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트는 아늑했다.
애벌레처럼 꼬물거리며 침낭 속에 자리를 잡으니 세상으로부터 빠져나와 안전한 장소에 숨어든 것 같았다. 편안하고 안심이 됐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몸은 누워서 잠에 뛰어들 준비가 되었는데 온갖 생각과 감정들이 덮쳐와 잠드는 것을 가로막았다. 생각에서 걱정으로 다시 생각으로 실타래처럼 계속 이어지는 상념이 눈을 감고 있는데도 시야를 가득 매웠다.
재하는 금방이라도 곯아떨어질 만큼 충분히 피곤함에도 어딘가에 단단히 묶여서 좀처럼 잠에 닿질 못했다. 토할 만큼 눈알이 빙빙 돌았다.
이러다가는 죽겠다는 생각에 재하는 자기를 괴롭히는 것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보기로 했다.
우선! 우서진이 아직 미션을 못했다는 것이 걸렸다.
하지만 송PD의 말처럼 우서진이 미션을 하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충분히 해결 가능하니까 그만 생각해도 된다.
두 번째!
두 번째는 기음스안.
재하는 그 이름을 마음속에서 부르는 것조차 무서워 어금니를 앙 다물었다.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속으로만 그 이름을 말해도 꼭 그 애가 들을 것만 같았다.
돌았네.
재하는 자기 안에 실낱같이 남아있던 이성이 신랄하게 비웃는 소리를 들었다.
아주 그냥 과대망상이 딱 정신병원 입원각이야!
다행히 완전 맛이 간 건 아닌가 보다 하면서 냉철한 이성에 좀 더 귀 기울이려 하자 눈앞이 펑 터지면서 뽀얗게 필터링 된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다시 미쳐가는 것이다.
그 얼굴은 생긴 것부터가 고문이었다.
눈에다 뭔 짓을 했는지 따뜻했다. 짙은 갈색 눈동자가 웃으면 반짝반짝한데 꿀 흐른다는 표현이 무엇인지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쌍꺼풀 없는 눈이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고, 언제나 위로가 되는 상냥함으로 가득했다.
진한 초콜릿 같은 갈색 머리카락이 눈썹까지 내려오는데 웨이브가 있는 듯 마는 듯 했다. 원래 곱슬인지 파마를 한 건지 모르겠지만 정말 잘 어울렸다.
귓불 아래부터 갸름하게 이어지는 턱선과 목 한가운데 복숭아 씨앗처럼 살짝 튀어나온 울대뼈는 재하가 특히 눈을 떼기 어려운 곳이었다.
잔잔하게 미소가 걸린 단정한 입술이 입을 열면 듣기 좋은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촬영 때문에, 미션 때문만은 아니었어.’
“으윽!”
갑자기 재하가 신음을 하자 이규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야.”
재하는 자기 때문에 같은 텐트에 있는 아이들이 피해를 보는 것 같아 목소리를 잔뜩 낮추어 말했다.
“잠꼬대 했나봐. 미안.”
“괜찮아. 괜찮아.”
차해인이 조금 잠긴 목소리로 안심시키듯 말했다.
“피곤한데 이상하게 잠은 안 와서 그냥 누워만 있었어.”
“정말? 나돈데.”
이규진이 반가운 듯 말했다.
“이렇게 8라운드까지는 무리일 것 같아. 그 전에 탈락하겠지만.”
차해인이 이규진 쪽으로 돌아누웠는지 침낭이 바스락 거렸다.
“근데 탈락하면 우리 더 이상 못 만나고 거기서 끝인 게 좀 아쉬워.”
이규진이 말을 하는 사이 재하도 이규진 쪽으로 돌아누웠다.
위에서 보면 중간에 이규진을 두고 양쪽에 재하와 차해인이 마주보고 누운 모양이 되었다.
“왜? 학교에서 봐도 되고 따로 만나면 되잖아?”
재하가 아무것도 모르는 티를 내며 말했다.
“출연 동의서 보면 최종 라운드가 끝날 때까지 출연자들끼리 촬영 외에 사적으로 따로 만날 수 없다고 되어 있었잖아.”
“아!”
이규진의 설명에 재하의 심장이 깊이 가라앉았다.
내일 탈락하면 최소 두 달 동안은 볼 수 없었다. 원래부터 모르던 사이였는데 촬영 때문에 잠시 봤다가 한참 안보면 아마도 다시 가까워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네. 안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정들었나봐.”
차해인이 아쉬운 듯 이야기 하다가 금세 웃으며 덧붙였다.
“그럼 우리 최대한 살아남아보지 뭐. 그럼 매일 매일 만날 수도 있잖아.”
그렇구나. 탈락하지 않고 살아남아야 계속 볼 수 있구나.
재하는 다시 반대쪽으로 돌아누워 몸을 웅크렸다.
쨋! 쨋! 쨋! 쨋!
새는 참 이른 시간부터 울기 시작했다. 주변은 아직 어둑어둑한데 새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엄청 듣기 싫은 소리였다. 아침을 알리는 새소리는 아름답고 상쾌하다고 하던데 학교 교정에 사는 새는 전혀 아니었다.
거슬리는 새소리를 한동안 욕하다보니 해가 뜨기 시작했다.
재하는 밤새도록 육체와 정신이 맞서 싸우는 것을 지켜본 상태였다. 어찌나 팽팽한지 둘은 엎치락뒤치락 했다. 육체가 이기면 까무룩 잠들었다가 정신이 다시 공격을 하면 후드득 잠에서 깼다.
결국 견디다 못한 재하는 이규진과 차해인이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텐트 밖으로 나와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어깨에 담요를 두르고 쪼그려 앉아 핫초코 한잔을 손에 쥐고 밤이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벌써 깼냐?”
누군가 꽉 잠긴 목소리로 재하에게 말을 걸자 재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우왓! 씨!”
이승호가 깜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재하의 안경에 희뿌연 김이 서려 중간에만 검은 눈이 조그맣게 보여서 괴상했다.
재하는 핫초코가 들어있는 종이컵을 한 쪽에 놓고 안경을 벗어 체육복 소매로 뿌옇게 서린 김을 닦아냈다.
“놀랬어?”
재하의 말에 이승호는 눌린 머리를 손으로 빗으며 아닌 척 했다.
“잠 못 잤어?”
이승호의 말에 재하가 고개를 저으며 안경을 끼고 핫초코를 호로록 마셨다.
“못 잤는데 뭐! 아주 깊은 갈등이 있구만?”
이승호가 재하 맞은편에 앉으며 싱긋 웃었다.
“누구냐? 누가 너를 잠 못들 게 하냐?”
재하가 피식 웃었다.
“내가 누나가 세 명이야. 너 보니까 딱 우리 둘째 누나 케이스 같은데.”
“그래? 그럼 그 누나는 어떻게 됐는데?”
재하가 별 기대 없이 물었다.
“결국 잠 못 들게 하는 놈하고 예식장 보러 다니고 있지.”
“뭐?”
“그냥 포기하고 접을 놈 때문에 날밤을 까진 않잖아. 전쟁터에서도 잠은 온다는데, 안 그래?”
“나는 잠자리가 불편해서 일찍 깬 거야. 밤 샌 게 아니야.”
재하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 그래. 혹시 필요하면 말해. 내가 둘째 누나 생각해서 적극 상담해 줄게.”
이승호의 넉살에 재하가 잔잔하게 웃었다.
“촬영 아니면 볼 일도 없는데? 두 달 뒤에도 이렇게 얘기할까?”
재하의 말에 이승호가 잠깐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모르지. 우연히 마주치게 되면 인사만 하는 그런 사이가 되려나?”
재하는 역시 그렇겠지 라는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승호가 또박또박 선서하듯 말했다.
“난 촬영이 다 끝나고 나서도 너랑 이렇게 얘기하면서 지낼 거야!”
감동!
세수도 안하고 오른쪽 머리는 심하게 눌렸지만 재하의 눈에는 이승호가 어떤 아이돌보다 더 멋져보였다. 집에 가자마자 이승호 팬클럽 가입부터 하겠다고 재하는 결심했다.
“핫초코 먹을래?”
갑자기 무척 친절해진 재하에게 이승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고 했다.
“나도!”
우서진이 이승호 뒤에 서서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재하는 끓는 물을 핫초코 가루가 담긴 종이컵에 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뜨거우니까 조심해!”
재하가 핫초코를 건네자 이승호가 고마워하며 말했다.
“고마워! 대신 아침밥은 내가 맡을게!”
“나도 같이 할게!”
우서진도 핫초코를 받아들며 아침밥을 하겠다고 하자 이승호가 말렸다.
“일단 넌 미션부터 해야지!”
이승호의 말에 재하는 얼른 우서진을 쳐다봤다.
그러자 우서진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문질렀다.
“난 별로 커플이 되고 싶은 여자애가 없어.”
뭐?
얼마나 눈이 높길래?
“여자애 중에 없어?”
이승호도 깜짝 놀란 표정으로 우서진을 쳐다봤다. 그리고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남자애 중엔?”
재하는 다 식은 핫초코를 호로록 마시며 무척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했다.
방송이 되나?
구독자에 목숨 건 송PD라면 대환영 일지도 모른다.
시즌 최초 남남 커플!
다양성을 존중하는 현대 사회에 안 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외모만 두고 보면 남자애들끼리도 잘 어울렸다.
미술과 후보 최지민과 문현빈!
일단 우서진보다 키도 크고 건장하지만 얼굴은 착하고 순해 보이는 최지민과 묘한 분위기를 가진 병약한 미소년 스타일 문현빈.
괜찮고.
다음 얼빠들의 천국, 무용과 후보 이승호와 김산!
누구와도 스스럼없이 잘 지내는 밝은 꽃남 이승호와 부드럽고 섬세한 김산.
아주 훌륭하고.
마지막 음악과 후보 까칠하고 차가운 정은성!
뭐 나름 나쁘지 않고.
과연 우서진의 선택은 뭘까 싶었다.
“남자애 중이라.”
곧바로 이승호 옆구리를 날려버리고 끝낼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신중하게 생각하는 우서진의 모습에 재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나 선택 장애 있단 말이야!”
우서진이 발끈한 척 한 마디 하자 이승호까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권재하도 아직 미션 안했으니까 둘이 하면 되겠네!”
한참을 웃던 이승호가 갑자기 솔로몬이 된 것처럼 우서진과 재하를 보며 말했다.
“안 돼!”
우서진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권재하는 절대 안 돼!”
뭘 저렇게까지 정색을 하나 싶어 재하는 괜히 한 마디 했다.
“같이 최종 라운드까지 도전하자며?”
재하의 말에 우서진이 진지하게 물었다.
“마음 바뀌었어? 최종 라운드까지 갈 거야?”
밤새도록 재하가 스스로에게 물었던 것과 같은 질문이었다.
선택 장애는 우서진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며 재하는 아무 맛도 안 나는 핫초코를 원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