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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로맨싱 사가 : 백발마녀전
작가 : 백발마녀
작품등록일 : 2020.8.23

똥싸개, 스토커, 시너테러범을 상대로 성장하는 쌍둥이 남매와 친구들의 이야기.

 
29화 ~ 32화(완)
작성일 : 20-09-02 03:08     조회 : 258     추천 : 0     분량 : 24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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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화. 너를 지켜줄게...

 

 아랑이와 오거리를 지나서 다시 ‘빌라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슨 말을 하며 걸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바람도 선선하니 근래 들어 가장 기분이 편안한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렇게 집까지 걸어왔을 때는 시간이 벌써 9시 30분 가까이 되어가고 있었다.

 

 “야, 현주도 왔나 보네. 근데 쟤들은 뭐가 그리 신나서 문도 제대로 안 닫았냐.”

 

 아랑이 한심하다는 듯, 우리 집 빌라 2층 입구를 손으로 가리켰다.

 

 입구 빌라 문이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안에서는 작게 들리는 텔레비전 소리 외에 별다른 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오히려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 이렇게 조용한 거야.’

 

 아랑도, 약간 이상한 기준을 느꼈는지, 더는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내 뒤를 조용히 따랐다.

 

 ‘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

 

 그렇게 생각하면, 비스듬히 열려 있던 문을 살짝 당겨 열었다. 마치 남의 집에라도 들어가는 양, 살며시.

 

 그리고 서서히 눈에 들어오는 집 안의 상황. 부엌 식탁 위 과자며 음료수통은 다 쓰러져서 바닥을 더럽히고 있었고, 조명을 쓰러져서 깨져있고, 벽에는 익숙하지 않은 스크래치 자국, 깨진 텔레비전 스크린에서는 일그러진 형태로 예능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현주가 보였다.

 

 소파 옆에 가려져서, 숨어 있는 건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 평소에 도도하고 약간은 사납게까지 생겼다고 생각한 현주 얼굴이 뭐에 맞았는지 잔뜩 부어올라 겁먹은 아이처럼, 그렇게 보였다.

 

 “현주야, 왜, 왜 그래…. 거기서 뭐 해? 희주는?”

 

 내가 천천히 다가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랑이 다가가는 내 어깨를 붙잡고, 멈춰 세웠다. 그녀가 나를 쳐다보면서도 겁을 먹고 있는듯했기에.

 

 “도, 도둑…….” 그녀가 쥐죽은 듯 조용한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입 모양이라도 없었으면 못 알아들을 뻔했다.

 

 “도둑? 도둑 들었어?” 내가 눈이 커져서 그녀 앞에 한 걸음 다가가다가 멈추고는 한쪽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춰서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며 물었다.

 

 “...몰라, 둘이 텔레비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위층에서 누가 내려와서…, 갑자기 나타나서 우리를 때리고….” 그녀의 손이 벌벌 떨렸다. 내가 더 다가가서 그녀 손을 잡았다.

 

 “집안에서? 집안에서 도둑이 나타났다고?”

 문득 지난달 집에 도둑이 들었던 게 생각났다.

 ‘방범창은 새로 설치했는데…’

 

 “괜찮아. 나도 있고. 봐봐. 아랑이가 있잖아.” 나보다는 아랑이가 훨씬 믿음직할 거란 생각에 아랑이를 살짝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희주는 어딨어?”

 

 “...그 사람이 날 때릴 때, 희주가 도망치려고 문을 열었는데, 그 사람이… 갑자기 희주 허리를… 발로 차고, 그리고… 머리채를 잡고 위층으로….”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위층을 가리켰다.

 

 그때 위층에서 희주 목소리가 들렸다. 크지만 문소리에 막혀서, 아니, 입에 뭐라도 물린 것처럼 갑갑한 목소리. 하지만, 나는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 내 이름.

 

 “희준아!”

 

 그 소리를 듣자마자 현주 손을 놓고 미친 듯이 위층으로 달렸다. 하지만 이미 내 앞에 아랑이가 나보다 훨씬 먼저 움직였다. 그 큰 몸집으로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 올라가더니, 아무런 주저 없이 희주 소리가 난 방문을 발로 세게 차서 열었다.

 

 단 한 번의 발차기에 잠겨있던 방문이 종잇장처럼 찢겼고. 두 번째 발차기가 힌지(hinge) 부분을 내리찍자, 문이 부서지듯 쓰러졌다. 박살이 났다고 보는 게 맞겠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랑의 악 받친 목소리. “이 개새끼야!”

 

 뛰어 들어가는 아랑의 눈빛은 이미 실핏줄 터져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내가 문 앞에 섰을 때, 희주는 입에 재갈 같은 게 물린 채로 침대 위에 쓰러져있었다. 양손도 앞으로 묶여있었고 아직 더 큰 일이 벌어지진 않았지만, 이미 티셔츠 목 부분이 잔뜩 늘어져 있었다.

 

 눈물범벅이 되어, 더는 소리칠 힘도 없는 듯, 아랑과 그 침입자의 몸싸움에서 멀어지려고 침대 끝, 뒤쪽으로 아등바등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190에 가까운 아랑이 그 침입자를 넘어뜨리려고 하는데, 그 침입자도 지지 않고 맞섰다.

 

 키는 아랑이보다 작았지만, 넓은 어깨에서 나오는 힘인지, 북슬북슬한 다리털에서 나오는 힘인지, 오히려 아랑을 거꾸로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 같았다. 힘 대 힘의 대결. 그리고 그의 얼굴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놈이었다. 영양쌤과 모텔에서 나온 ‘시인’. 희주 공부 가르쳐 준다는 핑계로 어떻게 해보려고 했던 ‘다리털 대딩’. 희주를 스토킹하다가 빌라 틈 사이에서 내 뒤에 숨어있던 그놈.

 

 내가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그를 향해, “너 이새끼” 하며 말을 이어가자, 그가 나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그때 아랑이 허리를 젖혀서 마치 씨름하듯 그의 다리를 걸었고, 결국 그를 침대 위쪽으로 쓰러뜨렸다. 하지만 그놈은 여전히 아랑이의 양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아랑은 그와의 힘겨루기에서 우위를 차지했지만, 여전히 그놈은 아랑의 팔을 잡은 채로 아랑을 끌어당겼고, 둘은 침대 위에서 부둥켜 마치 그레코로만형 레슬링이라도 하듯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었다.

 

 희주는 소리를 지르며 침대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도망쳤다. 그러고는, 나를 밀치고 방을 뛰쳐나갔다. 잔뜩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희주야!”

 

 내가 소리쳐 불렀지만, 그녀는 이미 계단을 미친 듯이 뛰어 내려갔다. 그러다 균형을 잃고는 넘어져서 계단 앞 화분에, 그리고 다시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그런데도 멈추지 않고, 몸을 일으켜 세워서는 현관문을 밀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내가 다시 다급히 그녀 이름을 부르고 그녀의 뒤를 쫓았다. 현주도 걱정이 되었지만, ‘아랑이가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했다. ‘지금으로서는 저렇게 겁에 질려 도망치는 희주를 안정시켜야 한다.’ 라는 생각뿐이었다.

 

 ---

 

 집 밖으로 뛰쳐나가서, 빌라길 쪽을 쳐다봤다. 그런데, 이상했다. 희주가 다시 뒷걸음질 치며 내 쪽으로 오고 있는 게 아닌가. 양손은 묶인 채로, 입에는 재갈이 물려서, 늘어진 티셔츠에 집에서만 입는 반바지….

 

 거기에 맨발로 뒷걸음치며 여전히 몸을 부들부들 떨며, 내게로 와서 부딪혔다. 희주는 겁에 질려 고개를 뒤로 돌려 나를 보았고, 나는 희주의 어깨를 살며시 잡았다.

 

 그리고 그녀 앞, 길을 막고 있는 존재를 쳐다봤다.

 

 검은색 티셔츠에, 검은색 8부 조거 팬츠, 검은색 마스크. 키는 나보다 조금 컸지만 늘씬한 서양 여성 같은 이질적인 체형. 단발머리에, 꽉 잡힌 어깨, 굴곡진 가슴, 그리고 이어지는 긴 팔, 매끈한 종아리, 그 끝 발목에 걸쳐진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한 발찌. 정훈이였다.

 

 양손에는 커다란 검은색 비닐봉지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그 중, 한쪽에서는 뭐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기괴했다.

 

 대치. 침묵. 이미 서로를 정확히 알아보고 있었다. 다만, 나도 그가 손에 들고 있는 게 무엇인지 모르고, 그도 우리가 왜 갑자기 이 시간에 밖으로 뛰쳐나왔는지 모를 뿐.

 

 “너 정훈이지! 뭐 하는 거야, 저리 안 비켜!” 내가 소리쳤다.

 “너희 남매. 난 알아. 난 봤어.” 그가 입을 열었다.

 “뭐, 뭘?!” 내가 소리쳐 물었다. 희주는 떨고 있었다.

 “너희 비밀….“

 

 그때, 갑자기 우리 집 빌라 3층에서 유리창과 창틀이 깨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누가 등으로 창틀에 부딪혀 부서지는 소리. 아랑이와 그 스토커의 싸움이 격하다는 반증이었다. 나로서는 제발 동네 누구라도, 어떤 어른이 좀 나와서, 이런 소란 소리를 듣고, 도와주었으면 하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타당, 탕, 쨍그랑.

 

 정훈이가 빌라 창문을 보더니, 별로 동요하지도 않은 채, 다시 희주를 노려봤다. 그리고, 봉지 하나를 땅에 내려놓고는, 그 손을 반대편 뭔가 뚝뚝 떨어지는 봉지 속에 집어넣더니, 시커먼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뚝…. 뚝…….

 

 저절로 얼굴 인상이 찌그러지게 되는…, 냄새. 역한 냄새.

 

 인분이었다. 아니 그것이 사람의 변인지, 동물의 그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단지, 매우 역한 냄새를 풍기는 똥이라는 사실 외에는.

 

 “우, 욱….” 내가 헛구역질을 했다.

 

 그러자, 그 틈에 정훈이 그 손에 쥔 똥을 희주를 향해 던졌다. 그리고 외쳤다.

 

 “내가 다 봤어! 시커먼 뭐가 나오면서, 몸이 이상하게 변하는 거!”

 

 이어지는 기괴한 웃음. “흐흐흐흐.”

 

 내가 몸을 돌려막았지만, 정훈은 쉼 없이 봉지에서 똥을 던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소리쳤다.

 

 “이 마녀 새끼들! 죽어!!”

 

 그를 쳐다보자, 이제는 똥 봉투를 집어 던지고, 바닥에 놓았던 다른 봉투를 꺼내 집어 들었다.

 

 “뭐 하는 거야! 이 미친 새끼! 지금 너 같은 새끼 상대할 시간이 없어! 저리 꺼져!”

 

 내가 소리치자, 그는 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실성한 듯 말했다.

 

 “자! 여기 내가 너희들이 좋아하는 거 가져왔어! 흐흐흐흐….”

 

 그러면서 다른 봉지에서 고추를 잔뜩 꺼내서 손에 들고 보여줬다. 수정궁 아저씨가 옥상에서 말리던 홍고추였다. 그것도 아주 많이.

 

 “어서 먹어봐….” 정훈이 고추를 하나 입에 넣었다.

 “그리고 보여줘 봐…” 그의 표정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

 “그 진짜 모습을….” 그만큼 그의 목소리도 켜졌다.

 “사람들이 알 수 있게 말이야.” 그리고 양팔을 벌리고는 소리쳤다.

 

 “내가 미친놈이 아니라, 니가 미친년이라는 것을!!” 그렇게 소리치고는 봉투에 있는 고추를 움켜쥐더니 우리를 향해서 뿌리듯 던졌다. 흩날리듯 던져진 수십 개의 고추에 시야가 가려졌다.

 

 그리고, 내 갈비뼈 사이로 날카로운 무언가가 쑥 들어왔다. 처음 맞아 보는 것이었지만, 분명 칼이라고 직감했다.

 

 “으윽…!”

 

 내 허리가 젖혀졌다. 그리고 나는 온 힘을 다해, 희주를 밀쳐내며 소리쳤다.

 

 “뭐해…, 인마. 뛰어. 으윽... 희주야…. 도망…가… 으윽.”

 

 희주가 잠시 멈칫하더니 내 얼굴과 칼에 찔린 내 갈비뼈, 빨갛게 피로 물들어가는 티셔츠를 번갈아 가며 보다가 이내 반대편 공터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드문드문 설치된 펜스를 밀어젖히고, 공터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면서 얼굴을 돌려 정훈이를 쳐다봤다.

 

 그는 온몸에 똥 범벅을 한 채,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서서, 나를 쳐다보며, 광인처럼 웃고 있었다.

 

 “흐흐흐흐…. 흐흐흐흐 이 괴물들…. 칼을 맞아도 죽지 않고…. 흐흐흐흐흐”

 

 내가 숨을 고르고, 그를 쳐다봤다.

 

 “지금이라도 도망가…. 네가 못 볼 걸 봤구나…. 너희 아빠 걱정하시더라….”

 

 그의 눈빛이 동요한 듯, 흔들리더니, 점점 자기 손에 묻은 칼과 피와 똥을 살폈다. 그리고는 조금씩 뒷걸음치며, 웅얼거렸다. 지금 나로서는 그를 제압할 힘도 없고, 아랑이가 그 스토커를 제압했다는 보장도 없기에, 이렇게라도 마무리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무엇보다, 희주를 따라가 봐야 했다.

 

 ‘많이 놀랐을 내 동생 희주’.

 

 저 멀리 빌라길 입구 쪽에서 경찰들이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그래도 신고를 하긴 했나 보네.’

 

 “야 오정훈. 어떡하냐, 벌써 짭새 떴나 보다.”

 

 정훈이에겐 안타깝지만, 그래도 상황이 정리될 수 있다는 안도가 내 목소리에 서려 있었다.

 

 그러면서, 정훈이 뒤편을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탁탁탁탁!!!

 

 빠르게 달려오는 소리.

 

 그때, 어떤 검은 형체가 나의 머리에 부딪히며 쏜살같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반대쪽 희주가 들어간 공터 쪽으로.

 

 정훈이 가져온 인분이나 내 피보다 진한 냄새.

 

 코끝을 무겁게 짓누르는 냄새. 예전에 아빠 옷에서도 한번 맡아 봤던 냄새.

 

 ‘농도 진한 시너 냄새.’

 

 그리고 그 뒤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실루엣. 얼굴. 눈썹의 흉터.

 

 “거기서!!! 야! 그 새끼 조심해!!!!”

 

 김원효 순경이였다. 빌라길 초입에는 이제 사이렌을 켠 경찰차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내 머리에 들어오는 한 가지 생각.

 

 ‘희주가 위험하다!’

 

 

 30화. 시너테러범

 

 김원효 순경이 나와 정훈이를 보고, 피와 칼과 똥을 보고, 추격을 멈췄다. 그리고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야, 이 X발. 이거 뭐야!?” 그리고 나를 붙잡고 물었다.

 

 “너 괜찮아!? 이거 지금 칼 맞은 거야?!” 그가 정훈을 한 번 보고, 다시 우리 집 내 소요에 눈길을 주더니, 무전으로 구급 차량 지원을 다급히 요청했다.

 

 “23구역 21 다시 3번지, 순25. 순25 시너 테러용의자 추격 중, 강도상해로 추정되는 사건 발생. 고등학생 피해자, 복부 좌상, 출혈 중. 구급 차량 긴급 지원 바람. 긴급 지원 바람.”

 

 그리고는 맹렬한 기세로, 넋이 나가 쳐다보는 정훈이의 손에서 칼을 빼앗았다.

 

 ‘방금 시너 테러용의자라고?!’

 

 뒤이어 또 다른 김순경, ‘띨순경’이 도착했다.

 “뭐야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나도 몰라. 우선 난 지금 저쪽으로 도망친 새끼 계속 따라갈 테니까, 여기 상황 확인해줘! 여기 이 친구는 칼 맞은 거 같아!”

 

 그렇게 말을 마치고, 김원효 순경은 다시 용의자가 도망친 - 희주가 달려간 - 공터 쪽으로 몸을 틀었다.

 

 내가 그의 팔을 황급히 붙잡고 물었다.

 

 “혹시, 지금 시너 테러용의자라고 했어요?!” 희주가 공터 쪽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김원효 순경은 ‘그게 도대체 칼에 맞은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너, 칼에 찔렸어. 우선 안정…” 이라고 말을 하려는데, 내가 소리쳤다.

 “저기, 제 동생이 있어요! 저 공터에!”

 

 김원효 순경이 놀라서 우선 나를 진정시키려는데, 갑자기 정훈이 소리를 치며 김원효 순경에게 달려들었다.

 

 나를 진정 시키려고 어정쩡하게 자세를 낮추고 있다가 기습적으로 밀쳐지는 바람에, 김순경은 손에 든 칼을 떨구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게 되었다. 그 사이, 정훈이 재빨리 땅에 떨어진 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쓰러진 김순경 쪽이 아닌, 빌라길 입구 쪽으로 몸을 틀더니, 뒤늦게 도착한 ‘띨순경’을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의 배에 칼을 찔러 넣었다.

 

 푸욱!

 

 겁에 질린 것인지 고통의 경직인지, 칼을 맞은 ‘띨순경’은 아무런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호흡이 멈춘듯한 얼굴이 그 밤에도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듯 느껴졌다. 반대로, 정훈이 그 모습을 보고 야수와 같은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

 

 김원효 순경이 그 모습을 보고, 똑같이 괴성을 지르며, 정훈에게 돌진했다. 하지만, 정훈은 재빠르게 몸을 틀어 그를 피하고, 칼을 들어 싸울 자세를 취했다.

 

 눈앞에서 본인이 놓친 칼 때문에 배에 칼이 찔린 동료를 보며, 김원효 순경은 눈이 뒤집혀 졌다.

 

 일그러져가는 인상에, 눈썹에 흉터가 그 어느 때보다 깊게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그렇게 깊게 있었던 것처럼. 더는 시너 테러범을 쫓을 상황이 아니었다.

 

 눈앞에 이미 두 사람이나 칼로 찌른 후 이제는 본인 앞에 칼을 겨누고 있는, 운동부 출신 고2 남학생과 대치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김원효 순경도, 그리고 언제나 반갑게 대해주던 띨순경도 걱정되지만, 난 희주에게 가봐야 했다. 집안에서 아랑이는 괜찮은지, 현주는 괜찮은지 소리쳐 물어보고도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땅에는 아까 정훈이 던진, 마른 홍고추가 피에 젖은 채로 잔뜩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아직 고추가 묵직하게 담겨 있는 듯한 검은색 비닐봉지가 그 끝에 떨어져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씩 몸을 이끌고, 검은색 비닐봉지까지 걸어갔다. 허리를 숙이는데 갈비뼈 안쪽에서 고통이 전해졌다. 비닐봉지를 한 손에 들었다. 아직 안에는 꽤 많은 양의 홍고추가 담겨 있었다.

 

 한 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칼에 찔린 옆구리를 잡고 천천히 뛰었다. 아니, 몸을 끌어 움직였다.

 

 칼을 맞아 본 것도 처음인데, 칼을 맞고 뛴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몰랐는데,

 

 이젠 알겠다.

 

 5월의 봄밤에 시원한 바람이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 구멍 난 옆구리 사이로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면서, 피가 한 움큼씩 흘러나오는 걸 느꼈다.

 

 푹 젖은 티셔츠가 자꾸 옆구리 사이에 끼이는 듯한 느낌마저 들어서, 뛰어가며 한 손으로 티셔츠를 벗어 던졌다.

 

 ---

 

 처음엔 희주가, 그리고 뒤이어 시너 테러용의자가 지나간 펜스 틈을 지나 공터로 들어갔다.

 

 밝은 달빛 아래, 또다시 벚꽃잎이 흩날렸다. 이제는 다 지고 없어야 하는 벚꽃잎이 어디선가 또.

 

 약 만평 정도 되는 탁 트인 공간. 넓은 공터.

 

 조용했다. 아니 어쩌면 내 복부의 통증이 전해오는 심장박동 소리에 내가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살며시 불어오는 바람이 땀으로 피로 범벅된 내 머리카락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코끝에 스치는 아세톤 같은 케미칼 특유의 톡 쏘면서도 비릿한 냄새.

 

 중앙 쪽으로 한 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진해진다.

 

 이제는 바람이 불지 않아도 냄새가 느껴지고, 구역질이 올라온다.

 

 희주가 흐느끼는 소리.

 

 아니, 사실 들리지는 않는다. 단지 중앙에서 희주로 보이는 여자아이 어깨가 달빛에 아주 조금씩 들썩이는 것이 보일 뿐이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들썩임보다는 떨고 있는 게 보였다. 어깨가 들썩일 만큼.

 

 그 옆에는, 좀 전에 나를 스쳐 지나간 시너 테러범으로 보이는 사람이 서 있었다. 멀리서 볼 때 꽤 가까이 서 있는 줄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희주 뒤편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가 웃고 있다.

 

 역시나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분명 더러울 것 같은 치아가 드러났다. 입에서 침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헤벌레~’ 해서는, 다가가는 나를 한번, 그리고 희주를 한번 이렇게 쳐다보고 있었다.

 

 번뜩이는 그의 눈동자를 보자니, 얼마 전 빌라 옥상 아저씨가 얘기하신 아프간 얘기가 생각났다. 캄캄한 밤, 야간 스코프가 없어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그런 광채.

 

 이제 불과 30m 정도 거리. 희주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희주도 나를 알아봤다.

 

 입을 뻐끔거린다. 뭐라고 말하려는데, 내 귀가 이상해진 것인지, 희주가 겁을 먹어서 목소리가 안 나오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신경은 이내 흠뻑 젖은 그녀의 옷에, 몸에 사로잡혔다.

 

 시너였다.

 

 축축하게 늘어져 몸에 들러붙은 티셔츠. 반바지 끝단에서는 시너가 아직도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그것을 보면서, 일순간 멍해졌다. 지금 내 눈앞에 상황이 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같다.

 

 일순간 바람이 휭 하고 불었다. 그 바람에, 옆구리에 송곳 같은 통증이 찾아왔다. 동시에, 코끝에서 시작된 역한 시너 냄새가 위장을 울렁거리게 했다.

 

 그리고 이제서야 들리는 희주의 떨리는 목소리.

 

 “...오빠 어떻게…, 나 어떻게…”

 

 “...아냐, 괜찮아. 진정해 희주야…”

 

 내가 손을 내뻗고 다가가며 말했다. 봉지를 쥔 손으로는 옆구리를 가린 채.

 

 아무것도 괜찮지 않았지만, 괜찮아 져야만 했다.

 

 “흑흑, 아빠 좀… 불러줘…” 그렇게 말하면서 희주는 차오르는 눈물을 견디지 못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굵은 눈물이 뚝 뚝 떨어졌다.

 

 그때, 희주 뒤에 서 있던 시너 테러범이 소리쳤다.

 

 “뒤로 가!”

 

 고개를 젖혀 그를 보니, 한 손에는 라이터를 다른 한 손에는 시너가 들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철제 통을 들고 있었다.

 

 “아저씨, 왜 그러세요. 저희 보내주세요.” 내가 그를 보며 부탁했다.

 “뒤로 가, 이 새끼야! 흐흐흐흐” 그가 위협하듯 라이터를 치켜들었다. 그는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아저씨, 제발… 저희 가게 해주세요… 희주야 이쪽으로 와” 내뻗은 손으로 희주에게 손짓했다. 그렇지만 희주는 잔뜩 얼어서 내 쪽으로 다가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녀가 옳았을지 모르겠다. 내가 섣부른 건지도. 하지만, 그대로 있으면, 저 미친 테러범이 우리를 보내줄 것 같지 않았다. 몇 주 전, 저놈이 누군가의 눈에 시너를 부은 것만 봐도, 이대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채 우리를 보내주지 않을 것 같았다. 조금 있다가 뒤에서 경찰이라도 들이닥치면, 더욱 격양되어, 불이라도 지를 것 같았다. 그래서 무서웠다.

 

 내가 칼 맞은 옆구리를 막고 있던 손을 떼고, 봉지를 치켜들며 한걸음 희주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다른 손을 봉지에 넣어 고추를 하나 꺼내어 보였다.

 

 발걸음을 옮기는데, 옆구리에 찌릿한 통증과 피가 울컥 스며 나오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방법은 이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야 그거 뭐야! 뒤로 안가!?” 그가 소리쳤다.

 

 희주의 눈동자가 고추를 들고 가까워지는 내 손을 쳐다봤다. 새끼손가락마다 하나가 짧아서 네 손가락으로 고추를 잡고 있었다. 새끼손가락은 어디에도 걸쳐 지지 못한 채.

 

 “이 개새끼들이 근데 말을 안 들어 처먹어!!”

 

 희주가 그런 내 손가락을 보며 발걸음을 한 발자국, 내 쪽으로 옮겼다. 천천히 손을 내밀며.

 

 치익.

 

 그때, 희주 뒤에서 라이터에 불이 켜졌다. 그리고 그가 괴이한 웃음기를 머금고 말을 시작했다.

 

 “지난번에는 말이야. 화장실 똥 수간에서 담배를 피우고 나오는 여자애가, 나오면서 칸 앞에서 기다리는 나를 이렇게 꼬나보더라고. 이 좋은 봄날에 누구는 마스크 끼고 작업복 입고 이런 시너 통 들고, 거기서 똥 싸려는데 여자애가 하나밖에 없는 칸 안에서 담배 피우는 거, 그거 끝까지 기다리고 싶겠냐고. 근데 나오면서 그렇게 꼬나 보는 거야, 뭐 X 같은 새끼라도 봤다는 듯이 말이지. 그래서 내가 ‘뭘 꼬나봐 이 XX아’ 라고 그랬거든? 그랬더니, 이 미친것이 자기한테 나는 똥냄새는 생각도 하지 않고 나를 보면서 ‘아 졸라 냄새나네’ 이 지랄을 하는 거야! 하하! 정말 웃기지 않아? 더 웃긴 게 뭔지 알아? 난 분명히 들렸거든? 근데 얘 어깨를 내가 딱 잡으니까, 딱 잡아떼는 거야! ‘너 뭐라고 그랬어, 방금!?’ 그랬더니, ‘아저씨 왜 그러세요. 저 아무것도 안 했어요!’ 이 지랄을 하는 거야! 하하하! 돌아 버리는 거지! 안 그래?!’

 

 그의 목소리가 점점 격양되어 가면서. 라이터의 불 끝처럼, 그의 말끝이 흔들렸다.

 

 “그래서 내가 그녀 얼굴을 딱 잡고 물었지. ‘니가 좀 전에 나보고 냄새난다고 했어, 안 했어? 내 눈 똑.바.로. 보고 말해라’ 그랬는데도, 요새 것들은 눈 하나 깜짝 안 해~! ‘아저씨 왜 이러세요, 저 아무 말도 안 했다니까요, 놓아주세요~’ 이러는 거야. 되려, 붙잡고 있는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거처럼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하아, X발. 아까도 그렇고 왜 그렇게 눈깔들을 간수를 못 하나 몰라. 그래서, 그 애 얼굴을 딱 붙잡고, 이렇게 시너 통을 걔 눈깔에다 부었어. 막 지랄을 하더라고. 크으~ 막 발버둥을 치는데 눈깔로 입으로 목구멍으로 막 들어가지 이게! 푸하하하! ‘또 그럴 거야 안 그럴 거야?’ 하고 물으니까, 대답을 하고 싶은데, 목구멍에서 시너가 꿀렁꿀렁하지. 뭔 소린지 알겠지? 이게 게워져 나오는 거야. 하~, 나 참. 괜찮은 기분이었어.”

 

 그리고는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나를 한번 쳐다보고, 다시 희주를 한번 쳐다보고.

 

 희주는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은지, 아주 천천히 나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내 손끝, 내가 들고 있던 고추와 마디 짧은 새끼손가락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한 채.

 

 “그때는, 아쉽게도 불을 붙여보지 못했어. 그 목구멍에서 불길이 화학 치솟는 장면을 상상했는데.”

 

 그가 다시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라이터를 던졌다.

 

 

 

 

 

 

 

 

 

 

 

 

 31화. 각성

 

 라이터 불이 무슨 도깨비불처럼 하늘에서 휙휙휙 날았다.

 

 그리고 희주 엉덩이 어디쯤 부딪혔다.

 

 불의 장막이, 그 flame이 마치 연극 무대 커튼이 열리듯 희주가 입은 반바지부터 어깨까지 그리고 머리 위쪽으로 한번에 ‘훅’ 하고 옮겨붙었다. 희주의 눈빛과 입술, 표정은 아직 몸에 붙은 불을 인지하지 못했다.

 

 나에겐 그렇게 보였다. 사진기로 연속촬영을 할 때처럼, 프레임 단위로.

 

 찰칵. 찰칵. 찰칵.

 

 희주의 동공이 켜졌다. 입술은 조금 더 벌어지고, 표정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다는 듯 상기되어 갔다. 그리고, 이내 내 뻗은 손과 팔에 옮겨붙을 보고서야, 무서움에 눈꼬리가 뒤로 당겨지고, 상황을 인지한 듯 팔을 허우적대며, 발을 동동 굴렀다.

 

 “희주야!!!”

 

 단숨에 내처 달렸다. 나한테 불이 옮겨붙는 건 상관없었다. 불에 타고 있는 희주를 끌어안았다. 희주가 고통스러움에 미친 듯이 괴성을 질렀다.

 

 “으아악!~~ 으아!”

 

 손은 든 고추를 희주 입에 집어넣으려고 했다.

 

 “이거 먹어!! 빨리!! 이거!!!”

 

 불에 타고 있는 희주에게 내 목소리가 들리길 바라면서 크게 절규했다. 그러면서 희주의 입을 찾았다. 하지만 희주가 너무 많이 움직여서 얼굴을 붙잡기가 쉽지 않았다. 이미 내 몸에도 불이 옮겨붙어 눈썹과 머리카락이 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겨우 희주 얼굴을 붙잡고 입에 고추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고추는 이미 불길에 타서 형태를 잃은 듯해 보였다. 하지만,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씹…! 으아악……! 씹어!!” 그렇게 소리치는 내 입안으로도 불길이 들어와서 목구멍까지 타는 느낌이 들었다.

 

 희주는 씹을 정신이 없었다. 피부까지 타는 열기에 온 힘을 다해 허우적대는 그녀와 오직 고추만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 이 화상의 고통으로부터 벗어 날 방법은 없었다.

 

 불과 10초 정도밖에 안 되는 시간이었을 텐데, 이미 수 분간 불 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 주저앉아 쓰러져가는 우리 몸에 퍽퍽한 무엇인가가 떨어졌다. 무게감이 있는 양. 눈을 뜰 수는 없었지만, 단숨에 피부를 태우던 불꽃 플레임이 사라진 걸 느꼈다. 고추 형태가 불에 타서 많이 없어졌지만, 그래도 혹시 고추의 성분이 희주를 각성시킨 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부드러운 느낌. 상의를 입고 있지 않은 내 피부에 고운 가루가 무겁게 누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열기에 눈꺼풀이 들러붙은 것인지 눈을 뜨기가 어려웠다. 겨우 한쪽 눈을 뜨자, 하얀 가루를 뒤집어쓴 희주가 보였다. 그리고 내 팔과 다리에도 밀가루 같은 하얀 가루가 잔뜩 묻어 있었다. 아마도 소화기 가루를 통째로 위에 들이부은 것 같았다.

 

 쓰러진 채 힘들게 눈을 치켜뜨자, 아랑이 지척에서 테러범과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었다.

 

 다시 희주를 보았다.

 

 “희주야…” 희주를 흔들어 봤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희주야~” 목소리가 갈라지며 잘 나오지 않았다.

 

 경찰이든 누구든 좀 도와주길 바라면서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눈에 검은 봉지가 띄었다. 희주 몸에 불이 붙은 걸 보고 내처 뛰어오느라 땅에 떨어뜨린 봉지였다. 고추가 들어 있던 봉지. 빌라 옥상 아저씨가 화건이 아닌 양건 방식으로 말렸다는 홍고추. 몸을 끌어 움직인 후 팔을 뻗었다. 몸의 불기운은 사라졌지만, 갈비뼈 사이의 통증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으, 윽…!”

 

 봉투를 끌어당기고 고추를 꺼냈다. 전혀 불길에 닿지 않은 고추였다. 서둘러 희주 입에 가져다 댔다.

 

 이미 희주는 정신을 잃은 듯해 보였지만, 어떻게든 입에 넣어야 했다.

 

 “희주야…. 이거…, 으윽…! 먹어야 해.”

 

 “어서…윽!”

 

 입을 움직이지 않아서, 고추를 몇 개 더 집어넣었다. 욱여넣다시피.

 

 “먹어…. 흑. 희주야…” 포기할 수 없었다. 내가 무엇을 다르게 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자책해 봐도 소용없었다.

 

 “켁…, 켁…”

 

 고추가 목구멍을 자극해서인지, 기도를 막아서인지 희주가 몸을 움찔거리며 소리를 내었다. 그리곤 얕은 기침을 캑캑 뱉었다. 입에서 고추가 일부 뱉어져 나왔다.

 

 더는 무리였다.

 

 나도, 어쩌면 희주도.

 

 쓰러진 채 눈만 겨우 껌벅이면서 바로 눈앞에 쓰러져 있는 희주를 쳐다봤다. 문득, 아빠가 얼마나 슬퍼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죽는 건가…? 이런 공터에서?’

 

 ‘달이 밝네…’

 

 ‘아랑이는 저 테러범을 쓰러뜨렸을까?’

 

 ‘아니, 집에서 그 대학생 변태는? 현주는 집에서 혼자 괜찮은 걸까?’

 

 ‘경찰은 왜 이렇게 늦는 거지? 띨 순경은 칼에 맞았던데…’

 

 ‘설마 김원효 순경도 다친 건 아니겠지? 그래도 눈에 그렇게 무서운 흉터까지 있는데 설마…’

 

 ‘정훈이는 왜 그랬을까? 무엇을 본 것일까?’

 

 그렇게 나도 모를 무의식의 생각에 잠겨있었다.

 

 조금도 눈앞에 희주의 모습이 변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그림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질 않을 때,

 

 내 피부를 갈라 찢는 이 통증이 옆구리 칼이 들어갔던 자리에 바람이 들이차서 그런 것인지 불길로 인한 화상 때문인지, 분간이 되질 않을 때.

 

 조금은 이질적인 무언가가 내 시선을 빨아 당겼다.

 

 희주의 머리카락이 반짝이는 것이었다.

 

 처음엔 머리에 온통 뒤집혀 씌워진 하얀 소화기 가루가 달빛에 비춰서 반짝이는 것으로 생각했다. 아니, 그랬기에, 특별히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카락이 넓게 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스스로 자라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풍성해지며, 안에서부터 무언가 차오르듯 그렇게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 들더니, 점점 넓게 퍼졌다.

 

 그걸 보느라, 희주의 얼굴에 나타난 변화를 이제서야 인지했다. 희주의 피부가 백옥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젖살도 채 빠지지 않았던 그녀의 얼굴은 천천히 말라가는 듯, 얼굴 윤곽이 패이기 시작했다. 17살 고2 여동생의 얼굴은 어디 가고 어느새 20 후반은 되어 보이는 듯한 묘하게 어두운 느낌이 드는 얼굴이 있었다. 변화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어깨부터, 팔 그리고 허벅지까지 살이 드러난 곳에 송글 송글 땀방울이 맺히는 게 보였고, 곧이어 수증기인지 열기가 아지랑이라도 피어오르듯 이글이글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빛에 비친 피부는 이제 하얗다 못해 푸르스름한 영롱함이 느껴졌다.

 

 “희, 희주야…”

 

 내가 나지막이 희주의 이름을 불러봤다. 조금 무서웠지만, 희주가 온몸에 입었던 화상과 열상으로부터 괜찮은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대답이 없기에 다시 불렀다.

 

 “희…, 희주야!”

 

 희주가 천천히 눈을 떴다. 은은한 빛깔의 검붉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잠시 초점을 맞추듯 동공이 넓어졌다 다시 작아지더니, 희주가 쓰러진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얀 가루를 입은 긴 머리카락이 살아있는 듯 넘실거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조용한 표정으로 둘러봤다. 마치 긴 잠에서 일어나는 아이처럼. 순진하면서도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한다는 듯, 아득하면서도 몽롱함을 내 비취며 말이다. 그리고 아랑을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

 

 아랑이 테러범 위에 마운트 자세로 주먹질을 하다, 그런 희주의 모습을 보고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그녀가 아랑을 향해 손짓을 한번 휙 하자, 아랑이 마치 크레인에 어깻죽지라도 걸려 당겨지듯 옆으로 수 미터는 훅 날아가 버렸다.

 

 쓰러진 테러범을 잠시 쳐다보더니 희주는 그를 향해 왼손을 허공에 내 뻗었다. 그리고는 손으로 사과라도 움켜쥐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손가락을 조이자, 테러범이 마치 모가지라도 잡힌 것처럼 격하게 버둥거렸다.

 

 그리고, 일 초 정도 후, ‘빠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안쪽에서 울대뼈가 부서지는 소리였다.

 

 쓰러져 있던 테러범이 두 손으로 자기 목을 부여잡은 채로, 고통에 허리춤이 높게 들려 올려 졌다가, 곧이어 땅으로 털썩 떨어졌다. 그리고 옆으로 누운 채 피를 게워내며, 웅크린 채 고통스러운 듯 꿈틀거렸다.

 

 너무나 충격적인 모습에 나는 눈 하나 깜짝이지 못하고 희주를 쳐다봤다.

 

 희주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초점 없는 눈동자를 아랑이 있는 곳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아까처럼 손을 허공에 내뻗어 올렸다, 아랑이를 향해서. 마치, 아랑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야…! 아랑이는…! 쿨럭…!”

 

 목에 들어간 소화기 분말 때문인지 화상 때문인지 더는 말을 이어 갈 수 없었다.

 

 희주가 내뻗은 손을 움켜쥐듯 손아귀에 힘을 주자 아랑이 고통스러워했다.

 

 “으아!!!~악!!!”

 

 마치 팔과 몸통이 희주의 알 수 없는 힘에 통째로 잡혀 조여지는 듯, 점점 더 팔이 우겨 넣어져 몸 안쪽으로 달라붙었다.

 

 “으으~~윽!”

 

 흉골이 압박됨에 숨이 막힌 듯 아랑의 억눌린 듯한 신음.

 

 희주가 반쯤 움켜쥔 손을 조금 높게 추켜 올리자 아랑의 몸이 공중에 뜨기 시작했다. 축 처진 발끝이 땅에 닿을 듯 말듯 허공에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여기저기 상처가 나 보이는 아랑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아랑은 고통 속에서 마지막 한숨을 미처 내쉬지 못한 채 입만 반쯤 벌려진 채로 있었다. 마치 곧 폭탄처럼 몸이 터져 버릴 사람처럼 보였다.

 

 “...안돼….”

 

 소리쳐 보려 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희주는 정말 아랑을 터트려 버리기라도 할 작정인 것 같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모든 게 제발 나의 꿈이길 바라며.

 

 그때, 희주가 크게 신음을 터트렸다.

 

 “허억!!”

 

 곧바로 희주를 쳐다봤다.

 

 희주 몸을 날카롭게 통과한 듯한 쇠꼬챙이가 보였다. 공터 내 아파트 건설이 취소된 후 방치된 철근 자재였다.

 

 몸을 뚫고 나온 철근 끝에서 피가 떨어질 듯 말듯 맺혀 있었다. 희주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아랑을 붙잡은 듯했던 손을 풀자, 아랑이 실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땅에 철퍼덕하고 떨어졌다.

 

 희주가 고개를 치켜들어 돌리면서, 괴성을 질렀다. 극심한 고통을 느끼는 듯했다.

 

 “끄으~~~아~~~악!!!”

 

 “허, 헉… 와~! 이 X발X, 이거 뭐야!”

 

 희주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또한 쓰러져 있는 시너 테러범과 같은 작업 복장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도 용의자 중 하나라는 사실을. 문득, 예전에 집 앞에 경찰이 왔을 때 무전 연락을 받았던 게 생각났다. 테러범은 애초부터 두 명이었다고. 아파트 부지 공터 안쪽 끝으로는 길이 막혀 있는 것을 모르고 먼저 들어와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 것 같았다.

 

 그는 눈앞의 초현실적인 모습에 넋을 잃고, 광기에 휩싸인 듯 보였다.

 

 “와~! 뭐, 뭐… 이런 게 다 있어?!”

 

 아드레날린이 과다 분비된 건지, 거친 호흡 속에 연신 감탄사만 내뱉었다.

 

 그 와 반대로, 희주의 검붉은 눈빛의 색깔은 점차 연해졌다. 그리고 하얗게 넘실거리던 머리가 차분히 가라앉고 있었다. 몸에서 피어오르던 아지랑이는 이제 더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나를 쳐다봤다.

 

 여전히 고통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이제는 나를 알아보는 듯 보였다. 그리고 일그러진 얼굴 속에서 겨우 쥐어 짜내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바람에 더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희주가 나를 안심시키려고 미소를 지어 보이려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는 단숨에 가슴을 뚫고 들어온 철근을 잡아 뽑았다. 아니, 뽑아 날렸다.

 

 슈욱!!

 

 퍽!!

 

 무거운 철근이 그대로 날아가서 십 미터도 더 떨어진 곳, 땅 위에 비스듬히 꽂혔다.

 

 

 

 “히이~익!!”

 

 희주가 뒤로 천천히 돌아섰다. 뒤에 있던 놈이 기겁하며 주저앉았다.

 

 나를 등지고 있어서 희주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이제 거침없는 분노를 그대로 담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테러범이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뒷걸음치듯 버둥거렸다. 마치, 눈을 마주 보고 있을 수 없는 악귀나찰 같은 존재 앞에 놓인 것처럼. 평범한 범인이 메두사라도 만난다면 아마 그렇게 도망치지 않았을까 싶었다.

 

 희주가 한 걸음 다가가며 두 손을 천천히 벌리더니 낮게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짓 기운이 닿은 대지 표면에 미세한 진동이 일었다. 땅 위에 흙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내가 쓰러져 있는 곳까지 전해졌다. 그녀가 한 걸음 더 다가가며, 조금 더 넓게 팔을 벌리자, 열기가 확연히 느껴졌고, 그녀가 앞 주변의 잡초인지 나뭇가지들이 마치 뜨거운 불에 급속히 타들어 가듯 바스러졌다.

 

 그녀가 팔을 어깨높이까지 올리자 이제는 하늘에 흩날리던 벚꽃잎이 열풍에 불타 공중에서 흩어졌다. 그녀 주변 땅 위의 흙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듯도 해 보였다.

 

 “사, 살…, 살려… 줘…”

 

 그녀가 그를 쳐다보며 들어 올린 양팔을 천천히 앞쪽으로 모아, 그의 몸 위쪽으로 가져갔다. 그러자, 그의 옷에서, 또 그의 몸에서 처음엔 수증기처럼, 그리고 이내 바싹 마른 듯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녀가 한 걸음 더 내디뎠다. 이제 희주는 그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뜨거운 열기가 그의 몸을 물리적으로 짓누르고 있는 듯, 그가 표현하기 어려운 고통의 신음을 내쉬었다.

 

 “으… 끄… 아…, 악…!”

 

 그리고, 갑자기 그의 몸에 불이 붙었다.

 

 땅에서부터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와 공기 중의 열기가 응축되어 더욱 온도가 높아지면서 마치 발화점을 초과해서 인체가 자연 발화하는 느낌이었다. 손가락 사이로 열기라도 느끼는 듯이 희주가 손가락을 움직여 댔다.

 

 희주 몸에 가려져 그의 모습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피부가 드러난 곳이 검붉게 타고 있었다.

 

 그가 뜨거운 열기에 허우적, 그리고 버둥거려야 하는데, 무거운 열기에 짓눌린 듯 꿈틀대기만 할 뿐이었다.

 

 수 초가 지나자, 그가 땅에 털썩 엎어져 쓰러졌다.

 

 그의 몸과 그가 입고 있던 옷을 태우던 불길이 내 눈에 들어왔다.

 

 불꽃이 사람의 몸을 자양 삼아 태어나 세상을 향해 춤을 추듯 화려하게 꿈틀거렸다.

 

 마치 한 줌의 재도 남기지 않겠다는 뜻이 뜨겁게 춤을 췄다. 희주는 그에 맞춰 연식 손가락을 너울너울 움직여 댔다.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그 춤을 보고 있었다.

 

 희주의 손가락의 움직임이 잔잔해지고, 불꽃이 사라질 때쯤. 테러범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새까맣게 불에 탄 토양의 흔적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달빛에도 확연히 알 수 있는 진한 그을림이 일그러진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 있었다. 그 검은색이 희주의 하얀 머리와 도드라지게 대조되었다.

 

 희주가 천천히 뒤로 돌아 섰다. 이제 땅의 열기는 조금씩 옅어 지고 있었다.

 

 “...나 이제 어떡하지, 희준아?”

 

 말과는 달리 오히려 나를 걱정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다가가서 안아주고, 다독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도 더는 눈을 뜨고 있기가 어려웠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달려왔다. 내 옆을 지나 희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헐벗은 그녀 몸에 재킷을 걸쳐 주었다.

 

 ‘누구…, 지?’

 

 땅에 누운 채로 겨우 눈만 껌벅이며 쳐다봤다.

 

 희주의 다리가 풀리며 쓰러지려는 걸 그가 붙잡아 부축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눈썹에 흉터.

 

 ‘아… 경찰형…. 김원효 순경….’

 

 “구급대!!!”

 

 그가 큰소리로 외쳤다. 희주를 부축하며 내가 쓰러진 쪽으로 다가왔다.

 

 “학생! 조금만 참아!! 조금만!!! 구급대!!!!!”

 

 그리고 계속해서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태어나서 들어 본 가장 큰 목소리였다.

 

 점점 소리가 작아졌고, 이내 난 정신을 잃었다.

 

 

 

 

 20화. 고추먹는 여동생

 

 처음 눈을 떴을 때 난 병원 중환자실에서 있었다. 아빠가 양쪽 관자놀이 부위를 한 손으로 부여잡고 당신 얼굴의 흐르는 눈물을 가리며 얘기를 듣고 계셨다. 반대편에는 담당 의사로 보이는 아저씨가 서서 얘기를 하고 계셨다.

 

 옆구리 칼에 찔린 깊은 상처와 장시간에 걸친 과도한 출혈, 그리고 전신에 심한 화상으로 인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가망이 없었다는 얘기를 들은 것도 같았다.

 

 아빠가 그만 울 수 있도록 그 의사가 좀 조용히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도 아빠는 퉁퉁 부은 눈으로 울고 계셨다. 이번엔 나를 보며, 약간은 기쁜 듯이 미소를 머금은 채.

 

 “희준아! 희준아! 아빠 목소리 들려!?”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담당 의사로 보이는 아저씨의 손을 부여잡고 인사를 해대셨다. 뭔진 모르지만 내가 살 수 있는 건가 보다 싶었다.

 

 회복은 꽤 긴 고통의 시간이었다.

 

 처음엔, 장시간의 마취 때문인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내가 왜 이렇게 깊은 화상을 입었는지, 옆구리는 또 왜 그렇게 아픈지.

 

 내가 혹시 무슨 장난을 치다 집이라도 태워 먹은 건 아닌지.

 

 그렇다면 희주가 날 말렸을 텐데, 희주는 어디에 있는 건지.

 

 하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위아래 입술이, 그리고 입 쪽이 굳은 건지, 거즈로 동여매 둔 것인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눈꺼풀을 움직이는 데만 몇 주는 걸린 것 같았다.

 

 몇 달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겨우 입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기억이 돌아왔다.

 

 마치 신께서, 이제는 궁금해해도 된다는 듯이, 입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나에게 일어난 일이 그리고 희주에게 일어난 일들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되려 물어볼 자신이 없었다.

 

 ...계절이 몇 번 바뀌고 겨울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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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양원 생활은 좀 어때? 심심하지?” 병실로 아랑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뭐. 넌 어째 키도 그렇고 덩치가 더 커진 거 같다?” 침대에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며 내가 답했다.

 

 “넌 쳐다보지도 않고 그걸 어떻게 알았냐?” 아랑이 침대 옆에 의자를 놓고 앉더니 고개를 갸우뚱 해 보인다.

 

 “창문 밖으로 너 들어 오는 거 봤어. 한 150킬로 나가냐?”

 

 “미친놈아, 사람이 어떻게 150킬로나 나가냐? 한···, 140킬로? 큭큭큭”

 

 “니가 백두장사 손명호냐? 나 참. 길 가다 사람들 쳐다보고 그러지 말아라. 눈만 마주 처도 오줌 쌀라···.”

 

 “흐흐흐 그런가? 희주는?” 아랑이 덩치에 안 맞게 머쓱해 하더니 물었다.

 

 “...”

 

 “잘 지낸 데? 거기 춥지 않나?”

 

 “썩 괜찮은가 봐. 저기 기념품 보내 왔네” 내가 턱으로 희주가 보낸 목각 토템 기념품을 가리키며,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보고 싶네, 희주.” 잠시 숨을 고르더니, 아랑이 말을 이어갔다. “내가 좀 더 일찍 뛰어갔으면, 너도, 어쩌면 희주도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아랑의 목이 메는 듯했다.

 

 그때 뒤에서 김원효 순경이 문을 열고 들어 왔다.

 

 “그게 왜 네 잘못이냐?”

 

 “아 형 오셨어요?” 내가 반갑게 인사했다. 그가 웃으며 손을 들어 인사를 받고는, 아랑을 보고 말을 이었다.

 

 “그냥 그런 날이 있다. 안 좋은 일들이 한 번에 일어나는 날이. 하필 집안에 스토커가 나타난 날, 밖에서는 그 정훈이라는 친구가 칼을 휘두를 줄 누가 알았겠니. 그리고 시너 테러범까지···. 애초에 네가 있어서 더 큰 일을 막을 수 있었던 거야. 그렇게 생각해라. 그게 팩트다.”

 

 그날, 희주를 범하려 했던 그 영양쌤 남친이 아랑과 몸싸움을 하다가 집 밖으로 도망치던 중, 밖에서 정훈과 대치하던 김원효 순경과 부딪혔고, 그 틈을 타고 정훈이 김원효 순경의 배를 칼로 찔렀다.

 

 “...형 그때, 배에 상처는 좀 괜찮으세요?” 아랑이 김원효 순경을 보며 물었다.

 

 “나?” 그가 셔츠를 들여 옆구리에 남은 상흔을 보였다. 그리곤 가볍게 손바닥으로 찰싹하고 때리더니 허세를 부렸다, “훈장이지 이건! 하하···! 아야야···!” 하지만 너무 세게 때렸는지, 이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뒤늦게 합류한 경찰 인력은 이미 3명이나(나, ‘띨순경’ 그리고 김원효 순경까지) 칼로 찌르고 눈이 돌아간 정훈과 강간미수 후 도망치려는 스토커 대학생을 갑자기 대치하게 되어 나나 희주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고 했다. 그 와중에, 칼에 찔린 김원효 순경이 아랑을 알아보고, 내가 뛰어간 방향에 시너 테러범이 있다고 소리쳤고, 아랑은 잠시 주저하더니, 스토커를 뒤로 한 채 공터 쪽으로 뛰어갔다고 했다.

 

 “근데, 소화 분말이 신발장에 있었던 건 어떻게 알았던 거야?” 내가 물었다.

 

 “옛날부터 너희 집 놀러 가면, 신발장 안에 소화기랑 그 하얀 가루 있는 거 보고 좀 특별하다는 생각을 했어. 보통은 그렇게 가루채로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문득, 오래전 아빠가 시너를 뒤집어쓰고 오신 날 신발장 위에서 내가 처음 소화 분말을 본 날이 생각났다.

 

 “네가 먼저 집으로 뛰어 들어가서, 소화 분말을 들고 가는 거 보고, 좀 특별하단 생각을 하긴 했다.” 김원효 순경이 아랑의 등을 다독이며 칭찬했다.

 

 “시너 테러범이라는 얘기를 들으니까, 왠지 갑자기 그게 먼저 생각나더라고요. 맨몸으로 가서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 같아서”

 

 “그게 없었으면 희준이는···. 네가 희준이를 구한 거야”

 

 “형이야말로, 칼까지 맞았는데, 어떻게 공터 쪽으로 올 생각을 하신 거예요?” 김원효 순경의 계속되는 칭찬이 본인에겐 과분하다는 듯, 아랑이 머쓱하게 웃고는, 되물었다.

 

 “진짜 난장판이었지. 현장에 도착한 다른 경찰들도 처음엔 그 두 명이 바로 그 ‘두 명의 테러범 용의자’인 줄 착각까지 했으니까··· 그래도 뭐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정리돼서, 수갑을 채우는데···, 건설부지 안쪽에서 뭔가 이상한 거야. 구급대원한테 김두원 순경부터 봐주라고 하고, 나는 펜스 안쪽으로 들어간 거지.”

 

 “...그리고 보신 거구요···?” 아랑이 내 눈치를 한번 살짝 보더니 다시 김원효 순경을 쳐다보며 물었다.

 

 “으, 응··· 달이 밝았다고 해도 워낙 넓다 보니 여전히 컴컴했고, 점점 다가가니··· 잘은 모르겠지만, 바닥에는 하얀 가루가 잔뜩 있고, 한 여자애가 반라의 상태로 너를 보며 서 있고··· 근처에는 땅이 불에 그을린 것처럼 시커멓고···. 그랬지···”

 

 김원효 순경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희주가 테러범을 ‘불로 짓이겨’ 죽이는 모습은 보지 못했던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한사람이라도 더 알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형이 오지 않았으면 저도, 희주도 아마 죽었을 거예요. 매번 말로만 죄송하지만, 정말···. 감사합니다.”

 

 “얘는 이 얘기만 나오면 이렇게 정색을··· 살아줘서 고맙다. 너희 둘이 처음 파출소에 와서 똥 얘기할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까지 치달을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다.”

 

 “그래도 저희가 파출소를 갔으니까, 형이 제 얼굴을 알아보고, 공터 쪽으로 가라고 알려준 거고,” 아랑이 먼저 말을 하고, 내가 화상 흉터 가득한 내 몸을 가리키며 들며 그 말을 이어받았다. “그 덕분에 이 정도로 끝날 수 있었던 거고.”

 

 “...”

 

 “...”

 

 침묵을 깨고, 아랑이 아빠 소식을 김순경에게 전했다. 마치 자기 일처럼, 자랑스럽게.

 

 “아 참, 희준이네 아빠, 이번에 승진하셨잖아요! 이제 대기업 상무님이세요!”

 

 “그래 12월에 발표라고 그러더니, 아버님 임원 되셨구나? 이야 축하한다 희준아! 하하하!”

 

 둘 다 남의 집 일에 참 기쁘게도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고맙습니다. 헤헤.”

 

 “이제 억대 연봉 대기업 임원 상무님의 아들! 그런 거지?!” 그간의 상처는 잊으라는 듯, 아랑이 덩치에 안 맞게 호들갑을 떨며 떠들어 댔다.

 

 “어서 회복하고, 요양 병원도 나와서, 학교 돌아가야지, 안 그래?” 김원효 순경이 말했다.

 “그래야죠··· 근데 학교는··· 그만 다니고 검정고시 준비하려고요.”

 

 학교를 포기한다는 얘기에 아랑이 내 흉터를 보며 이내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 병실 문이 또 열렸다.

 

 드르륵.

 

 “우리 희준이, 검정고시 보고, 대학교 가서, 소방관 할 겁니다. 하하하!” 아빠였다.

 

 “아, 아버님!” 아랑과 김원효 순경이 활짝 웃으며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맞아요, 저 소방관 하려고요.” 내가 김원효 순경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 이런 흉터를 가지고 사회 어디에서 나를 받아 줄까 생각해 봤는데, 아빠가 그러더라고요. ‘예민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숨겨진 아픔을 더 잘 알아채듯, 내가 생각하는 나의 부족함이 누군가에겐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그다음에 뭐였지, 아빠?”

 

 “‘Those who have suffered understand suffering and therefore extend their hand.’ 너의 몸에 남은 큰 화상 자국이 화재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는 반대로 큰 힘이 되어 줄 수 있다고.”

 

 “맞아, 그거! Patti Smith! 아빠가 그거 알려준 이후로 그 사람 노래만 들어.” 내가 미소 지었다.

 

 “아빠도 그 사람이 부른 노래 중에, Because the Night 좋아해”

 

 “...아버님!” 갑자기 김순경이 아빠의 손을 두 손으로 덥석 잡더니 물었다, “저의 이 눈썹 흉터도 누군가에게 매력으로 보일 수 있을까요?” 장난인지 진지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다부진 목소리로.

 

 “이 형, 모쏠이래요 흐흐흐”

 

 “너는 뭐 다를 것 같냐. 덩치만 ‘산’만 한 게. 나도 어릴 땐 인기 많았다~” 아랑의 고발에 김원효 순경이 허탈한 듯 답했다.

 

 “저는 형하곤 다르죠. 저는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누구?’ 냐는 듯 눈빛을 보냈지만, 아랑을 대답할 생각이 없다는 듯 미소만 지어 보이고 말았다.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내 김원효 순경, 아니 원효 형이 아랑이 목에 헤드록을 걸면서 병실이 시끄러워졌다.

 

 드르륵 쾅!

 

 “어머, 어머...어떻게. 흠흠...저기요! 여기 요양병원도 병원이예욧! 에티켓을 지켜주세욧!! 어머, 이거 문 어떡하니 이거...아유...”

 

 간호사 누나가 병실 문을 세게 열다 고장내고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도 우리에게 소란스럽다고 소리쳤다. 잠시 우왕좌왕 하더니, 우리를 향해 눈을 한번 흘기고는, 이내 휙 몸을 돌려 문 앞에서 사라졌다.

 

 “누구냐?” 원효형이 나를 보고 물었다.

 

 “케..켁...켁··· 강민정..켁켁..간호사 누나...형 항복!” 아랑이 여전히 목졸린 채로 켁켁대며 말했다.

 

 “음···” 원효형이 아랑을 풀어주자, 아랑이 호흡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흠. 그래도 형은 안돼. 저 누나 딱 보니까 인기 많아. 형은 그 눈썹때메 될일도 안돼.”

 

 “...근데 너 왜 말을 놓고 그러냐? 일루와!~” 이번에 잡히면 쉽게 풀어줄 것 같지 않았다. 아랑이 그의 손을 피해 병실을 냅다 뛰쳐 나갔고, 원효형은 자리를 비켜주 듯 아랑을 쫒아 나갔다.

 

 “밥은 먹었고?”

 “네. 아빠는?”

 “먹었지.”

 “승진 축하해”

 “뭘 맨날.”

 “맨날 얘기하고 싶네. 우리 아빠가 대기업 임원이라니.”

 “요새 같은 세상에 대기업 임원이 뭐 별건가.”

 “...”

 “...”

 “희주도 알지? 아빠 승진한거?”

 “응. 그럼. 잘 지낸데.”

 “알아. 잘 지낼거. 희주니까.”

 “몸 다 나으면 같이 보러 가자.”

 

 병실 문앞에서 들어올까 말까 주저하는 아랑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그냥 들어와, 뭘 거기서 똥 마려운 강아지 마냥 그러고 있냐?”

 “아 보였어? 험···그냥 가족들 얘기에 뭐 내가...근데 누굴 보러가?”

 “...희주.”

 “아 그래 언제?”

 “...아빠만 괜찮으시면, 난 우선 소방관이 먼저 되고. 그러고 나서.” 화상으로 인해 후유증이 아무래도 꽤 오래 가지 싶었다. 적어도 앞으로 몇년간은....

 “아..그래··· 서두를건 없지.”

 “대신···, 네가 먼저 가라.” 내가 아랑을 쳐다보며 말했다.

 “... 내가??!”

 

 아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말을 듣다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응. 수능마치고 졸업 여행으로 다녀오면 되겠네, 현주랑.”

 “내가 현주랑 거길 왜 가냐? 넌 자꾸 나랑 현주랑 엮더라, 나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애를~ 그리고, 걔 요새 무슨 기획사에서 연락왔다고 바빠. 아니, 바쁘데, 나는 잘 모르지만.”

 

 “흐흐, 현주도 희주 친구니까 가는 김에 같이 가라는 거지, 넌 뭘 생각한거야? 으응~?” 내가 능청스럽게 눈썹을 치켜 올렸다.

 

 “됐다. 너는 퇴원만 해봐. 그때 내가 잔뜩 괴롭혀주마. 그래도 되죠, 아버님?” 아랑이 아빠를 쳐다보며 장난스레 묻는다.

 

 “그래, 다 낫기만 하면 아랑이 네가 좀 데리고 다니면서 괴롭혀 다오. 너도 이제 겨울방학 끝나면 고3이니 공부 마무리 잘하고.”

 

 “네.” 아빠의 마침표에 아랑이 대답하고, 나는 눈웃음으로 그만 들어가 보라는 인사를 대신했다.

 

 “아빠도 들어가 보세요. 나 혼자 괜찮아. 글이나 쓰지 뭐.”

 

 주무시고 가시려는 아빠도 겨우 보내드리고 침대에 누워 희주가 보낸 토템 기념품을 손에 들고 바라봤다.

 

 창밖에는 어느새인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 눈인가···”

 

 나의 고2 생활이 그렇게 끝났다.

 

 ---

 

 내가 희주가 변하는 모습을 다시 본 건 그로 부터 10년 뒤. 내 나이 27살. 소방관 3년차. 강원 지방 대규모 산불 진압에 투입되었던 해. 그 곳에서 였다.

 

 현주는 한류 월드 스타라고 신문에 연일 이름이 오르고 있던 해 였고, 원효형은 어느새 2자녀의 아빠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서 30대 경감으로 승진했으며, 아빠는 본사에서 좌천되어 작은 계열사로 자리를 옮기셨지만 부사장이 되셨다.

 

 하지만, 지금은 아랑이에게 이 펜을 넘기려 한다.

 

 부디, 희주를 지켜봐 달라는 부탁과 함께.

 

 어찌 되었든, 희주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우리 가족외에 아랑이 뿐일테니.

 

 고추 먹는 여동생, 희주에 대해서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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