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4  5  6  >>
 1  2  3  4  5  6  >>
 
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용의 아이 따윈 개나 줘 버려!
작가 : 솔커
작품등록일 : 2020.8.3

#본격_여주인공이_다_해_먹는_동양_판타지!

"아이야, 너는 용의 아이란다."

아니, 용의 아이면 축복이나 내려줄 것이지 제물이 웬 말이람?
제물이 될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한 희진의 이세계 고군분투 생존기!

나는 지금이 왜 고구려인지도 모르겠고, 왜 황태손이 황궁 대신 산골짜기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신관인 주제에 신을 죽이러 가자는 소리나 하는 신관이 옆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야, 너네 진짜 나한테 왜 그러냐?"

과연 희진은 용의 아이라는 운명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13. 비밀스러운 아이 둘 (4)
작성일 : 20-09-02 19:07     조회 : 244     추천 : 0     분량 : 7474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희진의 일과엔 커다란 변화가 생겨났다. 전과 달리 아침부터 밤까지 거의 모든 시간을 최 영감이나 경과 함께 보내야만 했다. 희진으로서는 정말이지 죽을 맛이나 다름없는 나날들이었다. 하필이면 저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두 사람과 함께라니.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봐도 도무지 빈틈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물론 희진의 성격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아, 영감님! 제가 이 몸으로 이렇게 심오한 우주의 이치를 배워서 어디에 써먹어요!”

 

 “허면 네가 그 몸으로 산에 가서 나무를 해 올 것이냐, 나물을 캐 올 것이냐?”

 

 

 와, 영감님 라임 최고. 맞는 말로 사람을 뒤흔드는 최 영감 앞에서 희진은 그저 울며 겨자 먹기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공부 삼매경 속에서 희진은 대한민국 수험생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학교 가고 싶다던 말 취소! 나도 수험생 해 보고 싶다는 말 다 취소!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앉아서 공부만 해!

 

 

 정작 몸이 아파 아무것도 하지 못할 때는 부모님이 제발 쉬라고 말려도 듣지 않고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꼼짝 않고 책만 파던 게 불과 얼마 전의 자신이라는 건 까맣게 잊은 희진이었다. 아마도 좋아서 하는 일과 시켜서 하는 일의 차이겠지. 꿀맛 같은 잠깐의 달콤한 휴식이 주어기가 무섭게 희진은 후다닥 방을 박차고 나와 마루에 걸터앉은 채 짧은 다리를 까딱였다.

 

 

 사람이 뇌를 이만큼이나 썼으면 이젠 멍때리면서 좀 쉴 때도 됐지. 그럼, 그렇고 말고. 희진은 눈 앞에 펼쳐진 첩첩산중 산골짜기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험난한 기세로 굽이치는 푸르른 산등성이들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스트레스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궁금증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여긴 대체 어딜까. 한반도기는 할까. 고구려라고 했으니까 만주 벌판 한 가운데인 걸까? 때마침 문을 열고 나온 최 영감의 쪽빛 옷자락이 희진의 시야 끄트머리에 어른거렸다. 희진은 잽싸게 고개를 돌렸다.

 

 

 “영감님!”

 

 

 최 영감은 여느 때처럼 험상궂은 얼굴로 희진을 내려다봤다. 그의 입에선 으레 그렇듯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부르느냐?”

 

 “여기가 어디예요?”

 

 

 하아. 최 영감은 습관적으로 치미는 한숨을 꾹꾹 눌러 참으며 차근차근 운을 뗐다.

 

 

 “고구려지 않더냐?”

 

 

 그 말에 인상을 찡그린 쪽은 도리어 희진이었다. 아니, 그걸 누가 몰라서 묻겠냐고요.

 

 

 “그거 말고요. 저도 그건 알거든요? 여기요. 이 산이 어디냐구요.”

 

 

 잿빛 눈썹 아래에 자리한 최 영감의 눈이 형형한 빛을 뿜어냈다. 아차 싶어진 희진은 얼른 찡그렸던 인상을 풀었다.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고 눈까지 깜빡여댄 희진이 황급히 뒷말을 덧붙였다.

 

 

 “아니, 그냥 궁금해서요. 이리도 험한 산자락에 어찌 이리 훌륭한 집을 지으셨을까! 저처럼 어린아이가 보기엔 궁금한 게 당연하지 않겠어요?”

 

 

 큰 소리로 날숨을 내쉰 최 영감은 희진의 곁에 앉으며 혼잣말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이놈의 자식은 구미호라도 되는 것인지, 원. 능청스럽기가 웬만한 놈들 저리 가라구먼.”

 

 

 그의 혼잣말에 희진의 귀가 번뜩였다.

 

 

 “여기도 구미호가 있어요?”

 

 

 최 영감은 말 같지도 않다는 말을 한다는 듯 희진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여기도? 그럼 여기는 있고 저기는 없느냐? 세상천지에 어디 구미호가 있는 곳, 없는 곳이 따로 있으려고.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는 거겠지.”

 

 “아아, 말꼬리 잡지 마시구요!”

 

 

 희진은 팔을 훠이훠이 휘저으며 대꾸했다. 앙탈 같은 칭얼거림에 최 영감은 실소를 지으며 저 멀리 구름에 가려질 만큼 우뚝 솟은 산등성이를 바라봤다. 회한에 잠긴 눈빛이었다.

 

 

 “용신이 있는 마당에 구미호가 없을 건 또 무어람.”

 

 

 영 마땅찮은 대답에 손가락을 꼼지락대던 희진은 슬그머니 팔꿈치로 최 영감을 툭 치며 물었다.

 

 

 “영감님, 분위기 잡으시는 와중에 죄송한데요, 그래서 여기가 어딘데요?”

 

 

 정말로 궁금해 죽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최 영감은 엉망진창인 얼굴로 희진을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을 꾹 참는 것도 같고, 어찌 보면 할 말을 잊어버린 것도 같은 그런 얼굴. 잠깐의 정적 끝에 최 영감이 입을 열었다.

 

 

 “금강산이다, 이놈아. 금강산.”

 

 

 희진은 놀라 손뼉까지 치며 최 영감의 말을 반복했다.

 

 

 “대박. 금강산이에요? 일만이천봉? 진짜요?”

 

 

 최 영감의 얼굴에 또다시 의문이 떠올랐다. 도대체가 이 아이는 알아야 할 건 모르고 몰라도 될 건 왜 이리 잘 아는 게야? 그러거나 말거나 희진은 잔뜩 신난 모습이었다.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평생 살면서 한 번도 못 가 볼 줄 알았던 금강산이라니. 어찌 신나지 않으려고. 희진은 몸까지 바깥으로 쭉 빼며 빼곡하게 산채를 둘러싼 산자락을 바라봤다. 그저 푸르고 험난하기만 하던 산새가 하나하나 의미가 있는 것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저마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사연을 품고 있는 것처럼.

 

 

 “여긴 무슨 봉이에요? 비로봉?”

 

 “누가 그러더냐?”

 

 “네?”

 

 

 그런 희진의 감상을 산산조각내기라도 하듯 최 영감이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누가 이 금강산이 일만이천이라 하였냐고 내 묻는 것이다.”

 

 

 아하하. 그게 말이죠. 희진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슬그머니 마루에서 내려섰다. 조금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위쪽의 땅을 밟았다는 생각에 지나치게 흥분해버린 게 문제였다. 망했네, 망했어. 희진은 열심히 눈을 굴리며 생각했다. 지금이 1780년이면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가 앞인가, 뒤인가? 여기에도 그분이 계셨을까? 아니, 애초에 대동여지도에 금강산이 일만이천봉이라고 나왔던가?

 

 희진이 우물쭈물하며 답을 얼버무리는 사이 최 영감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바라봤다. 수상하기 짝이 없는 아이였다. 보고도 모르는 것을 보면 금강산에 온 적도 없는 아이인 모양인데 어찌 봉우리 이름을 알고 있을꼬. 설마 정말 구미호라도 되는 아이는 아닐는지.

 

 

 “그게, 그, 대동여지도……? 비슷한 거에서 본 거 같거든요. 비로봉. 일만이천봉.”

 

 

 희진은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최 영감에게서 슬그머니 멀어지며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어우, 간 떨어지겠다. 이러다간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구미호가 와서 파먹기도 전에 다 떨어져서 사라지겠네! 최 영감은 희진의 입에서 나온 지도라는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저 아이가 구미호인지 아닌지 같은 뜬구름 잡는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네 놈, 이젠 측법까지 알고 있다 할 셈이냐?”

 

 “네? 그게 뭐예요? 아, 뭐 재는 방법인가?”

 

 

 최 영감은 되었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내저었다. 희진은 입술을 삐죽이며 최 영감의 시야를 벗어났다. 아니, 뭔지 알려주면 좀 덧나냐고. 맨날 나한텐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자기는 안 알려주고. 참 나, 어이가 없어서. 희진은 속으로 구시렁대며 뒷마당으로 향했다. 마루를 빼앗겼으니 뒤에서라도 혼자 휴식을 취할 속셈이었다.

 

 최 영감의 성질머리를 욕하며 종종걸음을 옮기던 희진은 기둥 너머로 삐져나온 작은 그림자를 발견했다. 아무래도 먼저 온 손님이 계신 모양이었다. 최 영감님은 마루 위에서 온 얼굴로 하늘 천을 그리고 계시고, 도영 오라버니는 산에 갔을 것이고, 그럼 남은 사람은? 빙고, 경님이시겠네.

 

 희진은 까치발로 살금살금 걸어 그림자 근처로 다가갔다. 어디 한번 가볍게 놀라게 해 볼까 하는 심산에서였다. 기둥만 돌아서 왁! 하며 소리만 치면 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기둥 코앞에 선 희진은 훌쩍이는 울음소리에 양팔을 들어 올린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기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선 두 사람은 오래도록 아무런 말이 없었다. 경은 눈물을 삼키느라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고, 희진은 그런 경을 위로할 자신이 없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으니까.

 

 

 “어마마마, 아바마마…….”

 

 

 울음에 섞여 툭 튀어나온 경의 한 마디에 희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아이는 황궁에 불이 난 날 밤 도망쳤고, 이곳에 이 아이의 부모는 보이지 않았고다. 그런데 이 아이가 어마마마와 아바마마를 찾는다는 건 그 두 사람은 그날의 화재로 사망했다고 보아야 하는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희진은 양팔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부모의 죽음을 등 뒤로 하고 도망치는 심정이 어떤 것일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저 어린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작고 작은 경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입술을 꾹 깨물던 희진은 바닥에 떨어진 마른 가지를 일부러 소리가 나도록 꾹 밟았다. 기둥 너머의 그림자가 크게 일렁였다.

 

 

 “경님, 여기 계셨습니까?”

 

 

 희진은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모른다는 듯한 얼굴로 경에게 말을 건넸다. 경은 재빨리 고개를 돌린 채 손으로 얼굴을 닦아냈지만 발개진 코끝과 눈가는 그런다고 숨겨질 리가 없었다.

 

 

 “네가 웬일이냐.”

 

 

 평소와 다름없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도 훌쩍거리며 낮게 잠겨 있었다. 누가 봐도 나 울었어요, 라며 광고하고 있는 그 모습을 모른 척하는 게 더 힘들 지경이었다. 희진은 한숨을 쉬며 경의 곁에 쪼그려 앉았다.

 

 

 “뭐 하느냐?”

 

 

 경의 호통을 무시한 희진은 흙바닥 위의 자잘한 돌멩이를 주워 앞으로 툭 던지며 이야기했다.

 

 

 “많이 힘드시지요?”

 

 

 곁에서 다시금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희진은 천천히 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가에 다시금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붉은 입술은 어떻게든 울음을 참아보겠다며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희진은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 경의 등을 꼭 껴안고 천천히 토닥이기 시작했다.

 

 

 “많이 외롭고, 힘드시지요? 세상일이라는 게 원래 다 그렇습니다.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요. 좀 살 만하면 다시 죽을 맛이고, 또 살 만해지면 도로 죽을 맛이고. 나한테만 왜 이렇게 가혹한가 싶고, 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내 삶만 이렇게 엉망진창인가 싶고. 근데 또 어떻게 살다 보면 살아지더라구요.”

 

 

 경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희진은 조용히 제 어깨가 젖는 걸 느끼며 경의 등을 계속해서 토닥였다.

 

 

 “보고 싶은 이들은 많은데 아무도 볼 수 없고, 보고 싶다는 티도 내면 안 되고. 나는 아직 어리고 힘들어 죽겠는데 세상은 인정사정 안 봐 주고. 그렇죠? 내가 이렇게까지 힘들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뭘까 싶고, 왜 나만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나 싶고, 마냥 행복하게 잘만 사는 사람들 생각하면 억울해지고.”

 

 

 희진은 어느새 먼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하고 있었다. 경을 위로하기 위해 시작한 말들은 어느새 자신에게 향하는 위로가 되어 있었다. 바짝 쳐든 턱을 타고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머리카락에 닿아오는 축축함에 경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희진을 바라봤다. 눈물에 젖은 두 얼굴이 붉은 눈으로 서로를 마주했다.

 

 

 “그래도 살아야지요. 살기 위해 사는 게 뭐 어떱니까? 내가 없어지면 걱정할 사람들을 위해서, 나를 위해 모든 걸 내걸고 사랑해줬던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잘 살아야죠!”

 

 

 희진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환한 미소에 걸맞지 않게 눈꼬리를 타고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이야기하면 할수록 제 걱정을 하고 계실 부모님 생각에 속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희진은 애써 밝은 척 목소리를 내며 다시금 경을 끌어안고 그의 등을 팡팡 소리가 나도록 내리쳤다. 저를 밀어낼 줄 알았던 경은 가만히 제 품에 안겨 작은 어깨를 바들바들 떨 뿐이었다. 희진은 그가 눈물을 멈출 때까지 가만히 제 품을 내어주었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하는 법. 두 사람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아픔을 공유하는 중이었으니까.

 

 

 “나는 말이다.”

 

 

 한참 만에 경의 입에서 푹 잠긴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희진은 가만히 경의 등을 토닥이며 그가 계속해서 이야기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나는, 할바마마가 너무도 밉다. 밉고 미워 견딜 수가 없어.”

 

 

 경은 저도 모르게 희진의 품을 더욱 파고들며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무거운 말을 토해냈다. 첫 시작이 어려웠을 뿐, 참고 참았던 경의 감정은 물꼬가 트이자마자 매섭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찌 제 자식을 제 손으로 내친단 말이야. 어찌 자식을 가두어 죽일 생각을 한단 말이야! 어찌 사람이 그래, 어찌 제정신으로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 나는, 나는 그런 할바마마가 너무도 밉다. 아바마마를 내게서 앗아간 할바마마가 너무도 원망스러워 견딜 수가 없어.”

 

 

 울부짖는 경의 등을 토닥이던 희진의 손길이 순간 멈추었다. 희진은 방금까지 저를 지배하던 감정들이 바싹 마르는 기분을 느꼈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번져갔다. 경의 말을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었다.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

 

 

 “도대체 신전 놈들은 왜 아바마마와 할바마마 사이에 끼어서 일을 그 지경으로 몰아간 건지, 할바마마는 왜 아바마마보다 그깟 놈들의 의견을 더욱 높이 사신 건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모름지기 부모란 자식을 사랑함이 마땅한 게 아니더냐! 어찌, 어찌 그런단 말이야! 나는, 나는 그 모든 날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시파와 벽파의 당파 싸움의 희생양이 되어 뒤주에 갇혀 명을 달리한 사도세자와 제 손으로 세자에게 가혹한 명을 내려야만 했던 영조, 그리고 그 모든 걸 보고 자라난 정조. 희진의 손이 덜덜 떨려왔다.

 

 

 “나는 아바마마가 메마른 목소리로 문 너머로 어떻게든 내게 전하려던 그 말을 잊을 수가 없구나. 살아남아야 한다고, 너만은 꼭 황제를 피해 살아남아야 한다고. 가족끼리 어찌 그런 말을 한단 말이야. 어찌……그런 게 가족이란 말이냐!”

 

 

 경은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리며 희진의 품으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희진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경을 안아 토닥거렸다. 무의식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경의 말은 하나같이 사도세자와 영조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희진은 떨리는 눈으로 제 품에 기댄 경의 새카만 정수리를 바라봤다. 그럼 이 아이가 정조라도 된다는 거야? 이 애가 왕세손, 아니, 그러니까 황태손이라고?

 

 

 “경님!”

 

 

 저 멀리서 도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진은 분명 저를 찾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여전히 제 품 안에서 서러움을 토해내는 경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이 아이가 정조의 처지와 똑 닮았다는 생각을 하니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쌍함과 측은함이 밀려왔다. 이 작고 어린아이가 그동안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 희진은 천천히 경의 등을 쓰다듬었다. 조그만 위로라도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로 인한 아버지의 죽음을 보았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제야 조금은 사나운 경의 성질머리가 이해가 가는 희진이었다. 그 모든 게 트라우마로 남았던 거겠지. 그래서 그렇게 매사에 공격적인 거고. 그러면서도 자길 싫어하는 걸 무서워하는 거야. 희진은 쓸쓸한 얼굴로 조용히 경의 등을 토닥였다. 하지만 별안간 그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럼 그날 밤 황궁에 불은 누가, 왜 질렀던 걸까.

 

 

 “어마마마, 어마마마…….”

 

 

 희진은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만약 그날 밤, 이 아이의 어미조차 명을 달리한 것이라면? 그래서 세상천지 혼자가 된 이 아이가 할아비의 눈을 피해 도망친 것이라면?

 

 

 “와, 진짜 널 어쩜 좋냐.”

 

 

 희진의 입에서 진심이 담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내 인생도 인생이지만 너도 진짜 만만치 않구나. 어이구. 희진은 진심을 담아 있는 힘껏 경을 끌어안았다. 경의 작은 손이 제 허리를 조심스레 감싸 안는 게 느껴졌다. 어느새 두 사람의 작은 그림자는 하나로 합쳐져 커다란 그림자를 빚어내고 있었다. 기둥 뒤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며 멈춰있던 도영의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을 뒤로한 채 기척 없이 걸음을 옮기는 도영의 얼굴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33 34. 검의 주인 (1) 2020 / 10 / 21 234 0 4996   
32 33. 최 영감님 댁 셋째 딸(4) 2020 / 10 / 19 233 0 4126   
31 32. 최 영감님 댁 셋째 딸 (3) 2020 / 10 / 12 229 0 5455   
30 31. 최 영감님 댁 셋째 딸 (2) 2020 / 10 / 9 237 0 4778   
29 30. 최 영감님 댁 셋째딸 (1) 2020 / 10 / 7 244 0 5028   
28 29. 그 마을에서는 (4) 2020 / 10 / 5 231 0 6946   
27 28. 그 마을에서는 (3) 2020 / 10 / 2 235 0 5263   
26 27. 그 마을에서는 (2) 2020 / 9 / 30 234 0 5120   
25 26. 그 마을에서는 (1) 2020 / 9 / 28 227 0 5005   
24 24. 동상이몽 (3) 2020 / 9 / 26 233 0 5208   
23 23. 동상이몽 (2) 2020 / 9 / 23 238 0 6087   
22 22. 동상이몽 (1) 2020 / 9 / 21 239 0 6468   
21 21. 이상한 나라의 도마뱀 (4) 2020 / 9 / 18 238 0 6643   
20 20. 이상한 나라의 도마뱀 (3) 2020 / 9 / 16 238 0 5687   
19 19. 이상한 나라의 도마뱀 (2) 2020 / 9 / 14 255 0 6272   
18 18. 이상한 나라의 도마뱀 (1) 2020 / 9 / 11 240 0 5596   
17 17. 그림자 박선달 (2) 2020 / 9 / 10 250 0 6268   
16 16. 그림자 박선달 (1) 2020 / 9 / 7 240 0 6699   
15 15. 비밀스러운 아이 둘 (6) 2020 / 9 / 4 241 0 6645   
14 13. 비밀스러운 아이 둘 (4) 2020 / 9 / 2 245 0 7474   
13 12. 비밀스러운 아이 둘 (3) 2020 / 8 / 31 250 0 5877   
12 11. 비밀스러운 아이 둘 (2) 2020 / 8 / 28 253 0 6078   
11 10. 비밀스러운 아이 둘 (1) 2020 / 8 / 26 233 0 5065   
10 9. 1780년, 지금이 고구려라고?(4) 2020 / 8 / 24 239 0 5373   
9 8. 1780년, 지금이 고구려라고? (3) 2020 / 8 / 21 238 0 5411   
8 7. 1780년, 지금이 고구려라고? (2) 2020 / 8 / 19 236 0 6235   
7 6. 1780년, 지금이 고구려라고? (1) 2020 / 8 / 17 261 0 4976   
6 5. 두 번씩이나 어딘지도 모를 곳에서 깨어나… 2020 / 8 / 14 266 0 5935   
5 4. 두 번씩이나 어딘지도 모를 곳에서 깨어나… 2020 / 8 / 12 264 0 5973   
4 3. 두 번씩이나 어딘지도 모를 곳에서 깨어나… 2020 / 8 / 10 257 0 5125   
 1  2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등록된 다른 작품이 없습니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