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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코 끝이 간지러울 뿐이라서
작가 : 바비수
작품등록일 : 2020.8.19

그 흔한 사랑고백도 없었다. 격렬한 포옹, 격정적인 키스도 없다!
자극적인 대사, 스킨십 한 번 없이 잔잔하고 소소한 순간들만 있었을 뿐!
그저 간지럽기만 했던 그 시절, 지우와 수현.
그 때 우린 뭐였을까? 이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4 You must see me now
작성일 : 20-09-06 00:11     조회 : 200     추천 : 0     분량 : 1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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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그리고 며칠 뒤 <광고와 사회> 전공수업에서 다시 그를 보았다. 두리번거리며 어색하게 교실에 들어서는 모습에 지우는 옆자리 의자를 뺐다. 그리고 그를 부르려는 순간,

 

 “수현아! 여기!”

 

 “아, 형!”

 

 누군가 그에게 헤드락을 걸고 끌고 갔다. 이내 그는 사람들에 둘러 쌓여 있었다.

 오랜만에, 기차에서 처음 그를 봤을 때 느꼈던 예의 그 충격에 다시 한 번 휩싸였다.

 저런 사람이 있다고. 나와는 정반대의 사람이 있다고.

 지우가 그 동안 학교를 다닐 동안 그는 다니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저렇게 튀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을 리 없다. 지우가 아무리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의 에너지는 사방에서 발사되었고 누구라도 한번쯤은 그를 돌아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지우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학회실에서 마주쳤던 것이 그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단호했다.

 

 그는 학과에서 인기가 참 많은 사람이었다. 그가 몇 년의 휴학 후 복학한지 며칠 만에 재학생뿐만 아니라 갓 입학한 신입생부터 복학생, 졸업반까지 전 학년이 그를 알았다.

 

 지우는 학교에서 우연이라도 수현을 마주치면 완벽하게 낯선 사람을 보듯 자신을 바라보는 수현의 눈빛이 싫었다. 전혀 모르는 사이처럼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수현이 미웠다.

 

 그는 항상 왁자지껄한 무리와 함께 있었다. 지우는 어쩌면 수현이 자신과 아는 사이를 숨기고 싶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과 사람들이랑은 껄끄러운 일이 몇 개 있었으니까. 그래서 학과 사람들 앞에선 자신과 아는 척을 하지 않는 걸까?

 

 지우는 수현을 마주칠 때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란 사실이 뼈 저리게 느껴져서 되도록 수현과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피해 다녔다. 멀리서라도 수현이 보이면 뒤돌아 갔다.

 

 「같이 듣는 수업이 두 개였어. 전공 하나, 교양 하나.」

 

 「교양 수업도요?」

 

 「응. 철학 수업. 그 사람은 제주도에서 봤을 땐 정말 단순한 사람이었어. 근데 아니더라.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어.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아주 조금 알았던 거겠지. 아주 일부만.

 근데 소년 같은 얼굴. 쓸데없이 싱글거리는 얼굴만은 똑같았어.」

 

 그의 웃는 얼굴을 볼 때마다 지우는 항상 거부당하는 느낌이었다. 그에게 다가가는 것이 자연의 섭리에 어긋나는 기분.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 당하는 기분. 해맑은 얼굴을 볼 때면 홀로 수치스러워졌다.

 

 「걔 앞에서만 서면 초라해지는 기분이었어. 전공수업 중간고사가 토론이었거든? 체벌에 대해서 찬반으로 나눠서 토론을 하고 학생들끼리 서로를 평가하게 했어. 난 반대 입장이었는데 우리 팀이 아무도 반론을 안 하는 거야. 교수는 옆에서 계속 그러면 단체로 F 줄 거라고 쪼고. 그래서 계속 반론을 했는데 우리 팀에선 나만 발언을 하고 있더라고. 다른 사람들 눈엔 아니꼬워 보였겠지. 교수가 제일 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찍어보라는데 걔만 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난 그 순간이 너무 끔찍했어. 걔한테 불쌍해 보이고 싶지 않았거든. 동정 받고 싶지 않았거든. 걔는 그렇게 순수한 의도로 사람을 굴복시키는 재주가 있었어. 나는 그게 너무 자존심 상하고 싫었어.」

 

 지우는 스스로가 생각하기엔 완전히 올곧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우는 분노했다. 쉽게 행해지는 무수한 불의에 대해 분노했다. 지우는 따돌림을 시켜본 적도, 그에 동조한 적도, 그에 방관하지도 않았다.

 초등학생 때 반장은 한 남자아이를 교묘하게 괴롭혔다. 반장이 그러니 반 아이들 전체가 그 아이를 무시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지우는 단 한번도 그 아이를 무시한 적 없었다. 그리고 매주 있는 일기검사 때 일기를 통해 반장을 고발했다.

 

 지우는 모기를 제외하곤 그 어떤 생물도 죽이지 않았다.

 화장실 벽에 붙어있는 이름 모를 아주 작은 벌레조차도 눈에 거슬린다고 죽인 적이 없었다.

 천장 모서리에 꽤나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거미줄을 훼손하지 않았고 거미는 룸메이트라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이 내보내야 할 경우에만 조심스레 잡아서 방생하였다. 지우는 그 어떤 생명도 죽이지 않는다.

 

 지우는 절대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리지 않았다. 옷에서 떼어 낸 먼지조차도 휴지통으로 꼭 가져가서 버렸다. 신념 없이 살아가는 것이 싫었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대로 사는 것은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아주 작은 행동 하나에도 깊게 생각하고 행하는 게 옳다고 믿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오, 도덕적으로 손가락질 당할 일 없다고 자신의 꿋꿋함이 자랑스러웠으나 그의 앞에선 뾰쪽하고 딱딱한 자신이 싫었다. 그 앞에선 사랑이 충만한 유한 사람이고 싶었다. 그런 사람을 그는 좋아할 것 같았다.

 

 지우를 철저히 무시했던 수현은 <철학개론> 수업 때엔 지우가 원래 알고 있던 그로 돌아왔다.

 지우는 오리엔테이션을 멍 때리면 듣고 있었다. 사실 OT는 출석하지 않는 학생들이 많았다. 수업변경기간이라 출석일수에 포함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오히려 지우는 그렇기 때문에 꼭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과 맞지 않는 수업이면 다른 수업으로 바꿔야 하니까.

 

 역시나 OT에 온 학생은 별로 없었다. 30명 정원인 수업이었으나 출석한 학생은 지우를 포함해서 여덟 명 남짓이었다.

 

 수업 시작 1분 직전에 수현이 들어왔다. 수현도 이 수업을 수강한다니 의외였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들어오는 그를 외면했다. 그 또한 전공수업 때처럼 당연히 모른척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현은 헤실 거리며 지우의 옆에 앉았다.

 

 전공 수업 때의 수현과는 너무 달라서 무슨 아수라백작인가 싶었다. 괘씸한 마음에 지우는 수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수현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교수님의 말을 열심히 듣는 척했다.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억지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교수님의 풍성한 회색머리가 신기했다. 지우 집안은 대대로 머리카락이 새까만 검정이라 저런 머리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 때 옆에서 수현이 키득거렸다.

 

 “거기, 남학생. 왜 키득거려?”

 “아, 죄송합니다.”

 “다들 무료해하는데 같이 좀 웃지. 왜 웃었나?

 “아니, 여기 이 학우가 노트에 <교수님 머리는 왜 회색일까> 라고 써서….”

 수현이 웃음 참지 못하는 목소리로 웃으며 지우의 노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학생 이름은 뭐지?” 교수가 지우에게 물었다.

 “한지우입니다.” 지우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머리가 왜 회색인지 정말 모르나?”

 “네?” 지우는 당황해서 대답하지 못했다.

 “흰머리다. 요 녀석아!” 교수님이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호통치셨다.

 

 지우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교수님 얼굴이 40대로 보여서 저 많은 머리카락이 다 새치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게다가 수현이 이런 식으로 자신을 골탕 먹일 거라곤 예상도 못했었다. 수현은 계속 키득거리고 있었다.

 

 「하필 그 교수님이랑은 밖에서도 마주쳐서 더 민망했다니까.」

 

 지우는 원체 남자에 관심이 없었다. 없다기 보단 싫어했다는 표현이 맞았다.

 하지만 그런 지우에게 유일한 남자사람친구가 한 명 있었다. 2학년 때 함께 산학협력단에서 근로했던 기용이었다. 기숙사생인 지우는 주로 학교 근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2학년 때는 산학협력단 학생조교로 일했고 3학년 땐 학교 근처 아동복지시설에서 일했다. 그리고 4학년인 현재에는 교내 카페테리아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처음 산학협력단 학생조교를 지원했을 때 산학협력단장은 여자를 뽑지 않는다고 했다. 지우는 근로조건에 남자여야 한다는 조항이 없는데 왜 그렇느냐고 물었다. 무거운 짐을 옮길 일이 많아 현재 일하고 있는 세 명의 학생조교 모두 운동건강학과인 남학생이며 몇 년 내내 그래왔다는 것이었다.

 지우는 자신이 광고홍보학과로써 문서나 PPT작업도 잘 할 수 있고 다른 남학생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무거운 것을 들고 힘쓰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우의 당당한 포부에 산학협력단장은 최초로 여학생인 지우를 학생조교로 뽑았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산학협력단 내에 신입으로 입사한 사원이 교육청에 제안서를 제출하는 날짜를 착각하는 일이 발생했다. 제출 당일 200장에 다다르는 제안서 3부를 당장 인쇄해야 했다.

 지우는 1학년 때부터 안면이 있었던 학교 근처 인쇄소에 부탁했고 종이가 찍혀 나오는 대로 모아서 제본하는 것을 도왔다. 그 덕에 무사히 기한 내에 교육청에 제안서를 제출할 수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지우는 산학협력단장에게 두터운 신임을 얻었고 입사제의까지 받았다. 지우는 정중히 거절했다.

 

 근로하면서 지우는 다른 세 명의 학생조교와는 서너 마디도 채 나누지 않았다. 지우는 굳이 시키거나 알려주지 않아도 알아서 할 일을 해냈기 때문에 간단한 목례인사를 제외하곤 말을 나눌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정해진 근로기간이 끝나갈 때쯤이었다. 산학협력단 내 연구 관련해 주문한 서적을 우체국에서 받아오는 심부름 중이었다. 학교와는 20분 남짓한 거리였다. 버스를 타고 가기엔 애매해서 걸어가야 하는 위치였다. 서적은 어마 무시하게 두꺼웠다. 게다가 세 권이나 되어서 10키로는 되는 듯했다. 지우는 두 손 위에 세 권을 나란히 쌓았다. 두꺼운 책이 눈앞을 가릴 듯 말 듯했고 손은 후들거렸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힘든지 지우는 짜증스럽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했다.

 

 악착같이 산학협력단이 있는 지식정보관에 거의 다다랐을 때 갑자기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굵직하고 거센 빗줄기에 지우는 급히 바로 앞에 있는 학생회관으로 들어갔다.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뛰어가면 5분도 안 되는 거리였다. 하지만 무섭게 내리는 비로 인해 책이 쫄딱 젖어버릴 터였다. 지우는 비가 그칠 때까지 잠시 기다려보았지만 비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 다른 사람한테 도움 받는 것을 못 견디는 지우였지만 이번 상황은 어쩔 수가 없었다. 지우는 산학협력단 학생조교 내선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세 명 중 이 시간에 근로하는 게 누구더라. 지우는 잠시 생각했다.

 

 “산학협력단 학생조교 박기용입니다.”

 

 세 명 중 제일 말수가 없고 자리도 가장 떨어져있어 인사조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기용이었다.

 지우가 간단하게 상황 설명을 하니 기용은 알겠다며 끊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 한 손에 우산을 든 기용이 학생회관에 도착했다.

 장대비에 우산도 별 수 없었는지 기용의 하얀 얼굴에도 머리칼 끝에도 빗방울이 잔뜩 맺혀있었다. 지우는 미안함이 밀려왔다.

 

 “죄송해요. 갑자기 비가 와서요.”

 

 “이거 쓰고 가세요.”

 

 기용이 말끔하게 접혀있는 단우산을 건넸다. 그리고 입고 있던 남방을 벗어 물기를 탈탈 털어내더니 지우가 들고 있던 서적을 가져가 감쌌다.

 

 “우산이 한 개라. 천천히 오세요.”

 

 그렇게 말한 기용은 지우의 대답도 듣지 않고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당황한 지우가 얼른 우산을 펼쳐 들어 그를 쫓으려 했지만 긴 다리로 이미 저만치 뛰어가고 있었다. 우산에 물기가 없는 것을 보자 그가 올 때도 우산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급하다고 생각해서 우산도 안 쓰고 뛰어왔나? 같이 써도 되는데. 나랑 어색해서 그런가?

 기용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지우는 의아했다. 이전까지 지우는 그가 차가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하얀 얼굴과 날카로운 콧대 때문에 느껴지는 분위기가 그랬다. 그는 같이 일하는 동안 인사 한 번 하지 않았고 말 한마디 건넨 적이 없었다. 물론 그건 지우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말해서 운동학과에 키도 크고 잘생긴 얼굴이라 지우는 짐짓 그가 여자들한테 인기도 많을 것이며 사람들을 무시하는 거만한 사람일 것이라 단정지었다. 자신도 모르게 편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꾀를 쓸 줄 모르는 우직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오히려 배려가 지나쳐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이내 부담스럽다고 느끼는 자신이 나쁜 사람같이 느껴졌다. 역시 내가 문제야. 지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후 지우는 여름감기에 걸렸다. 지나치게 강한 에어컨바람 때문이었다.

 지우는 여름엔 조금 더운 게 맞고 겨울엔 조금 추운 게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여름엔 에어컨을 틀어 오히려 추웠고, 겨울엔 히터를 틀어 오히려 더웠다. 인위적인 바람에 약한 지우는 여름감기에 곧잘 걸렸다.

 

 “어디 아프니?”

 

 안색이 좋지 않은 지우의 모습에 산학협력단 내에서 학생조교를 관리하는 직원이 물었다.

 

 “감기 기운이 조금 있는 것 같아요.”

 

 “괜찮으니까 병원 다녀와.”

 

 지우는 감사하다고 말하고 짐을 챙겨 나왔다. 기용이 그런 지우 뒤를 따라 나왔다.

 

 “근처 병원 알아요?”

 

 “네?”

 

 갑작스러운 기용의 질문에 지우가 되물었다.

 

 “후문 쪽에 있는 건 의사가 돌팔이에요.”

 

 지우가 가려고 했던 병원이었다.

 

 “그나마 괜찮은 데는 버스 타고 가야 되는데 같이 가요.”

 

 지우가 왜냐고 묻기도 전에 기용이 덧붙였다.

 

 “지난번에 비 맞아서 저도 감기 걸렸거든요.”

 

 지우는 남자를 싫어했다. 여태까지 남자사람친구는 한 명도 없었고 남자친구도 사귄 적 없었다. 남자들이 친한 척하는 것도 싫었고 추근대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기용의 표정과 말투는 매우 담백했다. 기용이 단지 <남자>라고 철벽치기 민망할 정도였다. 게다가 남에게 빚지는 것을 워낙 싫어하는 지우는 그 날 이후로 기용에게 큰 약점이라도 잡힌 사람처럼 그에게만은 마음이 약해졌다. 자기 때문에 감기에 걸렸다는 기용의 말에 죄책감까지 느껴져 더더욱 거절할 수 없었다.

 

 같이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기용은 말이 없었다. 지우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잘 보지 않는 편이었지만 기용에게만은 한없이 을이 되었다. 지우는 어색한 분위기를 덜고자 괜히 이런저런 말을 걸었다. 기용은 그저 묻는 말에만 대답할 뿐이었다. 하지만 지우는 알 수 있었다. 그는 무뚝뚝한 게 아니라 그저 말주변이 없는 것이다. 그와 함께 할수록 지우는 그가 퍽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기용이 데려간 최신식 내과에 도착한 지우는 엉덩이에 주사를 맞았다. 간호사가 엉덩이를 찰싹 때리는 소리가 너무 커서 밖에 있는 기용에게까지 들릴 정도였다. 지우가 주사를 맞고 나와 그도 진료를 받았는지 물었다. 그는 대충 말을 돌리며 이제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그 날부터 지우의 하루에 기용과 함께 있는 시간이 점차 길어졌다.

 

 근로시간이 끝나고 지우가 기숙사로 갈 때면 자연스럽게 따라와 자기도 기숙사 옆 체육관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어디를 갈 때도 자기도 근처에 볼 일이 있다고 같이 갔다. 지우는 헷갈렸다. 자기한테 이성으로서 관심이 있는 건지 그저 같은 사람으로서 다가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선을 그어야 하나 생각하다가도 너무나 담백한 기용의 표정에 자기가 오바하는 것 같아 머쓱했다.

 

 기용은 곁에 있으면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성임에도 불편하거나 싫지 않았다. 그는 지우에게 요구하는 것이 없었다. 그와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고 차분해졌다. 산학협력단 근로가 끝난 이후에도 그와의 관계는 유지되었다. 지우는 친구들보다 그와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항상 기용은 지우의 스케줄에 맞춰 움직였다. 지우가 도서관에서 밤을 새서 시험공부를 하면 그 옆에 앉아 노트북으로 영화 서너 편을 다운받아 봤다. 식욕이 없는 지우의 들쑥날쑥한 식사시간에 맞춰 함께 밥을 먹었다. 지우는 기용의 하루 일과를 몰랐지만 기용은 지우의 24시간을 알았다.

 

 어렴풋 그의 마음을 알았지만 이미 그의 존재가 너무나 익숙해진 지우는 모른 척했다. 그를 잃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은 물론이고 가족에게도 힘든 내색을 보이지 않는 지우였지만 우울하거나 속상할 때면 늘 기용이 곁에 있어주었다. 그에게는 자존심을 부릴 필요가 없었다. 그는 그저 잠자코 들어줄 뿐이었지만 지우가 가장 의지하는 존재가 되었다. 지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지우에겐 없어선 안 될 존재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지우는 4학년이 되었다. 기용은 먼저 졸업을 한 후에도 지우를 보러 학교에 오는 일이 잦았다. 기숙사생인 지우는 가끔 주말이면 본가에 갔다. 그럴 때면 기용은 근처에 있는 단골집에 갈 때가 됐다며 꼭 지우를 데려다 줬다.

 그 날도 기용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고 있었다. 승강장에 정차하자 지우와 기용이 앉아있던 맞은편 문으로 철학교수님이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회색머리 사건으로 민망했던 지우가 멋쩍게 인사했다.

 교수님은 “아, 지우학생!” 하며 우연히 만나 반갑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지우가 교수님께 자리를 비켜드리기 위해 일어서려고 하자 기용이 가볍게 제지하며 먼저 일어섰다.

 “여기 앉으세요. 교수님.”

 “오, 학생도 내 수업 듣나?” 목소리에 기용을 못 알아본 것에 대한 미안함이 담겨있었다.

 “아니요. 전 졸업생입니다.”

 

 교수님은 지우의 옆에 앉았고 기용은 지우의 앞에 섰다. 지우는 이 뜬금없는 조합이 어색했다.

 기용은 전혀 개의치 않고 지우에게 물었다.

 

 “배는 안 고파?”

 

 옆에선 교수님이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교수님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것 같아 지우는 더욱 민망했다.

 

 「교수님은 좋은 분이었는데 대신 뒤끝이 좀 있으셨어.」

 

 철학수업 때면 수현은 꼭 지우의 옆에 앉아 장난을 걸고 친한 척을 했다. 그러면 교수님은 수현에게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지우에게 핀잔을 주었다. 지우는 억울하기도 하고 계속 난처하게 만드는 수현이 얄궂다고 생각했다.

 친한 사람들이 많은 전공수업 땐 모르는 사람처럼 굴다가 다른 학과 학생들과 듣는 철학 수업 때만 친한 척을 하는 게 얄미웠다. 하지만 철학수업만 기다려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땐 완전히 나를 모르는 척 했어. 그리고 단 둘이 있을 땐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글거리면서 다가왔어. 그게 너무 얄미워서 철학수업 땐 오히려 내가 차갑게 굴었어.」

 

 「둘 다 이상해요. 진짜 답답하고 바보 같다.」

 

 「나도 그 땐 왜 그렇게 솔직하지 못했는지 모르겠어. 걔가 내 옆에 앉아서 커다란 강아지가 꼬리를 흔드는 것처럼 자기를 봐달라는 듯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봤어. 그러면 난 어떻게든 옆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어. 그래도 걔는 개의치 않고 말을 걸었고 그럼 나도 못 이기는 척 대답했어.」

 

 “넌 무슨 음악 좋아하냐?” 수현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CCM” 지우는 그를 보지도 않고 짧게 대답했다.

 “오~ 너 기독교였어?” 수현이 과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신 안 믿어.” 지우가 딱딱하게 말했다.

 “근데 CCM을 좋아해?”

 지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진지하고 솔직하게 대답하면 자신을 이상한 사람으로 볼 것 같았다.

 CCM 특유의 신성한 분위기가 지우에게 마음의 안식을 주었다.

 가끔씩 교회에 가서 사람들이 엄숙한 목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보면 그 자체만으로 편안해지고 구원받았다고 느꼈다. 그 순간만일지라도.

 “뭘 가장 좋아하는데?” 수현은 개의치 않고 다시 물었다.

  “나의 안에 거하라” 이번엔 대답해줬다.

 지우는 <우리 딸, 우리 아들>이라는 부모들의 애정표현도 싫었고 <넌 내 꺼야>라는 연인들의 닭살멘트도 싫었다. 누군가에게 귀속된다는 건 불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우 또한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다. 인간의 욕구 중 <조직의 소속>이 있다는 매슬로우의 이론은 확실했다. 어디에도 기댈 때가 없다고 느껴지는 날에 들으면 위로가 되었다.

 “아무튼 특이해.”

 지우는 수현의 말을 무시했다.

 

 “너 키가 몇이냐?” 수현이 툭 던지듯 물었다.

 “그러는 넌 몇인데?” 150초반인 지우는 키에 대한 질문이 참 지긋지긋했다.

 “나 180인데 178이라고 하고 다녀.” 수현이 바보같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 쓸데없는 거짓말은 왜 하는데?” 지우가 한심하단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이 와! 그것보다 커 보이는데! 하면 기분 좋잖아.”

 지우는 수현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실없는 소리를 자주 했다.

 

 “오늘은 입술이 오렌지 색이네!”

 선크림도 겨우 바르는 둥 마는 둥 하는 지우가 어느 날 시간이 남기도 하고 날씨가 좋기도 해서 왜인지 기분이 들떠서 틴트를 바르고 간 날이었다.

 수현이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지우를 보고 해맑게 말했다. 지우는 괜히 수현을 의식해서 화장한 것 같아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초등학생처럼 직접적이고 확실한 표현이 당황스러웠다.

 “뭐 어쩌라고.” 지우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수현이 씨익- 웃었다.

 

 취업정보센터에서 면접 컨설팅을 받는 날이라 흰 와이셔츠를 입고 간 날이었다.

 “와이셔츠 입은 거 처음 본다!” 옷을 가리키며 수현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항상 헐렁한 청바지에 편한 티셔츠만 입고 다녀서 본인도 정장차림이 어색하던 차에 수현의 지적에 더욱 쭈뼛해졌다.

 

 항상 지우가 먼저 도착해서 앉아있으면 수현이 그 옆에 앉았다. 하지만 그 날은 수현이 먼저 도착한 날이었다. 지우는 일부러 수현을 피해 뒷자리에 앉았다. 수현이 뒤돌아보며 말했다.

 “오, 머리 풀었네!” 대충 하나로 머리를 묶고 다녔던 지우가 처음으로 머리를 풀고 간 날이었다.

 작년엔 어깨 정도쯤 왔었는데 그 사이 머리가 꽤 자라 허리까지 왔다. 수현은 아예 다리까지 돌려 뒤를 보고 앉았다. 등받이 위에 손을 얹고 그 위에 턱을 괬다. 그리고 지우를 빤히 바라봤다.

 그의 눈이 어린아이처럼 초롱초롱 빛났다.

 “앞에나 봐.” 이제 지우는 면역력이 생겼다.

 덤덤한 지우의 목소리에 수현이 다시 제대로 고쳐 앉았다. 말 잘 듣는 초등학생 2학년 같았다. 그 모습이 귀여웠다.

 

 거추장스러워서 액세서리를 하지 않는 지우였지만 프리마켓에서 정말 마음에 드는 목걸이를 구매했다. 페트병 뚜껑으로 만든 업사이클 목걸이였다. 환경보호를 위한 취지도 좋았고 사람이 직접 만든 것이라 단 하나밖에 없는 특별함이 좋았다. 지구(Earth) 모양을 본 떠 오묘한 푸른 빛깔을 내는 동그란 모양이 참 마음에 들었다.

 “어, 목걸이 했네?” 목걸이를 하고 간 날 수현이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왜? 하면 안 되냐? 속으로 생각하며 지우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목걸이도 하는구나.”

 그쯤 되니 지우가 신경 끄라고 말하려던 차였다.

 “예쁘다.”

 장난끼 없는 저음의 목소리가 그렇게 낯설 수가 없었다. 그 후로 그 목걸이를 다신 할 수 없었다. 다시 그 목걸이를 걸고 간다면 수현이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 쓰였다.

 수현이라면 “예쁘다고 해서 또 하고 왔네!” 라고 장난칠지도 몰랐다. 그의 말을 의식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목걸이를 할 수가 없었다. 정작 그는 목걸이를 또 하든 말든 관심 없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지우는 그 목걸이를 도저히 다시 걸 수가 없었다.

 

 「쓸데없는 관심이 민망하고 부담스러웠어. 호기심 많은 소년한테 과학시간마다 관찰 당하는 실험체가 된 것 같기도 하고. 나중엔 농락당하는 기분이었다니까.」

 

 「에이! 언니도 참!」

 

 「하하. 걔 말 하나하나에 움찔거리는 내 꼴이 그랬다고.」

 

 
작가의 말
 

 가을방학 - 인기 있는 남자애

 

 혹시 널 짝사랑한 걸까

 그건 아닐 거야.

 넌 오직 남자애들한테만 인기 있는 남자애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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