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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한국남자 지훈
작가 : 오리무중91
작품등록일 : 2020.9.13

현재 20,30대 남자들의 현실적인 삶과 거기에 대한 위로를 하고 싶은 작품으로 , 주인공 지훈은 20대 후반의 남자로 남자로서의 부담함과 젊은 남자로서의 현실을 나타내는 인물입니다.

 
7화
작성일 : 20-09-18 18:56     조회 : 269     추천 : 0     분량 : 18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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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의 어느 날 지훈은 오늘 하루만 지나가면 내일부터는 일주일간 휴가이다. 3교대 근무중 가장 피곤한 야간근무이지만 활짝 핀 얼굴로 근무하고 있다. 지훈은 내일 아침 퇴근하자마자 서울역으로 바로 달려나가기 위해 오늘 일주일간 짐도 싸서 출근했다. 이번 휴가는 본가에 가서 엄마밥 이나 실컷 먹고 올 계획이다. 별것 아닌 계획이지만 그냥 일주일간 이 회색 건물에 회색빛 도시에 없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설레고 있다. 아침 해가 밝았다. 지훈은 오랜만에 밝게 웃으며 퇴근했다.

  지훈은 직업 특성상 명절에도 고향에 가기는 굉장히 힘들다. 서울로 올라오고 난 뒤 이렇게 길게 고향에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도 거의 1년 만에 고향에 내려가는 것이다. 지훈은 250Km/h 속도 이상으로 달리고 있는 KTX도 경운기가 달.달.달.달 거리면서 달리는 것같이 느껴진다. 이런 기분은 이등병 때 100일 휴가 이후로 처음이었다.

  기차역에서 나오니 후~욱!하고 열기와 고향의 냄새가 에어컨 바람으로 차가워진 콧속으로 피서를 온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고향의 더위, 확실히 아래 쪽라서 그런지 덥다. 지훈은 입고 있던 남방을 벗어 허리에 묶는다. 남방만 묶었을 뿐인데 진짜 여행지에 여행 온 기분이다.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한다. 거의 1년 만의 고향집 달라진 점이 없다. 평일 오전이라 집에는 반겨주는 이 한 명 없이 고요하다. 괜히 아무도 없는 성에 입성하는 개선장군 마냥 고개를 들고 들어온다. 아무도 없는 고향집을 정복한 것 같이 느껴진다. 지훈은 야간 근무를 하고 바로 내려와서 인지 너무 졸렸다. 원래 자신이 쓰던 방문을 열었다. 덜컥 끼이이익 1년이 지나도 여전한 낡은 경첩소리가 반갑다. “엄마는 이것 좀 고치지 쯧쯧” 근데 웬걸 짐도 많이 없고 비어 있어야할 방에 지훈의 형의 물건들로 가득했다. 지훈의 형인 석훈은 3년전에 결혼을 하고 분가를 했었다. 부모님 집으로 들어와 형수랑 같이 쓴다고 하기에는 작은 방이고 또 형의 물건들로만 가득했다. 의문을 뒤로하고 지훈은 너무 졸려 침대로 들어가 잠이 들었다.

  띠.띠.띠.띡 철컥. 지훈은 누군가 들어오는 기척에 잠에서 깼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지훈 엄마였다. 지훈은 졸음을 닦아내고 “엄마 왔어~”하고 인사한다. 지훈의 엄마인 희숙은 활짝 웃으며 “어구야 낯설다. 못 본 사이에 왜 이리 늙었댜. 살도 좀 빠진 거 같고” “우리 황여사님은 안 본새 회춘하셨네... 어째 이리 늙어도 이쁘댜~” “능글 맞은거 봐라. 아들 넌 어째 날이 갈수록 징그러워지냐? 옛날에는 서툴고 어린 구석이 있었는데..” 희숙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왜 내 나이 이제 서른이다! 나도 이제 늙었어!” “그래도 엄마눈엔 아직 새끼다. 새끼야!” “또 말장난한다. 엄마 나 집밥 먹고 싶어! 엄마밥!” 장도 안 봐왔는데 뭘 해줘야 될까나? 기다려봐” 말을 마친 희숙은 옷을 갈아입으러 안방으로 들어갔다. 지훈은 거실 소파에 앉아 티비를 켜고 의미없이 채널을 돌린다. 그 때 연달아 아버지인 성식이 들어온다. 지훈은 반사적으로 “다녀오셨어요.”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성식은 “어, 왔냐.” 짧게 인사하고 현관에서 흙투성이인 작업복을 벗어 던지고는 욕실로 바로 들어간다. 희숙이 안방에서 나오면서 “니 아빠 들어왔니?” “응, 바로 씻으러 들어가던데?” 희숙은 현관에 성식의 작업복을 가리키며 “아들 저것 좀 세탁기에 바로 넣어라.” 지훈에게 일을 시켰다. “씌~ 거의 일 년 만에 온 손님인데..일을 시키냐...” 지훈이 투덜거리며 현관으로 발을 옮긴다. 현관에서 작업복을 집으려는 순간 띠.띠.띠.띡! 철컥! 문이 열린다. 문이 열리자 석훈이 보인다. 석훈은 당황한 건지 머쓱한 건지 “왔냐?” 라며 인사한다. 지훈도 “어 왔다.”라고 반문하고 작업복을 집어 들어 세탁기로 향한다. 끼이이익! 뒤에서는 석훈이 방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세탁기에 빨래를 던져 넣고 거실로 나오는데 희숙이 잠깐 와보라고 손짓한다. 지훈은 입모양으로만 왜를 외치며 희숙에게 다가간다. 희숙은 지훈을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가더니 밖에 들릴세라 조용히 말했다. “니네 형 이혼하고 집에 들어온 지 3달정도 됬다.” “왜?” “이야기하자면 길고 우선 저녁먹고 나중에 조용히 이야기 해줄게” 지훈은 알았다고 끄덕이고는 다시 거실로 나간다. 희숙도 저녁을 마저 차린다. 저녁준비가 얼추 끝난 희숙은 “큰아들 저녁먹자 나와.”하고 최대한 다정하게 말하는 듯했다. 그 소리에 지훈은 식탁으로가 숟가락이랑 젓가락을 놓고 밥솥을 열어 밥을 휘적휘적 하여 수증기를 날렸다. 덜컥 끼이이익! 방문을 여는 낡은 경첩소리가 들렸다. 석훈이 보이자 지훈은 “밥 많이 줘?”하고 주걱을 들고 물어본다. “적당히 줘” “아니다. 그냥 많이 푼다. 엄마 오늘 김치찜 했어! 어차피 밥 많이 먹게 될거다. 나중에 밥 없다고 하지 말고 처음부터 많이 가져가라!” 지훈의 말에 석훈은 “그래, 알았다.” 하곤 멋쩍게 웃었다. 석훈은 내심 아무렇지 않게 반응해주는 지훈이 고맙게 느껴졌다. 그렇게 오랜만에 4인가족은 한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한다. 지훈도 희숙의 김치찜이 너무도 반가웠는지 허겁지겁 얼굴에 반가움이 묻는지도 모르게 먹는다. 또 희숙은 지훈이 좋아하는 계란말이까지 해서 줬다. 빨간 김치찜에 침대라고 해도 믿을 노랗고 폭신한 계란말이 지훈은 아 이제 고향에 왔구나 하고 실감이 난다. 식사를 끝내고 석훈과 성식은 각자 방에 들어갔고 희숙은 설거지 준비를 한다. 지훈은 괜히 옆으로 가서 “도와주까?”라고 물어봤는데 희숙이 대뜸 “그래 내가 비누칠 할테니, 니가 헹궈” 했다. 지훈은 속으로 ‘인사치레였는데...’라고 생각했지만, 희숙의 옆에서 설거지거리를 헹궜다. 희숙이 “니네형 그냥 성격차이라고 이혼했다는데 정확한 이유를 말 안해준다.” “으음...그래? 원래 그런거 시시콜콜 이야기하고 그런타입 아니잖아” “그리고 니네 형수” 지훈이 말을 자르며 “전 며느리님” “여튼 걔한테 전화해서 물어봐도 그냥 성격차이 때문이라고만 하더라.” “아구 황여사님 거기는 왜 전화 하셨습니까! 그 밖에서는 멀쩡한 양반이 집안일에서는 그러노, 그냥 그런갑다 하고 말해줄 때 까정 가만히 있어. 괜히 들쑤셔서 가뜩 심란한 사람 벼랑으로 몰고가지 말고!” 지훈이 희숙에게 호통을 쳤다. “알겠다!!” 희숙은 지훈이 괜히 자신을 다그치는 것 같아서 조금 서운했다. 은행을 다니는 희숙은 밖에서는 팀장직급까지 올라간 똑똑한 인물이다. 하지만 자기 자식일이니 경우가 아닌걸 알면서도 자꾸만 관심을 가지게 된다. 희숙 또한 그럴 땐 평범한 엄마일 뿐이였다. 그날 밤 지훈은 석훈 덕분에 초등학교 이후 처음으로 엄마와 안방에서 잠을 잤다. 지훈과 희숙은 1년동안 밀린 대화를 조잘조잘 하기도 하고, 같이 티비예능을 보며 깔깔거리고 웃으며 자정이 넘게 까지 밀린 회포를 풀었다.

  부스럭. 늦잠을 자도 되는 지훈이 희숙의 출근 준비소리에 눈을 떴다. 시계를 보곤 ‘끄응’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켠 다음 차가운 물 한 컵 마실겸 이부자리에서 일어난다. 출근준비를 하던 희숙은 “깼어? 더 자지 그래” “아냐 깬 김에 일어나려구, 아침부터 바~쁘~네” 하며 괜히 희숙을 한번 놀리고 부엌으로 향한다. 띠링..졸졸졸졸... 정수기에서 빙하수 만큼 차디찬 물이 내려온다. 몰래 입에 약을 털어 넣은 후 벌컥벌컥 캬악! 차디찬 냉기가 식도를 따라 내려가 지훈의 몸과 정신을 깨운다. 벌컥! 끼이이익! 석훈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석훈을 발견한 지훈이 “츌.근.하시네뵈여~~”하고 얄밉게 석훈을 놀린다. 석훈은 지훈을 한심하게 쳐다봤다. “아침부터 뭐 잘못 먹었냐? 아프면 병원 가봐라.” 석훈의 반응에 지훈이 웃으면서 말을 했다. “크큭큭큭 오늘 몇 시에 들어오노?” “어제랑 비슷하게?” “요샌 안 바쁜 갑네” “뭐, 막 바쁘거나 그렇진 않네” “저녁에 괜찮으면 술 한잔하자 나가서 둘만” “생각해보께” “알겠다, 저녁에 보제이~” “오냐~” 석훈은 지훈과 한 약속에 마음 한 구석이 무겁게 느껴진다.

  가족들이 모두 회색 전쟁터로 간 집은 조용하다. 고요하다. 그 정적에서 지훈은 조용한 전쟁을 하고 있다. 가족들에게 자신의 병을 이야기할 것인지 말 것인지 크게 고민 중 이다. 석훈의 상황에 자신의 상황까지 지훈 스스로 짐을 덜기 위해 가족들에게 짐을 지운다? 지훈은 그것 또한 마음이 편치 않다. 지훈은 지금껏 그래 왔듯이 가면을 쓰고 밝은 척하며 가족들을 속일 자신이 있다. 지훈은 석훈과 술자리 전까지 계속 고민하고 고민했다. 하늘이 어두워 지더니 비가 한방울, 두방울 땅을 젖히기 시작했다.

  띠.리.리.리 석훈의 전화이다. 띳! “어! 왜?” “야, 나 지금 퇴근하니까 6시반 까지 ‘복사꽃’으로 와라.” “집에도 안 들리고 바로? 알겠다. 6시반 까지 갈게.” ‘복사꽃’ 동네에서 나름 오래되고 유명한 막걸리집, 지훈도 고등학교 졸업하고 여기에서의 추억이 많았다. 동네에서 괴짜라고 불리는 막걸리집 사장님은 술을 마시러 오는 학생들에게 욕지거리를 하지만 이래저래 배고픈 학생들에게 안주도 푸짐하게 주고, 서비스도 왕왕 주는 정 많은 사람이다. 고급지고 맛집인 느낌보단 가성비 좋고 싼 맛에 가는 그런 느낌의 술집이다. 또 10년 전 지훈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석훈이 처음으로 같이 술을 사준 곳이기도 하다. 지훈도 거의 5년만에 가는 것이었다. 지훈은 시간에 맞추려면 빠듯해 이래저래 분주히 준비하고 현관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띠.띠.띠.띠 철컥 희숙이 퇴근하고 들어온다. “어 엄마 왔어? 나나 밖에서 형이랑 술먹기로 했어! 저녁은 아빠랑 둘이서 먹어~” “큰놈이랑? 그래 알겠어. 늦어?” “몰라? 늦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그래 술 너무 많이 먹지 말고.” “엉~ 다녀올게~” 희숙은 지훈과 석훈이 같이 술을 먹는다는 게 먼가 아들들이 다 커서 서로를 챙기는 것 같아 대견했다. “애들아빠 오면 오늘은 그냥 족발이나 시켜먹자고 해야겠다.”

  지훈이 먼저 도착했다. 5년 만에 오는 ‘복사꽃’은 똑같았다. 건물 외부는 리모델링을 했는지 짙은 회색과 밝은 회색이 어우러진 현대식의 모습이었지만, 막상 가게 내부로 들어오니 예전에 왔을 때처럼 주황빛의 백열등 조명과 문풍지, 나무탁자, 이곳저곳에 걸린 지게, 망태기, 키 시골집에 와있는 듯한 인테리어가 그대로였다. “사장님, 안녕하셨죠? 저 기억 못 할 수도 있겠다. 너무 오랜만에 와서요.” “뭐 얼굴은 본 것 같다. 뒤지지도 않고 잘도 왔네. 칫” “큭큭큭큭 하나도 안 변하셨어요. 말씀하시는게.” “사람이 변하면 뒤지는거지 난 오래살거야~! 아 됐고 편한데 앉아있어라, 메뉴판 갖다 줄테니까.” “큭큭큭큭 네” “왜 계속 쳐웃고 자 빠졌노! 주둥아리 찢어가 계속 웃게 만들어뿔라!” “아따 욕 한번 찰지다, 알겠어요. 주문은 한 명 더 오면 할게요.” “그래, 쳐 자빠져 있어라” “네” 사장님과 짧은 대화를 나누고 지훈은 되도록 사람들이 잘 없는 조용한 자리를 물색했다. 계단 아래 조그마한 방처럼 생긴 자리를 찾은 지훈은 자리에 앉아 석훈에게 전화를 건다. “형, 나 도착! 어디쯤이여?” “주차장에 차대고 있다.” “오키, 뭐시켜 놓을까? 나 배고파. 파전 먹고싶어!” “그래, 파전이랑 두부김치 시키고 동동주도 한 사발 시켜라” “알겠다~” 지훈이 사장님이 들려라 소리쳤다.“사장님 저희 파전이랑 두부김치랑 주시구, 동동주도 한 사발 주세요.” “많이도 쳐묵네, 좀만 기다리봐라.” “네, 맛있게 해주세요” “오~냐”. 사장님의 퇴장과 동시에 석훈이 등장한다. 지훈이 석훈을 발견하고는 머리위로 손을 올려 흔들었다. “차 많이 막히더나?” “니가 빨리 온거다.” 석훈이 자리에 앉자 미묘하게 담배 냄새가 났다. “히야, 담배피나? 끊었었다 아니가?” 석훈이 지훈을 한번 쓱 쳐다보더니 별일 아니라는 듯 “요즘 이거라도 있으니 살지 이것도 없으면 적적해서 안 된다. 오늘 왜 술 먹자고 했노?” “그냥, 술 먹고 싶어가.” “말 돌리지 마라.” 현석이 능글거리는 지훈에게 날카롭게 대답했다. “거~참 사람 참...그냥 이야기 좀 하고 싶어서 그러지... 요새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냥 나도 사니까 사는거지 뭐하고 사는지는 모르겠다.” 지훈이 석훈의 말을 가로막으며 손사래를 쳐댔다. “아 됐다. 맨 정신에는 진지한 얘기 못하겠다. 술 좀 먹고하자.” 때 마침 파전과 동동주가 먼저 나왔다. 살얼음이 동동 뜬 옅은 분홍빛을 띈 노란 동동주가 사발 안에 나무꾼이 타고 올라간 두레박 마냥 찰랑찰랑 넘칠 듯 말 듯 푸짐하고, 잘게 썬 오징어와 골뱅이, 조그만 칵테일새우가 오밀조밀 올라가 있는 푸르고 바삭해 보이는 파전은 지훈의 군침을 당긴다. 동동주 사발 안에 조그마한 플라스틱 조롱박으로 담뿍 떠 석훈의 잔에 가득, 또 담뿍 떠 지훈 자신의 잔에 가득, 젖가락으로 먹기 좋게 뜯어서 손이 들고난 뒤 “첫잔은 원샷!” 탱! 밥그릇같이 생긴 노란 광택의 양은 막걸리 잔이 붙이치는 소리가 투박하다. 꿀꺽~꿀꺽~꿀꺽 동동주 특유의 청량하고 달작한 목넘김이 시원하다. 그 다음으로 젓가락에 잡혀있던 파전은 입안으로 조심히 집어 넣었다. 파전이 바삭! 하고 입안에 들어온다. 탱글 쫄깃 적당한 저항감으로 식감을 더해주는 해산물들 씹을 때 마다 쭉쭉 나오는 달작한 파즙... 어릴 때 추억의 맛이여서 그런지 마냥 맛있게 느껴진다.

 “나 형이 처음으로 여기서 술 사줬었는데 기억하나? 10년 전 이나 지금이나 여긴 변함이 없네... 동동주도 그대로고 파전도 그대로고 우린 이제 하루하루 늙어서 서로 밥벌이도 하고 하는데...” 현석이 추억에 잠겨 있는 지훈을 쏘아봤다. “먼 이야길 하고 싶은데? 서두가 왜 이리 기노.” “왜이리 날이 서 있노, 이러는데 내가 이야기를 할 수 있겠나? 한잔 더하자 원샷해라!” 탱! 막걸리잔이 다시 한번 붙이치고 비워진다. “내려와서 알았다. 히야 혼자 된 거...” “엄마가 말 안 했었나?” “응, 본인도 안 하는데 엄마가 어떻게 내 한테 먼저 이야기 하겠노.” 지훈의 말에 석훈은 머쓱해졌다. “그래서, 그 이야긴 왜 하는데?” “솔직히 말하면 궁금해서, 왜 이혼했는지 걱정도 되고 속상도 한데 궁금한 게 지금은 더 크다. 엄마도 자세히 이야기는 안 한다 하고 답답해하는 것 같더라.”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지나간 일인데 이유가 뭐 그리 중요하노, 그냥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게 중요하지” 지훈이 답답한 마음에 석훈에게 소리쳤다. “말이 그러면 그런데,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내가 자살시도를 했다고 해, 다행히 미수로 그쳐서 병원에 누워있는데 왜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이야기하지 않아.. 그럼 형은 어떨 거 같은데? 신경 끌 수 있나?” 석훈은 지훈의 말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석훈의 첫 직업은 군인이었다. 사관학교에 입학해서 23살의 나이로 해군 소위로 임관을 하게 됐다. 석훈은 임관하고 1년간 통신관으로 근무를 하다가 UDT에 지원했다. 국내에서 UDT생활을 하던 중 소말리아에 파병가게 되어 5년간 소말리아에서 근무를 했고, 해적소탕작전 중 동료의 죽음을 목격하고 그 계기로 석훈은 ‘제대 하겠다.’ 마음먹고 8년의 군 생활 끝에 대위 전역했다. 그래도 군대 내에서 인간관계를 잘 쌓아놓은 덕분에 괜찮은 국방업체에 인맥반 실력반으로 입사하였고, 전역하자마자 결혼을 했다. 석훈은 장남으로서의 가정을 꾸려야한다는 책임과 안정적인 생활을 원했고 그 당시 여자친구, 지금은 이혼한 전부인인 수희도 사랑했기에 결혼이란 결정을 하게 되었다. 석훈의 결혼 전 연애기간은 2년이었지만 파병과 직업의 특이성 때문에 전부인과 실질적인 연애는 6개월 정도밖에 안 되었다. 그래서 서로를 잘 몰랐다. 수희는 허영심이 많은 여자였다. 매번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자신의 결핍에 자격지심을 느끼고 우울해했다. 만족이란 것을 모르는 여자였다. 석훈도 결혼 전 수희의 허영심을 전혀 몰랐다고는 할 수 없었다. 3년 전 여름 결혼식이 1달도 채 남지 않았다. 한창 결혼 준비 중인 석훈은 수희와 카페에 앉아 있었다. 석훈은 본인이 소말리아로 파병을 가 목숨을 담보로 근무를 하며 모인 돈과 은행의 대출로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 차근차근 준비해서 중심에서 조금 벗어난 외각지에 23평형의 크지 않은 아파트를 전세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수희는 만족하지 못했다. 수희는 외각지인 것도 싫었고 23평형의 아파트인 것도 싫으며 전세인 것은 더더욱 싫었다. 수희는 자신이 최고여야만 했다. 그런 곳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는 것은 수치스럽기 까지 했다. “오빠, 오빠 부모님께 말씀드려서 도움 좀 받아서 지금 그 집 말고, OO동 캐슬 아파트로 가자. 오빠 지금 모은 돈이랑 부모님께 도움 받으면 가능하잖아. 응?” “수희야 부모님한테 손 안 벌리려고 그 동네로 가는 거야. 난 오히려 직장이랑 집이랑 가까워져서 좋은데? 너 어차피 결혼하면 일 그만둘 거 라면서..” “나 일 그만해도 괜찮다고 했잖아 남자가 왜 말을 바꿔?” “아니 그런 뜻으로 이야기한 게 아니라” “그리고 오빠만 좋으면 다야? 오빠 혼자 살거야? 내 생각은 안해? 이럴거면 왜 결혼하자고 했어?” 석훈은 수희가 왜 이렇게 신혼집을 싫어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너 왜 그 집이 싫은데? 이야기 좀 해봐” “거긴 중심지에서도 멀잖아! 그렇다고 학군이 좋은 것도 아니구 또 우리집에서도 멀어 나 임신하면 우리 엄마가 자주 왔다갔다하면서 나 케어 해줘야하는데 예비장모님 생각도 좀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석훈은 어처구니가 없어 한숨을 쉬며. “후...무슨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벌써 이야기 하냐.” 수희는 지훈의 한숨에 “지금 한 숨 쉰거야? 한 숨 쉬어야할 건 나야! 그리고 나 아는 언니들은 다 좋은 동네에 편한월드, 재이, 캐슬, 레쏘리 같은 명품아파트에 사는데 나는 외각에 23평형 아파트 산다고 하면 무시할 게 분명하단 말이야...게다가 자가도 아니고 전세 산단 소리를 어떻게 해! 생각만 해도 수치스러워...” 석훈이 한숨을 쉬었다. “후...잠깐 생각 하고 있어봐 화장실 좀 다녀올게” 석훈은 끊었던 담배생각이 간절했다. 그리고 결혼준비하면서 수희가 예민해 진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딸랑~ 석훈이 다시 까페 안으로 들어왔다. 수희는 여전히 뾰루퉁한 얼굴로 석훈을 쳐다봤다. 석훈이 자리에 앉자 수희가 입을 땠다. “그럼 나 많은 거 안 바랄게 OO동 캐슬아파트는 포기할게. 그럼 그냥 우리 동네 재이아파트로 들어가자. 오빠가 모은 돈 이랑 1억정도 있으면 들어갈 수 있잖아. 1억정도는 어머님 아버님 부담되지 않는 선이잖아.” 석훈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우리 집에서 5천, 네 집에서 5천 이러게 도움 받아서 재이아파트 들어가고 부모님들께 매달 갚아나가는 걸로 하자. 어때?” “오빠 거기서 우리집이 왜 나와? 나 진짜 양보 많이 하는거야! 우리집을 어떻게 보길래 그런 이야기를 서슴 없이해? 오빤 우리집이 만만하고 쉬워?” “무슨 만만해? 너는 그럼 우리집이 만만한 갑다? 그러니 1억정도는 그냥 받아도 되는 그런 만만한 집이라고 생각하는 가보다? 니 논리대로면 넌 우리집이 만만한거네.” “남자가 무슨 말꼬리를 그렇게 잡아? 오빤 나랑 진짜 왜 결혼하려고 해? 몰라 나 집에갈레!” 휙~딸랑딸랑딸랑랑랑랑랑 수희가 문을 거칠게 열고 가버렸다. 석훈도 생각이 많아졌는지 수희를 뒤따라 쫒아가지 않았다. 석훈은 조용히 컵과 자리를 정리하고 난 뒤 문을 열고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한 석훈은 ‘수희야 미안해’하고 짧게 문자를 남겨 놓았다.

  몇 일 뒤, 따르르르릉 전화벨이 울린다. ‘장모님’ 글자가 눈에 보인다. 석훈은 휴대폰을 들고 조용히 비상계단으로 나가 걸터앉았다. “네 장모님, 어쩐 일로 전화하셨어요? 제가 요새 좀 연락이 뜸했죠? 죄송합니다.” 전화기 넘어 목소리가 독이 오른 땡초 마냥 맵다. “박서방 이러긴가? 어떻게 이제 곧 결혼하는 새 신부 눈에서 눈물이 나게 하나? 남의 집 귀한 딸 데려가면서 무슨 짓인가!” “죄송합니다. 장모님” “사돈댁이랑 이야기해보니까 사돈댁도 아예 도움 못주실 상황은 아니더만, 왜 자네만 사돈댁에 도움 안 받겠다고 해서 우리 수희 눈물을 흘리게 만들어! 다른 집들 보면 신랑집에서 집 한 채씩 턱턱 해주던데! 대단한 집에 시집가는 것도 아니고 거기서 끼리끼리 형편 비슷한 집안들끼리 만나서 하는 결혼에 우리가 이렇게 없이 대접받아야 겠나? 어?” 석훈은 가슴 속 깊은 어딘가에서 붉은 무엇인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부모님이 걱정하실까봐 이야기 하지 않았는데, 당사자도 아닌 3자가 자신의 부모에게 이야기 했다는 것에 너무 화가 났다. 또 당황하셨을 부모님과 또 죄송하다고 했을 부모님을 생각하니 너무 화가 났다. “장모님, 방금 저희 부모님이랑 통화 하신겁니까? 저도 이야기 안 했는데 저랑 통화하기 전에 저희 부모님이랑 통화 하신겁니까? 그리고 저한테 하시듯 남의 집 귀한 딸 데려가서면서 무슨 경우냐고 따지신겁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가?” 석훈이 말을 끊으며“네, 중요합니다. 장모님한테는 딸 데려가면서 울게 만드는 파렴치한 집안일지 몰라도 저에게는 저랑 동생을 위해 많은 걸 희생하신 존경스러운 분입니다. 지금 이 부분은 기분이 많이 좋진 않습니다.” “자네 나를 얼마나 만만하게 봤으면 이렇게 말대꾸를 따박따박 하는 건가? 내가 만만하고 쉬운가?” “장모님도 저희 집 자체가 만만하고 쉬우신가 봅니다. 전화 끊겠습니다.” 뚝. 석훈은 너무 화가 났다. 왜 이렇게 나와 내 가족이 무시를 당해야 하는가... 본인들은 귀한 딸이고 나는 귀하지 않은 아들인가? 왜 결혼하는데 신부집에 신랑집이 죄의식을 가지고 모든 요구를 다 들어주는 것이 당연한 건지... 석훈은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퇴근 시간 ,석훈은 수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르 띡 “왜, 할말 있어?”수희가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오늘 점심 쯤, 장모님 전화 오셨어.” “알아, 엄마가 전화했다더라. 근데 오빠 마음대로 전화 끊었다며? 어떻게 우리 엄마한테” 석훈이 수희의 말을 끊으며 담담하게 말을 했다. “수희야, 우리 결혼 다시 생각해보자. 화가 나서 순간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야. 오늘 점심 때 부터 계속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자.” 수희는 석훈이 이렇게 나올지 몰랐다. 자신의 말이라면 껌벅 죽던 석훈이 자신에게 이렇게 단호하게 나올지 몰랐다. 수희는 굉장히 당황했다. “아니 오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파혼하자는 거야?” “파혼인가? 약혼식도 안 했는데... 파혼이라면 파혼이지...생각할 시간을 가지든 파혼을 하는 거든 결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자는 말이야.” 수희는 아무 말 없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석훈이 말을 이어나갔다. “네가 장모님께 어떻게 말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장모님이 나한테, 우리 부모님한테 한 행동이나 말이 결혼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더라. 더 할 말 있어?” 수희가 마지막으로 발악이라도 하는 듯 석훈에게 쏘아 붙였다.“내 인생 어떻게 책임질거야? 결혼하면 그만둔다고 회사에 사표도 미리 내놨는데 어떡할거야!!!” 석훈이 수희의 단말마를 단호하게 잘라내었다. “내가 사표 내라고 한 적 없는데” 검은 침묵이 이어졌다. “그럼 끊는다.” 뚝! 뚜뚜뚜 석훈의 눈 앞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바래어 회색빛이 나는 아스팔트 도로가 오늘따라 어둡게 보인다.

  띠.띠.띠.띠 다음날 아침, 석훈의 힘든 아침을 알리는 소리가 귀에 울려 퍼진다. 밖에서는 출근준비를 하는 분주한 소리가 들린다. 석훈은 집에 이야기 하지 못했다.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아침햇살은 석훈의 마음과 대조되게 너무도 밝다. 노란 아침햇살이 방안을 밝히는데 석훈의 마음은 암막커튼이라도 쳐있는 듯 어둡다. 석훈은 조용히 밖을 나간다. 출근 준비를 하고 적막히 출근을 했다. 점심시간이 돼었지만 배가 고프지 않았다. 석훈은 동료들에게는 점심식사 맛있게 하라고 하고는 차에 들어와 앉았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화면에 ‘어머니’ 세글자가 띠워져있다. “어, 아들 왜? 점심은?” “아 먹었어요. 오늘 일찍 먹었어요. 식사는요?” 희숙도 몇일 전 일 때문에 입맛이 없는 건 마찬가지 였다. “먹어야지, 그런데 왜 전화했어?” “다른 게 아니라, 장모님이랑 통화하신 거 다 알아요.” 희숙이 뜨끔했다. 또 현석이 알고있단 사실에 마음이 않좋았다. “아, 왜 또 너한테 전화해서 이야기 하던?” 현석이 최대한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많이 당황하셨죠? 따지시듯 이야기 하셨을 텐데...” “뭐 당황은 했는데... 사돈댁이 좀... 할말은 했으니 일방적으로 당했다곤 못하고...이해도 되고...아 그리고 니네 아빠는 몰라 이야기 안 했어.” “안 좋은 말 많이 들으셨어요?” 희숙은 고민스러웠지만 그래도 당사자들인데 알아야겠지 하고 통화했던 내용을 이야기 했다. 석훈도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수희한테 어제 결혼 다시 생각해 보자고 이야기 했어요.” 희숙이 갑작스레 놀라 언성이 높아졌다. “응?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결혼 준비하면서 이것저것 부딪쳤던 것도 많고, 내가 알던 사람이 맞나 싶고, 결혼에 대한 자신감도 없어지고 그래서요... 꼭 결혼을 엎자는 게 아니라 생각할 시간을 가져보자고 했어요.” “으음... 아들 그런데 결혼준비 하다보면 이래저래 예민해지니까 부딪치고 하는 부분이 어쩔 수 없이 생긴다. 너네뿐만 아니라 다른 집들 봐도 다 그 정도는 갈등이 생기는 것 같더라. 또 결혼하면 결혼 전에 있었던 일들은 자연스럽게 아무 일도 아니게 되곤해, 이번엔 아들이 조금 경솔했던 것 같은데?” 석훈은 희숙이 자신의 편을 들지 않은 부분이 내심 서운했다. “네 알겠습니다. 점심 드셔야되는데 시간 길게 잡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도 이번에는 제가 먼저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그럼 점심 맛있게 드세요.” “그래 아들 저녁에 집에서 보자.” 뚝. 무거운 전화가 끝이 났다. 석훈은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핸들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퇴근시간이 다 되어가는 오후5시 반 전화벨이 울린다. ‘장인어른’ 네 글자가 눈에 보인다. 후~ 석훈이 쉼 호흡을 하고 전화를 받는다. “퇴근하나?” “네 장인어른...” “수희랑 집사람한테 이야기 들었네, 얼굴보고 이야기 좀 했으면 하네만” “...” 석훈은 직접 얼굴 보고 이야기 하는 것은 너무 불편했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전화로만 이야기하고 말씀드리기에는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네 퇴근하면 댁으로 들리겠습니다.” “알겠네. 고맙네. 그럼 조금 있다 보세” “네” 뚜-뚜-뚜-

  오후 6시 퇴근시간이 되었다. 석훈은 차에 올라타 시동을 켜고 전화를 한 통걸었다. ‘어머니’전화화면상의 세글자... 띡. “어 아들 퇴근 중 이야?” “네 저 그런데 저녁 먹고 들어갈게요.”

 예감이 이상한 희숙은 평소에는 묻질 않지만 석훈을 괜히 추궁해봤다. “누구랑 저녁 먹니?” 석훈도 왠지 거짓말하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생기는 것 같아 사실대로 이야기하기로 하기로 했다. “장인어른댁에 가기로 했어요. 얼굴 보고 이야기하는 게 맞는 것 같아서요. 그게 예의기도 하구요.” 희숙이 역시 라고 생각했다. “아들 너무 단정 짓고 생각하지 말고 이야기로 잘 풀 수 있는 부분은 잘 풀고 와.” 희숙의 말에 석훈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저녁에 들어가서 말씀드릴게요. 전화 끊어요.” 뚝! 저무는 해의 노을 아래 아스팔트길에 고민을 담은 배가 한 척 고요히 목적지로 달리고 있었다.

  검은 철 대문 앞에선 석훈은 초인종을 누른다. 문 앞 석훈의 손에는 과일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평소에 희숙이 어디 다닐 때는 빈손으로 다니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 왔다. 띵똥! “누구세요?” 낯 익은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열린 현관에는 수희가 한발로 딛고 한손으로 문을 열고 밀어 마치 발레하는 모습 같았다. 수희는 석훈의 모습에 또 석훈의 손에 들려진 과일바구니에 자신에게 사과를 하러 온 줄 알고 착각했다. 수희는 괜히 한번 튕겨본다.“오빠가 왠 일이야? 전화한통이라도 주고 와야지 이런거 사오면 내가 용서라도 해줄 줄 알아?” “너 때문에 온 거 아니야. 아 너 때문에 온 거 맞나? 장인어른이 오라고 하셔서 온 거야.” 석훈의 말은 차가웠고, 수희의 낯은 뜨거웠다. 그때 장인어른이 현관에 나와 “자네 왔나?” “네... 빈 손으로 오기 그래서 과일이라도 사들고 왔습니다.” “그래 들어오게. 저녁은 먹었나?” “아뇨, 바로 오느라 못 먹었습니다.”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 합세.” 석훈은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했다. 식사를 하고 네 사람은 석훈이 사온 과일을 깎아 거실에 앉았다. 영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초지정은 어느 정도 들었네... 수희가 아무리 철딱서니 없이 굴었다고 했다만... 그렇다고 청첩장도 다 돌렸는데 결혼을 다시 생각하자고 하나!” “수희가 어떤 말을 했는지 정확히 들으셨습니까?” “아파트 사는데 자네 부모님한테 도움 받아서 더 좋은데로 가자고 했다고 들었네... 집 구하는데 돈 한푼 안 보태는 우리로서는 할 말이 없네만... 그래도 잘 달래서 진행 할 생각을 해야지 결혼을 엎자고 하는가! 좀 이번엔 자네도 경솔했던 거 같네!”

 “네 형편에 맞추어 하자는 제 말은 무시하고, 자기 채면 때문에 무리하자고 하더라구요. 그럼 장모님이 저한테 하신 이야기는 들으셨습니까?” “응? 그건 무슨 소린가?” “수희엄마가 자네 한테 뭐라고 했는가?” 명자의 얼굴이 굳어진다. 명자가 당황한 듯 횡설수설하며 이야기의 주도권을 뺐으려 들었다. “아니 내가 뭐라고 하기는 뭐라 해 우리 수희 왜 섭섭하게 하냐고 좀 타박했지! 우리 수희한테 잘하라고 엄마로서 그런 말도 못 하나?” 뻔히 보이는 명자의 의도를 알아차린 석훈의 인상이 구겨졌다. “장모님께서 직접 말씀 안 하시니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어머니께 전화하셔서 아들 결혼하는데 돈 한 푼 안 쓰냐고 자기 딸 거저 데려가냐고 무슨 대우가 그러시냐고, 경우가 없다면서 따지셨다고 했습니다. 제가 이야기 드리기도 전이었는데 저희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런 수모를 당하셨습니다. 장인어른 댁에서는 저희 부모님이 귀한 딸 훔쳐가면서 울리는 파렴치한일지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어릴 때부터 저희 건사하시느라 힘들게 일하신 존경스러운 분이십니다. 아직도 자식들한테 짐이 될까, 일을 놓지 않고 계시구요. 솔직히 수희랑의 일은 여차저차 맞추어가며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장모님과의 일이 결혼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부분에 대해 결정적이었습니다.” 영배는 수희 엄마의 일은 또 몰랐고, 지금 이 내용이 너무 당황스럽고 또 석훈을 볼 면목이 없었다. 자신 같아도 부모를 그렇게 취급했다고 하면 충분히 정이 떨어질 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미안하네... 안사람이 그랬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네...” 석훈이 내친김에 다 말씀드리자 싶어 입을 땐다. “또 지금 계약한 집은 제 직장에서 가깝습니다. 수희도 결혼하면 직장 그만두고 집에서 살림한다고 이미 사직서도 제출한 것으로 알고 있구요. 수희가 꼭 중심가에서 살아야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영배는 당황스러웠다. 수희 말만 들었고 딸년이라는 년은 자기 잘못한 것은 쏙 빼고 이야기했다. 오죽하면 딸년이 사직서를 낸 것도 방금 알게 된 것이다. 오늘 석훈의 경솔함을 어른으로서 혼낼 생각이었는데 석훈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오히려 사돈댁에 사죄해야할 판이었다. 영배는 이제껏 봐왔던 석훈이 쉽게 그런 결정을 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그런 결정을 했을까? 생각보다 본인이 오히려 경솔하게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딸을 결혼시킬 나이가 됐음에도 아직 멀었구나.’하고 반성하게 됐다. “내가 진짜 미안하네... 딸자식을 잘못 가르치고 안사람 단속을 잘못했네. 그래도 청첩장도 다 돌렸고 결혼식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결혼을 물리는 것은 좀 다시 생각해주게. 내가 책임지고 사돈어른들에게는 다 사과하겠네. 두 번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네.” “아버지는 지금까지 일들 모르고 계십니다. 어머니가 그 수모를 당하셨음에도 혹시 일이 커지실까봐 말씀 안 드렸다고 하더라구요. 또 여기 온다니까 어머니가 그러시더라구요. 결혼 준비 하다보면 예민해져서 그럴 수 있다고 오늘 말로 풀 수 있는 건 잘 풀어보라고 하시더라구요. 저한테 하셨던 말은 몰라도 어머니께 사과는 꼭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영배는 희숙의 마음 씀씀이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자기 부인은 석훈이 말도 안 끝났는데 먼저 전화 끊었다고 길길이 날뛰면서 자기한테 부풀려서 욕을 했는데, 안사돈은 그 수모를 당하고도 일이 커질까봐 혼자 감내했다는 사실에 더 부끄러워졌다. 그때 명자가 입을 때며 “자네도 잘한 건 없지 않나? 장모 말도 안 끝났는데 전화를 끊어버리고 내 입장에서 얼마나 황당했는지 아나?” 말을 듣던 석훈은 인상을 찌뿌렸다, 금새 표정관리를 했다. 그 찰나의 찡그림을 본 영배는 얼른 명자에게 소리치며 다그쳤다. “당신! 지금 수희인생 망칠려고 수 쓰는거야? 사람이 염치가 있으면 잘못한 걸 알고 잠자코 있어야지 사돈댁보고 경우가 없다고 했다더니 당신이 경우가 없네! 지금 결혼 파토나면 당신 탓인지 알어!” 영배는 일부러 석훈이 보라고 호통을 친 것도 있었다. 석훈은 영배가 호통치고 소리치는 모습에 마음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수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자신이 엄마에게 한 말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됐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석훈에게 사과했다. “오빠, 내가 미안, 내가 생각이 짧았던 것 같아...” 사과는 했지만 수희는 반성은 한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회사에 사직서도 벌써 제출했고 나이도 차서 석훈이 아니면 결혼하기 힘들 것이 란걸 알기 때문에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사과였다. 수희는 결혼 전까지 일단 지고 들어가기로 했다. 이미 계산이 끝난 행동일 뿐이었다. “먼저 외각 아파트에 간 다음 차차 늘려가면 되지 뭐... 좋게 생각할께!” 수희가 지고 들어오자 석훈도 마음이 바뀌었다. 어찌 됐건 청첩장도 다 돌렸고, 지금 결혼을 물리기엔 부담도 크다. 또 결혼 전에 한 번 크게 액땜했다고 생각하면 나쁠 건 없었다. “그래 나도 순간 홧김에 그랬던 것 같아 수희 네가 내 의견을 존중해줘서 너무 고맙다. 우리 다시 힘내서 잘 해보자.” “오빠, 사랑해.” 석훈이 일어나 90도로 숙여 사과했다. “장인어른, 장모님 걱정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이러게 산을 넘겼으니 앞으로 더 잘 살지 않겠습니까.” 영배는 석훈의 너스레에 맞장구쳤다. “그래 자네 말이 맞네, 더 잘살려고 오늘 같은 일이 있었던 게야. 우리 부족한 딸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아닙니다. 부족한 저에게 귀한 딸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배과 석훈의 덕담에 분위기는 훈훈해졌다. 하지만 명자는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있었다. 명자는 남편이라는 놈은 자기편을 안 들고 오히려 나무라고 소리치고 내심 서러웠다. 석훈도 아직 명자에게는 화가 풀리지 않았고 더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럼 늦었으니 가보겠습니다. 저희 어머니도 기다리실 거 같아서요.” “그래, 사돈댁 기다리면 안 되지! 알겠네. 멀리 나가지 않겠네~” “네 그럼 가보겠습니다.” 석훈은 인사를 마치고 나왔다. 수희도 배웅하기 위해 따라 나왔다. “수희야 우리 진짜 더 잘살자!” “응, 오빠 그런데 나 그 아파트 들어가면 애는 좀 뒤에 가질거야. 우리애기 한테는 뭐든 최고로 주고 싶거든 환경이 더 나아지면 가지자.” “응? 나는 우리 2세 빨리 보고 싶은데” “생각은 해볼게” 석훈은 수희의 입술에 화해와 작별의 뽀뽀를 하고 차에 올라탔다. 올 때는 무겁기만 했던 차바퀴가 집으로 가는 길엔 경쾌하게 움직였다.

  띠띠띠띡 철컥 “어머니 저 왔어요.” “응~저녁은?” “아버지는요? 먹었는데 출출하네요.” “벌써 자러 들어가셨지. 라면이라도 끓여줘?” 덤프트럭을 운전하는 성식은 새벽녘에 나가기에 일찍 자러 들어가는 편이었다. “네, 짜장라면으로요.” “그래 씻고 나와” 씻고 나온 석훈은 식탁에 앉았다. 희숙도 석훈의 맞은편에 앉았다. 석훈은 정성스레 계란후라이까지 올라간 짜장라면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달려들었다. 이제야 입맛이 도는 듯하다. 후루룹 입안 가득 면발을 집어 넣고 우물우물 씹다가 희숙과 눈이 마주친다. “맛있어? 천천히 먹어.” 희숙이 물컵에 물을 따른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 석훈이 우물우물 대답을 한다. “다 좌알듯어여, 믁어 으아기해여” “응? 머라구?” 꿀꺽 “다 잘 끝났다구요, 먹고 이야기하자구 했어요.” 희숙은 안심하며 “그래그래 마저 먹어.” 짜장라면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석훈은 입 주변은 닦으며 조심스레 수희네 집에서의 일을 풀어놓았다. 이야기를 다 들은 희숙은 “다행이네, 바깥사돈이 그래도 상식적인 분이시네. 너네 아버지한텐 내가 나중에 천천히 상황봐서 이야기할게 넌 신경씨지 말고 결혼 준비나 잘하렴. 혹시 돈 필요하면 이야기해 최대한 만들 수 있는 만큼은 만들어볼게.” “네” 대화가 끝나고 석훈은 설거지를 하고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며칠 만에 가벼운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같은 시간 수희네 안방에서 영배가 잠자리에 누워 명자쪽으로 몸을 돌렸다. “수희가 딴 건 몰라도 남편 복이랑 시어머니 복은 있는 것 같네.” 아직 영배에게 삐져있는 명자가 자연스레 영배에게서 등을 돌렸다. “복은 무슨 대단한 집안도 아니면서 유세나 떨고 우리 수희가 이런 취급으면서 결혼해야 되나 모르겠네.” “이보게 수희 나이가 이제 30줄이야 그렇다고 변변한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남자 보는 눈은 있어서 다행이지. 우리 사위 봐봐 번듯한 직장있어. 인물 좋아. 사람 됨됨이도 좋고 거기다 사돈총각도 자기 밥벌이하고 수희네한테 손 벌일 일 없을 거고 사돈총각이 이번에 혼수품 중에 수희 명품백도 사줬잖나. 우리도 받은 만큼 해야되는데 그냥 예단만 받고 말았지 않나.” “우리 딸 데려가면서 그 정도도 안 하면 사람인가?” “어휴... 됐다. 내일 잔말 말고 안사돈한테 전화해서 죄송했다고 경우가 아니었다고 사과해!” 명자가 바라락 화를 내면서 영배에게 소리쳤다. “오늘 사과했으면 됐지 뭘 또 전화를 해!” “언제 사과했어, 그냥 뚱하게 똥 씹은 표정으로 있었지.” “아니 사위놈도 웃긴게, 그래도 내가 장모인데 괜찮다는 말 한마디 안 했잖아! 나한테 그렇게 무례하게 행동했으면서!” 명자의 말에 영배가 벌떡 일어나 답답한지 가슴을 쳐댔다. “어휴! 어휴! 어휴! 어른이면 어른답게 행동해 같잖은 유세 떨지말고! 당신은 어째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더하냐! 됐고 내일 사돈댁에 전화 안 하면 나랑 같이 살 생각하지마! 수희를 봐서라도 좀 해라! 나중에 이것 땜에 수희가 시집살이하면 어쩌려고 그러니! 제발 좀!” 명자도 수희를 생각하니 걱정이 되는 듯했다. “알겠어 내가 전화해서 잘못했다고 싹싹 빌게! 됐니 됐어!” 수희네의 밤도 그렇게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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