이미지가 좋은 의사로 활동하고 있었던 터였다.
이 더러운 행태를 보다 못한 한연희가 박진우의 실상을 폭로했을 때도 구독자 팬덤의 힘은 강력했다.
100만의 팬들은 되려 그녀를 손가락질하고 돌을 던졌다.
꽃뱀
꼬리 치려다가 걸린 사람
의사와 결혼 테크 타려다가 결혼 못하니 꼬장 부리는 사람
무고죄로 당장 처벌해야 한다... 는 등
박진우가 집행유예를 받은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해자 박진우는 피해자가 되어 있었고, 피해자 한연희는 가해자가 되어있었다.
한연희가 자살을 시도하게 되었던 계기에는 박진우의 너튜브의 영향이 가장 컸다.
화면 건너의 익명성에 가시 돋힌 말들.. 그 말 하나 하나들이 한연희의 가슴을 파고들어 찔러댔다.
박진우는 살아나갈 수 만 있다면 이런 말들 몇 번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는 위력과 강제에 의해서 증언하도록 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너튜브에 바로 올려 지는 것은 다른 의미였다.
자신이 쌓아 올린 모든 이미지를 순식간에 무너뜨린 다는 것을 의미 했다.
무언가 분란이 일어나게 되면 사람들은 진실을 알려고 하기보다 자신이 믿고 싶어하는 것을 믿으려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치밀한 놈들 이었네..’
“이제껏 모은 동영상 파일 어딨어?”
휴대폰을 다 만진 한연희는 박진우의 휴대폰을 침대위로 던지며 말했다.
“응?”
한연희가 손짓 했다.
이범이 다시 손가락을 한번 튕기니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불길이 일어났다,
“으아아아아아아악!! 시계 뒤에. 시계 뒤에 USB”
다시 손가락을 튀기자 불꽃이 꺼졌다.
한연희는 박진우의 메탈 시계를 들어서 보았다.
자기와 만나면서부터 시계가 유난히 컸다는 느낌이 있었다. 시계 뒷공간을 두드리니 공허한 울림이 느껴졌다.
분, 초 조작하는 침을 몇 번 돌리니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시계가 벌어졌다.
그리고 시계가 돌아가는 그 복잡한 기계 작은 공간에 USB의 은색 표면이 보였다.
한연희는 떨리는 손으로 USB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호텔 노트북에 꽂아 천천히 확인 했다.
화면이 켜지고 USB와 동기화 하는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노란색 폴더가 켜졌다.
박진우는 꼼꼼했다.
만났던 모든 여성의 불법 촬영물을 보관하고 있었다.
이름, 기간별로 분류된 파일 수백개가 나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연희 자신의 이름이 적힌 파일도 있었다.
“하...시발...진짜 사이코 변태 새끼...”
말하는 한연희의 목소리가 떨렸다.
짝!, 짝! 짝!
한연희는 박진우의 뺨을 수 차례 날렸다. 그리고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으며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이범과 한연희의 박진우 파멸 계획은 두 가지 였다.
1.사회적 몰락 2.법적 몰락
사회적 몰락은 그가 가장 자랑스럽게 내 세우고 있었던 너튜브를 통해서 달성하려고 했고
법적 몰락은 그가 저지른 죗값을 모두 받게 하려는 것이었다.
동영상 파일등 증거를 통해서.
하지만 한연희는 증거로 제출할 동영상들을 보면서 분노에 치를 떨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정도로 하는 복수로는 이 사악한 인간에 대한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한연희는 앉아 있는 이범에게 뭐라고 말을 했다.
“■■■ ■■■ ■■■■■”
이범은 알겠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 말을 듣자마자 박진우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발악을 했다.
“아아아아아아악! 제발 그것만은 안돼!!, 제발 부탁이야! 하라는 것 다 할게
내가 진짜 잘못했어 연희야. 제발 그것만은..아니 다른 곳은 다 되더라도...그곳 만은 안돼!!“
한연희는 시끄럽다는 듯이 다시 수건을 물렸다.
이범은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가운을 입고 있던 박진우의 옷을 젖혔다.
그리고 손가락을 튕겼다.
남자와 여자를 구별해 주기 위한 살덩어리가 눈앞에 보였다.
그 살점의 끝에서부터 불이 붙기 시작하더니 점점 서혜부까지 들어갔다.
그리고 그 살들은 마치 수술 한 듯,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무(無)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