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으로 조인트를 까인 인우는 절뚝거리며 닭싸움하다 뒷걸음치듯 한 발로 방방 뛰어다니다가
가까이 솟은 전봇대를 간신히 부여잡는다.
"너, 넌 대체 뭐야? 갑자기 나타나서는.."
타이트한 블랙 슈트를 걸친 태오는 그의 말을 깔끔히 무시하고는 당황한 이수를 한 팔로 부축한다.
"이수 씨, 저 놈이 손찌검한 데는 괜찮아요?"
"손찌검? 난 때리는 척만 했다고.."
(이 놈이 입만 살아가지고..)
그는 시치미를 뚝 떼는 인우의 말에 성난 표정으로 홱 돌아본다.
"내가 다 봤거든.. 그리고 저 차엔 화질 좋은 블랙박스도 달려 있다는 거 명심해."
배트맨이 악당을 혼줄 내기 위해 잠시 코크핏을 비운 사이, '배트모빌'의 헤드램프는 그들을 환히 비추고 엔진 소리는 으르렁거린다.
하 실장은 유심히 이수의 얼굴을 살피는데..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놀란 탓인지, 양쪽 뺨이 불그레하다.
태오는 그녀의 뺨에 양 손바닥을 올리더니, 살짝 눌렀다가 힘을 주어 꽉 움켜쥔다.
"아야! 아, 아파요." 기겁하며 한 발 물러서는 이수.
"거봐. 아프다잖아. 이거 이거 뽈때기 부어오른 거 봐."
다시 보니 그녀의 볼때기는 호빵맨의 빵빵하게 부푼 그것처럼 동그랗고 불그스름하다.
"112 전화해서 경찰 불러야겠네. 야밤에 혼자 걷는 아녀자를 폭행하다니.."
태오는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든다.
"이수야, 나 너 남친이야.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뻐억~!>
더 이상 인우의 말을 듣고 싶지 않은지..
그녀는 다짜고짜 오른발을 뒤로 빼더니 축구공을 뻥 차는 것처럼 그의 소중한 낭심이를 정확히 가격한다.
"어흑, 어으으흑!"
그는 몸을 둥글게 움츠리고는 그 자리에 널브러져 입에 거품을 문 채, 두 다리를 오므렸다 폈다 바둥바둥댄다.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내가 우스워 보이지?
오늘부터 내 주위 100미터 이내에 얼쩡거리면 니 거시기 폭파해버릴 거니까 조심해.
그리고 너.. 내 남친 아니거든. 오늘부로.."
이수는 하 실장의 듬직한 팔뚝에 바짝 다가서며 다정하게 팔짱을 끼는데..
"내 남친은.. 이 분이야. 우리 회사 캡틴이자 내 오피스 남친."
그녀는 자신이 너무 들이댔다는 걸 알면서도,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뒤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급 당황한 태오는 팔꿈치에 닿는 그녀의 폭신한 가슴과 자신의 목덜미를 스치는 생기 넘치는 머릿결을 한 올 한 올 느끼며,
두 다리가 휘청거렸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주저앉은 인우를 노려본다.
"얌전히 집으로 돌아가. 더 이상 망신당하기 싫으면.."
하 실장은 허리를 숙여 널브러진 인우의 귀에 속삭이고는 이수를 집 안으로 들여보내려 한다.
두 사람이 그녀의 집 앞에 다다랐을 무렵..
"으아아! 너네들 가만 안 둘 거야!"
욱하는 성질을 못 이기고 분노가 폭발한 인우는 희번덕거리는 눈자위를 치켜뜨며,
이수와 태오를 몸으로 받아버릴 듯 코뿔소처럼 달려가는데..
하태오는 한 발을 인우의 다리 사이로 밀어 넣더니 상대의 멱살과 바지춤을 휘어잡고는
재빨리 상체를 빙그르 회전시켜 유도의 업어치기 자세로 휙 넘겨 버리는 게 아닌가.
"끄아악~"
인우는 거꾸로 공중을 날아가더니, 담벼락 아래 쓰레기봉투 더미 위에 그대로 메다 꽂힌다.
그는 부르르 몸을 떨며 큰 대(大) 자로 사지를 축 늘어뜨리고 일어나지 못하고,
더 이상 대항할 기력을 상실한 채 맥없이 녹다운당한 스토커 구 남친의 최후라니..
망신살 뻗치는 그 사건 이후로, 이수는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었다. 인우의 그림자마저도 그녀의 곁에 얼씬 안 했다고 한다.
풍문으로는 자신을 좋다고 따라다니던 후배 민지와 얼마간 사귀다가 데이트 폭력으로 형사 입건되었다고 하더라.
"잘 들어가세요. 실장님."
"내일 아무래도 출근 못할 듯싶은데, 연차 당겨서 써도 돼요."
"그래도 되나요?"
"그럼요. 제가 결재 승인하면 됩니다. 푹 쉬세요."
"감사합니다. (시크릿 오피스 남친님.)"
첫 면접 이후로 껄끄럽고 불편하기만 하던 인프라지원실의 캡틴,
하태오 실장님이 갑자기 듬직해 보이고 가슴이 따뜻한 남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비록 과도하게 집착하는 구 남친을 멀리 떼어내기 위해 기지를 발휘하여 오피스 남친이라 둘러댔지만
두 사람은 단선 철로의 양쪽 끝에서 천천히 속도를 높이며 달려오는 폭주 기관차처럼..
언젠가 꽝하고 정면으로 맞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사님과 팀장으로 진급한 태오와 이수는 정해진 운명대로
계약 연애를 맺더니 기상천외하고 비밀스러운 숨바꼭질 데이트를 즐기게 된다.
***
달달한 밀크 초콜릿을 천천히 녹여 음미하듯 멍하니 황홀경을 헤매던 이수는 가죽 소파에 누워 있다.
불청객 길냥이로 인해 우수관이 막혀 물에 젖어 있던 베란다의 노란 장판은 말라 붙어 번들거린다.
[띠리리릭... 삐!]
어둑한 실내의 정적을 깨는 현관 도어록 누르는 소리가 들리지만 비밀번호가 한 자리 틀렸다.
"아직 너희 집 비번도 모르니? 할미가 해 볼게."
"할머니, 나 왼손으로 눌러서 틀린 거거든요."
밖에서 소란스러운 인기척이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리고, 박 여사와 시아가 요란을 떨며 들어온다.
"얘가.. 집 안을 반지하처럼 어둡게 하고 있어."
서둘러 거실과 키친의 LED 조명을 밝히는 박 여사.
이수는 몸을 일으켜 소파에 몸을 기대고는 눈이 부셔 미간을 찡그린다.
"엄마, 나 왔어. 그리고 엄마한테 보여줄 거 있거든."
신발을 내던지다시피 휙 벗어던진 시아가 그녀 곁으로 다가오는데..
"이거 봐라. 서프라이즈!"
"에그머니. (깜짝이야.)"
아이는 품에 넘치도록 양팔로 감싸 안은 털 뭉치를 엄마에게 보여준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소파에 등을 바짝 기대고 몸이 굳어진다.
"꺄아옹.. 크아옹."
시아의 조그만 품에 웅크리고는 가느스름한 눈을 치켜뜨며 이수를 응시하는 그것은..
아까 태오가 나가는 틈을 타서 도망간 그 러시안 블루 고양이가 아닌가?
"엄마, 엄마. 외할머니 집에서 나오는데.. 울 학교 교문 앞에서 얘가 졸졸 뒤를 따라오지 뭐야.
처음엔 내가 다가가면 골목으로 도망가고 그랬는데.."
욕실에서 손을 씻고 나온 박 여사가 말을 보탠다.
"요물 같은 놈이 꼬리를 살랑 흔들면서 자꾸 우리 뒤를 밟길래 신경이 오죽 쓰여야지.
훠이, 훠어이 하고 쫓기도 하고, 헛발질도 하고 그랬는데.. 기어코 요 앞까지 따라붙더라고."
얌전히 자신의 가슴에 안긴 그놈을 쓰다듬던 시아는 신이 났다.
"집 앞에서 내가 쪼그리고 앉아서 손을 내밀었더니 글쎄..
내 손바닥을 그 앙증맞은 혀로 핥아대지 뭐야.
간지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버렸어."
아직도 몸 여기저기가 간질간질한 것처럼 온몸을 배배 꼬아댄다.
"야옹이 겨드랑이 아래 내 손을 넣었는데.. 얼마나 보드랍고 따스하든지.
내친김에 번쩍 들어 올려서 품에 안고 왔어. 잘했지?"
"이 놈이 배가 고픈 건지 아니면 영악하기 그지없는 영물인지..
길냥이면 가까이 오지도 않을 텐데, 가만히 시아 품에 안겨 있더라."
이수는 그 '영물'이 간밤에 쏟아진 폭우에 자신의 집 우수관을 막히게 한 범인이라는 것을 차마 밝힐 수 없었다.
오전에 파이프를 잘라내는 보수 공사 끝에 저 아래서 하악질을 하던 그놈을 직접 꺼낸 태오와
모든 과정을 지켜본 그녀 말고는 누구라도 선뜻 믿기 힘든 일이니까.
그야말로 신박한 서프라이즈, 세상에 저런 일이로다.
"엄마, 나 소원이 있는데.."
"무, 무슨 소원?"
짐짓 우려하던 일이 터지려 한다.
"나 곧 생일 다가오잖아. 그래서 그런데.."
"생일 아직 멀었거든. 스무 밤은 더 자야 돼."
"꿈에서 아빠가 준 핑크 리본 달린 깜짝 선물이 아무래도 이거 같거든."
미치겠다. 빌어먹을 남편 아니 루시드 같으니..
아이에게 선물을 주려면 마트에 진열된 시크릿 쥬쥬 세트나 큼지막한 삼단 케이크를 보내 주든가.
비좁은 우수관에 냐옹이를 버려두고 가는 건 뭐냐고? 그것도 비가 쏟아지는 날에..
"우리 집에서.. 이 야옹이 기르면 안 될까?"
시아는 어릴 때부터 죽은 남편을 빼다 박았는지.. 아니면 자신을 닮았는지 고집이 혹등고래 심줄처럼 질기다.
분명히 안 된다고 뚝 잘라 말하면 시무룩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폭포수 같은 울음을 터뜨리고는
지 방으로 들어가 식음을 전폐하고 틀어박힐 것이다.
주워온 저 고양이만 싸고 돈 채, 학교 수업이고 학원이고 다 거부하리라.
박 여사는 이 난감한 상황에 뭐라 끼어들기 어려운지, 슬쩍 눈치를 보며 뒤로 빠지더니 냉장고 문을 열어 안을 정리한다.
이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문을 연다.
"일단 며칠 두고 보고 결정하자. 기르던 주인이 있을지도 모르니.."
"그럼 찾는 주인이 없으면.. 우리가 길러도 되는 거지?"
먼지가 쌓인 식탁 위를 행주로 훔치던 박 여사가 한마디 한다.
"길냥이는 원래 집구석에 정 붙이는 놈이 아니라서.. 지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 도망갈 수 있어. 그러니 너무 정 주지는 마라."
아이는 소파 한켠에 앉아 러블 고양이 특유의 암회색이 감도는 짧은 털을 쓸어내리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배고픈 거 같은데.. 우리 집에 온 이상 굶길 수는 없으니 이거라도 먹여 봐라."
소파 앞 네모난 탁자에 널찍한 접시를 내려놓더니, 따뜻하게 데운 흰 우유를 따라 주는 박 여사.
냥이는 몸을 뒤척여 시아의 품을 빠져나오더니 탁자 위에 올라서 접시에 담긴 우유를 연신 핥아댄다.
"오래 굶주렸나 보네. 이따 이웃집에서 고양이 사료나 한 대접 얻어와야겠다.
그 집 사는 민수네 할머니가 텃밭 같이 가꾸는데, 길냥이한테 틈틈이 먹이도 주거든.
그 할멈 밖에 나가면 어디서 나타났는지.. 고양이 두어 마리는 졸졸 따라다녀."
그러고 보니 접시에 코를 박고 마른 목을 축이는 냥이의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듯 홀쭉해져 있다.
대체 그 좁은 우수관에 얼마나 갇혀 있었던 걸까?
이수는 측은한 마음에 몸을 일으켜 냉장고로 가더니 참치캔을 꺼내 가져온다.
동그란 알루미늄 캔을 따자 가다랑어 살의 비릿하면서 고소한 내음이 퍼지고..
고양이는 입맛을 다시며 그녀에게 다가온다.
"우유는 다 먹었구나. 사료 줄 때까지는 이걸로 버텨야겠다."
참치 캔에서 살코기만 골라 숟갈로 떠 접시에 크게 덜어주니 환장하고 달려들어 허겁지겁 먹어댄다.
"저러다 숨 넘어가겠네." 급한 마음에 사레들릴까 물을 한 잔 따라오는 박 여사.
"엄마, 숨도 안 쉬고 먹어."
"배고파서 그래. 며칠은 굶었나 보다."
접시에 든 우유와 참치를 다 먹어치웠는지 긴 혓바닥으로 입가를 닦아내며 탁자 위를 어슬렁거리더니..
훌쩍 점프하여 소파에 앉은 이수의 무르팍 위로 달려든다.
"까, 깜짝이야. 얘가 멀쩡한 사람 간 떨어지게 하는데 소질이 있어."
기다란 꼬리를 말고 둥글게 몸을 구부린 냥이의 옆구리를 쓰다듬자
기분이 좋은 듯 길다란 몸을 쭉 펴더니, 앞다리를 위로 쳐들고는 허연 배를 보이며 드러눕는다.
배가 부르자 졸음이 쏟아지는 듯, 한껏 기지개를 켜며 그녀를 올려다보더니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한다.
그때,
냥이의 입 안에 뭔가 반짝이는 것이 보이는데..
(저게 뭐지?)
이수는 그놈의 입에 쇳조각이라도 박혔나 싶어 한 손으로 턱 아래를 움켜쥐어 벌리고는
그 안을 유심히 살펴본다.
붉은 혓바닥 끝 3분의 2 지점에 은빛을 띠는 쇠구슬이 단단히 박혀 있다.
(이건 혀 피어싱 같은데.. 누가 이런 짓을 한 걸까?)
"엄마 왜 그래? 냥이 입 안에 뭐가 있어?"
시아는 궁금해하며 그녀 옆에 앉아 고양이의 입안을 들여다보는데..
"시아야, 그늘진다. 안 보이거든."
아이는 입가를 샐죽이며 뒤로 살짝 물러선다.
"착하지. 얌전히 있어. 야옹아. 나 깨물면 혼낼지도 몰라."
이수는 고양이의 기다란 혀 밑으로 손가락을 가져가 들어 올리고는 조심스레 뒤집어본다.
(이, 이건. 설마..)
섬칫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는데..
고양이의 혀 아래에 달린 피어싱의 정체를 확인하곤 그녀의 눈이 휘동그레진다.
아무래도 이 묘묘한 영물이 대한민국에 빼곡히 들어찬 아파트 중에
하필이면 정이수의 집을 지나는 우수관에 콕 떨어진 건
우연이 아닌 '필연'인 것만 같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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