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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진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작가 : 화산호
작품등록일 : 2020.9.11

“나랑 사귀자!”
진심 1도 없는 고백이란 걸 알지만
커플이 되어 살아남아 우승해야만 끝이 나는 유튜브 인기 방송,
<리얼 청춘 낭만 서바이벌 쇼: 하이틴 스캔들>에 출연하게 된 12명의 고등학생들.
서로의 정체를 살피며 아슬아슬한 연애 서바이벌 게임을 시작한다.

뭔가 유치한 프로그램에 쭈뼛쭈뼛 참가하게 된 권재하!
최대한 존재감 없이 그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첫 번째 탈락자가 되는 것이 원래 목표였다.
그런데!
왜 나보고 웃어 자꾸!
왜 삼겹살 그거 내 밥에 올려주고 난리야!
분명히 날 좋아하는 게 아니란 걸 아는데
이러면 탈락하기 싫어지잖아.
점점 살아남고 싶어진다고!
다음 라운드에서도 너를 계속 보려면
다른 애한테 고백해서 살아남아야 하는데.
진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 애에게 그러면 나는 완전 양아치잖아.

 
15. 조용히 처형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작성일 : 20-09-22 00:16     조회 : 250     추천 : 0     분량 : 5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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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산은 누군가 장미 정원으로 뛰어 들어와 멈추는 소리에 눈을 떴다.

 커다란 모과나무 아래에 놓인 벤치에 누워있던 김산은 누군지 확인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권재하?

 김산은 맞은편 벤치 앞에 멈춰선 재하가 빨간 교복 리본을 풀어헤치는 것을 보았다. 그래도 답답한지 교복 블라우스 단추도 한두 개 풀었다. 그리곤 양 쪽 소매를 걷어붙이고, 고개를 뒤로 확 젖혀 벤치에 온 몸을 늘어뜨리듯 앉았다.

 털썩.

 재하가 앉은 벤치 근처에는 나무가 없어서 햇빛이 그대로 재하의 얼굴을 찔러대는 것 같았다. 손등으로 두 눈을 덮더니 별안간 거칠게 소리쳤다.

 “에이, 씨!”

 재하가 다리를 쭉 뻗으며 죄 없는 흙바닥을 걷어찼다.

 김산은 자기가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할 것 같았다. 의도치 않게 훔쳐보고 있는 것 같아 어색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용히 재하를 불렀다.

 “권재하!”

 재하는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놀랐는지 움찔거리곤 서둘러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아무렇게나 뻗어 놓았던 팔 다리도 얌전히 모았다.

 김산은 재하의 재빠른 움직임에 웃음이 났다.

 허술한 모양새가 재밌었다.

 김산은 재하의 옆으로 갔다. 그리고 손바닥을 재하 이마 위에서 펼쳐 햇빛을 가려주었다.

 “이런 것 좀 하지 마.”

 재하가 잠긴 목소리로 말하며 자기를 올려다보자 김산은 멈칫했다.

 항상 까만 구슬처럼 반짝이던 눈동자가 텅 비어 보였다.

 김산은 재하를 처음 봤을 때 재하의 눈동자가 신기했었다.

 볼 때 마다 항상 뭔가로 가득 찬 두 눈동자가 쉬지않고 반짝여서 자꾸만 쳐다보게 됐었다. 호기심이 가득 할 때도 있었고, 엉뚱한 걱정이나 당황으로 가득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웃음으로 가득했었다. 입은 고집스럽게 꽉 다물고 있어도 눈빛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렇게 재하의 눈을 쫓다보니 어느새 재하의 생각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눈동자가 깊이깊이 가라앉아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혹시 너도 내가 무슨 손수건 같은 거 줬었니?”

 김산은 재하가 영문 모를 소리로 떼를 쓰는 것 같아 조용히 옆에 앉아 듣고만 있었다.

 “하아.”

 “땅 꺼지겠다는 말을 이제 알겠네.”

 재하가 자신의 말에 잠깐 배시시 웃자 김산은 조금 안심이 됐다.

 “고마워서. 너무 잘 해줘서. 혹시 너하고 내가 예전에 알았던 사이인가 해서.”

 김산은 재하의 말을 알아들어 보려고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너한테 잘 해주는 건 맞아.”

 김산은 솔직히 말했다.

 재하의 생각처럼 김산은 남들에게 살갑고 따뜻한 성격이 아니었다. 예의를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그렇다고 남들과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지내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재하에게는 유난히 먼저 다가서려고 했었다. 방송 촬영이긴 해도 생전 처음 낯 뜨거운 말로 고백했을 정도니 말이다.

 김산은 재하가 뜨악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웃음을 참으며 계속 말했다.

 “근데 너랑 내가 예전부터 알았던 사이는 아니야. 니가 손수건 같은 거 준적도 없어. 내 기억엔.”

 “아!”

 재하의 눈동자가 다시 방황하며 다른 곳으로 굴러갔다.

 “성질 다 부렸어?”

 김산의 말에 재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김산을 바라봤다.

 김산은 내친김에 하고 싶었던 말을 해보기로 했다.

 “너는 나한테 은근히 무섭게 구는 거 알아?”

 재하는 내가 언제 그랬냐고 하려다 뭔가 생각났는지 찔끔 입을 다물었다.

 김산은 일부러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내가 저기! 바로 저기서 너한테 고백하니까 막 무섭게 지가 마녀라 그러면서 도망가게 하고!”

 재하는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소리 내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어제 밤에 걱정 되서 찾으러 가보니까 길 한가운데서 최지민 폭행하고 있질 않나!”

 김산의 이어지는 말에 재하가 입을 벌리며 무슨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김산의 말은 빠르게 이어졌다.

 “나보고 꼴 보기 싫다고 했던 거 기억나지? 그리고 내가 계속 같이 촬영하면 좋겠다고 하니까 못 들은 척 한 건?”

 재하는 벌렸던 입술을 다시 꼬옥 다물었다.

 “지금도 일진처럼 교복 막 풀어헤치고, 눈을 이렇게 막 못되게 뜨고. 내가 햇빛 그거 쫌 가려줬더니 그런 거 하지 말라고 면박 줬잖아!”

 김산이 재하의 눈초리를 흉내 내자 결국 재하는 웃고 말았다.

 “아! 정말. 나 진짜 못됐네. 미안해.”

 하지만 김산은 재하의 눈을 보고 더 이상 장난칠 수 없었다.

 입은 웃고, 목소리도 명랑했는데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얼마나 많이 눌러 담고 있는지 눈 주변이 빨갰다.

 김산은 아파보이는 그 눈을 어루만져 주고 싶어서 자기도 모르게 재하의 눈으로 손을 뻗었다.

 안 돼!

 재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안경을 바짝 쓸어 올렸다.

 위험했다. 순간 너무 편안하고 안심이 돼서 눈물이 왈칵 나올 뻔 했다.

 이제 다시 이렇게 이야기하기 어려워 질 텐데, 오늘이 마지막일 텐데 꼴사납게 질질 짜는 얼굴로 기억되고 싶지 않았다.

 김산은 재하가 돌아앉아 주섬주섬 움직이는 것을 바라만 봤다.

 손만 뻗으면 바로 닿을 거리인데 더 이상 다가갈 수가 없었다.

 여자애가 어려운 적은 없었다. 어릴 때부터 항상 여자애들은 김산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걸고, 웃고, 선물을 주곤 했었다. 김산이 다가갈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재하는 아니었다. 다가오지도 않으면서 다가가지도 못하게 했다. 어려웠다.

 “짠!”

 재하가 김산을 향해 휙 돌아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제 일진 아니지?”

 단정하게 묶은 리본과 단추, 얌전하게 걷어 올린 소매와 차분하게 정돈한 머리카락까지 평범한 권재하의 모습이었다.

 “사실은 살면서 처음으로 엄청 멋진 남자애한테 고백 받아서 좋았어. 하기 싫은 촬영을 계속 하고 싶을 만큼!”

 재하는 담담하게 시선을 맞추며 차분하게 말을 하는데 그 말을 듣는 김산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고마워! 정말 정말 좋은 기억을 남겨줘서.”

 재하가 방긋 웃자 재하와 김산의 스마트워치가 울리기 시작했다.

 오전 11시.

 하이틴 스캔들, 첫 번째 라운드 미션 종료.

 결국 미션 실패로 끝나버렸다.

 문현빈에게 조금 미안하고, 이은주에게 많이 분했지만 재하는 조용히 처형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원하던 대로 첫 번째 탈락자가 된 것이다.

 

 송PD가 화사한 원피스를 입고 야외음악당 무대 중앙에 섰다. 잠깐씩 불어오는 바람결에 옅은 라벤더 색의 긴 원피스가 하늘하늘 날렸다.

 송PD 앞에는 12명의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앉아 있었다.

 남학생들은 하얀 교복 셔츠에 어두운 회색 넥타이를 목에 맸다. 교복 바지 역시 어두운 회색이었다. 그리고 셔츠 위에 베이지색 카디건까지 똑같이 입었지만 신기하게도 전부 개성이 달라보였다. 여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교복을 입어도 학생들의 특징이 하나하나 살아있었다.

 송PD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12명의 어린 출연자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첫 번째 라운드가 끝났어요! 처형과 탈락자 결정을 하고 촬영 마무리하겠습니다.”

 재하는 무표정하게 앉아 송PD의 말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마치 온 몸에 눈이 달린 것처럼 주변 모든 상황이 느껴졌다. 이은주가 흘끗 거리는 것이 가장 크게 느껴졌고, 정은성, 문현빈의 시선도 느껴졌다.

 “그럼 이번 시즌 첫 커플들을 소개해 볼까요?”

 송PD가 과장되게 웃으며 말했다.

 “김희윤 학생과 김산 학생. 그리고 이은주 학생과 우서진 학생!”

 이은주와 우서진을 호명할 때 이규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재하는 굳이 이규진을 보지 않아도 어떤 표정일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그리고 한 커플 더 있죠?”

 송PD의 말에 앉아있던 아이들이 두리번거렸다.

 재하는 세 번째 커플을 소개하려는 송PD의 말을 들으며 정은성을 보았다.

 살아남으려면 사실 방법이 없진 않았다.

 김산 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과도 더 친해지고 싶었다. 탈락을 하면 좋은 아이들을 더 만날 수 없다는 것이 생각보다 아쉬웠다. 그리고 기회를 봐서 이은주는 꼭 밟아 주고 싶긴 했다.

 촬영 직전 정은성이 재하에게 다가왔을 때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커플이 또 있었어? 누군지 알아?”

 재하의 옆에 앉은 강나연이 재하에게 물었다. 재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살아남고 싶지 않았다.

 이젠 예전만큼 정은성이 펄쩍 뛸 정도로 싫지 않았지만 커플로 출연할 정도로 마음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재하도 세 번째 커플이 누구일지 궁금했다. 촬영이 시작되고 처음으로 주변을 둘러볼 만큼 호기심이 생겼다.

 “차해인 학생과 문현빈 학생.”

 “말도 안 돼!”

 가장 먼저 놀라서 소리친 건 이승호였다.

 하지만 이승호가 아니었으면 재하가 소리칠 뻔 했다.

 언제?

 재하는 문현빈을 멍하게 쳐다봤다. 문현빈도 그런 재하를 보며 싱긋 웃었다.

 “오! 권재하 학생! 방금 그 표정 무슨 뜻인가요?”

 송PD의 한 마디에 카메라가 재하와 문현빈에게 더 집중되는 것 같았다.

 그래 마음대로 이용해라!

 이젠 더 이상 이용하고 싶어도 못 할 테니까.

 재하는 이미 모든 것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근데 차해인은 모르나?

 문현빈 마왕인데.

 모르는 것 없이 눈치 빠른 차해인이 문현빈이 마왕인지도 모르고 커플이 됐다는 것이 재하는 이상했다.

 재하는 어느새 시청자 모드가 되어 커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첫 라운드에 이렇게 세 커플이나 생긴 건 처음이에요! 부디 다음 라운드에서도 이렇게 예쁜 커플들이 그대로 이어지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한 번 커플이 되면 다음 라운드 처형 때까지는 헤어질 수 없었다.

 다음 라운드 처형 때 파트너가 바뀔 수도 있고 각자 따로 혼자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왕과 마녀는 제외였다. 이번 시즌부터 마왕이나 마녀와 커플이 되면 탈락도 안 되고 마왕이나 마녀가 처형되기 전엔 벗어날 수 없었다.

 무서워.

 죽어야 헤어지는 구조는 같았지만 더 지독해 진 것 같았다.

 재하는 송PD를 보았다. 저 머리에서 이런 방송 아이디어가 나왔다는 생각이 드니 송PD가 무서웠다.

 “그럼! 이제 마왕과 마녀 사냥을 시작해 볼까요?”

 재하는 기분 탓인지 송PD가 계속 자기를 보는 것 같았다. 뭐라도 한 마디 해보라는 듯 쳐다보는 것 같아 부담스러웠다.

 재하가 살아남을 또 다른 방법이긴 했다.

 문현빈.

 마왕이라고 증언하고 문현빈을 처형 시키면 된다. 그럼 재하는 살아남을 수 있다.

 하지만 재하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걱정스러운 눈빛과 조심스럽게 받쳐주던 어깨. 지금 입고 있는 교복과 사람다운 몰골을 빼더라도 재하에게 문현빈은 마왕이 아니라 수호천사였다.

 “솔직히 아직 잘 모르겠어요. 아직 아무런 단서도 없고.”

 최지민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하며 재하를 흘깃 보았다.

 뭐지?

 너한텐 내가 마녀냐?

 재하는 차가운 표정으로 최지민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다들 같은 생각인가요?”

 송PD의 물음에 12명의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럼 이번 라운드 탈락자는 미션으로 결정을 해야겠네요.”

 재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제는 자기 차례였다. 탈락할 때 배경음악으로 샤콘느를, 비탈리 말고 바흐의 것으로 깔아달라고 해볼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긴장을 털어보았다.

 “첫 번째 미션은 가장 호감이 가는 이성 친구에게 고백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송PD는 잠시 뜸을 들이며 출연자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재하를 보며 말했다.

 “미션에 실패한 권재하 학생!”

 재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재하 학생은 첫 번째 라운드 처형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의 있나요, 재하 학생?”

 “아니요. 이의 없습니다.”

 재하의 대답에 송PD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틴 스캔들 시즌3의 첫 번째 탈락자는.”

 

 

 “아이 씨, 꼭 이 사이에 광고 넣더라! 짜증나게! 확 안 봐 버리고 싶다니깐!”

 갑자기 짜증을 내는 딸을 보면서 엄마는 한 숨을 쉬었다.

 “아! 짜증나. 중요한 순간에 딱 끊고 광고 넣는단 말야.”

 딸이 투덜거리자 엄마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야 지들도 돈을 벌지!”

 “아! 된다. 엄마 조용해봐!”

 

 

 “잠깐만요!”

 송PD와 재하를 포함한 모든 아이들이 정은성을 보았다. 정은성이 벌떡 일어나 재하 옆에 나란히 섰다.

 “권재하를 처형에서 구하고 싶습니다!”

 

 

 “헐!”

 핸드폰에서 눈을 못 떼는 딸을 보며 엄마는 만감이 교차했다. 아무리 기말고사가 끝났다지만 너무 심했다.

 “이러고 끝남?”

 “또 왜?”

 “헐! 다음 영상 다음 주에 올라오는데? 뭐 이런 막장 편집?”

 딸이 발을 동동 구르다가 엄마에게 매달리며 소릴 질렀다.

 “정은성이 킹 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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