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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
작가 : 성시우
작품등록일 : 2020.9.16

찰리 채플린이 인생을 한 문장으로 압축했던 바가 있더랬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너무나 멋진 이 역설을 셀로판지 삼아 다시 인생을 들여다 보면, 지난날 우리를 울리고 웃겼던 많은 일들이 사실은 모순 덩어리였음을 발견하고는 한다. 그것은 타이밍이라는 운명이 안배해 놓은 것일 수도 있고, 우연이라는 함정에 빠진 것일 수도 있고, 스스로의 미련함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상황의 역설을 마주한 순간 우리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것 아닐까?

이 이야기는 그 역설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누가 만들어 놓은 것이든지 간에 모든 인물들은 각자의 역설에 빠지고 각자 알아서 깨트린 유리조각에 다치다가 그 조각들이 시간을 거슬러 다시 맞춰지듯이 서로 연결된다. 그리고 모두가 맞물려 한 방향으로 나아가려 한다. 인생은 온갖 역설로 가득하다는 사실로.
여기에 나오는 가장 몸집이 큰 역설은 ‘사랑’이다. 물론 통속적이게도 3명의 남녀가 엮여 있다. 하지만 시간이 비껴 있다. 주요 배경은 25년 전인 1995년과 현재 2020년. 두 사건이 교차하며 진행된다. 한 여자는 사랑했지만 죽어버린 남자를 위해 살아있는 자신의 모든 걸 버리고, 한 여자는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죽은 남자를 이제 막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들은 모녀다. 그 다음으로 넘어가 보자. ‘집착’이다. 애초에 있지도 않던 가문의 뼈대와 대를 이어야 함에 우둔하게 집착해 자신의 핏줄을 잡아다 죽인 웬 머저리가 있다. 그리고 그 노쇠한 몸뚱이가 쇳소리를 토내며 마지막 숨을 몰아 쉴 때 귀띔으로 알게 된다. 그놈이 피붙이라는 것을. 애써 남긴 DNA를 스스로 절멸했으니 일종의 자기 거세이려나. 마지막으로 하나 더 뽑자면 ‘재미’다. 사실 태초의 큰 그림을 이미 파악한 자가 있었다. 그러나 추격자인 그는 덮을 건 덮고 파고 들 건 파고 들었다. 이유는 하나다. 이 기막힌 상항이 너무 흥미진진했다. 그래서 정성을 기울인 끝맺음을 잘 봤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자신의 머리 위에서 뛰어놀고 있던 운명인지 우연인지는 오랜 시간이 흘려 그가 짐작도 못한 곳에서 다시 꿈틀대고 있었다. 또 다른 추격자가 자신마저 찾아낸 것이다. 그 추격자와 마주한 순간 향수와 함께 희열이 다시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 신대철 시인의 시 제목이자 시집 제목이다. 이 이야기는 이 문장의 역설에 기대 시작하고 이를 확인하며 끝맺는다. 그리고 쌓아올린 역설을 딛고 새로운 시작의 단면까지, 할 수 있다면 포착하고자 한다.

 
1화 : 1989년 7월 14일
작성일 : 20-09-16 01:50     조회 : 330     추천 : 0     분량 : 8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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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년 7월 14일

 

 퀴퀴하고 어두운 골목길을 따라 낡은 다세대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소년은 그날 밤도 그 사이를 익숙하게 걷고 있었다.

 

 하얀 도복에 검은 띠를 손에 쥔 소년은, 앞 매무새를 풀어 헤친 채 띠를 뱅뱅 돌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세월을 오래 탄 주택들과 깨져 나간 가로등들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소년을 주시했다.

 

 이제 소년은 장미슈퍼를 끼고 왼쪽으로 돌아 소년의 집이 있는 더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소년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곳을 지킨 허름한 장미슈퍼도 빛 파랜 눈을 끔벅거리며 소년의 뒤를 쫓았다.

 

 소년은 초록색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져 녹이 쓴 철문을 밀고 한 다세대 주택으로 들어갔다.

 

 건물은 1층에 두 세대, 2층에 두 세대, 옥상에 옥탑방 하나가 있었다.

 

 가뜩이나 어두운 동네의 가장 후미진 곳이었고, 장미슈퍼까지 와서 굳이 안쪽을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아무도 모를 곳이었다.

 

 그에 걸맞게 계단에는 거미줄로 장식을 달고 수북한 먼지로 분칠까지 하고 있었다.

 

 소년은 늦은 밤이었지만 나이에 어울리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총총 뛰어 올라갔다.

 

 소년의 집은 이 다세대 주택의 2층, 안쪽 202호였다.

 

 계단을 올라 안쪽을 향해 몸을 돌리자 가로등 빛이 닿지 않는 칠흙같은 어둠이었지만 소년은 몸이 기억하듯 빠르게 짧고 좁은 복도를 해쳐 나갔다.

 

 동시에 군더더기 없는 연속동작으로 운동화 끈에 묶어 목에 걸고 있던 열쇠를 빼고 무심코 현관문 손잡이를 잡으려던는 순간,

 

 문이 닫혀 있지 않았다.

 

 문이 채 닫히지 않은 상태에서 잠금장치를 돌렸던지 튀어나온 잠금쇠 때문에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그리고,

 

 “깍! 이거 놔, 이새끼야!”

 

 찢어지는 비명소리, 엄마다.

 

 소년은 놀라 바로 집안으로 튀어 들어갔다.

 

 현관에는 커다란 남자 구두가 거칠게 벗겨져 나뒹굴고 있었다.

 

 “이년이! 너 지금 뭐라 그랬어? 뭐?”

 

 거실에서 한 남자가 엄마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마구 흔들고 있었다.

 

 워낙 좁은 집이었기에 거실과 부엌의 경계가 거의 없었고, 실상 부엌이라면 부엌, 거실이라면 거실이라 해도 좋을 공간이었다.

 

 남자는 건장했다. 적어도 180cm는 훌쩍 넘어 보이는 키에, 근육으로 다져진 커다란 어깨와 굵은 팔뚝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소년의 엄마는 작고 마른, 왜소한 여자였다.

 

 이미 그녀는 남자에게 한참을 얻어맞은 모양이었다.

 

 머리는 산발이었고 입술은 터져 피가 배어 나왔으며 한쪽 눈은 벌써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엄마!!”

 

 소년은 엄마를 보고 소리쳤다.

 

 “현구야…….”

 

 엄마는 당황했다.

 

 “현구야! 나가! 나가 있어!”

 

 엄마는 아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는커녕 아들을 재빨리 내보내려 했다.

 

 “하? 쟤야?”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소년을 보며 피식 웃었다.

 

 소년은 남자에게 달려들어 남자의 손을 잡아챘다.

 

 “아저씨 뭐야? 놔! 놔, 이거!”

 

 “이 새끼가! 싸가지 없게!”

 

 남자는 한 팔로 거세게 소년을 떨쳐 냈다.

 

 휘청하던 소년은 다시 거구의 남자에게 죽기 살기로 덤벼들었다.

 

 남자는 덤비는 소년에게 살짝 밀쳐지는 듯 하더니 금세 소년을 던져 버렸다.

 

 소년은 작은 식탁에 강하게 부딪쳐 쓰러졌다.

 

 식탁 위 쟁반에는 곯은 사과 2개와 과도가 놓여 있었다.

 

 “현구야!!”

 

 엄마는 아들에게로 몸을 돌렸으나 다시 남자에게 머리채를 휘어 잡혔다.

 

 “어디가, 이년아! 너 아까 했던 얘기 이 새끼 앞에서도 해봐, 어?”

 

 “엄마!”

 

 식탁 앞에 쓰러진 소년은 다시 한 번 일어나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매일 합기도 도장에 출석도장을 찍고 있던 소년이지만 아직 덜 자란 그는 이 건장한 남자의 상대가 안 됐다.

 

 남자는 여자의 머리채를 놓치고 소년을 패대기쳤다.

 

 이윽고 그는 엎어진 소년을 흠씬 두드려 패기 시작했다.

 

 소년의 엄마는 악다구니를 쓰며 두 사람 사이로 뛰어들었고 본능처럼 자신의 몸으로 아들을 덮었다.

 

 그녀는 작은 체구로 아들에게 가는 매를 다 받았다.

 

 제 흥분을 못 이긴 남자는 엉켜 있는 모자를 무자비하게 걷어 찼고, 두 사람은 바람에 날리는 스티로폼처럼 날아가 식탁의 다리에 크게 부딪쳤다.

 

 그 아비규환 속에서도 엄마는 아들이 다치지 않도록 자신의 몸으로 아들을 받쳤고, 억 소리와 함께 쓰러진 엄마를 보고 아들은 악이 받쳤다.

 

 “엄마!”

 

 그때, 소년의 눈에 어둠 속에서 순간 반짝이는 과도가 보였다.

 

 모자가 식탁에 부딪힐 때 식탁 위에 있던 칼이 얄궂게도 소년의 손이 닿는 곳에 떨어진 것이다.

 

 소년은 칼을 웅켜쥐고 남자를 겨눴다.

 

 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허, 이 새끼 봐라. 너 이년 아들 새끼 겁나 잘 키웠다. 응?! 너 그걸로 나 찌르게? 찌를 수 있어? 찔러봐. 찔러봐, 병신 새끼야.”

 

 “현구야…….”

 

 고통과 충격이 아직 몸을 내리누르고 있던 여자가 아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흐느꼈다.

 

 “엄마 저리 비켜.”

 

 소년의 눈에 광기가 내비쳤다.

 

 소년은 작은 칼을 앞뒤로 휘둘러 남자를 위협했다.

 

 그러나 그 모습은 미끼 없는 낚시대가 물 속을 공연히 저어대는 것처럼 공허해 보였다.

 

 남자는 소년의 발악이 귀엽게도 보였다.

 

 잠시 지켜봐 주는 척 하더니 곧 한 손으로 소년이 칼을 쥔 손을 잡았고 다른 손으로는 소년의 뺨을 사정없이 내리 쳤다.

 

 남자의 손은 소년의 손과 칼을 통으로 감싸 쥐기에 충분히 컸고, 남자의 힘은 몇 대 맞는 것만으로 소년이 정신을 잃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들이 맞아 쓰러진 것을 본 엄마는 이를 악 물고 다시 한번 남자에게 몸을 던졌다.

 

 “하지마! 하지마! 내 아들 때리지마!”

 

 “이 쌍년이, 돌았나!”

 

 여자는 죽자 살자 덤볐고 남자의 하얀 구찌 셔츠가 찢어졌다.

 

 그러자 남자는 소년을 놓고 다시 여자를 잡아 더욱 심하게 구타했다.

 

 소년은 머리가 멍했다.

 

 정신이 희미하게 돌아오는 것 같았다.

 

 엄마가 죽어라 맞고 있었다.

 

 과도는 바로 옆에 떨어져 있었다.

 

 덥석 과도를 집었다.

 

 

 

 

 

 

 

 

 

 

 

 

 

 

 

 주변이 조용했다.

 

 남자의 등에 칼이 꽂혀 있었다.

 

 남자는 태엽이 거의 풀린 장난감처럼 뚝뚝,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아직 작은 소년이 자신의 등에 붙어 있다.

 

 “아놔, 어이가 없네.”

 

 남자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소년은 여전히 분노와 흥분에 일그러진 얼굴로 불규칙한 호흡을 내뱉으며 남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바닥에 엎드려 있는 여자는 아직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이윽고 소년의 시선이 남자의 뒤통수에서 천천히 내려와 자신이 아직 쥐고 있는 칼에 닿았다.

 

 그제야 소년은 깨달았다.

 

 “아아악!”

 

 그리고 불에 댄 듯 과도의 자루에서 손을 떼며 뒤로 나자빠졌다.

 

 남자는 가려운 등을 긁으려는 듯 손을 뒤로 넘겨 칼을 잡아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이럴 땐 팔의 근육이 성가시다고 생각했다.

 

 남자의 셔츠가 조금 피로 물들었다.

 

 곧 남자의 한쪽 무릎이 꺾였고, 얼마 후 남자가 쓰러졌다.

 

 모자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 쳐다봤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엄마였다.

 

 그녀는 기어가서 남자의 코에 귀를 대고 그가 숨을 쉬는지 확인했다.

 

 남자가 숨을 쉬지 않았다.

 

 여자는 심장이 오그라들고 머리가 아득했지만 엄마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아들에게로 가 두 손으로 아들의 어깨를 부여잡아 흔들었다.

 

 “정신차려, 정신차려! 엄마 말 잘 들어. 지금 영웅이 삼촌한테 가. 넌 가서 삼촌 집에 숨어 있고 삼촌 좀……, 삼촌 좀 이리로 와 달라고 해. 빨리! 시간 없어! 너 정신 안 차려, 진짜?”

 

 소년은 엄마의 얼굴을 멍하니 처보다가 뒤로 넘어지듯 몸을 빼며 일어섰다.

 

 엄마는 일어나려는 아들을 잠시 다시 붙잡고 꼭 끌어안았다가 이내 밀어냈다.

 

 “가! 가, 이제, 빨리, 어서!”

 

 엄마는 그렇게 얻맞으면서도 나오지 않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엄마아아아…….”

 

 소년은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휘청휘청 도망 나왔다.

 

 그리고 계단을 기어 올라가 옥탑방의 문을 두드렸다.

 

 “삼초온…. 삼초온…….”

 

 아무도 없었다.

 

 소년은 영웅이 삼촌이 늦게 돌아온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그리고 지금은 그가 돌아오는 시간이다.

 

 늘 영웅이 오는 길로 영웅을 찾아 나서야 했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자신의 집을 한 번 더 돌아봤다.

 

 끄억끄억 울음이 터져 나왔고 동시에 덜컥 겁이 났다.

 

 소년은 도망치듯 그 다세대 주택을 벗어났다.

 

 

 

 

 

 

 

 골목길 어귀에서 낡은 백팩 하나를 한쪽 어깨에 걸쳐 맨 남자가 에어 서플라이의 을 흥얼거리며 걷고 있었다.

 

 영웅이었다.

 

 하루의 피곤이 고스란히 묻은 얼굴이었지만 세상 선한 인상을 가진 사내였다.

 

 영웅은 반대편 끝에서 달려오는 실루엣 하나를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현구였다.

 

 현구는 아랫집에 사는 현희의 아들이었고, 영웅은 현희를 좋아했다.

 

 현희를 좋아하는 만큼 현구도 사랑했다.

 

 “현구야.”

 

 그는 조금 전의 고단함을 싹 지우고 반가움만을 채운 얼굴로 현구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달려오는 현구가 이상했다.

 

 “삼초온……. 삼초온…….”

 

 열일곱이긴 하지만 클 만큼 큰 녀석이 눈물 콧물 범벅이 되서 자신을 찾아 휘적휘적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니…… 와 우노? 뭔 일이가?”

 

 영웅은 소매를 당겨 현구의 눈물과 콧물을 닦아주며 물었다.

 

 현구는 신발도 한짝만 신고 있었다.

 

 “얌마, 니 신은? 한짝은 엿 바까 무긋나?”

 

 “삼초온…… 엄마가…… 엄마가……. 으아아아아…….”

 

 현구는 끝내 울음이 터져 나왔다.

 

 영웅은 현희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부디 자신이 늦지 않기를 바랐다.

 

 그 뒤를 현구가 휘적휘적 따랐다.

 

 

 

 

 

 

 영웅은 거칠게 대문을 열고 가파른 계단을 단숨에 올라갔다.

 

 현희의 집 현관문 앞에 선 그는 채 닫히지 못한 문을 보았다.

 

 충혈된 눈과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한 영웅은 마른 침을 한번 삼키고 현희의 집으로 들어갔다.

 

 남자 구두.

 

 신발을 벗고 현관을 지나자 쓰러진 남자와 그 뒤에 앉아 있는 현희가 보였다.

 

 “희야……. 희야…….”

 

 영웅은 조심스럽게 현희 옆으로가 무릎을 꿇고 그들을 살폈다.

 

 옆으로 몸을 살짝 웅크린 채 쓰러진 남자 등에는 칼이 꽂혀 있었고 얼마간 피가 배어 나와 있었다.

 

 그 뒤로 현희가 무릎을 꿇고 몸을 늘어뜨린 채 앉아 있었다.

 

 “희야.”

 

 영웅이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오빠…….”

 

 현희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엉망으로 얻어맞은 얼굴이 영웅의 눈에 드러났다.

 

 “이…… 이게 무신 일이고……? 니 얼굴이 와 이라는데?”

 

 영웅은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현희 얼굴을 감싸 쥐려 했다.

 

 그러나 현희는 고개를 돌려 영웅의 손을 피했다.

 

 “오빠. 내 말 잘 들어. 길게 설명할 순 없어. 현구가 이 사람 찔렀어. 근데 나 때문이야. 그래서 내가 찌른 거로 할 거야. 내가 좀 있다 경찰에 신고할 거야. 근데 아마 내가 죽인 걸로 결론 나도 이 사람 아버지가 현구를 찾을 거야. 오빠가 현구 좀 숨겨줘. 아마 경찰도 찾겠지만 경찰이 포기해도 이 사람 아버지는 포기 안 할 거야. 오빠가 아무도 못 찾게 현구 좀 숨겨줘. 오빠…… 부탁해……. 오빠밖에 없어. 현구 좀, 우리 아들 좀…….”

 

 “와……. 이 사람 가족이 뭔데…….”

 

 “이 사람 아버지 엄청 무서운 사람이야. 그래서 자기 아들 이렇게 만든 게 누군지 끝까지 찾아내서 자기 손으로 죽이려 들 거야. 내가 죽였다고 믿더라도 내 아들까지 그렇게 할 거야. 지금 현구 데리고 오빠 집에 숨겨주고 있다가 경찰이 잠잠해지면 멀리 멀리 떠나. 들키지 말고. 경찰도, 이 사람 아버지도 못 찾게. 돈은 오빠, 돈은, 오빠도 알다시피 나 없잖아. 빚밖에……. 이 사람 지갑에 있던 거랑 내가 갖고 있는 거, 이게 전부야…….”

 

 현희가 통장 두 개와 도장, 수표 몇 장과 얼마간의 현금, 그리고 끼고 있던 14K 반지를 빼서 영웅의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수표와 현금 대부분은 남자의 지갑에서 나온 것이었다.

 

 “미안해, 미안해 오빠…….”

 

 “이게… 무신…… 희야…….”

 

 “조금만 잠잠해지면 멀리 떠나. 그렇게 좀 부탁해, 오빠. 응? 오빠 현구 아들처럼 이뻐했잖아. 응, 오빠…….”

 

 “알았다……. 알았다……. 같이, 같이 가자.”

 

 현희는 흐느껴 우는 와중에 실없이 웃으며 말했다.

 

 “안 된다고. 매듭을 지어야지. 그래야 경찰이라도 안 보태지. 어쩌면 이 사람 아버지도 포기할 수도 있고…….”

 

 현관에서 주춤하던 현구는 겨우 영웅의 뒤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왔다.

 

 어둠 속 영웅의 뒤에서 서서히, 그리고 뻣뻣하게 나타났다.

 

 “어…… 엄마…….”

 

 현희는 현구를 발견하자 눈물을 삼켰다.

 

 “가. 이제 가, 오빠. 오빠 가면 내가 경찰에 신고할 거야. 어서.”

 

 “희야……, 이러지 말고…….”

 

 영웅은 현희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러나 현희는 영웅을 거칠게 밀쳤다.

 

 “이제 가라고!”

 

 뒤로 밀쳐져 넘어진 영웅은 어느새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닦으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도무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현희를 설득해 보려 했지만 정말 시간이 없음을 영웅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는 마저 일어나려다 현희를 향해 다시 몸을 숙였다. 그리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희야, 내가 니 억수로 많이…….”

 

 “알아. 오빠 나 많이 사랑한 거. 고마워, 오빠. 그리고 미안해…….”

 

 이를 악 문 영웅은 벌떡 일어나 주저앉는 현구를 일으켜 나가려 했다.

 

 그러나 현구는 또 다시 엄마를 두고 갈 수 없었다.

 

 “엄마!!!”

 

 자신을 끌어안아 올리는 영웅을 밀쳐내며 엄마에게로 가려 했다.

 

 “엄마아아아!”

 

 “가! 가, 아들. 그리고 다 잊어버려. 우리 아들, 엄마가 정말 많이 사랑해.”

 

 “엄마아! 엄마아아아아!”

 

 영웅은 두 눈을 질끈 감고 현구를 끌어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꼭 감아도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순 없었다.

 

 두 사람을 보며 현희는 옅게 미소 지었다.

 

 곧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바깥에서 현구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소리가 사라졌다.

 

 집안에는 다시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현희는 전화기가 있는 텔레비전 장으로 가서 수화기를 집었다.

 

 “여보세요. 경찰서죠? 제가 사람을 죽였는데요, 여기가……. 아니에요, 장난 전화 아니에요.”

 

 얼마간 이야기를 한 후 전화를 끊고 다시 남자의 뒤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죽은 남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손을 들어 그의 이마와 눈썹을 한번 쓸어 만져 보았다.

 

 그리고 담담하게 남자의 등에 꽂힌 칼을 뽑았다.

 

 생각보다 큰 힘이 들지 않았다.

 

 붉은 피가 왈칵 그녀의 무릎으로 쏟아졌다.

 

 그녀는 칼자루와 칼날에 묻은 피를 입고 있던 베이지색 여름 니트에 쓰윽 닦아내고는 이윽고 그 칼로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남자의 몸 위로 여자의 몸이 겹쳐져 쓰러졌다.

 

 

 - 2020년

 

 사람이 없지도 많지도 않은 기차 안 창가 자리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내다 보고 있다.

 

 “원장님, 저 그만 두려구요.”

 

 한 달 전, 원장에게 도전하듯 퇴사 의사를 밝혔다.

 

 “그냥 좀 쉬려구요. 너무 바빴던 것 같아요. 조금만 쉬어 볼게요.”

 

 우 선생, 지금 한창 물들어 오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애들한테도 인기 좋잖아?

 

 휴가 줄게, 좀 쉬다 와,

 

 왜 이래, 진짜?

 

 지금 쉬면 경력 단절밖에 더 돼?

 

 어디 다른 데 갈려고 그러는 거야?

 

 페이 문제야?

 

 결혼해?

 

 원장의 말이 무섭게 쏟아져 나왔다.

 

 그의 말이 모두 옳기도, 틀리기도 했다. 결혼 빼고.

 

 실제로 저러한 문제들이 많았지만, 그보다 내 속의 뭉친 본질적 무언가가 훨씬 컸다.

 

 어느날 문득 깨달았다. 나는 확실히 지쳐 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모든 것에 큰 고민없이 빠른 결정을 내렸고 스스로가 원하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일류 명문대까지는 아니지만 서울 4년제 대학을 나와서 휴학 한 번 안하고 졸업했다.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 삼아 시작한 입시 강사일을 어찌어찌 유지하여 직업으로 삼았다.

 

 의도했다기보다, 그렇게 흘러왔다.

 

 원생도 꾸준히 늘었고 출근하는 날짜도 점차 늘어 났다.

 

 언제부턴가 한 달에 하루도 쉬지 못할 때가 많았다.

 

 정말 열심히 살았다,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난 겨울, 한 밤중 퇴근해서 녹초가 된 몸을 거실 소파에 늘어트리고 어두운 허공을 응시했다.

 

 아무 것도 안 보였다. 그리고 발견했다.

 

 생각이, 사고가 정지한 자신을.

 

 이제 나는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고를 때에도 무엇을 먹을지 몰라 무언갈 집어 올리기까지 한참이 걸렸고, 라떼나 아메리카노 중에서 뭘 마실지 정하지 못해 친구에게 ‘나두’라는 소리만 하게 됐다.

 

 어느 날은 출근길에 혼자 카페에 갔다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실 작정이었는데도 “따뜻한 걸로 드릴까요?”라는 점원의 의례적 맨트에 “네”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가장 최악은 서른 한 가지 아이스크림.

 

 없는 시간을 꾸역꾸역 내서 혼자 영화제도 가고, 페스티발도 가고, 멀리 여행도 훌쩍 떠나던 지난날은 사라져 버렸다.

 

 영문도 모르게 무기력하고 게을러졌다.

 

 인생의 확신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자존감은 풍화 작용으로 흩어져 버렸다.

 

 그래, 나는 부유하고 있었다.

 

 다시 생각이란 것을 해보기 위해, 스스로를 건져 보기 위해, 깨달음을 얻은 다음날 생각없이 일들을 저질렀다.

 

 직장을 그만두고 월세인 집을 비웠다.

 

 원래 많지 않은 살림을 중고매장에 팔고 기차표를 샀다.

 

 서울을 떠났다.

 

 

 

 

 나는 여전히 멍하게 창밖을 보고 있다.

 

 내 옆에는 커다란 캐리어 하나와 백팩이 있다.

 

 나에게 남은 거추장스러움은 이것이 전부다.

 

 자, 이제 어떻게 살까?

 

 그때 기차에서 방송이 흘러 나왔다.

 

 “우리 열차는 잠시 후 종착역인 목포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잊으신 물건이 없는지……”

 

 

 

 

 

 바야흐로

 목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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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화 : 1989년 7월 14일 2020 / 9 / 16 331 0 8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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