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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오늘만 백만번째
작가 : 박재경양
작품등록일 : 2016.8.22

키다리 아저씨 같은 남자를 만나기는 애초에 글러 먹었고, 회사에서 만난 남자친구라는 놈은 등쳐먹고 사기나 치고 다니고. 하는 일 하나없는 여자 나이 서른. 진서는 오랜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제주도로 내려왔다. 이렇게 된 바에 한살이라도 어릴 때 하고 싶었던 일이나 하면서 엄마옆에 있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웬걸, 차주혁, 할리우드에서는 크리스라고 불리는 뮤지컬 배우가 제주도에 찾아왔다. 그것도 진서의 집에! 왜? 태어나서 처음 보는 잘생긴 남자가 왜 우리 집에 있는거지?

 
강제로 한거 아니고요, 진짜에요
작성일 : 16-10-24 12:19     조회 : 308     추천 : 0     분량 : 4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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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지…’

 진서의 동공이 확장되고, 전두엽은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미친듯이 회전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이 나는 거라고는…

 “저 진짜 아무 짓도 안할 겁니다. 맹세합니다.”

 주혁의 말 뿐입니다.

 ‘그럼 내가 막 꼬신건가… 아무 짓도 안한다고 했는데 내가 막 어? 옷벗기고 그런건가?’

 그랬을 수도 있었다.

 진서가 마음 속으로 고뇌하며 멘붕에 빠져 있다는 것도 모르는 지, 주혁은 잘 자고 있었다.

 새근새근.

 주혁의 가슴이 숨을 내쉴때마다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티브이에서만 보던 연예인의 몸이었다.

 근육이 빵빵한 몸이 아니라, 군살이 하나도 없이 잘 빠진 몸이었다.

 시간이 흐를 수록 배가 남산처럼 나오고, 물살이 점점 붙던 정태진의 몸이랑은 딴판이었다.

 ‘참 잘생긴 몸이다.’

 진서는 방금까지 머리가 깨질듯 아파왔다는 것을 잊고 멍하니 주혁을 보았다.

 

 전화벨이 울리지 않았다면 진서는 주혁이 깰 때까지 계속 보고 있을 거였다.

 진서는 주혁이 깰까봐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엄마였다.

 “이 기집애야! 어디서 서방질을 하고 다니길래 외박을 해? 외박을! 어? 너 어디야?”

 “아 알았어. 금방 갈게.”

 밤사이에 무슨 억울한 일이 있었는지, 아니면 밤사이에 무슨 좋을 걸 먹었는지 엄마의 목소리는 귀가 터질 듯이 컸다.

 진서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옷이 어디 있을까…’

 진서는 두 팔로 가슴을 감쌌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데도, 속옷만 입고 있는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방 어디에서도 옷은 없었다.

 ‘아놔…’

 어제 토했다는 사실이 기억나지 않으니, 옷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수밖에 없었다.

 진서는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아침 햇살이 작은 거실로 비치고, 열어놓은 문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진서는 속옷만 입고 있다는 것도 잊고, 잠시 거실에 서서 바람을 맞았다.

 “시원하다…”

 숙취도, 두통도 사라질 정도로 시원한 바람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들리는 낯익은 목소리.

 “아침이유.”

 뒤이어 현관문이 열렸다.

 엄마였다.

 그래, 진서의 엄마였다.

 진서는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엄마…”

 “이게 지금…”

 외간남자의 집에서 속옷차림을 하고 있는 딸의 모습을 본 엄마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제 난 죽었구나.’

 곧장 등짝 스매싱이 날라올 것 같아, 진서는 눈을 질끔 감았다.

 하지만 엄마는 가만히 진서를 보고만 있었다.

 “엄마… 그게 아니라. 진짜 난 아무 기억도 안나는데… 그렇다고 내가 겁탈 당한 건 아닌거 같고 엄마… 그러니까…”

 장황하게 기억도 나지 않는 지난밤을 변명했다.

 엄마는 들고 있는 아침을 넘어지지 않게 가만히 내려놓더니 두 팔을 번쩍 들고 진서에게 다가왔다.

 “아니 이것아!”

 그리고 뒤이어 엄마는 진서의 등짝을 세차게 내려쳤다.

 등에 엄마의 손도장이 벌겋게 찍혔다.

 “아파 엄마. 아… 나 진짜 아니라니깐…”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어? 이것이 처녀 귀신처럼 헐렝헐렝 다니더니, 이제 남자를 덮친거여? 아이고오~ 이게 무슨 난리여! 이것을 밤마다 어디 못나가게 꽁꽁 묶어놓을 수도 없고!”

 ‘응…? 엄마 나 걱정하는거 아니었어?’

 엄마의 반응은 놀라웠다.

 외박한 딸을 걱정하고 있는게 아니었다.

 “어쩐지, 저 총각 보는 눈이 게슴츠레 하다 했어. 이것아. 외간 남자 인생 망쳐놓고! 아이고오~ 아이고오~”

 “엄마! 진짜 뭐야? 나 걱정 안해? 딸이 남자 방에서 속옷만 입고 나왔는데.”

 “넌 어릴때부터 성질이 더러워서, 하기 싫은 건 때려도 안했는데 무슨. 네가 좋으니까 훌훌 웃도리나 까고 그랬겠지. 안그래? 저 총각은 무슨 죄야. 아이고오…”

 기가 찼다.

 엄마는 진서를 걱정하는게 아니라, 진서에게 겁탈 ‘당했을’ 주혁을 걱정하고 있었다.

 “동네 부끄러우니까 빨랑 옷이나 입어.”

 엄마는 다시 한번 진서의 등짝을 세차게 내려쳤다.

 “아, 나도 옷 입고 싶어. 근데 옷이 어딨는지 모르겠다니까.”

 “하다하다 옷까지 찢어먹었니? 동네 챙피해서 내가 진짜…”

 엄마도 진서의 옷을 찾는 데 거들었다.

 

 진서는 옷을 입지 못하고 엄마가 던지듯 갖다 준 가디건 하나를 걸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띠링.”

 문자 메세지가 왔다.

 구남친 정태진이었다.

 ‘제주도 도착했어. 짐 풀고 만나자. 이따 호텔에서 미팅이 있는데, 이쪽으로 올래?’

 진서는 그제야 태진과 약속했던 것이 생각났다.

 얼떨결에 그러자고 한 것도 기억났고, 그래서 자책하며 막걸리를 마신 것도 기억났다.

 ‘지금이라도 시간이 안된다고 할까.’

 진서는 잠시나마 망설였지만, 결국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고 말았다.

 거절하지 못하는 것, 마지막까지 쿨하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것은 욕심이었다.

 태진과 끝도 그랬었다.

 못된 놈이라고, 쌍욕 한번도 못해보고 더 좋은 사람 만나라는 덕담까지 마치고 나서야 태진과 헤어졌다.

 

 *

 “진서야.”

 태진은 호텔 로비에 나와 있었다.

 흰 셔츠에 산뜻한 넥타이를 맨 데다가, 다리에 딱 붙는 슬렉스까지 입은 태진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새로 사귄 여자친구의 센스가 좋은건지, 진서와 헤어지고 드디어 패션에 눈을 뜬 건지는 모르겠지만.

 진서는 오랜만에 친구를 보는 듯,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태진에게 다가갔다.

 ‘아… 발이야.’

 10센티에 가까운 킬힐을 오랜만에 꺼내신은 진서의 발은 고통에 휩싸여 있었다.

 제주도에 온 뒤로는 매일 운동화 아니면 슬리퍼만 신고 다녔으니, 발이 아플 법도 했다.

 진서는 발이 뭉개질 것 같은 고통을 참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발아 쫌만 참아. 가오 떨어지게.’

 킬힐을 신은 진서는 웬만한 남자들보다 컸고, 오랜만에 꺼내 입은 딱 붙는 원피스는 날씬한 진서의 몸매를 더욱 부각시켰다.

 게다가 머리까지 셋팅하고 풀 메이크업까지 마쳤으니, 이 정도면 훌륭했다.

 그래서인가, 역시 태진은 진서를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가… 이렇게 예뻤니?”

 태진은 완전 넋이 나간 듯한 목소리였다.

 ‘역시. 해장을 포기하고 꾸민 보람이 있군.’

 결과는 진서의 예상대로였다.

 태진은 헤어질 때보다 더 예뻐진 진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점심은 먹었니?”

 진서는 일부러 쾌활하게 말을 했다.

 끈적끈적한 태진의 시선을 받는 것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래, 이렇게 예쁜 날 두고 다른 애랑 결혼하는 걸 후회해야지. 늦었어 정태진. 그러니까 있을 때 잘하지 그랬니.”

 “밥이라도 먹을까?”

 

 

 태진은 진서를 호텔 레스토랑으로 데리고 갔다.

 잔잔한 클래식이 흐르는 이곳, 우아하게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스테이크를 먹는 사람들 앞에서 진서도 덩달아 고급스러워 진 느낌이었다.

 “미디움레어, 그리고 레어 하나 주세요. 그리고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스페셜하게 와인도 부탁해요.”

 “어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구나.”

 진서는 스테이크는 거의 익혀먹지 않는다는 취향을 기억해 준 것에 깜짝 놀랐다.

 “그럼. 진서 너는 육즙이 뚝뚝 흐르는 고기 좋아하잖아.”

 태진은 싱긋 웃었다.

 마치 처음 데이트를 할 때처럼, 태진은 다정했고, 진서를 하나하나 챙겨주었다.

 긴장이 풀린 진서도 마치 이제 막 연애를 시작했을 때처럼 태진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와인이 한잔, 두잔 들어가고,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였다.

 태진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진서야. 실은 오늘 출장, 너 보려고 일부러 내가 가겠다고 우겼어.”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나 말이야, 너랑 다시 시작해 보고 싶어. 비록 네가 지금은 제주도에 있지만 말이야, 앞으로 우리가 잘 돼서 결혼식도 올리게 된다면…”

 “응?”

 이 자식 지금 나랑 뭐하자는거지?

 진서는 혼란스러웠다.

 방금 기분좋게 마신 와인과 스테이크가 입 밖으로 다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역겨운 자식.

 ‘결혼… 한다지 않았어? 지금 그걸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는건가? 그렇게 내가 만만한가?’

 진서는 일부러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분노로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치욕스러웠다.

 어떻게 저렇게 눈을 똑바로 뜨고, 저렇게 차분한 목소리로 다정하게 날 속일 수가 있지?

 “널… 어떻게 해줄까?”

 진서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응? 무슨 말이야. 너도… 나랑 같은 마음이니? 그렇다면 다행이고. 진서야 나는 있잖아… 세상에서 너와 헤어진 게 가장 가슴이 아팠어… 진심이야. 너랑 헤어진 이후로 다른 여자한테 눈길 줘본 적도 없고…”

 그때였다.

 문을 등진 진서의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아하고 조용하게 식사를 하던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어머! 차주혁이야! 어머어머어머!!!”

 라는 소리가 들렸다.

 ‘차주혁?’

 진서는 고개를 돌려 오늘 아침까지 한 침대에 누워 있던 그 차주혁인가 확인해 보려고 했다.

 아니,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언제 갖춰입었는지 딱 붙는 수트를 보기 좋게 차려입고, 머리에 포마드 기름을 발라 단정하게 빗어 넘긴 차주혁이 성큼성큼 진서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 수트와 넥타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딱 붙는 셔츠는 정말이지, 너무 섹시해서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우리 토끼. 어디 갔었어. 한참이나 찾았잖아.”

 주혁은 망설이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목소리로, 정말 진서를 애타게 찾은 것처럼, 한시라도 진서와 떨어져 있을 수 없다는 말투로.

 간절함을 담아서, 사람들이 모두 소리지르고 있는 곳, 태진이 놀란 눈으로 보고 있는 그앞에서,

 주혁은 진서에 입에 사랑이 가득 담긴 키스를 피부었다.

 ‘어머어머어머… 진짜 어머다 어머…’

 그 달콤한 입맞춤에 진서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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