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나갔나.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좀 해줘야 할것 같은데.’
밤새 진서에게 팔베개를 해줘서 그런가 팔이 뻐근해 죽을 지경이었다.
‘이게 얼마짜리 팔인데…’
헤일리한테도 잘 해주지 않는 팔베개를 말이다.
독립적인 여성인 헤일리는 주혁의 집에서 묵고 갈 때 조차도 싱글 침대에서 혼자 자기를 고집했다.
-“옆에서 낯선 사람 숨소리가 들리면 잠이 들지 않아.”
라는 게 이유였다.
-“같이 안고 자면 좋잖아. 난방비도 적게 들고.”
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었던 주혁도 지금은 헤일리에 익숙해졌다.
지금이야 익숙해져서 이사를 할 때마다 헤일리용 싱글 침대를 신경써서 구입하는 지경이 되었지만.
그런데 아무 경계심도 없이 주혁의 품으로 파고드는 진서란…
주혁이 깜짝 놀라면서도 진서를 내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었다.
따스함.
함께 잠드는 안락함.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안함이라서 그런가, 팔은 아팠지만 덕분에 잠은 푹 잘 수 있었다.
어쨌든 진서는 주혁을 치한으로 오해하고 있을 것 같았다.
말도 제대로 못하고 토사물 범벅을 만든 진서가 어제 일을 기억 못할 게 분명했다.
빨리 가서 상황을 설명해야 하건만, 주혁은 그러던지 말던지 느긋했다.
‘취객도 가버렸으니 샤워나 할까.’
주혁이 문고리를 돌리고 있을 때, 카랑카랑한 진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것이 처녀 귀신처럼 헐렝헐렝 다니더니, 이제 남자를 덮친거여?”
이 집에서 진서를 걱정하는 건 아무도 없었다.
“엄마! 진짜 뭐야? 나 걱정 안해?”
라고 진서가 억울함을 한껏 담아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큭.”
주혁은 문을 열려다 말고, 웃음이 튀어 나왔다.
게다가 진서는 너무 멀쩡했다.
진서가 옷을 찾다가 나가버리고 나서야 주혁은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아직도 진서의 체온이 남아 있는듯, 거실은 훈훈한 공기가 맴돌았다.
‘정말 웃긴 여자야.’
방금 전 진서와 진서 엄마가 나눈 대화가 아직도 선명했다.
어제는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던 엄마와 구남친 욕을 하면서 막걸리를 원샷하던 딸.
외간 남자와 한침대에서 잔 딸을 걱정하는 대신 딸이 덮쳤을지도 모를 남자의 미래를 걱정하다니…
생각만 해도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데 주혁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질 법한 문자 메세지가 도착했다.
데이빗 형이었다.
‘배달 도착’
‘응?’
주혁은 깜짝 놀랐다.
뒤이어 데이빗 형의 문자 메세지는 더 놀라웠다.
‘문 열어’
‘응?’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데이빗 형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말하는 건가.
떨리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정말로 데이빗 형이 서 있었다.
진짠가.
주혁은 인사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데이빗 형을 보았다.
“3D아니니까 이거나 좀 받지?”
데이빗 형은 던지듯 책뭉치를 주혁에게 던졌다.
“대본이 도착했어요. 일하셔야죠. 안그래?”
“으, 응…”
“어떻게 왔냐고?”
“응… 그렇지.”
“네 폰에 위치 추적기 달아 놓은 건 모르지?”
“농담 아니었어?”
“농담일리가.”
데이빗 형은 들어오란 말도 안했는데 신발을 벗었다.
“한국식 집이니까 신발 벗고 들어가는 거 맞지?”
거실에는 진서 엄마가 두고 간 아침이 놓여져 있었다.
데이빗 형은 빵을 집어 들고 우적우적 씹었다.
주혁을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너 하나 때문에 얼마나 손해를 봤는지 따위는 말 안하마. 그래서, 언제 미국으로 갈거야. 언제까지 티켓을 미뤄야 하는거야. 어서 말해.”
“…”
주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필 와도 민현우가 와 있는 제주도니? 아무리 할리우드에서 커밍아웃이 유행이라고는 하지만, 너도 커밍아웃 하게? 헤일리는 어쩔거야. 어? 민현우가 전화오고 난리 났어. 어쩔거냐고. 어? 너 민현우의 백만 팬들을 모두 네 안티로 앞세우고 사랑 고백이라도 할거니? 무슨 세기의 사랑도 아니고…”
“…아, 형. 좀 진정해.”
“진정하게 생겼니? 내가 너때문에 언제까지 싹싹 빌어야 되냐고오~”
데이빗 형이 한탄을 한바가지 늘어놓으려는 찰나였다.
진서의 집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진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침부터 또 어딜 기어나가 이 기집애야!”
“아침 아니거든. 지금 점심이야 점심!”
“그러니까 어딜 가냐고!”
“아 저기 호텔~ 친구 왔단 말이야.”
“호텔? 이것이 너 지금 또 어느 남자 인생을 망치려고 그러고 가? 어? 당장 안 기어 들어와!”
주혁은 거실의 커튼을 슬몃 열었다.
한껏 차려입고 어색하게 힐을 신은 진서가 뒤뚱거리면서 집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저렇게 예쁜 여자였나…’
그래, 어제 마당에 주저 앉아서 막걸리를 물처럼 마시던 여자와 같은 여자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예뻤다.
몸에 딱 붙는 원피스를 입으니 날씬한 몸매가 더 날씬해 보였다.
헐렁한 청바지를 입을 때는 저렇게 날씬한 건 몰랐는데 말이다.
‘저렇게 입고 구남친을 만나러 간다는거지…’
잘해준 것도 없대고, 다른 여자랑 결혼한다는 남자가 왜 구여친을 만나려고 하는걸까…
어제부터 진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석연치 않았는데, 더 석연치 않아졌다.
왜 제주도까지 와서 진서를 만나는거지?
“형, 남자가 결혼할 여자를 두고 전 여친을 왜 만나는 걸까?”
“글쎄… 빌려준 돈을 갚으라는 건가? 갑자기 그건 왜?”
불길했다.
주혁은 그 불길함이 현실로 이뤄질까 걱정스러웠다.
“주혁이 너 내 말 듣고 있니? 야, 크리스 너 지금 뭐하니?”
안듣고 있었다.
저렇게 한껏 차려입은 진서가 너무 걱정돼서 데이빗 형의 말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형. 그럼 짐 다 싸들고 온거야?”
“그렇지. 여기에서 바로 너랑 미국으로 갈거니까.”
“그럼 내 옷이랑 차도 다 가져 왔겠네?”
“그렇…지? 왜. 너 왜! 무슨 짓을 꾸미려고?”
“챙겨온 옷 좀 빨리 꺼내줘봐.”
“내가 너한테 또 당해야겠니? 야, 빨리 말해. 또 어디로 도망가려고!”
데이빗 형은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주혁을 이길 수는 없었다.
주혁은 데이빗 형이 꾸려온 짐더미들 속에서 수트 한 벌을 꺼냈다.
“이건 뭐하게. 시상식 장에서 입던 거잖아. 어? 너 이거 협찬 받은거야. 얼마 짜린 줄 알지? 어떻게 입어야 되는 지도 알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수트 디자이너가 협찬해준 옷이었다.
수트 한벌 값이 주혁의 6개월 수입과 맞먹는 어마어마한 가격이었다.
주혁은 재빨리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단장했다.
“너 뭐 여자 만나러 가니? 아니면 남자 만나러 가니? 흥.”
데이빗 형은 어마어마한 콧방귀를 뀌었다.
“둘 다.”
“아이고 대단한 배우 나셨어 아조.”
데이빗 형은 비꼬면서도 주혁이 옷을 입는 것을 챙겨 주었다.
“넥타이는 맬거야 말거야.”
“매야지. 진짜 멋있고 섹시해야해.”
“허 참… 그래. 알았다. 알았어.”
결국 데이빗형은 주혁을 태우고 진서가 정태진을 만나고 있는 호텔까지 따라왔다.
‘너무 빨리 나온건가…’
주혁은 선글라스를 벗지도 않고 로비를 살폈다.
얼굴을 가리려고 선글라스를 꼈다지만 눈부신 주혁의 외모를 감추기에는 부족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주혁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
게다가, 호텔 로비에는 여자로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류 가방을 든 키 작은 남자 두 명이 호텔에 있는 전부였다.
주혁은 키 작은 남자의 뒤쪽에 비어 있는 소파에 앉았다.
그 소파가 현관에서 등을 돌리고 있어서 숨기기에 적당했다.
“정 팀장님, 서울로 언제 가시려고요?”
“아마 내일? 난 알아서 올라갈게.”
“오~ 팀장님, 오늘 외박하시는 거예요?”
“응. 약혼녀한테는 내일까지 출장이라고 했어.”
“무슨 일이길래 거짓말까지 해 놓으셨어요. 허허.”
“응. 글쎄… 오늘 즐거운 일이 생길 지도 모르지. 뭐.”
“그럼 가보겠습니다. 전 오늘 일은 못 들은 걸로 할게요.”
“응. 땡큐.”
남자 한 명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놈인가…’
주혁은 고개를 돌리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이윽고 정 팀장이라는 자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혁은 정 팀장이라는 자식과 진서가 호텔의 레스토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뭐길래 여기서 이러는거야?”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데이빗 형이 물었지만 소용없었다.
“나쁜 남자로부터 여자를 지키려고.”
“네가 무슨 히어로니? 야.”
“쉿.”
주혁은 데이빗의 입을 가로막았다.
“할리우드 스타에서 커밍아웃하고 캡틴 아메리카라도 될 계획이니? 야, 아서라 아서.”
데이빗 형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주혁은 시계를 보았다.
‘밥을 먹고 와인을 마시고, 지금쯤이면…’
“형, 갔다올게. 호텔 후문에 차 좀 대기시켜.”
“뭐? 너 또 도망가려고?”
“아니니까.”
주혁은 선글라스를 벗더니, 같은 층에 있는 호텔 레스토랑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어머…”
주혁을 알아본 사람들의 탄성이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차주혁이야, 차주혁…! 어머어머어머…!”
‘그래, 차주혁이다. 내가 그 차주혁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