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꿈을 빌어 자네와 만나러 올 거야. 내가 두 번 노크하면 다소곳하게 문을 열어줘.. 오늘처럼 과하게 반항하면 바다와 같이 드넓은 내 인내심도 어느 순간 바닥날 지도 몰라. 비참한 참수의 운명에서 당신을 구해준 내게 최소한의 고마움은 표시하는게 이롭지 않을까?"
그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는 칠흑과 같은 빛을 내뿜는, 커다란 'ㄱ'자 모양으로 굽어진 사신의 대낫, 데스 사이드(Death Scythe)를 왼쪽 어깨에 걸친 채 횡단보도를 건넌다.
적색 램프를 불규칙적으로 점멸하는 신호등 아래.
이수는 건너편으로 멀어져 가는 사신을 바라보다가 도로 연석 위에 그대로 주저앉는다.
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퍼붓는 핏빛 비는 주변의 낮은 지형을 순식간에 집어삼키더니, 그녀의 가슴 언저리까지 차오른다.
(이대로 주저앉아 핏물에 익사하는 볼썽 사나운 결말을 꿈 속에서 맞이하고 싶진 않아.)
그녀는 한쪽 팔을 바닥에 짚고는 가까스로 무릎에 힘을 주어 일어서더니, 자신이 내려왔던 길을 반대로 한 걸음씩 올라가는데..
온 세상을 피바다로 삼킬 것처럼 작정하고 오르막을 뻗어 오른 핏줄기는 빠른 속도로 그녀의 발걸음을 따라잡아 무릎과 허벅지를 잠기게 하더니, 이내 가슴을 넘어 입 안으로 시뻘건 물을 들이켜게 한다.
"크윽, 커헉, 켁!. 이, 이대로는 살아남지 못할 거 같아."
그녀는 결심한 듯 입을 크게 벌리고 마지막 큰 숨을 들이마시고는 양손을 쭉 뻗어 넘실거리는 핏물 아래로 잠수한다.
그와 동시에.. 현실처럼 보이는 이 기막힌 무대를 조종하는 연출자가 거대한 회전 레버를 돌리는 듯 '쿠구쿵' 소리가 나더니..
그녀가 잠영하는 피바다가 서서히 180도 회전하더니 수면의 위와 아래가 바뀌어 버린다.
방금 전만 해도 수면 아래를 향하여 헤엄치던 이수는 자신도 모르는 새, 저 위를 향해 떠오르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다행히도 저 멀리 강렬한 초록색 빛을 내뿜으며 점멸하는 무언가가 그녀의 눈길을 끄는데..
(아까 그 횡단보도에 서 있던 신호등일까?)
조급한 마음에 잠시 허우적대며 소중한 숨 한 모금을 내뿜고 만다.
(서두르면 안 돼.. 정이수. 이건 꿈일 뿐이야. 어릴 적부터 헤아릴 수 없는 밤을 함께 한 그런 꿈 말이야.)
이수의 머릿속에 왜 그 멜로디가 떠올랐을까? 익숙한 그 노래를 마음 속으로 따라 부른다.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누나 몰래 돌을 던지자.. 냇물아 퍼져라 멀리멀리 퍼져라~"
가까스로 평정심을 유지하고는 숨을 최대한 참은 채 평영 주법으로 양다리로 물을 밀어내며 솟아오르니
초록빛을 내뿜는 물체가 바로 앞이다.
매끈하게 마감된 천장에는 기분 나쁜 '스마일' 문양이 새겨진 은빛 금속 마개가 뭔가를 빈틈없이 꽉 틀어막은 채, 주위로 녹색 램프 서넛이 신호를 보내듯 깜박인다.
(이, 이건 마치 욕조 마개처럼 생겼는데.. 그렇다면..)
꽉 막힌 마개는 당연히 뽑으라고 존재하는 것이리라. 그녀는 하얀 천장에 두 발바닥을 단단히 디디고는 거꾸로 서서 그 마개 틈에 손가락을 깊이 넣어 있는 힘을 다해 끌어당긴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단단히 박혀 꼼짝 않는.. 빌어먹을 표정으로 웃고 있는 마개라니..
이수의 입에서 꼬르륵 물거품이 솟아 나오고.. 점점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가운데..
(여,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하면 꿈에서 영영 깨지 못할지도 몰라. 시아는 차디차게 식은 내 몸을 흔들며 울부짖겠지.)
"끄아악!!"
그녀는 천장을 디딘 발 끝에 힘을 모으고, 마개 틈으로 비집고 들어간 손톱이 빠져라 온 힘을 다해 아래로 끌어내린다.
둥글게 빛나는 금속 재질에 음각으로 새겨진 '스마일맨'의 길게 찢어진 입매가 귓가까지 늘어난다 싶더니..
[뻐엉~!]
응축된 탄산이 시원스레 빠지는 소리와 함께 금속 마개가 저 아래로 튕겨져 나가고, 시꺼먼 하수구가 모습을 드러난다.
주변의 벌건 핏물이 커다란 소용돌이를 천천히 그리며 '그 구멍'으로 빠져나가는데..
"으아악!!"
그녀 또한 저 위로 휘말려 올라가는 거센 물결에 휩싸여 균형을 잃고는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더니, 도저히 통과할 수 없을 것 같은
비좁은 수채 구멍 속으로 '쏘옥' 빨려 들어간다.
그 후로는 이수의 기억이 점점 혼미해졌기 때문에 자세히 묘사하기가 힘들다.
다만, 거대한 소라 내부의 껍데기를 닮은 나선형 결을 따라 끝도 없이 내려가는 듯한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그녀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을 미끄러지듯 파고든다.
아무도 찾지 않는 폐장된 워터 파크의 낡은 슬라이드를 타고..
대형 깔때기를 닮은 놀이 기구 안에서 빙글빙글 큰 원을 그리며 저 아래로 내려가는가 싶더니,
곧이어 수직으로 떨어지는 기다란 파이프를 통해 끝없이 낙하하는데..
공중으로 부웅 떠오르는 듯한 아득한 느낌과 함께 저 아래에 희미한 빛이 보이고, 그것은 점점 더 커지고 확실해져 간다.
"컥, 커흐흑, 켁켁.."
이수는 좁고 기나긴 파이프 라인을 빠져나와 푸르고 맑은 물 속에 풍덩 빠져 허우적댄다.
깊은 웅덩이에 빠진 그녀는 그렇게 한참을 양 팔을 휘적대며 몸부림치다가
마침내 수면 위로 떠올라 하얗게 질린 얼굴을 내밀고는 가쁜 숨을 몰아쉰다.
***
희끄무레한 창 밖은 여전히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다.
(징헐 놈의 비. 언제까지 내릴 셈이냐.)
이수는 살짝 눈을 뜬 채 슬그머니 손을 뻗어 몸 이곳저곳을 만져 본다.
꿈은 꿈일 뿐.. 그녀는 시뻘건 피바다에 빠져 그 난리법석을 피웠음에도 다친 데도 없고, 흠뻑 젖은 곳도 없다.
자는 동안 어찌나 몸부림을 쳤는지.. 홑이불은 침대 아래 바닥으로 떨어졌고, 온몸이 송글송글 맺힌 땀으로 축축할 뿐이다.
그녀는 확인 차원에서 자신의 허벅지를 세게 비틀어 꼬집어 보려다가 곧 마음을 접는다.
(이제는 나도 혼란스러워. 여기가 꿈인지 현실인지 깨닫는 것이 과연 중요할까.
눈 뜨고 깨어나 발 딛고 선 '이 곳'에서 온 힘을 다해 버티고, 살아남는 게 중요할 뿐이야.)
이수는 오른쪽 갈비뼈 아래가 아려오는 느낌에 몸을 일으켜 옆구리를 손으로 쓸어내린다.
(거기서 빠져나오느라 발버둥을 쳤더니 목이 마르네. 속도 쓰리고..)
주위를 둘러보는 그녀의 시선에 침대 가장자리로 멀찍이 밀려나 새우잠을 자고 있는 시아가 보인다.
엄마의 험한 발길질이 딸에게는 미치지 않은 게 다행이랄까?
이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시아의 몸을 살짝 들어 가운데로 옮겨주고는 편안히 눕게 정리해 준다.
(잘 자라. 우리 딸. 엄마처럼 기묘한 꿈 꾸지 말고.. 이쁜 꿈만 꾸면서 자.)
하얗고 동그란 이마에 드리워진 젖은 머리칼을 위로 쓸어 넘겨주는 엄마의 따스한 손길에 시아는 가볍게 몸을 뒤척인다.
간밤에 천장을 무대 삼아 그림자 놀이를 하면서 죽은 아빠가 시아의 꿈에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더구나 괴물 같은 그 고양이를 선물했다니.. 그녀는 다시금 등골이 서늘해진다.
"그 고양이 이름이 뭐였더라. 꿈에서 몇 번 들었던 거 같은데.."
사별한 남편 '희준'이.. 떠올리기만 해도 끔찍한 '루시드'로 변하여 꿈자리에 나타날 때, 그 옆을 졸졸 따라다니던 러시안 블루 고양이.
금방이라도 용을 닮은 긴 가죽 날개를 뻗어 날아올라 꼬리날에 불을 켜고는 자신의 눈 앞에 나타날 것만 같다.
[꺄아옹~ 크아옹!]
억수 같이 내리는 빗줄기를 피해 제 짝을 찾아 울부짖는 밤고양이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수는 어스름한 거실로 나가 냉장고에서 찬 보리차를 꺼내 들이켜고는 라동 뒤편으로 열린 창 밖을 바라보는데..
빗물을 잔뜩 머금어 저 멀리 희붐한 빛을 띠는 주택가 옥상에..
형형한 인광을 발하는 날짐승의 한 쌍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다.
(이런 험한 날씨에, 저기까지 길고양이가 올라갔나?)
잠이 덜 깬 그녀의 궁금증이 깊어질 찰나 순식간에 사라지는 두 줄기 빛.
"내가 헛것을 봤나. 하긴 비도 오는데 저 높은 곳에 야옹이가 올라갈 리가 없지."
혼잣말을 하고는 컵에 남은 물을 한 번에 마시고는 안방 침대로 돌아간다.
"잠이나 더 자자. 이대로 뜬 눈으로 지새우면 내일 너무 피곤해. 사신인지 뭔지 하는 놈도 하룻밤에 두 번 찾아오진 않겠지.
개뼉다구 같은 놈.. 또 나타나기만 해 봐. 사타구니를 뻥 걷어차 줄 테니.."
눈 앞에 사신이라도 나타난 듯 주먹을 휘두른 이수는 심호흡을 하고는 시아 옆에 누워 다시금 잠을 청한다.
한 시간 아니 두 시간 남짓 잠이 들었을까?
안방과 베란다 사이의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 일어나 봐. 여기 난리 났어."
"으, 으응?"
겹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시아가 얼굴을 빼꼼 내밀고는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엄마를 부른다.
"엄마. 여기 나와보라니깐. 빨리빨리.."
"엄마 피곤한데.. 왜 그러니?"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간신히 일어나 거실 쪽 베란다로 발걸음을 옮겨 나가니 글쎄..
밤새 쏟아진 폭우로 베란다 어딘가에서 빗물이 철철 넘쳤는지
시아의 발목 언저리까지 차오른 물은 거실 창턱을 넘어 집 안으로 번질 기세가 아닌가.
"아, 아니. 이게 무슨 물난리야."
아이는 언제 일어났는지 아침부터 베란다에 나와 맨발로 물을 첨벙 밟고는 촐싹대며 신이 났다.
"시, 시아야, 거실로 들어와. 대체 어디서 물이 샌 거야?"
(꿈에서는 피바다에서 허우적대더니, 현실에서도 물난리인 건가? 최악이다. 최악!)
잠시 멍을 때리다 정신을 차리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어 내리는 이수.
서둘러 옷장으로 가더니 헌 옷 무더기와 수건을 대야에 담아 가지고 나온다.
"이걸로 발 닦아. 그리고 소파에 얌전히 앉아 있어."
그녀는 아이에게 수건을 건네주곤 조심스레 베란다로 나가 헌 옷과 수건을 바닥에 쏟아붓고는 넘친 물을 훔쳐 닦기 시작한다.
"그동안 태풍이 와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대체 어디서 넘친 거지? 창문 아니면.."
쪼그려 앉아 물을 닦아 내는 이수의 시선에 창가 구석에 위치한 기다란 회색 '파이프' 하나가 들어온다.
"저 파이프 주위가 유난히 물이 흥건한데.."
플라스틱 대야에 흠뻑 젖은 수건의 물을 비틀어 짜내고는 위아래 층과 연결된 파이프 주위를 자세히 살펴보는데..
"일단 아파트 관리소장한테 연락해보자. 이건 내 힘으로 해결할 만한 문제가 아니야."
***
이수: "소장님. 라동 804호인데요. 거실 베란다에 물이 가득 찼어요."
관리소장: "라동 804호? 간밤에 비가 그리 쏟아붓더니 '우수관'에 말썽이 생겼나? 오늘 일찍 나왔으니 10분 후에 올라갈게요."
잠시 후 우수관 이곳저곳을 두드리며 살펴보는 관리소장. 50대 중반으로 보이는데 기력이 다했는지 마른 몸에 허리가 구부정하고 걸음걸이가 느리다.
"이게 원래 잘 안 막히는데 희한하네. 여기가 빌라나 주택도 아니고.. 옥상에서 정원을 가꾸거나, 빗물이 배수가 잘 안되면 우수관이 자주 막히거든."
"그럼 이거 어떻게 해야 돼요, 소장님?"
"단지가 작아서 자체적으로 수리할 만한 인력은 없고.. 내가 업체에 연락해서 수리하라고 할게요."
"네, 가능한 빨리 부탁드려요."
하지만, 시아를 학교에 등교시키고, 한 시간이 지나도록 관리 소장은 기다리라고만 한다.
"소장님, 언제쯤 수리받을 수 있을까요?"
"배관 업체들이 바쁜지 연락도 잘 안 되고.. 이걸 어쩌지. 요즘 비가 많이 와서 하수도가 넘치고, 우수관이 막히고 난리인가 봐.
"언제까지 기다리고만 있어요. 지금도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잘못하면 거실까지 물이 넘치겠어요."
"급한 건 알겠는데.. 어쩔 수 있나. 방금 연락 닿은 업체는 다음 주에나 시간이 난다네."
"..."
그녀는 하는 수 없이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다. 헌 옷으로, 수건으로 아무리 닦아 내도 넘치는 물의 기세는 멈출 기미가 안 보이는데..
이수는 물난리가 난 베란다를 심란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없을까. 부담 없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언제든 날 돕기 위해 찾아올 수 있는 그런 사람..)
"아?!"
옛말이 틀린 게 하나 없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그 사람'이 퍼뜩 떠오른 듯 급히 통화 버튼을 누르는데..
"정이수, 아침부터 웬일이야. 나한테 전화를 하고?"
그녀의 귓가를 울리는 유난히 큰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늘찬 아빠, 하태오 이사였다.
- 33회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