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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코 끝이 간지러울 뿐이라서
작가 : 바비수
작품등록일 : 2020.8.19

그 흔한 사랑고백도 없었다. 격렬한 포옹, 격정적인 키스도 없다!
자극적인 대사, 스킨십 한 번 없이 잔잔하고 소소한 순간들만 있었을 뿐!
그저 간지럽기만 했던 그 시절, 지우와 수현.
그 때 우린 뭐였을까? 이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5 Mind. To you.
작성일 : 20-09-06 23:37     조회 : 215     추천 : 0     분량 : 1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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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걔는 참 사람을 놀래키는 재주가 있었어. 철학수업 듣는 것도 의외였는데 공예수업도 들었더라고. 참 어울리지도 않는 교양을 듣는다고 생각했어. 그날은 좀 이상한 날이었어.」

 

 지우는 셔틀버스에 올라탔다. 축제기간이라 그런지 버스 안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이렇게 한 명도 타지 않는 셔틀버스는 처음이라 신기했다. 자신의 옆자리에 아무도 앉을 일 없다고 생각한 지우는 통로 쪽이 아닌 창가 쪽에 자릴 잡았다.

 여름이 시작된 날씨는 이상하게 지우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지우는 자신이 참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라고 생각하며 웃었다. 버스기사 아저씨는 한 명만 태우고 출발하기엔 아쉬웠는지 한참 동안 출발할 기미가 없다가 마침내 시동을 걸었다. 반쯤 버스 문의 닫혔을 때, 불쑥 누군가의 손이 들어왔다.

 

 “감사합니다!”

 

 수현이 헤실 거리며 올라탔다. 그리고 지우를 발견하곤 화색을 띄며 옆자리에 앉았다. 좌석이 이렇게나 많은데 굳이 옆에 앉는 수현을 보며 또 쓸데없이 친한 척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설레는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나이키 반바지를 입은 수현의 다리 털이 지우의 다리를 간질였다.

 그 묘한 간지러움도 기분 좋았다.

 

 버스가 출발하고 창문너머 바라본 풍경에 왠지 마음이 한껏 풀어졌다. 잔잔하고 평화로웠다. 자신과 수현. 단 둘밖에 존재하지 않는 기분이었다. 이번 학기만 끝나고 조기졸업을 하면 이 풍경도, 수현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아쉬운 감정이 들었다.

 

 “졸업하면 뭐할 거야?” 문득 지우가 물었다.

 

 “농부나 할까 봐.”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지우는 학교에서 수현을 마주쳤을 때부터 들었던 의문이 떠올랐다. 제주도에서의 순박한 시골 소년 같던 모습이 진짜 수현인지, 대학교에서 시끌벅적하게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진짜 수현의 모습인지.

 

 “근데 왜 전공을 광고홍보학과로 했어?”

 

 “아버지가 광고쟁이였거든. 되게 자유롭고 재밌는 분이라는데. 어릴 때 부모님이 이혼하셔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거든. 아버지가 궁금하기도 하고 나도 광고를 배우면 아버지가 이해될까 싶기도 해서.”

 

 지우는 갑자기 부모님의 이혼을 말하는 수현에 놀랐다. 자신은 그 누구에게도 부모님의 이혼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수현은 가까운 사이도 아닌 자신에게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수현은 언제나 지우를 놀라게 한다. 당황스럽게 한다. 부끄러움을 준다. 지우는 한번도 아버지를 이해해보려 하지 않았다.

 

 “이혼 후에는 만난 적 없어?”

 

 “엄마가 절대 연락하질 않았거든. 내가 성인이 된 후에야 만나는 걸 허락하셨어. 새 가정 꾸리시고 잘 지내더라고. 고등학생 동생도 있어.”

 

 지우는 다시 한 번 수현에게 놀랐다. 지우는 재혼을 하지 않은 아버지도 자신을 버렸다는 생각에 용서할 수가 없는데 수현과는 몇 살 차이 나지도 않은 아이가 있는 아버지라니. 수현과 어머니를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재혼을 하셨다는 말이다. 아니, 떠나기 전일지도 모른다.

 지우는 자신이라면, 그런 아버지 따위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단하다. 어떻게 용서가 가능해?”

 지우는 자기도 모르게 묻고는 곧 굉장히 무례한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용서? 아예 그런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데. 사실 아빠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어. 내가 정말 어릴 때 두 분이 헤어지셨거든.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께서 재혼하셨어. 엄마 말론 엄마가 연락을 끊었대. 새 가정이 있는 아빠한테 연락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셨대. 모르지 뭐. 근데 난 아빠를 미워할 수가 없더라고. ”

 

 덤덤하게 말하는 수현에 지우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수현의 말을 들었다.

 

 나한테 아빠에 대한 기억이라곤 단 두 개야.

 아버지 사진은 엄마가 다 버리고 딱 한 장 있거든. 수영장에서 아버지가 수건으로 내 머리 말려주는 사진. 솔직히 기억도 안 나지만 아버지가 날 사랑하는 게 사진에서 느껴져.

 그리고 마지막 기억은 아버지가 회사 때문에 서울에 돌아가시는 걸로 한참 엄마랑 싸울 때였어.

 아버지 혼자 서울로 올라가는 날이었는데 그 때 엄마는 화나서 방에 들어가 있고 나는 장난감 가지고 놀고 있었거든. 근데 아버지가 구두를 신으면서 혼잣말로 그러더라고. ‘아... 진짜 일 가기 싫다.’ 그러다 나를 보시곤 웃으면서 ‘아빠 다녀올게.’ 하고 나가셨어. 아버지도 나랑 엄마를 두고 혼자 가는 게 싫으셨던 거라고 믿어.

 딱 이 기억 두 개뿐인데 난 아빠를 미워할 수가 없더라고.

 

 수현의 말에 지우도 아주 깊숙이 묻어두었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지우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였을까. 학교에서 매주 토요일은 단체 청소의 날로 전교생이 다같이 청소를 했다. 그 날도 지우는 열심히 걸레로 나무바닥을 밀다가 손바닥에 나무가시가 박혔다. 양호실에 갔지만 너무 작은 가시는 보이지 않았고 양호실 선생님도 가시를 빼내지 못했다. 어린 맘에 지우는 박힌 가시를 빼내지 못하면 가시가 몸 속을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다가 심장을 찌를 거라고 생각했다. 지우는 심장에 가시가 박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집에 오자마자 엉엉 울면서 엄마에게 전화했다. 좀처럼 우는 법이 없는 지우가 울면서 전화를 하자 놀란 엄마와 아빠는 동시에 집으로 달려왔고 아빠는 한참이 걸려 족집게로 손바닥에 박힌 작디작은 가시를 빼냈다.

 그 날은 두렵고 무서운 날이었는데 아빠의 사랑을 가장 절실히 느낀 날 또한 그 날이었다. 지우는 아빠를 미워하지만 그 날의 기억으로 사랑 받았음을 잊지 않으며 살아갔다. 그 기억은 아빠란 존재에게 자신이 사랑 받았다는 믿음을 지탱해주었다. 그래서 그 날의 기억이 지우에겐 참으로 소중했다.

 

 지우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할 말이 없었다.

 대신 불쑥 “네 다리 털 때문에 따갑잖아.” 하고 퉁명스럽게 말하며 자신의 다리를 문질렀다.

 “내 다리 털? 따갑다고?” 하하하. 수현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지우는 수현의 다리 털 한 가닥을 잡아 뽑는 시늉을 했다.

 

 지우는 가깝지 않은 이들에겐 철저히 존댓말을 썼다. 철저히 격식 있게 대했다. 오빠, 언니라는 호칭은 왠지 낯간지러워서 ~님, ~씨 같은 딱딱한 호칭을 썼다. 그런데 수현에겐 선배님이란 말이 나오질 않았다.

 제주도에서도 같은 학교 선후배인 것을 알게 된 지금도 세 살이나 어린 지우가 자신을 너라고 불러도 수현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지우는 자기답지 않게 예의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수현에게만은 그랬다. 그냥 이유 없이 편한 사람. 마음을 풀어헤쳐놓는 사람. 수현은 지우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나 유리공예 수업 들어~” 수현이 상장을 받아온 아이처럼 신나서 말했다. 그리고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커다란 손과 어울리지 않는 아주 작은 무엇이었다.

 “짠! 내가 만든 거!” 수현이 뿌듯한 표정으로 작고 조약한 공예품을 손바닥 위에 올려 보였다.

 유리를 녹여 만든 물고기 모양의 펜던트였다. 꼬리 쪽엔 sh라는 알파벳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지우는 수현이 어울리지도 않게 교양으로 유리공예 수업을 들었다는 게 의아하기도 하면서 투박한 손으로 집중하며 이니셜을 새겼을 수현의 표정을 상상하니 웃기기도 했다.

 

 “더럽게 못 만들었네.” 지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우는 자신이 수현 앞에서는 왜 이렇게 무례한 사람이 되는지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여기.” 수현이 전혀 개의치 않고 쾌활하게 말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지우에게 자신이 만든 물고기 펜던트를 건넸다. 지우는 갑작스러운 수현의 행동에 나한테 주는 거냐고, 왜 주는 거냐고 물을 생각조차 못했다. 당연한 듯한 수현의 행동에 지우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과제로 만들긴 했는데 쓸 데도 없고 열심히 만들었는데 버리긴 아까웠나 보다. 그래서 우연히 만난 자신한테 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처치곤란이라 떠넘긴 것이든 뭐든 상관없었다. 수현의 손길이 담긴 무엇을 간직할 수 있게 되어 좋았다. 수현이 만들었다는 증표로 수현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지우는 주말에 집에 내려가자마자 체인 줄을 찾아 수현이 준 펜던트를 끼워 넣어 자신의 열쇠고리로 달았다. 열쇠는 수현의 앞에서 꺼낼 일이 없으니 수현에게 들킬 일도 없었다.

 

 「그 날만큼은 걔랑 되게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어. 그 날의 날씨, 분위기. 그리고 걔도 어딘지 모르게 달랐거든. 아빠 얘기도 하고 나한테 버린 거나 다름없지만 무언가를 받았잖아.」

 

 「이거에요?」

 

 「응. 사실 작년에 바람맞고 휴대폰이랑 번호 다 바꾸면서 버리려고 했는데 이제 이게 손에 익어서 열쇠 찾을 땐 이 물고기부터 찾게 되니까 버릴 수가 없더라고.」

 

 「근데 이거 언니 주려고 만든 거 아니에요? sh가 아니라 JW 아니에요?」

 

 「에이. 아냐. 내가 갖고 다녀서 그런지 다들 그렇게 보더라.」

 

 「구우면서 좀 지워져서 그렇지 JW 맞는데…」

 

 「걔는 그냥 옆에 있는 누구와도 엄청 가까운 사이인 것처럼 구는 게 성격이었어. 축제에 관심 도 없었는데 걔가 과대라 학과주점에서 일하는 거 살짝 보러 갔었다? 근데 우리 과 여자애랑 얼굴을 나란히 맞대고 사진을 찍고 있는 거야. 그 때 내 심장이 얼마나 덜컥했는지 알아? 하지도 않는 SNS 뒤져서 걔 계정을 찾아냈는데 여자들이랑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수십 장은 태그되어 있더라. 나 혼자 설레고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게 너무 부끄럽더라. 걔한테 화도 나고 밉고.」

 

 철학수업 땐 4인용 책상에 항상 타학과 남학생/수현/지우/타학과 여학생 이렇게 넷이 나란히 앉았다. 같이 앉다 보니 지우는 옆자리의 유리조형학과 정민과 꽤 대화하는 사이가 되었다. 붙임성 좋은 수현은 이미 옆자리의 남학생과 절친이 된 듯 했다. 항상 형~ 하면서 응석 부렸다. 그러고 보면 수현은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과 어울렸다. 확실히 수현의 유치하고 바보 같은 성격이 동갑보단 형들과 잘 맞겠다 싶었다.

 

 축제 직후였다. 평소처럼 두번째 줄 두번째 자리에 수현이 앉아있었고 웬일인지 정민은 그 뒷줄에 앉아 있었다. 지우는 순간 멈칫했다. 원래 앉는대로 두번째 줄 세번째 자리에 앉아야 하는 건지 안면을 튼 정민과 앉아야 하는 건지.

 “지우야. 여기!”

 정민이 자신의 옆자리 의자를 빼며 지우를 불렀다. 안 그래도 수현을 보기가 껄끄러웠던 지우는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그 사진들이 왜 그리 불쾌한지 몰랐다. 불쾌할 권리가 있나 싶었다. 수현에게 신경 끄기로 했다.

 

 으레 그랬듯 수현은 몸을 돌려 지우를 보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럴 때마다 지우가 “뭐.” 라고 퉁명스럽게 말하면 꼭 지우에 대해 한마디라도 걸고 넘어지는 게 그들의 루틴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수현이 몇 번을 뒤돌아보며 지우에게 장난칠 타이밍을 노려도 지우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계속 무시하면 저러다 말겠지 싶었다.

 

 하지만 그는 지우의 예상을 벗어났다. 수업이 끝나고 책을 가방에 집어넣고 있는 지우에게 수현이 다가왔다. 점점 가까워지는 수현이 당황스러웠다. 지우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무슨 장난을 쳐도 상대해주지 말자. 지우는 본 체도 하지 않고 마저 가방을 정리했다.

 

 “하이파이브!” 수현이 왼쪽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활짝 웃었다. 천진난만한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지독한 패배감을 느꼈다. 지우가 아무리 무례하게 굴어도 그는 아무렇지 않게 웃을 것이다. 그것이 지우의 자존심을 무너뜨렸다.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넌 날 불쾌하게 만들 수 없어. 슬프게 만들 수 없어. 라고 비웃는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수 십 번, 수 백 번 졌다.

 

 수현에게 스치는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억울했다. 나만 바보같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지. 넌 그저 나 같은 아싸랑도 친해졌다고 뿌듯했겠지. 친화력 좋고 성격 좋은 네가 친해지기 어려운 애는 없다고. 어떻게든 그 웃는 얼굴을 울상 짓게 만들고 싶었다. 난 다른 사람들처럼 네 바보 같은 장난에 웃고, 설레고, 널 좋아하는 그런 뻔한 사람이 아니야. 네가 아무리 다가와도 난 곁을 내주지 않을 거야. 그렇게 다짐했다.

 

 “친한 척 좀 그만해.” 지우가 차갑게 말했다. ‘참나’하고 삐진 척하면서 가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현은 말없이 서있었다. 그는 지우의 예측을 불허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지우가 좀 비켜달란 듯이 한숨 쉬었다.

 

 “니가 그렇게 말하면”

 그의 목소리가 작지만 선명하게 귓가에 꽂혔다.

 

 “내 마음이 아파.”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었다. 아이처럼 너무나 직설적인 감정표현에 말문이 턱 막혔다. 하지만 눈빛만은 예의 그 소년이 아니었다. 지독하게 까만 눈동자는 시선을 떨군 채 땅만 바라볼 뿐이었다. 어둡고 칙칙한 얼굴은 위협적이기까지 했다. 소년의 얼굴을 지운 수현에게 위화감이 느껴졌다. 저런 표정도 갖고 있구나.

 

 너는 내게 매번 굴욕감을 주면서 난 딱 한번 기분 나쁘게 했을 뿐인데 그렇게 상처 받은 표정을 지으면 내가 너무 억울하잖아. 그에게 엄청난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 같았다. 지우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지우가 미처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가 돌아서서 나가버렸다.

 

 지우는 그의 반응에 놀라면서도 괘씸했다. 누군가에게 한번도 거절당해본 적 없구나. 친해지려고 다가갔을 때 상대방이 거부한 적이 없구나. 그래서 넌 그렇게 모든 게 쉬웠구나. 네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난 설렜는데 넌 모두에게 그렇듯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들이겠지.

 

 「언니 너무했다. 너무 무서워.」

 

 「억울했거든. 내가 생각한 나와 그의 거리와 그가 생각하는 나와 그의 거리가 비례하지 않다는 게.」

 

 “저 사람 좀 이상한 거 같아. 나한테 대뜸 필기한 거 보여달래.”

 따라 나온 정민의 입에서 나온 말이 의외였다.

 “네?”

 “지우 너한테도 친한척하던데 그거 다 필기노트 빌리려고 수 쓰는 거야.”

 지우는 정민의 말에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지우의 모든 예측을 벗어났다. 역시 수현이었다.

 

 「아무한테나 친한 척하는 건 알았지만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인지는 몰랐어. 내가 저 사람을 안다고 할 수 있나 싶더라. 이제 좀 알았다 싶으면 낯선 모습이 튀어나오니까. 그 후로는 장난도 잘 안치더라고. 그렇게 데면데면했는데 전공 기말고사가 조별과제였거든. 어쩌다 보니 나랑 걔랑 어떤 선배랑 셋이 같은 조가 된 거야.」

 

 수현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의 유치하고 장난끼 많은 소년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가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생각하는 건 포기했다. 지우는 이제 그를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대충 감을 잡았다. 그저 그가 행동하는 그대로 똑같이 대하면 되는 것이다. 수현이 A를 누르면 지우는 A를 내주었다. 수현이 모르는 척하면 지우도 따라서 무시하고 수현이 장난치면 지우는 핀잔을 주면 됐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수현이 아무렇지 않게 대하면 지우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것이었다. 그들만의 그림자 놀이 같은 거였다.

 

 “단톡방 파게 번호 알려줘.” 첫 회의 때 민성이 지우에게 말했다.

 “얘 똥폰이라 카톡 안 돼.” 지우가 대답하기도 전에 노트북으로 자료를 정리하던 수현이 말했다.

 “PC카톡 하면 되거든.” 지우가 어이없단 목소리로 말하자

 “어쭈, 노트북도 있냐?” 수현이 깐죽거렸다. 그나마 지우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수현의 모습이었다.

 

 “내가 만들게. 번호 좀.” 수현이 민성에게 자신의 휴대폰을 건넸다. 그 다음 지우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지우는 자신의 휴대폰 뒷자리가 수현과 처음 만난 날인 게 마음에 거렬ㅆ다.

 “그냥 아이디로 친구 추가하면 돼.”

 지우의 말에 수현이 멈칫하다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참나~ 귀찮게. 알았어. 그 네이버?”

 “어.”

 그 날 수현이 <메롱들아>이란 제목으로 민성과 지우에게 회의 내용을 정리한 메일을 보냈다. 참 한결같이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회의 중 블랙베리 폰의 배터리가 나갔다. 오래된 폰이라 그런지 자주 방전되었다. 충전기를 꽂을 콘센트가 없어 하는 수 없이 수현의 노트북에 블랙베리 폰을 연결해 충천시켰다. 웬일로 조용한 수현이 수상해서 봤더니 노트북으로 연결된 지우의 폰 갤러리를 보고 있었다. 쓸데없고 유치한 짓 할 때는 머리가 참 잘 굴러간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지우는 제주도에서 찍은 수현의 사진이 생각나 화들짝 놀라 케이블 선을 뽑았다.

 “왜 남의 걸 함부로 봐?” 지우는 자기도 모르게 버럭 화를 냈다.

 “똥폰인데 다 연결되네.” 수현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젠 지우가 짜증을 내도 화를 내도 끄덕 없었다. 수현도 지우를 대하는 법을 터득했다.

 

 「민성선배는 통학이었고 나랑 걘 기숙사에 살았어. 그래서 회의가 끝나고 돌아갈 때면 자연스럽게 둘이 같이 가게 됐어.」

 

 “너 신발끈 풀렸다!”

 “뭔 상관이야.”

 “그러다 끈 밟고 넘어지면 엄청 쪽팔릴텐데!”

 지우는 수현이 계속 깐죽거리자 한숨을 쉬며 대충 신발끈을 묶었다.

 “머리로 바닥 청소하게?” 수현은 땅바닥에 흘러내리는 지우의 긴 머리카락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그 행동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뭐 하는 거냐고 말할 틈도 주지 않을 만큼 간단하고 신속했다.

 

 조별과제가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갈 때마다 수현은 지우가 매고 있는 백팩의 가방고리를 들어올리는 장난을 쳤다.

 “뭐야. 장난치지마.”

 “싫은데~ 할 건데~” 뜬금없는 장난에 짜증을 내도 수현은 기숙사에 도착할 때까지 잡고 놓지 않았다. 꼴은 우스꽝스러웠지만 덕분에 매고 있는 가방이 무겁지 않았다.

 

 크고 무거운 노트북을 들고 간 날엔 “노트북 너랑 진짜 안 어울려!” 장난치면서 노트북을 뺏었다.

 수현은 기숙사에 도착할 때까지 돌려주지 않았다. 덕분에 낑낑대며 노트북을 들고 가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웃긴다! 근데 뭔가 설렌다!」

 

 「하는 짓이 보통 사람들이랑 다르잖아. 처음엔 이게 뭐지 헷갈렸는데 나중엔 그냥 그런 사람이구나 싶었어.」

 

 지우는 한번도 고맙다고 말하지 않았다. 장난인지 배려인지 알 수가 없었다.

 수현은 신발끈을 묶어주지 않았다. 가방이 무겁지 않냐고 들어주겠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 하듯 시시껄렁한 장난을 칠 뿐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하듯 편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 줄 뿐이었다. 수현은 지우가 착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네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면 절대 안 돼. 라고 말하는 것처럼 철저하게 선을 지켰다. 그래서 지우는 설렐 수도 없었다. 수현은 지우에게 그럴 권한을 주지 않았다.

 

 그는 참 어려운 사람이었다. 항상 자기가 원하는 표정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 그 속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기숙사에 다다를 때면 “잘 가라”하고 쌩 하니 돌아서서 가버렸다.

 그 뒷모습이 마치 <넌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너 따위한테 보여줄 진짜 마음은 없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절대로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법도 없었다.

 

 「주말에 걔가 단톡방에 같이 저녁 먹자고 톡을 보냈어. 민성선배는 학교에 있을 리가 없는데.

 까먹은 건지 절대 개인톡은 하기 싫은 건지. 얄밉더라. 일부러 계속 밀쳐냈어.」

 

 3학년까지 빡빡하게 학점을 채워 들은 덕분에 전공수업은 <광고와 사회> 하나뿐이었고 교양수업은 <철학개론>을 제외하곤 사이버 강의를 들었다. 덕분에 평일엔 주로 교내 카페테리아에서 일했고 주말엔 사이버강의를 듣거나 과제를 했다. 기숙사에서 노트북으로 밀린 사이버 강의를 듣고 있던 토요일이었다. PC카톡 알림창이 깜빡였다.

 

 <같이 밥드실 분?>

 <나 통학러잖아ㅋㅋ>

 <아. 오케이> <야. 기숙사 밥이나 먹자>

 <난 안 먹어>

 <왜?>

 <기숙사 밥 맛없어>

 <참나> <그럼 딴 거ㄱㄱ>

 <돈 아까워>

 <참나> <사줄게> <나와>

 

 「좀 설렜다? 굳이 사준다니까. 근데 걔가 뭐 워낙 이사람 저 사람한테 잘해주니까. 그리고 성격상 진짜 혼자 먹기 싫었겠지. 착각하지 말자. 착각하지 말자. 그렇게 다짐하면서 나갔어. 역시나 걘 슬리퍼 끌고 나왔더라고. 난 괜히 데이트 같고 그래서 나름 신경 써서 입고 나갔거든. 걘 아무 생각 없었던 거지 뭐.」

 

 수현이 츄리닝 차림으로 기숙사 앞에 서있었다.

 “뭐 먹고 싶냐?” 수현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비싸고 맛있는 거.” 그런 수현을 괜히 골탕먹이고 싶었다.

 “회 먹자.” 의외의 답변이었다.

 

 「기껏해야 학교 근처 분식집에 갈 거라고 생각했거든. 게다가 고기도 아닌 회라니. 학교에서 꽤 멀리 있는 식당이었어. 걸어서 30분? 함께 걷는 내내 코끝이 간지러웠어. 막 심장이 쿵쾅거리고 떨리는 건 아닌데 누가 살살 간지럽히는 것처럼 간질간질한 기분.」

 

 슬리퍼를 신고 걸어가기엔 먼 거리라 발이 아플 거 같기도 하고 대학생이 먹기엔 너무 비싼 거 같아서 괜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래도 지우는 이 순간이 좋아서 잠자코 있었다. 연못으로 낚시를 하러 간 그 때처럼. 걸어서 30분. 짧지 않은 그 거리가 지우에겐 너무 짧게 느껴졌다.

 

 시시콜콜한 대화가 오갔다. 으레 그랬듯 지우가 이런저런 불만을 쏟아내면 그는 왜 그런 사소한 걸로 스트레스 받냐고 ‘그 사람도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라거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겠지’라는 식으로 말했다. 그러면 지우는 또 어쩔 수 없는 건 없다고 열을 냈다.

 

 「그 사람은 항상 내가 이겼다고 말했어. 근데 난 단 한번도 이긴 적이 없었어. 나는 매번 졌어.

 내 말이 맞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어떤 말을 늘어놓아도 걔가 장난스럽게 웃는 순간, 나는 완패했어. 천진난만한 미소에. 소년 같은 얼굴에.」

 

 식당에 도착한 지우가 “아, 뭐 먹지? 참치회, 모듬튀김, 김치우동 다 맛있겠다. 나 다 먹을래!”라고 말했다. 수현을 골탕 먹이려고 장난으로 한 말이었다. 그러면 수현이 ‘다 먹지도 못하면서.’ 라고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수현은 “그래~ 먹고 싶은 거 다 먹어라.”면서 지우가 말한 모든 메뉴를 시켰다. 그리고 “어디 다 먹어 봐~”라고 덧붙이며 무시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우는 입이 원체 짧았다. 제주도에서 함께 지냈던 수현은 이를 알고 있었다. 어디 먹을 수 있으면 먹어보란 거였다. 지우는 조금 먹는데다 속도도 느렸다. 적은 양을 천천히 먹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랑 밥을 먹을 때면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했다. 마저 다 먹지 못한 채로 숟가락을 놨다. 먹고 싶었던 건 이미 다른 사람들이 먹고 없었다.

 

 수현은 음식이 나오자 지우 쪽으로 밀며 먼저 먹으라고 했다. 먹을 수 있는 만큼 다 먹으라고 했다. 혼자 먹기 민망해서 “왜? 너도 먹어.” 하면 “일단 먹어 봐.”하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지우가 “내가 다 먹어버려야지!” 라고 하면 “니가 먹으면 얼마나 먹겠냐” 며 콧방귀를 뀌었다.

 

 “아, 진짜 배부르다.” 식사를 마친 지우가 말했다.

 “와, 대체 뭘 먹은 거야?” 수현이 놀란 척하며 비꼬았다.

 “내가 이만큼이나 먹었잖아.” 지우가 발끈하면 수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지우가 거의 다 남긴 음식을 금방 다 먹었다. 수현은 지우와 반대로 빨리, 많이 먹는 사람이었다.

 

 왜 이리 많이 남겼냐고 타박하지도 더 먹으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지우가 좋아하는 것부터 먹고 남긴 걸 먹는 수현이 좋았다. 가리는 것 없이 맛없는 부위도 군말 없이 먹는 수현이 좋았다. 지우가 천천히, 느린 속도로 먹는 것을 가만히 기다려주는 것도 좋았다.

 

 자상하지 않으려는 자상함.

 배려 아닌 척하는 배려.

 다정하지 않은 다정함.

 심드렁한 친절.

 

 그런 수현이라서.

 지우도.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좋아하지 않았다.

 

 
작가의 말
 

 힘이 될 거야. 내가. 너에게.

 (샤이니 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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