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회 – 마음대로 해도 괜찮아
달칵. 문이 조용히 열렸다. 다물어진 재현의 얼굴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이 적막은 무엇이지? 재현은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그러다 본 것은 넋 나가 서 있는 도윤이었다.
도윤은 안쪽 녹음실에 멍하니 서 있었다.
충동적이었다. 그 모든 것은.
*******
눈물 맺힌 얼굴을 본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제가 울린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자신이 울린 것만 같았다.
설명할 수 없는 눈물에 가슴이 조여들었다.
「저도 외롭지 않았었겠죠?」
「내 마지막 날에 누군가 함께였겠죠?」
‘그게 무슨 말이야. 네 마지막 날이라니.’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혹시 안 좋은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왜냐하면 그 말은 진심이었으니까.
이 여자는 자신의 마지막이 고독하지 않았을거란 확신을 받고 싶어했다. 진심으로.
더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수없이 되뇌었을 생각들 중 이 아이는 ‘말해도 되는 것’을 골라 말한 것일 테니까.
이상하게 이 아이는 멀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닿기도 전에 멀리 떠나가는 시간일 것만 같았다.
‘.......그건 안돼.’
그래서였다. 억눌렀던 마음이 바보처럼 터져버리고 말았다.
어느새 제가 이 사람을 붙들고 있었고, 어느새 그 향기가 제 품에 안겨 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심장이 요동쳤으나 그럴수록 더 놓을 수 없었다.
부디 이 사람의 마음이 가라앉기를, 그래서 이제 다시는 떠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이해할 수 없는 소망이 울고 있었다.
“.......”
그러나 곧, 떨리는 손이 제 가슴에 닿았다. 그와 동시에 이 사람은 저를 밀어냈다. 희미한 힘이 밀어내자 이 사람을 붙들었던 손은 속절없이 떨어졌다.
“......벼리야.”
“죄송해요....... 전 이만 가볼게요.”
“.......잠깐만!”
도윤은 자신도 모르게 이 이를 붙들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그저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밖으로 나가버렸다.
*******
더 참았어야 했는데, 다 어리숙한 제 탓인 것만 같았다.
“아니지. 다 내 잘못이지...... 내가 왜 그런거지, 도대체......”
그저 멍하니 빈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을 때였다. 머뭇거리는 목소리 하나가 멀리서 울렸다.
“......형. 괜찮아?”
“아...... 재현아, 왔어?”
도윤은 아직 상념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 천천히 재현을 돌아보았다. 그러다 답이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살짝 웃었다.
“그래, 답이 없지. 답이 없어.”
“형?”
“있어, 나 나갈게.”
“.....어.”
도윤이 곧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혼이 나간 듯 도윤은 여전히 정신없어 보였다. 재현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며 조용히 물었다.
“형, 그...... 벼리는? 벌써 간 거야?”
“아...... 응...... 그렇지.”
그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 그리곤 힘이 든 듯 이마를 쓸어올렸다. 무슨 일이 있던 건지 표정이 불안해 보였다. 하지만 이를 캐물을 새도 없이 도윤이 먼저 선수를 쳤다.
“채영이랑은 무슨 얘기 한 거야? 꽤 걸렸네.”
“아, 그냥 뭐...... 이런 저런......”
“둘이 그런 얘기 할 정도로 가까웠던가?”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도윤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었고.
재현이 월야에 승윤 대신 들어오기로 한 시점부터, 승윤은 도윤에게서 철저히 격리되었었다.
도윤이 고분고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다는 게 윗선의 결론이었다.
심지어 승윤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이유로 도윤은 승윤과 철저히 연락이 끊기게 되었다. 승윤이 더 이상 연예계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 그러니 도윤과도 연락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그 이유는 위에서 내려온 거짓말이지만. 승윤은 나중에 정신이 든 이후로 도윤을 만나게 해달라 부탁했었다고 하니까.
‘그런데 이걸 말하면...... 분명 형은 본인이 그룹을 탈퇴하는 한이 있더라도 내게 등을 돌리겠지.’
어디에도 재현이 기댈 곳이 없는 것 같았다. 물론 죄를 지은 자로서 기대려 한다는 자체가 사치지만.
이 와중에 어느새 도윤의 표정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염려에 재현은 애써 씩 미소 지었다.
“그냥, 뭐. 형이 벼리랑 둘이 좀 있으라고 자리 비켜준 거지.”
“뭐?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모르면 되나? 그냥 딱 보면 나오지. 난 지금 뭐 누구한테 뭐라 할 처지도 아니니까 흘러가는 대로 두려고.”
“그게 무슨 말이야? 흘러가는 대로 둔다니?”
재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형. 오늘 둘이 술 한잔 할래?”
“?”
*******
“네가 웬일이야? 요새 뭐 아프다는 핑계로 나도 피해다니더니.”
술을 따르던 재현의 손이 멈췄다. 재현은 조금 머쓱한 표정으로 씩 웃었다.
“뭐야, 다 알고 있었어?”
재현은 이제 제 잔에 술을 따랐다. 도윤은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하지. 사실 너 요즘 들어 내내 이상했잖아.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 것처럼.”
“형은 나 엄청 신경 쓰였나 보네.”
“에휴, 그걸 말이라고 하냐.”
그가 픽 웃었다. 그리곤 술잔을 들자 재현이 얼른 제 잔을 내밀었다. 가볍게 웃으며 잔을 부딪힌 후 도윤은 술을 조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재현은 그걸 보며 따른 술을 모조리 털어 넣었다.
“야, 넌 그래도 상태 안 좋은 애가 처음부터 그렇게 마시면 어떡해.”
“......고마워, 형. 형 술 마시는 거 안 좋아하는데 이렇게 선뜻 와줘서.”
도윤이 재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웃고 있지만 재현의 표정은 위태롭기만 했다.
“정말 왜 이렇게 나 걱정시키는 사람이 많은 건지 모르겠다.”
“응?”
“그렇다고 나한테 말해주는 것도 아니고......”
도윤은 조용히 제 잔을 보았다. 맑은 액체에 파동이 일고 있었다. 더 이상 손을 대지 않아도 파동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렇다고 말해 달라 할 수도 없고.”
도윤은 점차 가라앉던 잔을 꽉 틀어쥐었다. 그 바람에 술이 찰랑였으나 그는 곧바로 전부 마셔버렸다. 재현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무튼, 그렇다고. 여기저기서 날 좀 힘들게 하네. 너도 포함해서.”
“.......”
도윤은 살짝 웃고 있었다. 재현은 뭔가 그 시선을 마주하기 어려워 고개를 떨궜다. 그리곤 상에 시선을 꽂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형. 세상엔 아무리 노력해도 될 일은 되고, 안 될 일은 안 되는 것 같아......”
“.......”
재현의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였다. 탁, 탁, 상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방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는 또 자신만의 세상에 가 있었다. 한없이 명랑하고 밝았던 재현이 이러니 도대체 무슨 일인가 답답할 뿐이었다.
“난 있지. 정말 많이 노력했어. 좋은 길이든 나쁜 길이든.......”
“.......”
“그럼 된다고 했거든. 꾹 참고 달리면 다 될 거라고.”
재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결과는 어땠는가. 삶이 박살난 승윤과, 죽어 돌아온 벼리였다. 그 앞에 도출된 결론은.
“이것저것 다 외면하고 달려온 결과는...... 그냥 내 끝이더라고.”
“재현아...... 너 도대체 왜 그래, 응?”
도윤이 급히 재현의 옆으로 가 앉았다. 재현은 다가온 사람에 조용히 눈을 들었다.
도윤의 동공이 급격히 요동치고 있었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걱정하지 마. 나 승윤이처럼 안 되니까.”
“......재현아! 너, 대체......”
“.......”
재현의 턱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복달한 감정을 누르는 듯 인상이 찡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곧 그 얼굴은 도윤에게 달려들었다.
삽시간에 잡힌 멱살에 놀란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해?!”
“재현아!”
“이렇게 못 볼꼴, 더러운 꼴 다 보면서 올라왔는데!”
“......!”
“어차피 될 일은 되고, 안 될 일은 안 되면 여태까지 내가 해 온 노력은 다 뭔데!”
재현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불안한 시선에 진동이 일고 있었다.
그때, 큰 손 하나가 재현의 손에 덮였다.
“......!”
그 손에 의해, 재현이 쥐었던 옷자락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제가 한 행동에 놀란 재현이 얼른 시선을 틀었다.
“미, 미안해...... 내가 왜 그랬지...... 형 잘못이 아닌데.......”
“.......”
떨리는 손이 급히 술잔에 향했다. 그러나, 곧 다가온 손에 의해 눌린 손은 잔을 들지 못했다.
“그럼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뭐?”
멍해진 눈이 위로 들렸다. 슬픈 듯 깊어진 얼굴이 시야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어차피 뜻대로 흘러가는 것 하나 없었다며. 네가 더러운 짓을 해도 달라진 게 없었다며.”
“.......”
“그럼 뭐하러 계속 맞추면서 사냐고. 어차피 네가 바란 건 돌아오지도 않는데.”
재현이 이를 악물었다. 알 수 없는 억울함이 속에서 치솟고 있었다.
그들이 말해준 노력의 끝에 나타난 결론에서, 그들은 또다시 더러운 노력을 하라 말한다.
모른 척하라고. 나타난 결론을 모른 척하라고.
손에서 술잔이 빠져나갔다. 그 감촉에 멀리 떠났던 재현의 시선이 돌아왔다. 도윤은 조용히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네 마음 내키는 대로 하라고.”
“......내가 그래도 될까? 난 형이 알았던 사람이 아닐 수도 있는데......”
“그래도 돼. 넌 나쁜 사람이 아니잖아.”
“......!”
도윤은 잠시 재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그의 손을 살짝 토닥였다.
“제발 이제 나 걱정 시키는 사람 좀 없었으면 좋겠다.”
“.......”
“그게 신종 취미인가? 나 골려주는 게? 아니면 일부러 공짜 술 먹으려고 꾀부리는 건가?”
픽 웃음이 나왔다. 재현이 웃자 도윤의 표정이 풀어졌다. 간신히 한숨 돌린 듯 안도의 미소가 띠어졌다.
그때, 재현이 문득 말을 꺼냈다.
“형, 나 부탁할 게 하나 있어.”
“뭔데?”
*******
(언니, 자요?)
안 자는 거 다 알면서 물어보는 거다. 지금 잠이 올 리가 있냐고.....!
정말 도윤은 나를 연모하는 걸까? 그런데 내가 새 사랑을 찾아도 되는 걸까? 아직도 사종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전생에 사내의 마음들을 다치게 한 죄로 내 시신까지 버려달라 청한 주제에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니.
「천한 기생년이 감히 누구의 앞길에 초를 치려 하느냐!」
(언니, 그런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
(요즘 세상에 그런 건 없어요. 신분은 없어지고, 남녀의 차이도 점차 달라지고 있잖아요.)
“안다. 내 어찌 그걸 모르겠느냐......”
벼리가 침대에 가만히 걸터앉았다. 등 돌려 누웠던 나는 그 기척에 천천히 돌아누웠다.
(그리고 그 언니가 만났다던 사람은 언니를 결국 버렸잖아요.)
“그것 또한 내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니 할 말이...”
(저는 언니가 더 중요해요. 언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벼리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 선한 눈빛에 거짓은 없었다.
(단순히 제가 붙들어 오긴 했지만...... 언니가 제 몸에 맞게 들어온 건 분명 다른 이유도 있을 거예요.)
“......다른 이유?”
(네. 전생에 가엾은 삶을 살았으니까...... 이번 시간에 마음껏 사랑받다 가라는 게 아닐까요?)
“......네 한부터 풀어줘야지. 그래야 네가 날 극락에 보내줄 것이 아니냐.”
벼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나 나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데뷔 무대를 보면 좋겠지만, 전 사실 그보다 더 큰 걸 얻은 것 같아요.)
“큰 거?”
(네. 제가 친구들에게 둘러싸이고, 같이 웃고 떠들고, 때로는 친구들이 나를 보호해 주는 걸 볼 수 있었잖아요.)
“.......”
(이상하게 계속 기억나진 않지만, 영 기운도 없고 실력도 없었던 것 같은데 언니 덕분에 엄청 노래 잘 부르고 춤도 잘 추는 저를 볼 수 있었구요.)
나는 물끄러미 벼리를 바라보았다. 푸르고 하얀 밤빛이 벼리의 혼에 부서지고 있었다.
“너 원래 잘 했잖아. 보아하니 채영이 고것이 널 계속 쥐잡듯 잡아서 기 못 편 모양이던데.”
(아, 그것도요! 언니가 막 채영이 다 물리치는 것도 좀 좋았어요. 진짜 언니 때문에 요즘 행복한 시간만 가득해요. 나중에 진짜 떠나야 할 때 너무 아쉬울 것 같아요.)
나는 조용히 손을 뻗었다. 그리곤 잡히지 않을 벼리의 손 위를 덮어보았다. 마치 얼음물에 담기듯 냉혹한 오한이 스며들었으나 꾹 참고 있어 보았다.
벼리는 나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걱정 말거라. 그때 나랑 함께 갈 거잖니.”
(.......)
“우리 둘이 오손도손 걸어가자. 가는 길에 사종을 만나면 소개시켜 줄 테니 그땐 네가 한 방 먹여 주든가.”
벼리가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그때, 벼리가 웃음을 뚝 멈추었다.
왜 저러나 싶을 때 핸드폰 불빛이 반짝였다.
“이 시간에 연락 올 사람이 없는데?”
혹시 도윤인가 싶어 핸드폰을 집으려 할 때였다. 그와 동시에 멀리서 기척이 들렸다.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문이 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