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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코 끝이 간지러울 뿐이라서
작가 : 바비수
작품등록일 : 2020.8.19

그 흔한 사랑고백도 없었다. 격렬한 포옹, 격정적인 키스도 없다!
자극적인 대사, 스킨십 한 번 없이 잔잔하고 소소한 순간들만 있었을 뿐!
그저 간지럽기만 했던 그 시절, 지우와 수현.
그 때 우린 뭐였을까? 이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6 왜 첫사랑은 모두 X년, X놈일까?
작성일 : 20-09-11 13:01     조회 : 209     추천 : 0     분량 : 8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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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식 먹을 배는 따로 있어서 디저트를 꼭 먹어줘야 된다는 지우의 말에 수현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가자~ 가~” 하며 잠자코 따랐다.

 

 지우는 카페에 있을 땐 신발을 벗고 발을 맞은편 의자에 올려두는 버릇이 있었다. 테이블에 의자가 단 두 개 밖에 없어 지우가 발을 올려놓을 의자를 찾으며 두리번거리자 수현은 익숙하단 듯이 비어있는 테이블에서 의자를 끌어와 지우의 맞은편에 놓으며 “하여튼 나쁜 버릇은 다 가졌지.” 라며 구시렁거렸다.

 

 “나도 동기 애들이랑 사이 안 좋아. 소문도 안 좋고. 신입생 때 친해진 여자동기가 있었어. 걔가 같이 놀이공원에 가자고 해서 같이 갔거든. 거기서 사귀자고 하더라고... 내가 그냥 친구로밖에 생각 안 한다니까 안 좋게 소문을 내서 그 이후로 동기 여자애들도 그렇고 남자애들도 나 싫어해.”

 

 수현은 정말 속상한 표정이었다. 누구라도 그 표정을 봤다면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달래주고 싶을 만큼.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지우는 내심 놀랍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하지만 지우는 위로해줄 여유가 없었다. 화나는 감정이 앞섰다.

 

 “당연히 여자가 남자한테 단 둘이 놀러 가자고 하면 고백이나 마찬가지인데. 그걸 수락했으면 그 여자도 자기한테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지. 정말로 몰랐어? 그 여자가 너 좋아한다는 거?”

 

 “난 그런 게 어려워. 잘 모르겠어.”

 

 지우는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와 놀이공원에 갔다는 수현의 말에 기가 찼다. 그럼 지금도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와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있는 걸까? 남녀가 단둘이 밥을 먹는 것에 그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사상이 뒤떨어지고 촌스러운 것일까? 그는 일부러 눈치 없는 척하는 걸까? 한없이 편한 사람인 척 해놓고 맘 속으론 난 너희랑은 급이 달라, 특별한 존재라고 우월감을 느끼는 게 아닐까?

 

 「놀이공원 때문에 착각한 여자애나 나나 똑같은 신세더라고. 나도 혼자 기대하고 설레고 착각한 거야. 걔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나한테 잘해준 건데. 너무 화가 났어. 바보도 아니고 어떻게 친구 사이랑 이성 사이의 차이를 못 구분해?」

 

 “난 고백해 본 적도 없어.”

 “쭉 자랑질 하시겠다?” 지우는 비꼬았지만 수현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누군가한테 관심이 생겼다가도 너무 바빠서 그 감정을 까먹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그 사람의 존재조차 잊게 되더라고.”

 

 지우가 얼굴을 찌푸렸다.

 오만한 위선자. 지우는 수현이 모든 사람에게 가깝게 대하지만 사실은 진심으로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누굴 좋아해본 적도 없어?”

 “음…세라누나? 첫사랑이었어.”

 광고홍보학과를 졸업하고 과 조교를 하고 있는 선배였다. 하얀 얼굴, 큰 기, 세련된 웨이브 머리, 항상 웃는 얼굴, 사려 깊은 말투. 전형적인 첫사랑 이미지. 예측불가 수현도 결국엔 다른 남자들이랑 보는 눈이 똑같다는 사실이 왠지 실망스러웠다.

 

 “아, 세라 누나도 너 알더라? 내가….”

 “뭐? 왜 남 얘길 함부로 해? 지우는 수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불쑥 화를 냈다.

 “아, 미안. 진짜 미안해. 기분 나쁠 걸 생각 못했다.”

 눈에 띄게 차가워진 지우의 표정에 수현은 어쩔 줄 몰라 허둥지둥 대며 말했다.

 너무 미안해하는 수현의 모습에 오히려 놀란 지우는 미안하다는 말을 처음 듣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우가 아무리 타박을 줘도 익살스럽게 넘어가던 수현이 처음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그 선배한테도 바빠서 고백하는 거 까먹었어?” 지우가 비꼬면서 물었다.

 “좋아한다는 감정이 뭔지도 잘 모르겠고…. 솔직히 연애라는 게 좀 시간낭비처럼 느껴져.”

 

 예상치 못했던 답변이었다. 가장 순수해 보였던 소년은 누구보다 회의적이고 냉소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정말 멋진 누나라서 지금처럼 좋은 선후배로 지내는 게 더 좋아. 꼭 이성으로서 말고 인간으로서 좋은 관계 있잖아.”

 “정말 남녀 사이에 친구가 있다고 생각해?”

 “당연하지.”

 “좋은 선후배, 좋은 친구 사이? 이성끼린 절대 그런 관계가 될 수 없어.” 지우가 단언했다.

 “내가 오늘 너의 그 고정관념을 깨줄게. 그게 내 목표다.” 수현이 선포하듯이 과장되게 말했다.

 

 수현의 말에 자신은 그저 수현이 관리하는 수백 개의 인맥 중 하나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저 게임 속 어려운 맵이라서 아무리 밀쳐내도 넌 오히려 승부욕이 발동해서 더 다가오는 거야. 퀘스트 클리어하듯이. 나는 네가 깨야 하는 미션이 아니야.

 

 “너나 피곤하게 인맥관리 열심히 해. 난 귀찮은 인간관계, 그딴 거 필요 없어.”

 “참나. 그러는 니 첫사랑은 누군데?”

 “난 첫사랑 없어.”

 “뭐야. 재미없게. 난 얘기 다 했는데.”

 

 사실 첫사랑이라고 할만한 거창할 것이 없었다. 그나마 기억에 나는 건 초등학교 3학년 때 다녔던 영어학원 원장선생님의 아들. 왜 좋아했는지 그 이유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심지어 얼굴조차 희미했다. 기억나는 거라곤 그냥 헐렁한 표정과 설렁설렁 걸어가는 뒷모습뿐.

 

 수현의 첫사랑에 견줄만한 거창한 첫사랑을 지우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우는 첫사랑이 없었다. 누군가를 열렬하게 사랑한 적도 갖고자 욕망해본 적도 없었다.

 

 「첫사랑이라는 거 사실 없는 건지도 몰라. 가장 아팠던 사랑이 기억에 가장 강하게 남아서 그게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첫사랑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 아닐까.」

 

 “아무튼 모든 인연은 예쁘게 다뤄야 해.”

 “가르치려고 드는 거 짜증나.”

 근데 그게 맞는 말이라 더 짜증나. 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제 가자."

 이번에도 헤어짐을 알리는 건 지우였다.

 

 

 “우리 이제 친해진 거 맞지?”

 기숙사에 말도 없이 들어가려는 지우의 등 뒤에 대고 수현이 놀이터에서 실컷 놀다가 ‘내일 또 보자!’며 친구와 작별인사 하는 아이처럼 해맑게 외쳤다.

 

 “아니. 전혀.”

 지우가 무섭도록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쌩 하니 돌아섰다.

 

 내게 장난스럽게 웃을 때면, 매너 좋게 대할 때면 그에게 아무것도 아닌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내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서 난 그것이 싫었다. 나는 어쩌면 그래서 그를 화나게 만들고 싶었는지 모른다. 불쾌하게 만들고 싶었는지 모른다. 진짜 네 얼굴을 보여줘. 익살스러움을 연기하지 않는 너를 보여줘. 하지만 그 노력은 언제나 수포로 돌아갔다.

 

 너는 사람들한테 외면 받거나 미움 받는 걸 무서워해. 모두가 널 좋아하고 편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길 바라지. 그러면서도 너무 가깝게 다가오는 건 또 싫어해. 단체모임엔 꼭 참석하면서 개인적인 연락은 절대 안 하지. 모든 여자들한테 친절하게 굴면서 막상 너와 깊은 사이가 되길 원하면 미안. 네가 오해할 줄 몰랐어 라고 몰랐던 척 쳐내면서 마음속 깊은 곳에선 넌 나한테 가당치 않아. 주제 넘지마. 라고 생각하지. 넌 참 모순되면서 건방진 사람이야.

 

 그렇게 수현을 비난했지만 사실은 두려웠다. 수현은 모두와 두루두루 친하지만 절대 그 이상은 곁을 허용하지 않는 사람이란 걸 알았다. 지우는 자신 역시, 그에게 스치는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억울했다.

 

 

 

 “완전 바람둥이네. 너 갖고 노는 거야.”

 1학년 때 룸메이트였던 유리가 말했다. 학과는 달랐지만 지우와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오랜만에 함께 점심을 먹으며 지우가 슬쩍 수현의 이야기를 꺼내자 유리는 혀를 끌끌 찼다.

 “그런 걸까?”

 “하는 짓이 고수잖아. 다 어장관리야.”

 지우는 내심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했으나 단호한 유리의 판결에 일말의 기대조차 사라졌다.

 

 “어, 지우야!”

 정민이었다.

 “혼밥하려고 했는데 잘 됐다. 나도 같이 먹어도 되지?”

 정민의 말에 지우가 유리에게 살짝 괜찮은지 물었다. 유리는 당연히 괜찮다고 말했다. 정민은 주문을 하고 이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지우에게 건넸다.

 “잘 됐다. 나 사실 이번 학기 마치고 결혼하거든. 원래 모바일 청첩장 보내는데 너한테는 특별히 실물 청첩장 줄게. 꼭 와~ 아 근데, 혼전임신이라 다른 사람한테는 말 안 해줬음 좋겠어.”

 

 급작스런 소식이 연달아 쏟아져 나왔다. 지우가 얼떨떨하게 축하한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유리도 덩달아 축하 드린다고 말했다. 정민의 결혼식에 갈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지우는 자신이 매정한 건지 다소 혼란스러웠다. 성격 좋은 유리는 지우보다 더 많이 정민과 예비신랑, 결혼준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식사 후 계산대에 서자 유리가 “지난번에 네가 샀으니까 이번에 내가 살게.”라며 지갑을 열었다. 계산서에는 정민이 먹은 음식까지 포함되어 있었지만 정민은 멀뚱히 서있을 뿐 지갑을 열 생각이 없었다. 결국 유리는 정민의 음식까지 계산했다. 지우는 이 상황이 몹시 불편하게 느껴졌다. 유리가 자신 때문에 잘 모르는 사람의 음식값을 계산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정민을 바로 옆에 두고 유리에게 네가 왜 정민의 것까지 계산하느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난 수업 들으러 갈게!”

 “네. 유리랑 결혼식 갈게요.”

 “그래! 근데 축의금은 따로 낼 거지? 식대가 인원수대로 나가는 거라!”

 

 

 지우는 밤만 되면 교내 동산에 올라 길고양이에게 밥을 줬다.

 커플끼리 오면 사랑이 영원할 거란 말도 있었고 커플끼리 오면 무조건 헤어진다는 말도 있었다. 상반된 설화가 내려오지만 아무튼 그곳은 CC동산이라고 불렸다. 까만 길고양이를 처음 봤을 땐 매우 작고 새까만 털만 삐죽삐죽 해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석탄 옮기는 숯 검댕이들 같았다. 그래서 지우는 그냥 <센>이라고 불렀다. 센에게 밥을 주는 저녁 시간대엔 통학생들은 모두 집에 가고 없었고 가로등도 없는 CC동산엔 기숙사생들도 드물었다. 지우는 아무도 없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그 날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 당연하죠. 제 동생인데 오빠로써 해줘야죠.”

 통화를 마친 수현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또 마주하게 된 낯선 모습이었다. 전혀 다른 수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낯설었다. 하지만 왠지 안쓰러웠다. 안 그래도 두꺼운 입술이 여기저기 부르트고 물집이 잡혀 있었다. 사람들 앞에선 바보같이 웃으면서 머리 속으론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걸까. 저 사람은.

 

 지우는 왠지 들어선 안될 대화를 엿들은 것만 같아서 자리를 뜨려고 했다.

 “어쭈, 아는 척도 안 하냐?” 수현이 말했다. 평소처럼 장난치듯 말했지만 시니컬하고 냉담한 기운이 느껴졌다. 맨날 모르는 척 하는 게 누군데. 어이없기도 했지만 자신이 자리를 피하려고 했던 걸 수현이 발견한 게 괜히 멋쩍었다.

 “아, 담배 냄새.” 지우가 괜히 코를 잡고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참나.” 수현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조금 옆으로 떨어졌다. 담배를 끄지 않는 고집이 얄밉기도 하고 상황 자체가 머쓱해서 그냥 내려가려고 할 때 수현이 대충 발로 담배를 비벼 끄며 말했다.

 “철학 수업 괜히 들었나 봐. 하나도 이해가 안 가. 중간도 망쳤는데 기말도 걱정이다.”

 지우는 뜬금없다고 생각했다가 정민의 말이 떠올랐다. 수현이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하는 학생일 수도 있고 잘 하는 학생일 수도 있다. 어쩌면 자신과 과탑을 다투는지도 몰랐다. 수현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으니까. 지우는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노트라도 빌려줄까 라고 말하려던 차였다.

 

 “넌 어떻게 질문 한 번 없이 만점을 받아? 진짜 대단하다. 너 머리가 엄청 좋은가 봐.”

 

 중간고사 이후 철학교수님은 유일하게 만점을 준 학생이 딱 한 명 있다며 그게 지우라고 하였다. 옆에서 수현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교수의 성적 공개에 지우는 다소 민망하고 부담스러웠다. 자랑스럽고 당당한 게 아니라 오히려 억척스럽고 성적에 집착하는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수현의 곁에만 있으면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수현은 항상 교수님에게 시시콜콜한 것도 다 질문했다. 그러면 전공교수님은 그것도 모르냐며 면박을 주었고, 철학교수님은 사람 좋게 웃었다. 하지만 공통적인 반응은 결국엔 흔쾌히 답변을 해준다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는 거 많은데 그냥 넘어가는 거야. 물어보는 게 쪽팔려서. 그래서 나한테는 네가 대단해. 나 사실 되게 잘 쪽팔려 하는 성격이거든.”

 

 지우는 사람들한테 어떤 것을 물어볼 때마다 자신이 아주 멍청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모른다는 게 두렵고,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들킬까 봐 두려웠다. 지우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 질문하는 게 두려웠다. 수현에게 이 말을 하는 지금 이 순간조차도 자신을 멍청하게 볼까 봐 두려웠다.

 

 “그런 성격은 뭐냐.”

 “나 사실 신발끈 잘 못 묶어. 근데 신발끈 묶는 법 물어보는 게 쪽팔려서 아무한테도 안 물어봤다. 그러다 보니까 그냥 풀린 채로 다니는 게 익숙해졌어.”

 “완전 허당이구만. 허당." 수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쪽팔릴 게 뭐 있냐. 그냥 잘 하려고 애쓰는 건데. 다들 그렇게 살잖아. 나도 그렇게 살고.”

 수현은 흘러가는 소리처럼 대충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이 지우에겐 아팠다.

 수현이 아버지에게 잘했단 말 한 마디 듣고 싶어하는 어린 아이 같았다. 수현을 잘 모르지만. 극히 일부만 알지만.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을지 알 것 같았다.

 

 부모에게 버림 받은 아이의 반응은 두 가지다. 하나는 증오하고 원망하다가 나중에는 원래부터 없었던 존재인 것처럼 지운 채 살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돌아와 다시 사랑을 줄 거라고 믿고 기다리는 것이다. 지우는 전자이고 수현은 후자이다.

 수현은 기다림을 택했다.

 

 “너한테는 잘했단 말보단” 지우가 수현을 보지 않고 말문을 열었다.

 “수고했단 말을 해주고 싶어.” 수현의 시선이 느껴졌다.

 

 “수고했어.” 그렇게 말하며 그의 너른 어깨를 안아주고 싶었다. 넓고 단단하지만 그 속엔 한없이 약하고 어린 아이가 살아서 토닥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사이라서 그저 할 수 있는 얘기를 꺼낼 뿐이었다.

 

 “난 내 자존심 때문에 아빠가 죽은 사람이길 바랐어. 부모님이 막 이혼하셨을 때는, 어린 마음에 다시 잘될 거라고 생각했어. 주말드라마처럼 우리 가족도 결국엔 해피엔딩일 줄 알았거든. 순진했던 건지 멍청했던 건지. 근데 성인이 돼서야 안 거야. 아빠는 요만큼도 엄마랑 다시 잘 해 볼 생각이 없었다는 걸. 그걸 알고 나니까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미친 듯이 부끄럽더라. 그래서 누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하면 부럽단 생각을 해. 끔찍하지?”

 

 지우는 라는 말에 매료되었다. 이 단어의 숭배자라고 할 수 있다. 한국어로 해석하자면 ‘~을 해야 마땅하다’라는 뜻이다. ‘열심히 노력했으니 상을 받을 만 해.’ ‘열심히 일했으니 승진해야 마땅해.’ 이런 식으로 쓰일 수 있다. 하지만 지우는 네거티브 형식의 신봉자이다.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아야 마땅해.’ ‘욕 먹어도 싸.’ 와 같은 표현 말이다. 지우는 이 단어에 매료된 순간부터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부모님은 지우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이혼했다. 아버지는 사업을 벌였다가 망했고, 도박을 했고 ,빚을 졌다. 그리고 이혼했다. 지우가 알았던 것은 딱 여기까지였다.

 지우에겐 퍽 괜찮은 아빠였다. 절대 혼낸 적이 없었다. 공부하라고 잔소리하는 법도 없었다.

 그래서 이혼 후에 엄마와 살았음에도 아빠와의 교류는 왕왕 있었다. 하지만 성인이 된 후에 조금씩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가 술집을 드나들었다는 것. 술집여자와 만나기까지 했다는 것. 그가 먼저 엄마에게 이혼을 요구했다는 것. 그가 우리의 친권과 양육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했다는 것. 이혼 후 단 한번도 양육비를 지불한 적이 없다는 것 등등.

 이런 사실들을 알아가는 와중에도 아버지와 교류했다. 가끔 용돈도 받고 어버이날, 생신에는 선물도 챙겨드렸다. 그런데 Deserve란 단어에 매료된 순간부터 모든 연락을 끊었다. 이 단어에 의하면 그는 어버이날 선물을 받아 마땅한 아버지가 아니었다. 이 단어는 그에게 긍정적으로 쓰일 수가 없었다. 그에겐 자식에게 버림받아도 싸. 라는 표현이 맞았다.

 

 차라리 아빠가 죽은 사람이기를 바라게 되는 순간이 있다.

 누군가 “부모님은 다 계시니?” 라고 물을 때.

 상처 받은 표정으로 “아버지는 돌아가셨어요.” 라고 말할 수 있도록.

 “이혼했어요. 도박도 하고 바람도 피운 끔찍한 아빠였거든요.” 라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깔끔하고 담백하니까. 자존심을 지키는 동시에 품위를 지킬 수 있으니까. 아버지를 잃은 것을 동정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싫지만 이혼가정이니 분명히 결핍이 있을 것이라고 재단 당하는 것이 수천 배 끔찍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친구가 부러웠노라 말하면 천벌 받을 말일까? 잘못을 한 것은 그인데 왜 내가 벌을 받아야 할까?

 

 그 무엇도 내 존엄을 무너뜨릴 수 없도록 내면의 성을 굳건히 세웠다. 돈으로 무엇이든 살 수 있는 억만장자도, 모든 것을 통찰한 현자도,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사람도 그 누구도 나를 굴복시키거나 패배감이 들게 만들 수 없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우습게도 그 누구든 단 한 마디의 말로 이 견고한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아버지는 어떤 분이셔?”

 나에게 가장 하찮고 보잘것없는 <아빠>란 존재가 나를 너무도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발가벗겨진 기분. ‘노력’이 ‘발악’이 되는 순간. 내가 가엾고 불쌍해지잖아. 그래서 차라리 그 존재가 죽어버리길 바랐다. 내가 천륜을 저버린 패륜아인가? 그가 나를 학대한 적도 나를 매몰차게 대한 적도 없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가 <죽은 존재>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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