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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한국남자 지훈
작가 : 오리무중91
작품등록일 : 2020.9.13

현재 20,30대 남자들의 현실적인 삶과 거기에 대한 위로를 하고 싶은 작품으로 , 주인공 지훈은 20대 후반의 남자로 남자로서의 부담함과 젊은 남자로서의 현실을 나타내는 인물입니다.

 
5화
작성일 : 20-09-14 08:25     조회 : 270     추천 : 0     분량 : 12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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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5 17 19 21

  중환자실로 옮긴 지훈은 동기 한 명 없이 선배들만 가득했다. 중환자실 특성상 근무하는 간호사 의사 할 것 없이 항상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 중 지훈의 사수라고 할 수 있는 정희와 경희가 있었다. 이름도 비슷한 이 둘은 동기였다. 정희는 채찍의 역할을 하는 선배였고, 그런 정희에게 혼나면 경희는 다독여주는 당근의 역할을 하는 선배였다. 지훈은 그런 경희에게 의지를 많이 했다. 그렇다고 정희를 싫어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업무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는 정희의 정확한 성격이 좋았다. 정희와 경희는 후배로 남자인 지훈이 들어와서 나름 좋았다. 성실하고 착한 지훈은 정희와 경희를 한결 편하게 해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희와 경희 바로 위에 나연이 있었다. 정희, 경희, 나연은 동갑으로 지훈보다 5살씩 많았다. 동갑이여서 그런지 정희, 경희, 나연은 선후임 같지 않게 편하게 지내는 듯 보였다. 나연은 변덕적이고 신경질적인 성격이었다. 초반에 나연은 지훈에게 한없이 착하고 친절한 선배였다. 사실 나연은 지훈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예림의 일도 있었고 지훈의 취향도 아니었던 나연의 사심 가득한 호의는 지훈에게 불편함일 뿐이었다. 처음에는 대충 맞장구쳐주고 분위기를 맞춰줬던 지훈도 점점 나연을 기피하고 나연의 호의을 거절했고, 그게 반복되자 지훈에 대한 호의는 적개심으로 변질 되었다. 나연의 괴롭힘은 표면적으로 거의 들어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나연은 지훈을 대놓고 괴롭히지 못했다. 자신 보다 선임인 간호사와 수간호사 모두 성실하고 싹싹한 지훈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대놓고 지훈을 괴롭히다가는 되려 본인이 곤란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항상 안 좋은 시선으로 지훈을 쳐다봤고 지훈은 그 시선이 항상 신경쓰였다. 그러다 사건이 터졌다.

  나연과 경희, 지훈이 같이 야간근무를 하게 됐던 날이다. 병원 심사평가가 시작될 시기, 우선 중환자실의 간호 물품 재고가 맞는지 확인해야 했다. 나연이 지훈에게 물품확인을 시켰다. “지훈선생 내가 환자들을 보고 있을 테니 재고확인 하고 와요. 4시간 이면 충분하죠?” 지훈은 얼척이 없었다. 그 많은 물품을 하나하나 확인하는데 몇날 몇일이 필요한데 4시간이라니 엄연한 부조리였다. “4시간요?” “네 그럼 근무시간 내내 그거만 할 생각이었어요?” 지훈이 짜증이 났지만 입술을 꾹 씹었다. “4시간 동안 할 수 있는데 까지 해보겠습니다.” 지훈이 나연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물품창고로 들어갔다. 지훈은 4시간 내내 먼지 구덩이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며 재고 목록표를 손에 들고 하나하나 확인했다. 4시간을 꽉 채워 물품의 반절이 안 되게 확인했다. 그때 나연이 전화가 왔다. “지훈선생 거기서 그러고만 있을꺼에요? 환자들은 경희쌤이랑 내가 다 봐야 되나봐요? 사람이 시간개념이 없어.” 지훈이 괜히 죄없는 전화기를 째려봤다. “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지훈은 전화를 끊고 몸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면서 병동으로 복귀했다. 나연이 지훈을 보더니 인상을 썼다. “어머! 지훈선생 몸에 먼지가 잔뜩이네! 환자분들 콘타되면 어쩌려고! 하여튼 기본이 안 돼있어! 옷부터 갈아입고 와요!” 지훈은 너무 화가났지만 표정을 관리했다. “죄송합니다 금방 씻고 옷갈아입고 오겠습니다.” 지훈은 뛰어서 락커룸으로 가 씻고 옷을 갈아 입고, 머리도 채 말리지 못하고 병동으로 돌아왔다. “지훈씨 그렇게 느려서, 무슨 남자가 씻는게 그렇게 오래 걸려요?” 지훈은 꼬투리를 잡는 나연이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다. “네? 지금 15분 걸렸습니다. 남자간호사들은 병동에 따로 탈의실이 없어서 의국까지 가야하는 거 알지 않으십니까?” “내가 옷 갈아입고 오랬지 씻고 오랬어요?” “옷만 갈아입는다고 끝이 아니지 않습니까 머리랑 얼굴에 앉은 먼지는 어떻게 해요 환자들 콘타되면 어쩔려구요.” 지훈이 나연이 했던 말을 그대로 나연에게 되돌려 줬다. 나연의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해지더니 소리쳤다. “야 박지훈 너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야?” 지훈이 화가 나 받아치려는데 경희가 지훈의 팔을 꼭 잡았다. “나연쌤 지훈쌤도 그런 뜻으로 이야기 한 거 아닐 거에요. 보는 눈도 있는데 그만해요.” 경희의 의도를 읽은 지훈은 나연에게 사과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말이 헛나갔네요.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나연이 사과를 받자 무안해진건지 의기양양해진 것인지 “그래 지훈쌤은 말투 좀 고쳐요.” 그리곤 지훈은 차트와 스케줄을 보고 환자들을 하나하나 케어했다. 아침 7시 반 겨울이라 그런지 지금에서야 동이 터오르고 있었다. 야속한 해는 왜 이리도 늦게 뜨는지 근무하는 8시간이 8개월 같았던 오늘, 지훈은 아침노을을 보며 원망을 해본다. 수간호사인 진숙이 출근을 했다. “다들 좋은 아침, 오늘 아침은 많이 쌀쌀하네~ 어젯밤에 별일들 없었고?” 지훈이 진숙에게 밝게 인사했다. 오늘따라 퇴근시간이 더욱 반가웠다. “네, 안녕하십니까, 어제 경민환자 바이탈이 조금 흔들렸는데 지금은 괜찮습니다. 그래도 계속 주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 알겠어. 밤에 고생이 많았네.” 그리고는 지훈이 어젯밤 확인하고 남은 재고 목록표를 진숙에게 내밀었다. “수간호사님, 어젯밤에 여기까지 확인했고 뒤부터 확인하면 될 것 같습니다.” 진숙이 목록표를 받아들고 넘겨보더니 지훈을 쳐다보고는 의아해 했다. “으음... 많이 했네, 근데 이걸 왜 지훈씨가 했어요?” “나연쌤이 저한테 주면서 시켜서 했습니다.” “이건 원래 지훈쌤 연차에는 잘 안 시키는데, 중간연차 선생님들이 하는 건데... 알겠어요. 고생했어요. 나연쌤 좀 불러주고 가봐요.” 지훈이 나연한테가 수간호사님의 호출 사실을 알렸다. 나연이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지훈은 모르겠다고 답했다. 병동 복도 끝 나연이 진숙 앞에서 쩔쩔 매고 있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광경을 보던 지훈은 속으로 ‘쌤통이다.’ 쾌재를 불렀다. 퇴근 시간 지훈이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지이이이잉 락커선반에 올려둔 지훈의 핸드폰이 울린다. 핸드폰 화면에 적힌 ‘김나연선배’ 5글자... 지훈은 쉼호흡을 하고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나연의 목소리에 독이 올라있었다. “지훈씨 퇴근하기 전에 나 좀 보고가요. 중앙 정원으로 와요.” 뚝... 나연이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지훈은 스트레스에 두통이 왔다. 지훈은 도살장 끌려가는 소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중앙정원으로 간다. 지훈이 도착했다. 벤치에 앉아서 다리를 꼬고 있던 나연이 지훈을 위아래로 훝어봤다. “지훈씨 진짜 나랑 해보자는 거야? 나 되게 엿맥일려고 그런거지?” 지훈이 고개를 아래로 쳐박고 표정관리를 했다. “아니요.” 나연이 화가 안풀려서 지훈을 쏘아 붙였다.“아니 그럼 왜 수쌤 한테 직접 줬는데? 일부러 그런거 아니야!” “그런게 아니라, 그냥 별 생각없이 그런 일은 총괄이 결국 수쌤이니 수쌤께 드린 거 뿐입니다. 또 제가 막내이다 보니 다른 선생님께 업무를 떠넘길 수도 없는 입장이지 않습니까?” 나연의 지훈의 말이 말대꾸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지훈쌤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변명이라고 하시면 변명입니다. 그런데 제가 드리고 싶은말은 일부러 그랬던 것은 아니란말 드리고 싶었습니다.” 나연이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 소리를 냈다. “하! 말대꾸 겁나 하네, 그래 그건 그렇다 쳐. 그럼 그 때문에 내가 수쌤한테 찍힌 건 어떻게 책임질거야?” 지훈은 어이가 너무 없었다. “제가 책임 져야하는 부분인가요?” “그럼 지훈씨 때문인데 지훈씨는 양심도 없어?” “선생님 그런데 수쌤이 선생님한테 지시한 업무를 저한테 시켜서 그렇게 된거 아닌가요? 제가 악의적으로 수쌤한테 이간질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이야기하시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지훈은 여기서 말꼬리 잡히면 안되겠다 싶어 오히려 사실을 말했다. 나연은 지훈의 단호한 태도와 조목조목 이야기하는 모습이 너무도 기분이 나빴다. 자신이 기분이 나쁘니 지훈을 상처줘야겠단 생각으로 더 강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지훈씨 내가 왜 지훈씨 싫어하는지 알아?” “잘 모르겠습니다.” “건방져서야 어디라고 지금 고개 빳빳히 들고 대들어! 선후배도 없어? 넌 부모님한테도 그러니? 어디서 배워 먹은 버릇이야!” 지훈이 지금껏 이야기는 참고 넘어갔지만 부모님을 욕하는 부분은 참을 수 없었다. “선생님 지금 저희 부모님 욕하신거에요?” 지훈의 정색에 나연은 살짝 당황했다. “내가 언제 지훈씨 부모 욕했다고 그래?” 지훈이 계속 정색을 하며 몰아세웠다. “부모님 들먹이면서 어디서 배워먹었냐고 하면 저희 부모님 욕한 거 아닌가요?” 나연이 지기 싫어 비아냥 댔다. “ 남자새끼가 쪼잔하게 하나하나 겁나 따져대네. 내가 욕을 했다 하더라도 지훈씨가 잘했어봐 내가 욕을 할 일이 있나.” 지훈은 더 이상 말을 하기 싫었다. 나연은 논리적으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선생님 하실 말씀은 끝나셨나요? 그 부분은 제가 책임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집에 가보겠습니다.” 나연이 그랬듯 지훈도 본인 할 말만 하고 뒤돌았다. 나연은 그 지훈의 뒷모습에 들어라는 듯 혀를 찼다. “저러니 건방지단 소리를 듣는 거지. 쯧쯧” 지훈은 순간 욱했지만 그냥 정원에서 나왔다. 나연의 지훈의 상처받은 모습에 이긴 것 같아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날 중앙정원에는 지훈과 나연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모두들 관심 없는 척하고 있었지만, 지훈과 나연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이 사건은 삽시간에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오르내렸다.

  그 날 저녁 지훈은 아침의 일로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본인의 부정적 감정들을 조용히 삭히고 있었다. 지이이잉 휴대폰 화면에 ‘김경희선배’란 글씨가 보인다. “여보세요.” “지훈아 지금 통화 괜찮아?” “네 선배 괜찮아요. 이야기하세요.” 온화하고 부드러운 경희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좋다. “음...조금 어려운 이야기인데...너 오늘 아침에 나연이랑 일 있었다면서, 괜찮니?” 지훈은 당황스러웠다. “네? 선배가 어떻게 아세요?” “그게 중요한건 아니잖아.” “그럼 어디까지 아시는거에요?” “나도 건너서 들은거긴 하지만 거의 다 알아, 괜찮아?” 지훈을 걱정하는 경희의 목소리에 지훈은 마음이 조금 풀렸다. “솔직히 말하면 괜찮지는 않아요. 지금 기분이 너무 안좋아요. 나연쌤이 이야기한 것처럼 내가 부모님 욕먹인 거 같고, 내가 진짜 큰 잘못을 한 건가 싶고, 또 평소에 건방져 보이나 생각이 많네요.” 경희가 따스하게 말했다. “지훈아 니 탓이 아니야, 아무리 잘못을 했더라도 부모를 욕 하는건 아니지, 그리고 너가 그렇게 큰 잘못한 것도 아니고. 너 내가 보기에는 겸손하고 싹싹하고 선배들한테 잘하고 좋은 후임이야.” 지훈이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러자 경희가 말을 이어나갔다. “지훈아 너 왜 나랑 정희가 나연쌤 선배처럼 안하고 동기처럼 지내는지 아니?” “아니요.” “나연쌤이 일을 잘 못해, 이것저것 실수도 많았고, 그래서 나연쌤 우리랑 1년차이 나는데 우리보다 인정 못받고 있어. 그래서 자격지심같은게 좀 있어.” 지훈이 울컥했다. 그 갇잖은 자격지심 때문에 자신에게 그렇게 했던건가 싶었다. “그 자격지심 때문에 저한테 그랬다는 거에요?”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다. 자기 동기들은 다 차간호사 달고 있는데, 본인은 1년 후임인 우리보다 못한 취급받고 있으니... 그런데 거기에 까마득한 후배가 말대꾸를 했으니 그 자격지심이 폭발한거지...” 이야기를 듣자 지훈은 나연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 듯 했다. 하지만 용서를 할 수는 없었다. “자기가 부족한 거를 후임들한테 풀어도 되는거에요? 그거 인성 문제잖아요.” 경희가 맞장구를 쳤다. “안되지 안되고 말고... 그래도 착한 지훈이가 이해해줘.” “선배 오늘 하루종일 나에게 왜그럴까 생각하는데, 중환자실 처음왔을 때 저한테 호의적으로 대해줬는데... 그게 뭐랄까? 순수하지 않은 것 같아서 거절을 했었거든요. 그거 때문에 나한테 이러나? 이런 생각도 했었어요.” “그래 나연쌤이 너 처음왔을 때 잘생겼단 말 여러번 했었던 것 같다.” “그렇죠! 그것도 아예 없는 건 아닐거에요.” 경희는 지훈의 불만에 다 맞장구쳐주고 토닥여줬다. 그런 경희에게 지훈은 너무 고마웠다. “선배 오늘 고마워요... 덕분에 기분이 많이 풀렸어요. 제가 다음에 커피한잔 살게요.” “그래 너 기분이 많이 풀렸다니 다행이네, 커피는 잘마실게...그럼 쉬어 내일보자~” “네, 쉬세요” 뚝. 전화를 끊자마자 배에서 꼬르륵소리가 났다. 지훈은 경희 덕분에 가슴팍에 막혀있던 체증이 내려갔는지 배가 고팠다. 지훈은 침대에 누워 휴대폰의 배달 어플을 뒤졌다.

  그 일이 있은지 보름정도 지났다. 그때의 감정은 많이 누그러들고 이제 별일 아니었단 듯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동안 계속 경희와 나연과 같은 근무조였지만 이번 주부터 바뀐다. 나연에게 책 잡히지 않으려고 계속 눈치를 봤더니 퇴근 때 너무도 피곤했었다. 퇴근을 하려는데 수간호사쌤이 지훈을 불렀다. “지훈선생 팀장님이 찾던데, 퇴근전에 한번 올라갔다가 퇴근해요.” 지훈은 의아했지만 알겠다고 답했다. 퇴근 복장으로 갈아입은 지훈은 간호팀장 방문에 노크를 했다. 똑.똑.똑 “네 들어오세요.” 안에서 팀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문을 열고 엉거주춤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저 찾으셨다고 이야기 들어서요...” 지훈의 눈에는 두려움과 궁금함이 같이 공존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높은 상사들은 어렵고 두렵게 느껴졌다. “박지훈선생 왔어요? 자리에 앉아요.” 잔뜩 쫀 지훈은 굉장히 공송한 자세로 의자에 앉았다. “커피 괜찮죠?” “네, 네” 간호팀장은 커피를 2잔 손에 들고 지훈의 맞은편에 앉았다. “왜 이렇게 긴장해 있어요.” “아, 아닙니다.” “다른게 아니라 지훈선생이 나연선생이랑 일이 좀 있었다고 하던데... 별일없죠?” 지훈은 얼굴이 굳어졌다. ‘어떻게 팀장이 이야기를 알게된거지? 참 이놈의 조직 소문퍼지는 속도가...쯧쯧’ 지훈이 속으로 혀를 찼다. “얼마 전에 다른 병원에서 간호사들 사이에 태움 때문에 기사가 났었자나요?” “아 저도 그 기사 봤습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요.” 지훈은 이 상황을 벗어나려면 최대한 상황을 좋게 이야기 해야된다고 생각했다. 괜히 일이 공론화되어 커지는 것이 싫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변절자 취급 당할게 분명하고 조직에서도 어울리지 못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론화 된다고 해도 좋게 바뀌는 꼴은 본적이 없다. 군대에서도 마음의 소리를 썼다가 피해보는 모습을 많이 봤다. “아 팀장님, 그 후로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다른사람 통해서 알게 되신 부분은 제가 죄송합니다. 공론화 되는거는 원치 안아서요. 우선 팀장님이 알게 되면 관리자 입장에서 조치를 하셔야되고 또 아시는 것 자체가 공론화가 되는 부분이라 생각했습니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팀장이 지훈의 사과에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그렇게 죄송해할 필요 없어요.” 지훈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어떻게 갈등이 없을 수 있겠어요. 저는 건강한 인간관계는 갈등이 생기고, 또 그걸 풀면서 형성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신뢰와 존중이 쌓인다고 생각합니다.” 팀장이 지훈에 말에 내심 안심했다. 얼마 전 모 큰 병원에서 간호사한 명이 태움에 못 견뎌 스스로를 포기하는 사건이 생겼고, 언론을 타면서 병원장, 간호팀장 할 거 없이 줄줄이 날아가는 모습을 봤었기 때문이었다. 팀장은 지훈이 그냥 둘러대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닌 진심이라고 생각했고, 뒤통수는 치지 않겠다고 안심했다. 또 지훈의 태도와 말에 지훈을 더 좋게 보게 되었다. “아니 잘생긴 청년이 생각까지 번듯하네.” 팀장의 칭찬에 지훈이 쑥스러운 듯 얼굴이 붉어졌다. “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그래요, 지훈씨 생각 잘 알았고, 야간 근무하고 피곤할 텐데 얼른 집에 가 봐요.” 지훈이 미지근하게 식어 버린 커피를 한 번에 들이키고는 부랴부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공간을 한시라도 빨리 탈출하고 싶었다. “그럼 팀장님 다음에 뵙겠습니다.” “네, 조심히 들어가고 푹 쉬어요~” 팀장이 간들어지는 콧소리로 배웅을 했다. 탁! 후~ 지훈이 크게 쉼호흡을 했다. 지훈은 한고비 넘겼다 생각했고, 어쩌다 보니 나연을 옹호했는 것 같아서 살짝 찝찝했다. 그래도 퇴근한단 홀가분함과 다음 주부터 근무조가 바뀐다는 사실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지훈은 그땐 알지 못했다. 오늘이 운수 좋은 날이 될지를...

  지이이잉 밤 10시 지훈의 핸드폰이 울린다. 눈이 부시는 화면의 ‘김나연선배’ 5글자, 지훈은 잠결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야! 너 자다 일어났니?” 나연의 목소리가 취해있다. 그리고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주변에서 ‘하지마, 하지마’ 하는 익숙한 목소리... “야 박지훈 나 지금 OO동인데 당장 텨와!” 눈도 재대로 못 뜬 지훈이 되물었다. “지금요?” “그래 당장 텨와!” “지금 시간이 몇신데 힘들 거 같습니다.” “이 새끼가 말귀를 못알아 먹어! 당장 안텨와? 내가 가까?” 지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방금 ‘새끼’라고 욕을 들어 먹은 것 같은데... 하는 순간 전화가 끊겼다. 무슨 일인지 상황파악 중인데 나연이 다시 전화가 왔다.

 “아 놔봐!” 전화상으로 들리는 나연의 목소리 지훈은 본인한테 한 게 아닌 옆에 사람에게 하는 소리같았다. “야 너 내가 그랬다고 이래저래 내 욕하고 다녔다며?” 흥분한데다 취하기 까지 한 나연은 거칠 게 없었다. “욕을 하고 다녔다니요?” 오늘 아침만 해도 간호팀장한테 나연의 실수를 덮어주려고 했는데 욕을 했다니 지훈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지훈은 좋은 대화는 할 수 없을 거란 직감이 왔다. 그리곤 휴대전화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나연이 콧웃음을 치며 말을 이어나갔다. “하...이 새끼 발뺌하는 거 봐라? 너 거짓말하다가 걸리는 것 보다 이실직고하고 용서를 비는게 더 낫지 않겠니?” 지훈이 인상을 팍쓰며 대답했다. “무슨 이실직고 말씀하시는 건데요.” “요새 별말 없이 일 열심히 하길래 반성하고 있나 했더니 뒤에서 호박씨 까고 있더라? 너 남자애가 쪼잔하게 아니 인간이 덜 되먹었구나?” 말할 가치가 없다고 느낀 지훈이 전화를 끊으려 했다. “ 선배 내일 술깨고 다시 이야기 해요. 전화 끊습니다.” 지훈의 취객 취급에 화가 더 난 나연이 소리쳤다. “나 멀쩡해! 니가 나보고 피해의식이랑 자격지심에 똘똘 뭉친년이라고 했다며” 나연의 말에 지훈의 뇌리에 경희가 스쳐 지나갔다.

 나연이 말을 이어나갔다. “게다가 자기한테 차여서 히스테리부리는 거라고 했다면서, 이래도 니가 욕 안했냐? 왜 아까처럼 연기해보지!” 지훈은 어디서 들었냐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처음 통화에 옆에서 하지 말라던 익숙한 목소리는 경희였다. 지훈은 억울했다. 경희와의 대화에서 비슷한 뉘앙스로 이야기를 했지만 저렇게 악의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고, 게다가 자격지심이란 단어는 경희의 입에서 먼저 나왔던 단어였다. 거기에 왜 살이 붙어 피해의식이라던지 히스테리라던지 게다가 믿었던 경희가 그렇게 이야기 했다니 지훈은 무언가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지훈이 말 없이 생각하고 있는데 나연이 쏘아 붙였다. “왜 조용하니? 할말이 없지? 너 두고봐 내가 병원생활 못하게 만들어주께! 끝까지 방해해주께.” 뚝!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연이 전화를 끊었다. 지훈이 끊어진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검게 비친 화면에는 상처받은 한 남자가 비치고 있었다. 이제껏 그랬듯이 지훈은 자신의 감정을 갉아 먹으며 경희에 대해 애써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지훈은 ‘자기한테 그랬듯이 맞장구치다가 그런거일 거라고, 일부로 말을 옮긴게 아닐꺼라고, 심사가 뒤틀린 나연이 그 말을 고깝게 들었던 것 뿐이라고 일부러 악의적으로 옮긴게 아닐거라고, 내일 근무교대때 이야기 해봐야겠다. 지금 전화로 할게 아니라 얼굴보고 이야기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회색빛은 지훈의 세상을 물들여가고 있었다.

  이틀 뒤 퇴근시간 경희와 드디어 만났다. 지훈이 경희에게 다가갔다. “선배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어...어 지금 바빠서 잠깐 기다려야 할 거 같은데?” 경희는 미소를 띠고 있지만 평소와 같은 온화함은 없었다. “기다릴께요. 좀 한가해지시면 전화주세요.” 지훈은 밤이 되어 어두워진 중앙정원에 앉아 있었다. 가로등 하나 없었지만 각 병동에서 나오는 불빛에 칠흑 같지는 않았다. 겨울의 차가운 밤공기가 지훈의 머리를 맑게 만들어주는 기분이었다. 지훈은 담담히 기다리고 있었다. 2시간 정도 지났을까? 경희가 전화가 왔다. “지훈아 집에 갔어?” “아뇨 지금 아래서 기다리고 있어요. 제가 올라갈게요.” “그래.” 지훈은 숨을 깁게 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코 끝을 찡하게 만들었다. 슈우웅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경희가 서있었다. “지훈아 여기서 이야기 하기는 좀 그렇고 계단으로 가자.” “네” 터어어엉~! 비상문이 닫히자 그 굉음이 비상계단 가득 메아리처럼 울렸다. 지훈은 비상계단으로 오는 내내 말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고민했다. 지훈의 입에서 정적이 먼저 깨졌다. “선배, 선배가 나연선배한테 이야기 하셨죠?” 경희가 이럴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팔장을 꼈다. “응, 내가 이야기했어.” “...” 조용한 침묵이 이어졌다. 지훈에게서 낮게 읍조리듯 말소리가 나왔다. “...역시, 선배 바쁜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그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지훈의 태도에 경희가 당황스럽고 순간 짜증이 났다. “아니 어렵게 시간 냈는데 그거 물어보려고 사람 불러낸거니?” 지훈이 멋쩍게 웃었다. “선배 다음에 이야기해요, 지금은 선배한테 섭섭해서 후회할 말을 할거 같아서요.” 경희가 인상을 썼다. “참 섭섭하다고? 지훈아 너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나 너보다 나연쌤을 더 오래봤어.” 지훈은 경희의 공격적인 태도에 당황스럽고 울컥했다. “그렇겠죠 제가 착각했나봐요. 근데 선배 저 억울한부분이 먼저 자격지심이란 단어를 말했던 건 선배에요. 근데 꼭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됐고, 살까지 붙었더라구요.” 경희가 콧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래서 어째라고? 왜 삼자대면이라도 할까?” 지훈은 계단 한 칸 올라가서 지훈을 내려다보며 이야기하는 경희의 표정과 모습에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비아냥이 섞여있는 웃음... 지훈은 아무말도 못하고 있었다. 경희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너 삼자대면하면 이길 자신있니? 사람 둘이서 하나 병신 만드는 거 어려운 거 아니야. 생각 잘해 지훈아.” 경희의 쏘아 붙임에 지훈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믿었던 사람의 다른모습... 이전에 느꼈던 배신감은 우스울 정도로 밀려치는 배신감과 실망감... 작게나마 느껴본 적 있는 감정이지만 이렇게 까지 생각과 사고가 멈출 정도로 충격적으로 느껴본 적은 없었다. 신뢰했던 사람에 대한 배신감과 실망감은 상실감으로 바뀌었고, 그는 인류에 대한 실망으로 변질되었다. 지훈은 여전히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지훈은 모두에게 친절한 경희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처럼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를 못해서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동질감과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경희는 달랐다. 경희는 지훈과 다른 인종이었다. 완전한 위선자였다. 경희는 이제껏 지훈에게 잘해주고 곁에 뒀던 이유가 쓸만해서였다. 그냥 필요에 의해서였다. 남자 간호사에 잘생기고 싹싹한 지훈과 친해지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될거 같아서였다. 게다가 정희가 악역을 맞아주니 자기는 선역을 하면 지훈이 더 따를 거란 계산도 있었다. 그녀는 완벽한 위선자였다. 겉과 속이 아예 다른 사람이었다. 지훈은 아무 말도 없이 비상계단을 나왔다. 뒤에서 경희가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 들리지 않았다. 경희는 비상계단에서 나오자 사람들의 눈치를 봤다. 그리고 지훈을 따라가지 않았다. 경희는 속으로 불안해하며 지훈이 자신에게 피해가 되기 전에 밟아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지훈은 집에 도착했지만 어떻게 들어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치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긴 것 처럼 단편적인 장면만 있을 뿐이었다. 띠.띠.띠.띠 알람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잠 한숨 못잤지만 출근준비를 해야했다. 그렇게 지훈의 세상은 완벽한 회색빛이 되었다.

  세상이 회색빛이 되고 난 뒤 지훈의 내면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 중 가장 큰 부분은 감정이 죽어버렸다. 다양한 생각과 감정 그리고 그 표현이 비교적 자연스러웠던 지훈은 이제는 분노, 무력감, 실망감, 우울감 외에는 다른 감정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유채색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지훈은 흉내를 내고 있었다. 기쁜척, 고마운척, 반가운척, 종은척 모두 흉내고 가짜일 뿐이었다. 지훈이 혼자있을 때의 표정은 그야말로 무채색이었다. 지훈은 경희와의 일 다로 다음날 나연이 혼자 남기를 기다렸다. 나연이 혼자 탕비실에 앉아 있자 지훈은 다가가 전에 해뒀던 녹음을 틀었다. 나연의 적나라한 욕과 인신공격들 3분이 채 안되는 녹취록이 끝이 났다. 지훈은 무채색의 표정으로 나연을 쳐다보고는 아무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란 나연은 지훈이 탕비실 문을 닫고 나갈 때 까지 아무말도 못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나연이 지훈을 따라 나갔다. “야 박지훈! 너 지금 그걸 들려주는 의도가 뭐야?” 지훈이 몇 발자국 뒤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있는 나연을 회색빛 표정으로 쳐다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지훈의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연은 지훈을 잡지 못했다. 그 후 지훈이 나연의 눈치를 보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나연이 지훈의 눈치를 보았다. 나연은 무서운 건지 불편한 건지 정신과 병동으로 자원했다. 근무여건이고 뭐고 간에 우선 지훈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이 답이란 결론을 낸 것이다. 나연이 그렇게 되자 경희 또한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나연이 시야에서 사라졌음에도 지훈은 세상은 돌아오지 않았다. 지훈은 여전히 밝고 싹싹한 사람이었지만 전 처럼 인류에 대한 애정이 넘쳐나던 순수하고 맑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게 지훈의 세상은 회색빛으로 탁하게 물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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