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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에로스여, 방아쇠를 당겨라
작가 : 그린기린
작품등록일 : 2020.9.16

시공간과 인종, 성별을 넘어 사랑을 다루는 불로의 존재, '에로스'
이들을 모아 교육하는 아프로디테의 학교는 운명에 맞는 임무를 부여하고 '에로스'는 파트너를 지어 임하는데, 우리 이 임무 잘 해낼 수 있을까?

"에로스는 절대 사랑에 빠져선 안돼. 노화와 죽음을 알게 될거야."

납화살과 금화살. 납총알과 금총알.
무엇이 저주이고 무엇이 축복이며 그 누가 먼저 된 신인가.
사랑의 운명은 우리의 손에 달렸다. 에로스여, 방아쇠를 당겨라.

 
아네모네, 너는 대체 뭐냐
작성일 : 20-09-21 20:06     조회 : 234     추천 : 0     분량 : 5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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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눈을 수없이 감았다 떠도 정말 현실이었다.

 

 아프로디테와 아네모네의 입술은 정확하게 겹쳐져있었다.

 

 나는 놀란 심장을 다스릴 새도 없이 후다닥 복도를 나서 밖으로 쫓기듯 튀어나왔다.

 

 시클라멘은 아직도 정신없이 잔다. 이건 거의 술 취한 거렁뱅이에 가깝지 않은가. 나는 머리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다리는 아프고, 머리는 복잡하고 밝은 아침하늘이 비현실적으로 밝게 보였다.

 

 당장 여기에 쓰러져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에로스의 자리를 박탈당한 시클라멘을 따로 눕힐 곳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런 장소에 다시 들어가서 물어보기도 뭐하고.

 

 나는 내 옆에서 축 쳐진 시클라멘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부드러운 선들로 겹쳐 있는, 아네모네와는 분명 다른 얼굴이었다.

 

 이제 에로스에서 벗어난 시클라멘은 어쩌면 에로스로 그칠 아네모네보다 더 남성성이 짙은 모습으로 장성할 수도 있었다.

 

 왜인지 기분이 묘해졌다.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이 멜랑꼴리한 기분을 애써 털어내 보았다.

 

 '기숙사. 기숙사로 가자.'

 

 쉬고 싶은 마음에 걸음이 빨라졌다.

 

 -

 

 끙끙 대며 반을 기어 들어간 기숙사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학교가 이상할 만큼 조용하더니 다른 에로스들은 벌써 무기를 부여받고 임무에 나간 모양이다.

 

 "이게 뭐야..세미랑 작별인사도 못했네"

 

 나는 시클라멘을 내 침대위에 내려놓고 한숨을 돌렸다.

 

 무거운 놈. 거렁뱅이. 내 속도 모르고 촘촘한 속눈썹을 내린 그를 마음껏 째려보았다.

 

 그리고 눈이 아파질 무렵, 문득 세미의 침대 위를 보자. 편지가 한 장 놓여있는게보였다. 나는 조심스레 다가가 서서 세미가 남긴 편지를 열었다.

 

 말수 없던 그녀답게 단 한 장의 작은 편지에는 잘 지내라는 말과 함께 자신은 언제까지나 밀테의 친구라며 꾹꾹 적어내린 그녀의 진실되고 소중한 마음이 남겨져있었다.

 

 온 마음이 눌러져 있는 듯한 한 글자 한글자가 참을 수 없게 무겁게만 느껴졌다.

 

 세미도 어제 하룻밤을 불안함으로 지새운 것일까. 세미는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을거라 말했지만, 정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이런 나를 향한 염려와 걱정이 역력한 그녀의 편지를 품에 안았다.

 

 세미의 비누향이 옅게 남아있는 방의 분위기가 너무 서글퍼 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날은 내가 그토록 원하던 꿈같은 순간이 아니였나.

 

 정식적인 임무를 받고 이 기숙사와 학교에서 떨어져 살게 되는 날.

 

 나는 갑작스럽게 전쟁터 놓인 어린 병사처럼 문득 겁이 난 것이다.

 

 준비는 충분히 되어있다 생각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용기있게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건 그저 오만하고 어리석은 착각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처음 보는 사람들과 처음 보는 세계에 완전히 압도당해 있었다.

 

 자유를 원하기는, 누구보다도 자유를 무서워 하는 이가 바로 나라는 에로스였다.

 

 그래도 이 정도면 잘 참았어. 나는 애써 내 자신을 달래보았다. 세미의 침대에 머리를 묻고 눈물샘을 잠구듯 입술을 깨물고 숨을 머금었다.

 

 "잘자. 밀테."

 

 누군가의 목소리가 옅게 귓가를 흔들었다.

 

 -

 

 "밀테.밀테."

 

 나는 나를 흔드는 손길에 눈을 떴다. 어느새 창문 밖은 어둑어둑하니 벌써 밤인듯 했다. 시간 잘 간다.

 

 시클라멘은 언제 깨어났는지 침대 턱에 걸터앉아 불안한 눈길로 나를 살피고 있었다.

 

 "왜 그래,"

 

 "하도 잠꼬대를 하길래. 걱정돼서."

 

 나는 그의 진심어린 걱정에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 본거래. 징그럽게시리.

 

 "내가? 잠꼬대를?"

 

 "응. 무슨 애처럼 엄마를 애타게 찾길래. 걱정돼서"

 

 "그랬었니..와, 벌써 밤이다 시간 훅훅 지나간다. 그치?"

 

 나는 눈가에 굳어 뻑뻑해진 눈물자욱을 닦아내며 말을 돌렸다. 창피하다 창피해. 이게 무슨 꼴이람. 마마보이라 그를 놀리던 내가 마마걸이라는 게 들키고 만 거다.

 

 "아네모네가 나에 대해 물어보더라고."

 

 "응?아네모네가 여기까지 왔었어?"

 

 "응 너가 한참 잘 때 잠시 들렸다 내려갔어."

 

 "그랬구나..나 깨우지 그랬어..근데 그래서 너는 뭐라 설명했는데?"

 

 나는 예상치 못한 등장인물에 놀라 그에게 되물었다. 과연 자신의 정체를 무엇이라 설명했을까. 객관적으로 나는 시클라멘에게 저주를 내린 천하의 나쁜놈인데, 과연 시클라멘은 내가 저지른 일을 어떻게 표현했을지 매우 궁금하는 것은 당연했다.

 

 "해방된 에로스라 말했어."

 

 "해방?"

 

 그의 대답은 예상외로 담백하고 덤덤했다.

 

 "응. 내가 에로스로써 자부심이 있던 것도 부정할 수 없지만, 너가 내 가슴팍에 화살촉을 꽂았을 때. 어떤 쾌감을 느꼈던 것 같아."

 

 "..카타르시스적인?"

 

 "맞아. 그 표현이다. 몸이 저릴 정도의 쾌감이었어. 오랫동안 무릎 꿇고 있다 일어난 것처럼."

 

 "뭐야. 표현이 왜 그래."

 

 "웃지마. 진짜 말로 표하기 낯설어서 그래. 그래도 밀테가 내게 화살촉을 넣어 준건 신의 한수였던거야."

 

 그는 들뜬 목소리로 내게 어제의 일들을 나열했다. 그의 웃음이 못내 순수해서 미안한 마음이 솟구쳤다.

 

 "...시클라멘..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 앞으로 너도 상처가 아물면."

 

 "상처가 아물어서 설령 열애의 감정이 옅어지더라도 내가 널 원망할 일은 없을거야. 걱정하지마. 밀테."

 

 "...그게 뭐야."

 

 "아네모네가 그러더라. 나는 아마 영원토록 너를 사랑할거라고."

 

 시클라멘의 고백은 갑작스러웠고 심장을 애태우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아네모네는 대체 무엇을 알길래 이런 덧 없는 확신을 시클라멘에게 심어주었나. 한편으로 불안감과 걱정이 샘솟았다. 거기에 아네모네와 아프로디테가 입맞춤을 나누던 장면이 떠오르니, 그가 점점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사실 아프로디테와 아네모네는 사랑하는 사이여서, 나를 호구로 추락시키는 전개가 없으리리고 그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조심해서 나쁠건 없다.

 

 에로스의 세계는 잔인한 법. 나는 깃을 세우는 유명한 형사처럼 홀로 쓸쓸이 밤거리를 걸어나가는 나를 상상했다.

 

 "..밀테?"

 

 "아, 아. 시클라멘. 정말 미안하지만 난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에로스의 힘이 영원할 거라 생각하지 않아."

 

 "..."

 

 내 단호한 어휘와 어투에 시클라멘의 표정은 급격하게 시들어갔다.

 

 "그리고 내가 너한테 몹쓸 짓 한 건 여지없는 사실이고, 그래서 나는 네가 인간으로서 행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거야."

 

 ".."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라고 생각하니까. 시클라멘, 이제 시간은 무한하지 않은거야. 나는 그런 너를 위해 열심히 일할거고."

 

 시클라멘은 내 결연한 결심에 아무 말이 없었다. 축 쳐진 눈썹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그런 시클라멘이 조금 사랑스럽다 생각했다.

 

 이런 얼굴이라면 어딜 가도 사랑받고 뽐낼 만한데, 어쩌다가 나를 사랑하게 돼서는.

 

 이렇게 적정선을 그어놓는 것이 지금은 서운하더라도 나중에 땅을 치며 나를 사랑했던 과거를 미워하게 되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 나을 것이다.

 

 "밀테, 너는 누구보다도 에로스의 힘을 믿어야 해."

 

 "...뭐?"

 

 "아, 아니다. 아네모네가 따로 할 말 있다더라. 식당에서 보재."

 

 "뭔데? 왜 말을 하다 말어. 말해봐!"

 

 "빨리 내려갔다 와. 안 자고 기다릴테니까."

 

 "아, 알겠어. 그만 밀어!"

 

 시클라멘은 내 등을 문 밖으로 떠밀었다. 그건 마치 세미와 나의 모습같아서 절로 웃음이 나오는 정겨운 풍경이었다.

 

 -

 

 "내려왔어?"

 

 "어? 머리, 머리가."

 

 아네모네의 감당 못하게 덥수룩하던 머리는 이쁘게 빗어져 하나로 곱게 묶여있었다. 잘난 눈매를 다 가릴 만큼 길었던 앞머리도 적당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총기가 종류별로 늘어져있었는데, 아마 임무에 사용할 고유무기를 고르라고 부른 것 같았다.

 

 "여기 앉아."

 

 "응."

 

 나는 그를 마주보고 앉았다. 뻘쭘한 분위기에 뒷목을 쓸어내렸다. 아직까지 이 사람이 진짜 내 파트너인지 도저히 실감이 안 났다.

 

 "이제 우리 내일이면 임무 나가게 되는 거 알지?"

 

 그렇게 오기 싫은 것처럼 행동한 것 치고는, 그는 이곳이 익숙한 듯 산뜻한 분위기로 내게 물어왔다. 이질감이 들었다. 이 사람이 정말로 비너스의 거울을 깨트리고 도망친 에로스인가 싶었다.

 

 "알지."

 

 "자 여기 봐봐. 이거 괜찮지 않아? 중요 탄환은 두 발 뿐에다 연사는 불가하니 웨블리형 리볼버도 괜찮고."

 

 "..그렇네."

 

 "또 도심 쪽 임무는 기동성이 좋아야 하니까. 피스톨도 괜찮고."

 

 "그렇지."

 

 내가 그의 말에 상투적으로 반응하자, 그는 나를 살피듯 물어왔다.

 

 "..설마 아직 잠 안깼어?"

 

 "아니. 완전 깼어. 멀쩡함의 현신 수준."

 

 "안깼구만. 뭘."

 

 그는 나를 보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렇게 제대로 보아하니 그의 빛나는 외모는 에로스 중에서도 굉장한 편이었다.

 

 안전하게 가려져있던 그의 깊고 형형한 눈을 마주하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처음 만난 것 마냥 어색하게만 느껴져서 자꾸 언행이 부자연스러워지는 것이었다.

 

 하필 앞머리는 왜 잘라가지고, 이제와보니 앞머리가 여심을 잠구는 안전장치였구만. 나는 속내를 꾹꾹 눌러 삼켰다. 혹여라도 긴장을 늦춰다간 속된 말로 그의 잘생김을 찬양하고 주접이 터져나올게 분명했다.

 

 거기다가 아프로디테와 입맞춤을 하던 장면이 가시질 않고 뚜렷하게 머릿속을 부유하는 거다. 이참에 아예, 시원하게 물어봐?

 

 답답한 호기심이 일었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사귄다던가 하는 답을 들을 것이 두려웠다. 아프로디테는 정말 내 예상을 한참을 벗어나는 작자였으니까. 나는 고개를 휘젓고 손을 주물럭거리며 잡생각을 없애려 노력했다.

 

 "왜. 추워?"

 

 "아니. 사실 나는 이미 총기는 맘에 정해둔 게 있어서."

 

 "아, 그래. 뭔데?"

 

 "..베레타92."

 

 "베레타?"

 

 "응. 연습할 때 자주 사용하던 종류인데. 손잡이 부분이 조금 두터워서 그렇지 압력도 제법 괜찮더라고."

 

 "이미 택한 게 있다면 됐네."

 

 "아네모네, 너는?"

 

 "나는 궁만 가지고 다녀."

 

 "왜?"

 

 "시위 당기는 손맛이 좋아서?"

 

 그는 장난스럽게 허공에 팔을 들어 시위를 당기는 시늉을 했다. 헐렁한 소매가 드러나며 탄탄한 전완근이 드러났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관망했다.

 

 "입 맞추더라?"

 

 "어?"

 

 "응?"

 

 나는 황급히 내 입을 가렸다. 그의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나도 모르게 생각의 흐름을 따라 부유하던 속내가 튀어나온거다.

 

 "봤어?"

 

 ".."

 

 "하긴 못 보는 게 더 이상하겠네."

 

 하지만 당사자인 아네모네는 제3자인 나보다 더 느긋하니 여유롭게 답하는 것이었다.

 

 그의 태평하기만 한 얼굴표정에 내 속에서는 불안감이 불일듯 일었다.

 

 정말로 아네모네와 아프로디테가 판을 짜고 나를 우롱하려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안 좋은 예감이었다.

 

 "그냥 별거 아니였어. 신경쓰지마."

 

 그의 대수롭지 않음이 몹시 신경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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