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환생한 헬레네의 전담 천사를 알고 있다면 어떡할래?”
레비의 말을 들은 엘리야의 두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엘리야는 레비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외쳤다.
“당연히 나한테 알려줘야지! …그게 누군데?”
레비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그가 팔짱을 끼더니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거 알아? 대천사 천사·악마 중재팀 팀장 비비안 말이야. 원래 인간 업무 담당이 아닌데. 이번에 급하게 임시로 인간을 배정받은 거. 근데 그 인간이 헬레네라는 소문이 은근하게 돌더라.”
헬레네의 담당 천사와 악마가 누구인지는 조금도 말이 돌지 않던 상황이었다. 고급 정보에 엘리야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걸 본 레비가 고개를 좀 더 숙여 엘리야에게 속삭였다.
“비비안이 헬레네의 전담 천사가 맞다면, 헬레네 조회는 당연히 할 수 있을 거야. 그녀에게 조회를 부탁해 봐. 분명 소득이 있을걸.”
그 말을 들은 그녀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엘리야가 중얼거렸다.
“그분은 높은 직위의 천사신데 악마인 내 부탁을 들어줄 리가…….”
그 말에 계속 웃는 얼굴이던 레비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그는 팔짱을 끼더니 노골적으로 빈정거리며 말했다.
“비비안은 '진짜' 천사 같기로 우리 악마들 사이에서도 유명하잖아. 부탁해보는 정도는 밑져야 본전이지.”
그는 한 손으로 엘리야의 뺨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말했다.
“환생한 헬레네가 업보를 심하게 치르고 있을까 봐 걱정이 많이 되었나 봐. 요즘 얼굴이 눈 뜨고 못 봐줄 정도로 초췌하잖아.”
엘리야가 레비의 손을 밀어내며 한숨을 쉬었다.
“네가 언제 그렇게 남의 일에 관심이 많았다고…. 아무튼 고급 정보는 고마워. 언젠가 꼭 보답할게.”
“나 그 말 기억해놓는다?”
레비가 빙글빙글 웃었고 엘리야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레비에게 볼 일이 다 끝난 엘리야는 자신의 업무실을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엘리야의 뒷모습을 보고 레비가 입꼬리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남’의 일이 아니라, 네 일이라서 관심이 있는 건데 말이지.”
*
엘리야는 비비안에게 어떻게 하면 헬레네의 조회를 부탁해볼 수 있을지 고민했다. 비비안이 레비의 말대로 보기 드문 악마들에게까지 상냥한 천사인 건 엘리야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비비안은 높은 직위에서 업무를 수행하는 만큼, 공과 사에 있어서 엄격했다. 엘리야가 단순히 부탁한다고 해서 비비안이 들어줄 일이 아니었다.
‘어, 근데 그러고 보니 키리안은 비비안 님이랑 술도 같이 마신 적 있다고 하지 않았나.’
키리안이 늦은 시간에 돌아왔던 밤이었다. 밖에 나갔다 오는 키리안을 거실에서 우연히 마주친 엘리야는 키리안에게 어딜 갔냐고 짧게 물었다. 이때 키리안은 비비안과 ‘Dei est risus(신의 웃음)’라는 이름의 바에서 같이 술을 마셨다고 말했다. 엘리야가 속으로 생각했다.
‘키리안은 천사고, 비비안 팀장님과 돈독해 보이잖아……. 악마인 나보다는 비비안 님이 키리안의 부탁을 더 잘 들어주시지 않을까.’
엘리야는 일단 먼저 키리안에게 부탁을 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엘리야는 회사 안에서 키리안과 마주쳐도 입이 도저히 떨어지지가 않았다. 엘리야가 키리안과 대화를 자연스럽게 하게 된 지는 불과 며칠밖에 되지 않았다. 난처해진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헤집었다. 그러던 그녀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한 장면이 있었다.
‘저녁 혹시 안 드셨으면…… 같이 먹지 않을래요?’
엘리야가 키리안과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그때 키리안은 엘리야에게 저녁을 같이 먹자고 요청했다. 엘리야는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장면을 되감으며 생각했다.
‘그때 나는 뭐라고 했었지?’
자신이 뭐라고 말했는지 떠올린 엘리야는 다시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억지로 너무 애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네 말대로 우리는 그저 공적인 관계니까, 서로 선만 잘 지키면 충분할 거야.’
‘내가 왜 그렇게까지 말했을까…….’
엘리야는 자신이 키리안과 같은 숙소에 함께 살면서도 아직까지 한 번도 같이 저녁을 먹은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엘리야는 메모장에 뭔가를 급히 적기 시작했다. 메모장에 빼곡히 주로 적힌 내용은 양파, 당근, 닭고기 등 식재료였다.
실력파인 엘리야는 이날 평상시보다 더 업무를 빠르게 처리해, 키리안보다 무려 2시간이나 일찍 퇴근했다.
“와, 엘리야 선배 이게 뭐예요?”
퇴근을 하고 숙소에 도착한 키리안은 식탁 위를 보고 감탄을 내뱉었다. 키리안의 말을 들은 엘리야는 내심 뿌듯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 사이에 놓인 식탁 위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요리들이 푸짐하게 놓여 있었다. 엘리야가 열심히 요리하느라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
“우리가 한 번도 같이 제대로 식사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
그 말에 감동을 받은 표정을 지은 키리안이 엘리야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허리를 약간 숙여 엘리야와 눈을 맞췄다. 엘리야는 여전히 볼을 붉게 물든 채로 키리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키리안이 정장 포켓에서 손수건을 꺼내 엘리야의 이마에 맺혀 있는 땀방울을 닦아주었다. 묘한 정적이 둘 사이에 찾아왔다.
“…….”
둘의 시선이 제대로 마주치는 순간, 둘은 동시에 고개를 서로 반대 방향으로 홱 돌렸다. 엘리야가 말했다.
“이, 일단 먹어볼까?”
키리안도 엘리야로부터 시선을 피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말했다.
“네 좋아요! 엘리야 선배, 요리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자리에 앉으며 키리안은 식탁 위에 놓인 요리들을 눈으로 훑었다. 옥수수 빛깔의 수프와 구워진 닭요리가 노릇노릇 김을 풍기고 있었다. 토마토가 종종 썰려져 함께 버무려진 샐러드는 싱싱해 보였다. 키리안은 미소를 지으며 수프를 한 입 떠서 먹어보았다.
‘?!’
수프의 맛을 본 키리안은 본능적으로 얼굴을 찡그리려다가 이성을 붙잡고 앞을 바라보았다. 키리안의 바로 앞에는 기대에 찬 눈을 반짝이는 엘리야가 있었다.
키리안은 항상 무표정을 하던 엘리야가 저렇게 생기 있는 눈을 한 것을 이번에 처음 보았다. 키리안은 엘리야와 눈을 맞추며 양 입꼬리를 당겨 겨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이번엔 닭고기를 한 입 먹고서 생각했다.
‘이를 어쩐다……?’
엘리야는 키리안의 눈빛이 곤란한 빛을 띠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닭요리는 겉은 바삭했지만 속까지 완전히 익지 않아 흐물거렸고 간이 덜 되었는지 싱거웠다. 수프는 너무 짠 데다가 불 조절에 실패했는지 텁텁했다. 수프 안에 들어 있는 당근과 감자는 너무 잘게 썰어져 있었다.
“어때……? 괜찮아?”
엘리야의 목소리에 키리안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엘리야는 여전히 기대에 찬 눈빛으로 키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야의 반짝이는 두 호박 빛 눈을 본 키리안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선배! 너무 맛있어요.”
그 말을 듣자 엘리야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걸 본 키리안은 속으로 생각했다.
‘엘리야 선배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보네.’
키리안은 은은하게 기뻐하는 엘리야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키리안은 엘리야가 만든 요리들을 열심히 먹었다.
그걸 보면서 엘리야는 정작 자신은 쉽게 수저를 들지 못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키리안에게 어떻게 헬레네의 조회를 부탁할지 그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식사 내내 키리안의 눈치를 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저기, 키리안…….”
“네, 선배?”
“……어, 저기…… 그게….”
키리안은 엘리야가 먼저 말할 때까지 잠자코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하지만 엘리야는 결국 키리안에게 음식을 더 권하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아, 아니. 이 음식도 먹어봐…….”
“아…! 네네!”
키리안은 당황하는 기색이 드러나지 않게 노력하며 음식을 열심히 먹었다. 그녀는 키리안이 다 먹어갈 때가 되어서야 자신도 음식을 들었다. 자신이 만든 수프를 한 스푼 떠먹어본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른 요리들도 먹어보았다. 식탁 위 있는 음식들을 다 먹은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별로인 것 같은데?’
여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자신 앞에 있는 키리안을 바라보았다. 키리안은 자신 몫의 요리를 다 먹은 상태였다. 그걸 본 엘리야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숙소에서 같이 살게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저녁 같이 먹자고 말해준 것도 키리안이었지. 키리안은 왜 이렇게 나한테 잘해주는 걸까? 키리안이 전에는 악마들에겐 냉랭한 거로 유명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역시…… 헬퍼라서?
거기까지 생각한 엘리야의 얼굴이 약간 침울해졌다. 엘리야가 식사를 끝낸 걸 확인한 키리안이 식탁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걸 본 엘리야가 빨리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자 키리안이 말했다.
“선배 나머지 정리랑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선배가 요리해주셨으니까, 이건 제가 해야죠.”
“어? 응, 고마워…….”
그릇들을 설거지통에 넣던 키리안은 엘리야의 얼굴을 보곤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의 큰 손이 엘리야의 이마를 덮었다. 키리안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고선 말했다.
“선배 지금 안색이 조금 안 좋은데요. 요리하느라 너무 피곤하셨나요?”
그 순간 엘리야의 얼굴 전체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엘리야는 서둘러 몸을 뒤로 빼며 말했다.
“아, 아니야! 별로 그렇게 잘 한 것 같지도 않은데. 내 요리 맛있게 먹어줘서 고마워 키리안.”
키리안은 엘리야의 말에 잠시 고민하는 얼굴이 되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맛있었어요.”
“응?”
“엘리야 선배가 열심히 해준 건데, 맛없을 리가 없잖아요.”
그 말을 들은 엘리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렇게 다정하게 말하는 키리안의 얼굴 위로 그녀와 전에 파트너였던 천사, ‘라파엘’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라파엘이 엘리야에게 미소를 지었던 얼굴이 키리안 위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엘리야는 생각했다.
‘키리안은… 어떻게 이렇게 다정할 수가 있는 거지?’
말을 마친 키리안이 서둘러 등을 돌려 싱크대로 향했다. 엘리야는 뒤를 돈 키리안의 귓가가 붉게 물들여진 걸 바라보았다. 뭔가를 결심한 엘리야는 쿵, 쿵 소리를 내며 키리안에게로 거침없이 다가왔다. 키리안에게 가까이 선 엘리야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키리안.”
“네?”
“원래…… 모든 천사 동료들에게도 이렇게 잘 해줘?”
이렇게 말하는 엘리야의 두 뺨은 터질 듯이 붉었지만, 키리안을 향한 엘리야의 눈빛만큼은 진지했다. 키리안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그도 곧 차분한 얼굴로 엘리야를 바라보았다. 침묵의 시간이 지나고, 키리안이 엘리야에게 몇 발걸음 더 다가갔다. 엘리야만을 바라보던 키리안이 침묵을 깨고 키리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