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아까 왜 엘리야 선배가 저한테 마음을 연 것 같다고 했을 때 놀라신 거죠? 혹시 엘리야 선배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 말을 들은 비비안은 고민에 빠진 얼굴로 술을 마셨다. 키리안은 비비안이 자신에게 어떤 말이든 꺼내길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비비안이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
“그게 키리안, 엘리야에게는…….”
이때였다. 누군가 비비안을 큰 목소리로 불렀다.
“비비안 님!”
비비안과 키리안은 쭈뼛거리며 자신들에게 가까이 오는 악마를 바라보았다. 비비안은 그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엠! 여긴 무슨 일이에요?”
엠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하고선 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 비비안을 구원자라도 되는 듯이 올려다보는 그의 보랏빛 눈망울이 애처롭게 반짝였다.
엠이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 간 비비안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그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엠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왜 대천사 가브리엘 님과 파트너가 되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가서요.”
그 말을 듣자마자 키리안은 자신 앞에 있는 이의 이름을 알 것만 같았다.
엠.
가브리엘 천사님이 직접 지목한 파트너.
그는 지금 자신이 천사 진영과 악마 진영 두 곳에서 얼마나 유명한 존재인지 모를 것이었다. 가브리엘 님이 갑자기 현역으로 활동하겠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가 지목한 파트너가 새파란 신입이라니. 이 뉴스는 모두가 떠들어대지 않고는 못 배길 소재거리일 수밖에 없었다.
키리안은 자신 옆에선 엠을 천천히 관찰했다. 은빛 머리칼을 가진 엠은 평생 누군가를 미워해 본 적이 없을 것 같은 선한 인상을 주었다. 그래서 키리안은 그를 언뜻 봤을 때 천사인 줄 착각했다.
투명하게 빛나는 은발과 보랏빛 커다란 눈을 가진 엠을 보며 키리안은 신화에 등장하는, 신이 사랑하는 소년이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엠을 유심히 관찰하던 키리안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맞아. 비비안 선배님과 느낌이 뭔가 닮았어.’
둘이 얼굴은 사실 전혀 다르게 생겼는데, 분위기가 비슷했다. 둘 다 상대에게 친절하면서 맑은 표정을 지녀서 그런 걸까. 나란히 선 둘은 키리안의 눈에는 오누이처럼도 보였다. 비비안은 엠의 기가 죽은 얼굴을 보고 술을 한잔 더 시켰다. 엠을 자신의 옆자리로 앉힌 비비안이 말했다.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죠? 가브리엘 님이 정한 일이라 이건 제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어요.”
비비안이 주문한 술잔이 나왔고, 그녀가 엠 쪽으로 술잔을 밀어주며 말했다.
“제 경험상, 이럴 땐 술을 마시는 게 답이에요.”
*
"운명은 개뿔!“
술을 본격적으로 마신 지 30분이 채 안 되었을 때였다. 술에 취한 엠은 울분을 토해내며 잔을 식탁 위에 내리꽂았다. 엠의 창백했던 피부는 본래의 색을 잃고 지금은 온통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완전히 만취한 엠을 보고 비비안과 키리안은 눈을 마주쳤다.
‘쟤를 어떻게 숙소에 데려다주지…?’
엠은 둘이 그런 고민을 하는 줄도 모르고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가브리엘 천사님이 얼마나 깐깐하고 엄격했는지 알아요? 싱글싱글 웃으면서 말하는데 말엔 서리가 껴있다고요! 그게 더 무서워!”
엠은 자신의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보나 마나 앞으로 실적이 왕창 깎일 게 분명해요. 악마 사원으로서 처음 출근한 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다녀요!”
키리안은 그 말을 들으며 엠에게 측은한 마음을 품었다. 이때 비비안이 말했다.
“흐음- 아니에요. 의외의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럴 리 없어요! 그건 비비안 님이 가브리엘 님의 재수 없는 독설을 못 들어봐서 그래요.”
이때 비비안의 대답을 대신한 건 낯선 이의 목소리였다.
“되게 웃기는 상황이네.”
빈정거림이 묻어 나오는 말투에 키리안과 엠은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붉은 기가 도는 금발을 가진 남성이 한쪽 입꼬리만 올린 채 웃고 있었다. 키리안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집중시킬 정도로 그의 미모가 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가 술을 조금씩 마시는 모습을 몇몇 천사가 주변에서 힐끔거리며 응시하고 있었다.
긴 머리칼을 틀어 올린 자태가 고우면서도 남성적인 선이 살아있어 남성 여성 모두 그의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주목했다. 엠이 그런 그에게 도전적인 말투로 말했다.
“뭐가 웃기다는 거죠?”
그 말을 들은 적금발의 사내가 거침없이 키리안 일행 쪽으로 다가왔다. 그걸 본 엠은 술이 깬 듯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비비안만이 무표정으로 가까이 온 적금발 남성을 바라봤다. 그는 엠의 눈높이에 맞춰 허리를 숙인 뒤 매혹적으로 미소 지은 뒤 말했다.
“네가 나랑 뜻이 통한다는 게 웃기다는 거야. 무려 ‘네가’ 그 가브리엘을 재수 없다고 생각하니 말이야.”
당황한 엠은 자신이 마시고 있던 칵테일 잔을 팔꿈치로 건드렸다. 칵테일이 테이블에서 벗어나 아래로 추락했다. 유리잔이 바닥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나는 소리가 들릴 거라 예상한 엠이 황급히 아래를 보았다.
그러나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엠은 자신의 옆에 유리잔이 누군가의 손에서부터 테이블로 멀쩡하게 놓이는 걸 바라보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거기엔 가브리엘이 서 있었다. 유리잔을 탁 소리 나게 테이블에 둔 가브리엘이, 적금발 머리의 남성에게 미소 지으며 질문했다.
“레비. 누가 재수가 없어?”
쳇- 가브리엘의 등장에 적금발의 남성은 툴툴거리며 허리를 폈다. 가브리엘은 눈은 웃지 않은 채로, 미소를 지으면서 남성 앞에 섰다.
그리곤 곧장 레비의 멱살을 잡았다. 레비는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가브리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가브리엘, 너 같은 대천사가 여기에도 와?”
“나라고 여기 오지 말라는 법 있나? 나는, 7대 악마 중 하나인 네가 여기에 온다는 거가 더 놀랍던데.”
‘7대 악마’라는 말을 듣자마자 키리안은 비비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비비안은 그런 키리안과 눈이 마주치자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었다. 가브리엘이 계속해서 말했다.
“평상시에 평사원 행세를 한 채 회사에 다니든 네 속셈은 모르겠지만. 계약 때문에 모르는 척하고 있었어. 근데 내 파트너한테 시비 거는 건 아니지.”
가브리엘에게 멱살이 잡힌 채 그는 엠을 곁눈질하더니 이죽거리며 말했다.
“난 단지 웃기다고 생각했을 뿐이라고. 저 아이가-”
거기까지 말한 레비가 양 손가락을 소리 나게 튕겼다. 그러자 검은 회오리바람이 빠르게 그의 몸 전체를 훑고 지나갔다. 검은 안개가 다 빠지고 나자, 레비는 완벽하게 엠의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엠의 보라색 눈과 눈이 마주친 가브리엘은 흠칫 놀라며 그의 멱살을 풀었다. 그걸 본 레비가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그는 엠의 얼굴을 한 채로 광기에 찬 눈을 빛내며 가브리엘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가브리엘 님이 재수 없는 독설을 한다고 푸념하기에-”
그만.
……!
가브리엘이 짧게 말했을 뿐인데도, 엠을 포함한 그곳에 있는 모든 악마가 몸이 짓눌리는 듯한 엄청난 중압감에 허리를 숙여야 했다. 악마 중에 유일하게 레비만이 허리를 굽히지 않은 채 꼿꼿하게 서 있었다. 하지만 그의 손등에 핏줄이 솟아올라 올 정도로 주먹을 쥔 손이 떨려왔다.
‘권능’은 신이 ‘천사’에게만 부여한 특별한 힘이었다. 천사는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 악마에게 고통을 줄 수 있었다. 천사가 ‘권능’을 발휘하면 악마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가 무겁게 자신을 짓누르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되었다.
몇몇 천사들이 악마를 깔보는 이유도, 자신들이 권능을 지녀서이기도 했다. 그들은 신이 자신들에게 권능을 부여했으니, 천사가 악마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직위가 높은 천사일수록 그가 행하는 ‘권능’의 위력은 자연히 강했다. 키리안은 가브리엘이 발휘하는 이 정도의 ‘권능’에 저 남자가 두 발로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놀라 했다.
처음 느껴보는 고통에 테이블을 겨우 잡고 있는 엠의 두 팔이 덜덜 떨려왔다. 그걸 본 가브리엘은 슬그머니 ‘권능’을 거두었다. 가브리엘이 이를 악물고 남성에게 말했다.
“당장 변신술 풀어.”
“악취미네……. 이 얼굴을 하고 있는데도 ‘권능’을 쓴단 말이야?”
엠의 얼굴을 한 남성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장난스럽게 으쓱해 보였다. 레비가 두 손가락을 튕기자 그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가브리엘이 분노로 두 눈을 시퍼렇게 뜨며 그에게 경고했다.
“여기서 더 지껄이면, 레비아탄 너는 한동안 두 발로 서서 걸어 다닐 수 없을 거다.”
가브리엘은 코웃음 치는 레비를 뒤로하고 엠에게로 다가왔다. 엠은 가브리엘이 미소를 짓는 걸 보고 오싹함을 느껴야 했다. 그의 감으로는 가브리엘이 이런 상황에 웃는 것은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일찍 퇴근 시켜주었더니, 이런 곳에서 시간이나 때우고 있고. 퇴근해서 여기에 올 기력이 있었나 보군요. 참고하겠습니다. 내일 출근해서 봅시다.”
키리안과 비비안은 둘 사이에 껴서 눈만 도르륵 굴리며 눈치를 보았다. 엠은 자신은 이제 완전히 망했구나 생각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순간 자신 앞에 뻗어 있는 가브리엘의 손이 보였다. 엠이 고개를 들자 오히려 가브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지금 당신 많이 취했잖습니까. 숙소까지 데려다준다고요.”
“네?”
엠이 마저 놀래기도 전에 가브리엘은 엠의 한쪽 손을 잡아 다리가 높은 의자에서 내려오게 했다. 무려 대천사님이 악마 사원에게 친절을 베푸는 걸 보고 그곳에 있는 천사와 악마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반응에도 가브리엘은 어떤 동요도 없이 엠을 부축했다. 말이 부축이지 상대적으로 체격이 작은 엠이 가브리엘에게 거의 안겨있는 폼이었다.
일종의 에스코트를 받은 엠의 두 뺨은 다시 붉어져 있었다. 키리안은 그들이 바를 나서자마자 아까 레비가 있던 자리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 자리에 원래 없었던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졌다.
키리안이 다급한 얼굴로 비비안에게 물었다.
“방금 저 악마가 바로 그 7대…….”
“그래, 맞아. 7대 악마는 변신술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으니까.”
“혹시 저 악마가 그 악마인가요? 일반 악마 사원 행세를 하면서 다니고 있다는?”
비비안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 저 악마는 환술에 특히 능하거든. 그래서 주변 악마들에게 자신이 원래 여기에 다니고 있는 악마 사원이라고 자연스럽게 생각을 주입한 것 같아. 레비 주변의 악마들은 아무렇지 않게 원래부터 레비를 일했던 동료처럼 대하더라고,”
여기까지 말한 비비안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키리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비비안이 진지한 표정을 하고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전부터 신경 쓰였던 일인데. 저 7대 악마가 평사원으로 위장한 뒤로 가까이 지내고 있는 악마가 있어. 그게 누군지 알아?”
“누구인데요?”
“……내가 봤을 땐, 엘리야야.”
술을 마시고 있던 키리안이 그 말을 듣고 사레에 걸려서 기침을 쏟아냈다. 비비안은 당황하지 않고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냅킨을 키리안에게 건넸다. 키리안이 입가를 냅킨으로 닦으면서 비비안에게 물었다.
“왜 엘리야 선배님이 저런 악마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