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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코 끝이 간지러울 뿐이라서
작가 : 바비수
작품등록일 : 2020.8.19

그 흔한 사랑고백도 없었다. 격렬한 포옹, 격정적인 키스도 없다!
자극적인 대사, 스킨십 한 번 없이 잔잔하고 소소한 순간들만 있었을 뿐!
그저 간지럽기만 했던 그 시절, 지우와 수현.
그 때 우린 뭐였을까? 이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8 마음이 소란한 날들
작성일 : 20-09-13 16:59     조회 : 208     추천 : 0     분량 : 9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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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개론 기말고사 날이었다. 이 시험을 마지막으로 지우는 1학기 종강이었다. 조기졸업을 염두하고 있는 지우에겐 대학교에서의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었다. 시험이니까 오늘은 나오겠지? 지우는 내심 수현의 얼굴을 볼 수 있기를 바랐다.

 

 수현은 철학 시험이 시작하기 직전에 교실에 들어섰다.

 어둠이 내리 앉은 듯 수척한 얼굴이었다. 평소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꾸며내지 않은 진짜 수현의 얼굴인 듯 했다. 아파서 억지로 웃을 힘도 없는 건가.

 

 기말고사 역시 서술형이었다. <자유의지>와 <결정론> 중 한 가지 입장을 선택해 주장을 펼치는 것이었다. 지우는 <결정론>을 택했다.

 ‘사랑’의 대상을 선택할 수 없다는 점, 첫인상은 ‘떠오르는’ 것이라는 점을 근거로 내세워 우리의 감정조차 우리가 선택할 수 없다는 내용을 서술했다.

 

 시험을 마친 학생들이 하나 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중해서 시험을 마친 지우도 조용히 뒷문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뒷문에 다다랐을 때 누군가 지우가 입고 있던 후드집업의 모자를 뒤집어 씌웠다. 갑자기 시야가 가려진 지우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잘 가라.”

 바로 뒤에서 수현의 갈라진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부터 지우의 뒤에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수현은 한 손으로는 문을 열어주면서 다른 손으로는 가볍게 지우의 어깨를 밀어 내보냈다.

 

 「장난스럽게 말하는데 목소리가 너무 안 좋은 거야. 걔 얼굴을 보려고 모자를 내렸는데 이미 저만치 갔더라. 근데 그 뒷모습이 뭔가 쓸쓸해 보이기도 하고 되게 아련했다?」

 

 난 얼굴도 제대로 못 봤는데. 인사도 못했는데. 하여튼 지 맘대로지. 그래도 장난칠 힘은 남아있나 보구나 싶어 안심이었다.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 뒷모습은 정말 마지막이 되었다.

 

 기숙사 짐을 정리하고 집으로 올라온 지우에게 학교번호로 전화가 왔다.

 “다음 달부터 취업정보센터 조교할 생각 없어요?”

 “네? 저 4학년 2학기 남았는데요.”

 “어, 조기졸업자 아니에요?”

 아직 조기졸업 신청을 하지 않았던 지우는 갑작스러운 제의에 의아했다. 전화를 끊고 교무처에 문의하니 사무처에 알아보란 말뿐이었다. 그래서 사무처에 전화를 거니 학과 사무실에 알아보란 답변을 받았다. 마침내 과사에 전화를 걸어 알아 본 결과, 시스템상 졸업요건이 충족돼서 자동으로 조기졸업자 명단에 넘어간 거라는 답변을 받았다.

 “그럼 조기졸업 안 하실 거에요?”

 조교의 말에 지우는 고민했다. 지우는 <광고와 사회>수업에서 C+를 받은 것을 제외하면 <철학개론>과 사이버강의 수업들은 모두 A+로 차석 장학금 대상자였다. 지우는 혹시나 해서 물었다.

 “혹시 제가 조기졸업하면 다음 사람한테 장학금 넘어가나요?“

 지우의 말에 남자조교가 옆 사람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야, 성적장학금 받는 사람이 졸업해버리면 다음 사람한테 넘어가냐?’ ‘대게 그렇지.’ 세라의 목소리였다. ‘김수현 휴학계 냈잖아. 걔가 3등 아니었어?’ ‘다 들리겠다. 학생 개인정보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니까.’ 세라가 핀잔을 주었다.

 수현이 휴학계를 냈다는 것이 의외였다. 복학하자마자 또 휴학을 한다니?

 

 “조기졸업 그대로 진행해주세요.”

 

 지우는 그 날 미뤄왔던 사랑니를 뺐다. 아래턱 양쪽 두 개를 동시에 뺐다. 아픔에 둔감한 편이라 그래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마취가 서서히 풀릴 때쯤 극강의 고통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잇몸 전체가 부어올라 말도 못하기 직전에 기용에게 전화가 왔다.

 “사랑니 잘 뺏어?”

 “흐어엉. 느므 으프.” 지우가 아픔을 참지 못하고 엉엉 울었다. 제대로 발음조차 하지 못했다.

 여태껏 아프다고 말을 한 적도, 눈물도 보인 적도 없었던 지우가 이렇게 나오자 어지간히 놀란 기용은 단숨에 지우의 집으로 달려왔다. 기용이 도착했을 땐 울음 소리가 새어나올 틈도 없을 만큼 지우의 입술과 턱이 잔뜩 부어올라 있었다. 하도 운 탓에 눈은 물론 얼굴 전체가 탱탱 부어있었다. 지우는 소리도 없이 폭포수 같은 눈물만 하염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피가 멈추지 않아 비릿한 피 맛이 계속 났지만 뱉어낼 힘도 삼켜낼 힘도 없었다. 입 속에 고인 피가 입술 사이를 비집고 침과 함께 줄줄 새어 나왔다. 눈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었다.

 기용은 말없이 연신 눈물과 피, 침을 닦아낼 뿐이었다. 한참이 흘러 지우가 진정된 기색이 보이자 부엌에서 죽을 끓여왔다. 한 손으론 죽을 떠먹이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우의 얼굴을 닦아내기 바빴다. 아주 작은 스푼으로 가까스로 지우의 입 속에 죽을 흘려 넣었다. 스푼 위에 핏덩이가 함께 나왔다.

 지우는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가슴이 미어질 만큼 울었다. 기용이 앞에 있는데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이제 더 이상 기용에게 못 보일 꼴이 없었다.

 너무 아파서 어쩔 수가 없어. 이게 다 사랑니 때문이야.

 지우는 극진한 간호를 받으면서 눈물이 메말라 더 이상은 나오지 않을 때까지 마음껏 울었다.

 이 날로 지우와 기용은 공식적인 연인이 되었다.

 

 「언니는 뭐였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을 볼 때마다 코 끝이 간지러웠어. 그 땐 간질간질한 마음, 말랑말랑한 기분이 뭘 의미하는지 몰랐어. 그냥 신경 쓰이는 사람, 거슬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게 좋아하는 마음이었던 거 같아.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데 다들 어떻게 사랑을 알고 사랑을 하는 걸까?

 내 감정은 나의 것이라서, 나만 알 수 있는 것이라서 아무도 알려주지 않잖아.

 나한테는 낯선 마음이라서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아는데 너무 오래 걸렸어.」

 

 지우는 졸업 직후 작은 회사에 취직했다.

 그 간지러웠던 기분은 완전히 잊은 채 이리저리 치이며 각박한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지우가 그를 떠올리게 된 것은 퍽 우연의 일치였다. K기업에 외근을 갔을 때였다. K기업은 지우가 다니는 중소기업에 일거리를 주는 대기업이었다. L담당자를 도와 프린터로 제안서를 뽑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저기요.”하고 말을 걸었다. 지우는 ‘타사 사람은 프린터를 쓰면 안 된다는 건가?’ 라는 생각에 조금 짜증스러운 얼굴로 돌아봤다.

 세련된 외모였지만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분위기의 여자였다. 낯익지만 어떻게 아는 얼굴인지 기억 나지 않았다.

 “N대학교 광홍과 맞죠? 조교였던 구세라에요! 이렇게 만나니까 되게 반갑네요!”

 그제야 기억이 났다. 그녀는 지우가 다니던 학교의 조교였다. 학과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유명한 선배. 예쁘고 성격 좋고 공부까지 잘 했던 선배. K기업에 근무한다는 것이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에 비해 지우는 꽤나 조용한 학생이었는데 자신이 그녀를 알아본 것이 아니라 그녀가 자신을 알아봤다는 게 신기했다. 이렇게 반갑게 아는 체를 해주니 고맙기까지 했다. 그녀는 편하게 언니라고 부르라며 지우 맞지? 성이 뭐였더라? 하며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웃으면서 명함을 건네는 그녀를 보니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전혀 의외의 사람에 대해 묻는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선배. 혹시…11학번 김수현이라고…”

 지우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자 처음엔 조금 당황하는 듯 하더니 이내 그의 소식을 들려주었다. 최근에 부친상을 겪어 조문을 다녀왔다고 했다.

 

 지우는 회사에 돌아와서도 자리에 앉아 한동안 멍했다. 내겐 너무 먼 사람의 일 같았다. 나는 그와 분명히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에게 아버지란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도 기억이 날듯했다. 그런데 뭐라고 하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잘 지내냐고 물을까? 날 기억이나 할까?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지. 거의 3년 됐나.

 

 SNS를 하지 않는 지우는 회원가입까지 해 겨우 수현의 계정을 찾아냈다. 수현이 올린 사진은 몇 년 전 사진 몇 개뿐이고, 다른 사람이 수현을 태그한 게시물로 가득했다. 남녀 구분 없이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과 여럿이 찍은 사진들. 지우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 소년같이 해맑게 웃고 있는 미소. 분명 그는 낯선 타지에서도 사람들의 관심과 보호를 받았으리라.

 그 미소를 보니 그대로구나 싶어 피식- 웃다가 씁쓸함이 몰려왔다.

 

 그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자니 황망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은 꽤나 큰 문제였다. 나는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대학생 때부터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고 졸업 직후엔 회사를 다니면서 열심히 돈을 모아 나이치고는 꽤 큰 돈을 모았다. 나만을 바라보는 헌신적인 남자친구가 있다. 아픈 곳도 없이 건강했다. 딱히 큰 고민거리도 없었다. 이것은 정말이지 내게 큰 문제였다. 절망, 재앙과도 같았다. 내가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음에도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결코 내가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내 인생에서 결핍된 것을 깨달았다.

 내가 조금만 더 솔직했더라면. 내 마음에 솔직했더라면.

 

 지나치게 무심했던 몇 가지 기억들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난 반에서 가장 키가 작은 아이였고 나와 같은 조가 된 남자애는 반에서 키가 가장 컸다. 이름은 찬호였다. 박찬호. 잘나가던 야구선수와 이름이 똑같아서 또렷이 기억한다. 같은 조 애들과 얘기하다가 내 생일이 오늘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박찬호는 생일파티에 가도 되겠냐고 물었고 난 가족끼리의 파티라고 했다.

 그런데도 그 애는 오겠다고 했고 난 친하지 않은 남자애가 날 축하해준다는 것도, 우리 집에 온다는 것도 껄끄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오는 게 싫어. 오지마. 라고 할 수 없어서 아파트 이름, 동은 제대로 말해주고 층만 바꿔 4층이라고 말했다. 우리 집은 14층이었다.

 

 그 시절 나는 애매하게 못됐고 애매하게 머리를 굴렸다.

 

 그 날 저녁, 아빠, 엄마, 나 이렇게 세 가족이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띵동. 누군가 우리 집 초인종을 눌렀고 인터폰을 보니 박찬호가 헉헉거리면서 문 앞에 서 있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나는 숨었고 엄마가 문을 열어 주었다. 박찬호는 4층이 아니라서 계단으로 한 층씩 올라오면서 초인종을 일일이 눌러 지우네 집이 맞는지 물었다고 했다.

 왜 내게 층수를 다르게 말했냐고 묻지도 않았다. 못 찾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라며 좋아했다.

 나한테 당하고도 좋다고 실실 거리는 게 멍청해 보였다. 엄마와 아빠는 매우 즐거워 보였다. 친구도 같이 축하파티를 하자는 말에 박찬호는 우리 집을 찾느라 시간이 너무 늦어서 선물만 주고 집에 가봐야 된다고 말했다. 박찬호는 케익 한 조각 얻어먹지 못하고 선물만 주고 갔다. 선물이 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가족들은 아쉬워하고 미안해했다. 나만 뚱했다. 왜 이렇게까지 내 생일을 축하하려는 거야. 부담스러워.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얼마 되지 않아 그 애는 전학을 갔다.

 

 그리고 초등학교 2학년 때도 여전히 나는 뚱했다.

 어느 날이었다. 그 날은 유난히 일찍 등교한 날이었다. 책상 밑 서랍 속에 웬 색칠놀이 책이 있었다. ‘넌 정말 귀여워. 니가 웃으면 내 기분도 좋아져.“라는 쪽지와 함께. 좋지 않았다. 동갑한테 귀엽다는 말을 들은 게 오히려 기분 나빴다. 난 그 책이 아까워서 색칠하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쪽지는 그 날로 바로 버려졌다. 누가 준건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 내 웃는 얼굴을 좋아하는구나 하고 말았다. 누군지 찾아내지 않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고 몰래 넣어놓은 거니까. 지금 생각해보니 그 아이에겐 못할 짓이었던 것 같다. 누군지 알아볼 걸. 아는 티 내지 말고 몰래 그 아이에게 잘해줄걸. 아주 나중에야 후회했다. 난 여전히 무심하고 나빴었다.

 

 고등학생 땐 누가 인형이 담긴 상자를 집 앞에 두고 갔다. 직접 캐릭터를 그려놓은 상자였다. 직접 그림을 그렸다는 게 신기했지만 내 나이에 캐릭터 그림에 인형이라니? 그렇게 생각했다. 내 집을 안다는 게 찝찝하기도 했다. 나는 경계하고 메마른 사람이었다.

 

 현재의 나는 연애를 하고 있다. 사랑하기 위해 사랑했다. 내가 열정이 충만한 사람임을, 낭만과 감상을 아는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해 사랑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감정들 중 어느 것 하나 모자람 없이 충족한 사람임을 확인하기 위해 사랑했다.

 

 사실 나는 사랑보단 분노, 혐오가 충만한 사람이었다. 분노의 대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있었지만 사랑의 대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내 자신을 객관화하여 바라보기로 하였다. 나에 대한 사실들을 정리해나갔다.

 나는 걱정이 지나치게 많다. 내게 걱정 없이 산다는 것은 생각 없이 산다는 것과 똑같았다. 난 끊임없이 걱정하고 근심하면서 내가 살아있음을, 그것도 맹렬히 살아가고 있음을 재차 확인하고자 했다.

 

 나는 하고 싶은 것이 없다.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당장 다음날 죽는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이뤘기 때문도,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내가 원하는 것을 몰랐다. 내게 필요한 것은 오직 휴식이었다.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래. 차라리 죽어버리자.

 

 나는 죽는 것이 두렵다. 앞선 말과 완전히 정반대의 말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나는 정말이지, 죽는 것이 두렵다. 병이 있는 것도, 크게 아팠던 적이 있는 것도,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자주 죽음을 상상하며 두려워한다. 학생 때는 흉하게 늙기 전에 50살에 죽는 게 좋겠어. 하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나는 죽는 것이 너무나 두렵다. 왜일까? 어릴 땐 아쉬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너무 불쌍하다. 이렇게 행복하지 않고 죽어버리기엔 열심히 살기만 한 내 자신이 불쌍해 죽을 수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행복하지 않아서 죽기가 싫어진 것이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란 말이 있지 않은가. 죽기 싫다는 것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니 그에게 연락 한번 하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인가 싶었다. 카카오톡 친구목록에서 그를 찾아냈다. 프로필사진은 몇 년 전과 똑같았다. 메시지를 보내고 한참이 지난 후에 답이 왔다.

 

 <잘 지내?>

 <오랜만이다ㅋㅋ 잘지냈냐>

 <그냥 회사 다니고 있어. 아버지 부고소식 들었어. 괜찮아?>

 <어ㅋㅋ>

 <한번 볼래?>

 <그래그래ㅋㅋ>

 <다음주 월요일 어때>

 <너 회사가 어딘데>

 <성수쪽이야>

 <그럼 사당역에서 보자>

 <2번 출구에서 7시에 봐>

 <오케이>

 

 성의 없는 답변. 일방적으로 잡은 약속. 설렁설렁한 카톡 말투는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더 대충이었다. 몇 년이 지났으니 당연한 건가? 그 전에도 아무 사이가 아니었는데 몇 년이 지난 지금이라고 달라질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아무것도 아닌 사이였다. 그래도 더 이상은 물러나지 않을 작정이다. 마음을 아끼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다는 걸 아니까.

 

 

 수현은 약속시간 한 시간이 지나도록 나타나질 않았다. 오매불망 그를 기다리며 휴대폰을 붙잡고 있던 지우는 카톡 알림이 뜨자마자 읽었다.

 

 <아 미안 깜박했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상견레 때문에 정신없었어>

 <결혼하는구나>

 <어ㅋㅋ 진짜 미안><청첩장 보낼게>

 <뷔페 왕창 먹을거야>

 <그래그래ㅋㅋ>

 

 신기하게도, 바람 맞힌 수현에게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싶어 걱정했는데 오히려 다행이었다. 호기롭게 연락한 것에 비해 결과는 허무했지만 이 정도면 됐다 싶었다. 아쉬워도 어떻게 하겠어. 할 만큼 했잖아. 홀가분했다. 결혼하는 사람한테, 만나기 싫은 사람한테 강요할 순 없다고.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이제 정말 일말의 미련도 없다. 괜찮다.

 

 지우는 그날 밤 마지막으로 휴대폰 속의 수현의 사진을 찾아봤다. 그리고 블랙베리 폰을 처분했다. 전화번호도 바꿨다. 이제 이 번호를 쓰는 것이 옳지 않다고 느꼈다.

 

 「그러니까 너도 마음 아끼지 마. 그것도 다 상대가 있어야 돼. 타이밍도 맞아야 되고. 시간이 지나버리면 마음 쓸 상대도 없어져. 마음껏 치대고 울며불며 붙잡아. 충분히 슬퍼하고 아파해. 네 마음 남김 없이, 미련 없이 다 써버려. 놓치고 나면 하고 싶어도 못 해.」

 

 「전 팀장님한테 연락 안 할 거에요. 만난다고 해도 하룻밤 자는 것 밖에 더 있겠어요? 그런 사이가 되고 싶진 않아요. 그런 식으로 끝나고 싶지 않아요. 이렇게 이별하는 게 맞는 거 같아요.」

 

 「네가 나보다 낫다. 난 이별이 참 어려웠거든. 사랑도 할 줄 모르는데 이별은 오죽했겠어? 사랑보다 이별을 먼저 하려니 참 어렵더라.」

 

 기용이 이별을 고하며 말했다.

 “네가 행복했음 좋겠어.”

 

 지우는 가슴이 너무 쓰렸다. 6년 동안 기용은 지우에게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너무 당연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없어선 안 될 존재, 지우 자신보다 지우를 더욱 아껴준 사람이었다.

 

 기용은 항상 지우에게 입버릇처럼 “네가 행복했음 좋겠다”고 말했다. 처음에 지우는 그 말이 듣기 싫었다. 지금은 불행해 보인다는 건가?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진정한 의미를 알았다. 자신과 함께하는 내가 행복하지 않다는 걸 기용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우가 6년 동안 한 번도 자신을 사랑한 적 없다는 것을.

 

 담담한 기용의 말에 지우는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6년간 가슴앓이 했을 기용의 앞에선 슬퍼할 권리도 없었다. 그 앞에서 눈물 흘리는 자신이 너무 파렴치하고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그가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 동안 어떻게 견뎠어? 함께 하면서 행복해하지 않는 날 볼 때마다 얼마나 아팠어?”

 

 기용이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정말 하늘의 별을 따준대도 지우는 행복해하지 않았다. 사랑 따윈 바라지도 않으니 그녀가 행복해했음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그저 웃어만 주면 좋겠다고 웃어보라고 아이처럼 떼도 쓰고 화도 내고 토라져도 봤다.

 

 지우와 처음으로 함께 밤을 보낸 날, 기쁨보다는 불안함이 앞섰다. 그 날 지우의 분위기가 묘했다. 기용이 잠깐 새벽에 잠에서 깼을 때, 휴대폰으로 누군가의 사진을 보면서 웃는 그녀를 보았다. 진짜 웃음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녀도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단지 그녀를 웃게 만드는 건 자신이 아닐 뿐이었다.

 

 그걸 알았으면서 참 오랜 기간 미련을 부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있었다. 지우는 강한 척하는 겉모습과는 달리 유약한 내면을 가진 사람이라서 이별을 고하는 법을 몰랐다. 누구보다 냉정한 척하면서 사실은 바보 같은 사람. 다른 사람들은 지우가 기용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오히려 지우를 이용하고 죄책감을 인질로 삼는 것은 기용 자신이었다.

 

 “난 널 사랑하는 동안 행복했어. 내가 너한테 행복을 빚진 거야.”

 

 “사랑해줘서 고마워. 사랑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어쩌면 잔인한 진심이었다. 집에 돌아오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지우는 토악질을 했다. 아무것도 먹은 게 없어 토사물이 전혀 나오지 않는데도 헛구역질이 계속 나왔다. 이렇게 자기혐오가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곧 지우는 많은 것을 정리했다. 거추장스러웠던 긴 머리를 짧은 단발로 잘랐다. 가지고 있던 물건은 최소한의 것만 남기고 모두 처분했다. 어디든 캐리어 한 개만 덜렁 들고 떠날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한 달 뒤 회사를 관뒀다. 제로(0)에서 시작하자.

 

 「그래서 제주도로 내려오게 된 거에요?」

 

 「응. 퇴사하고 바로 제주도로 내려왔어. 기약 없이. 계획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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