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안나오셨어요, 혁이 도련님?”
밥도 뜨는 둥 마는 둥 강이가 이불 뒤집어쓰고 눕자, 걱정된 분녀는 간식을 들고 방으로 찾아왔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
하지만 이불 속에 있는 강이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도련님~~ 주무세요?”
이불 속에서 코를 훌쩍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시는 거예요, 도련님?”
강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분녀는 걱정되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무례 좀 범할게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분녀가 이불을 확 젖혔는데, 울어서 눈이 퉁퉁 부운 강이가 보였다.
“무슨 일이에요? 도련님.”
분녀를 보자, 강이는 마지못해 일어나 앉았다.
“분녀야...”
“예...예 도련님... ”
“..........”
“말씀해 보세요. 무슨 일이시길래요, 예?”
“..........”
“아 답답해. 도련님...저 숨넘어가요.”
“니 말이 맞았어...”
“예? 뭐가요?”
“내가, 내가,”
강이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대체 무슨 일이시길래... 도련님 우는 거 첨 봐요.”
분녀는 강이 눈물을 닦아줬다.
“말씀해 보세요. 예? 제 목숨을 걸어서라도, 도련님 도울게요.”
강이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도련님....”
강이의 허망한 눈에선 금세 또 눈물이 쏟아질 듯 했다.
“혁이, 혁이가...”
“예, 혁이 도련님이 왜요?”
“(소근소근) .....”
“크게 좀 말씀해 보세요..”
“그러니까...........”
강이는 아주 작은 소리로 분녀한테 속삭였다.
“예에....?”
분녀도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이요?”
“응.”
“잘못 들으신 거 아니구요?”
“아니....”
“언제 누구랑요?
“몰라...”
“꿈꾸신 거 아니에요?”
“아니야.”
얼떨떨하게 쳐다보던 분녀는, 강이가 왜 우는지, 강이 마음을 알아차렸다.
“나도 모르게 온몸에 기운이 쭉~~ 빠지는 게,”
“왜 안빠지시겠어요. 저도 힘 빠지는데...”
“후~~ 말이라도 하니, 속이 좀 개운하구나.”
“어째요 도련님... 휴우~~ ”
분녀도 한숨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만약, 정남이가 혼례를 올린다면, 전 기절하고 말 거예요.”
“................”
“도련님, 말하심 안돼요, 혁이 도련님한테?”
“뭘?”
“도련님이...”
“어머님 말씀 잊었느냐 그새?”
“아니요. 잊다니요. 세상이 바뀌기 전까진 절대 무덤까지 가져갈 비밀이라고... 알죠 제가.”
“휴우....”
“제가 어찌 도와드릴 일이 없어 속상해요 도련님...”
“마음이라도 나눌 수 있으니, 고맙다.”
“도련님 삶도 참... 거시기 해요...”
“...............”
그날 밤 강이는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상대방을 제압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선제공격이야!”
문득 강이는 혁이 했던 말이 스쳐지나갔다.
‘선제공격? 그래, 분녀 말대로, 내가 먼저 여자라 밝힐까?’
‘아냐, 그래서 뭐, 어쩌려고? 내가 여자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내가 여자라면 어쩜 혼례를 취소하지 않을까?’
‘이미 정해진 처자가 있다는데, 어떻게 취소해.’
이래저래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리는데...
“어정쩡하게 있다가 한 대 맞느니, 내가 먼저 공격하는 게 낫지!”
혁의 말이 또다시 떠올랐다.
‘그래! 이대로 혁이 혼례 올리는 걸 보느니, 난 여자고, 널 좋아한다고 고백해버리는 거야.’
‘그래도 혁이 혼례를 올린다면?’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럼 아예 얘기 안하는 편이 낫지!’
고백해라, 안된다, 두 개의 강이가 막 싸우고 있었고, 어느새 강이 눈이 스르르 잠기고, 깊은 밤에 빠져들었다.
* * * * *
‘끝까지, 해볼 데까지 해보는 거야.’
자고 일어났더니, 강이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세상 끝난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막막했는데,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을 만난 듯 희망이 샘솟기 시작했다.
‘그래, 고백했다가, 안됨 마는 거지 뭐.’
강이는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산으로 향했다.
‘가만 있어봐!’
급하게 달려가던 강이가 갑자기 멈춰섰다.
‘그래, 혁이 좋아하는, 엿 좀 가져가자. 엿 먹으면서 얘기하면 어색하지 않고, 기분도 훨씬 좋아질 거야.’
강이는 그대로 집으로 되돌아갔다.
“어머니!! 엿 좀 챙겨주세요.”
“엿? 며칠 전 니가 먹은 게 마지막이었는데, 또 엿이 먹고 싶은 것이야?
“분녀 어딨어요? 분녀야!!”
강이는 분녀를 여기저기 찾아다녔고, 강이 방을 닦고 있는 분녀를 봤다.
“분녀야!”
“예, 도련님, 산에 가신 거 아니었어요?”
“너, 혼자 먹으려고 몰래 숨겨둔 엿 있지?”
“엿이요? 예, 있긴 한데...”
“얼른 그 엿좀 줘.”
“무슨 일이신대요?”
“빨리, 나, 급해.”
“맨입으로요?”
“뭐?”
“도련님, 저는 정남이랑 엿 같은 운명하고 싶은데, 정남이가 제 말을 들어야지요. 저잣거리 한번 같이 가자 해도, 나으리 뫼셔야 한다, 도련님 훈련시켜야 한다, 통 저한텐 관심이...”
“알았어. 앞으로 사부랑 엿 같은 운명 만들어 줄테니까, 엿 좀 줘.”
“진짜요? 약속 하셨어요?”
“알았다니까. 빨리 주기나 해.”
“저 그리고 있잖아요, 도련님! 정남이가... ”
“아 알았으니까, 엿좀 달라고 좀!”
“아 깜짝이야. 도련님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세요. 엿 주고 싶은 마음 싹 가시게.”
“어 미안, 내가 좀 급해서.”
“약속 지키세요. 꼭~!”
“응. 알았다니까.”
분녀는 쪼르르 어딘가로 달려가더니, 엿을 가지고 왔다.
“이 엿은 정말 제가 아끼는 건데.”
“고마워.”
엿을 받아든 강이 마음은 하늘을 날아갈 듯 가벼웠다.
‘이 엿을 보고 혁이 좋아하겠지?
혁은 윤씨부인이 만든 엿을 특히 맛있어 했다. 기분 좋은 강이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고 맑았다.
‘날씨도 적당해. 고백하기 좋은 날이야!’
산으로 향하는 강이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아~~ 바람도 시원하고~~’
혁을 기다리는 강이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설레고 떨리고 있었다.
“혁아 사실은 내가 예전부터 말하려고 했는데, 놀라지마, 내가 여자야. 내가 여자였어.. 여자라니까...”
혁이 왔을 때 망설임 없이 내뱉기 위해, 강이는 중얼중얼 연습하고 있었다.
“뭘 그렇게 중얼대?”
‘왔다. 드디어 혁이 왔어!!’
긴장한 강이가, 혁 오는 곳으로 몸을 돌리는데!!
순간, 숨이 멎는 듯 강이 가슴이 철렁! 심장이 쿵쾅쿵쾅! 저쪽에서 걸어오는 혁의 모습에, 산에서 웃통 벗고 뛰던 혁의 모습이 서서히 겹쳐졌다.
‘군살 없는 구릿빛 피부에 탄탄했던 팔뚝과 복근! 복부에서 王자가 보였었지...’
온몸으로 남성미 뿜뿜 내뿜으며 달려오던 혁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지며, 강이는 자기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그랬구나. 혁의 심장이 아니라, 내 심장이 뛴 거였어.’
‘여자란 걸 들키지 않으려고 온몸의 기운을 다 쓰느라, 정작 내 마음은 어떤지, 내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몰랐었구나!’
혁을 바라보고 있자니, 강이는 자기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리며 현기증이 나 주저앉고 말았다.
“왜그래? 아직도 다리가 아픈 거야?”
“어? 아니...괜찮아....”
얼른 달려와 팔을 잡아주는 혁의 옆모습을 올려다본 강이는, ‘아흐흐흐’ 저절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쩜 이리도 잘생겼어. 내 그동안 이렇게 잘생긴 혁을 몰라봤던 거야? 아님 내 눈이 오늘 삐뚤어진 거야? 그것도 아님 뭐에 잠깐 씌인 걸까?’
“괜찮아?”
“어 어...”
“근데, 너 눈이 왜 그렇게 부었어? 얼굴도?”
“부었어? 많이?”
“어.”
“보기 흉해?”
“흉하지. 뭔 일 있었어?”
“아니...뭔 일이 있는 건 아닌데......”
‘흉하지.’란 말에 강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거 같았다.
‘고백하기 안좋은 날인가? 괜찮아 보여도 말 꺼내기 어려운데... ’
강이가 생각에 빠져있는데, 혁이 강이가 가져온 엿보따리를 봤다.
“뭐야, 이건?”
“어... 너 좋아하는 거.”
“나 좋아하는 거? 뭔데?”
“풀어봐. 별건 아니야.”
혁이 서슴없이 천에 싸인 걸 풀었다.
“역시, 강이 너밖에 없어.”
너.밖.에!
‘너밖에’란 말이 강이 가슴에 콕 박혔다.
“그치, 나 밖에 없지? 히~”
“그래 너밖에 없어. 내가 혼례 올린다니, 축하해주려고 갖고 온 거잖아?”
“어?”
“혼례 올린대도 다들 그런가보다 반응이 없어 엄청 서운했는데, 역시! 넌 다를 줄 알았어.”
“어, 그게... 그러니까,”
강이가 우물쭈물하는 차에, 혁은 벌써 엿 하나를 입에 물었다.
“살살 녹는다 녹아. 어머니 엿맛은 진짜 끝내준다니까.”
“맛있냐?”
“당연하지. 나 이거 혼자 다 먹어도 돼?”
“어? 어...”
“좋았어. 니가 축하해주는 거니까, 아무한테도 안주고 나 혼자만 먹어야지..”
‘어 이게 아닌데!’ 싶어, 강이는 용기내 말하기로 했다.
“근데 말이야!”
“아참!”
강이와 혁은 동시에 말을 했다.
“너 먼저 말해.”
“아냐, 너부터 말해.”
“아냐, 너부터...”
강이가 혁의 눈치를 보면서 말할 기회를 넘겼다.
“색시 보러 가자.”
켁!! 색.시.!
색시란 말이 어쩜 저렇게 자연스럽게 나오지?
“뭐? 뭘 보러 가?”
“색시.”
“새액시?”
“니가 그랬잖아. 니 친구는 내 친구라고. 내 색시는 내 색시지만, 너한테 젤 먼저 보여주고 싶어. 우린 가장 친한 친구잖아.”
“그래도 그건 쫌,”
“왜 싫어?”
“싫다기 보다, 그게 말이야 혁아, 사실은 내가 그때 산에서 말하려고 했던 건데,”
“알아, 생각해보니 니 말이 다 맞더라.”
“???”
“너랑 나랑 친구니까, 니 어머님도 내 어머님이고, 니 친구도 내 친구고, 물론, 내 색시가 니 색시되면 곤란하지만, 그만큼 너랑은 제일 가까운 사이니까, 내 색시를 너도 자주 보고, 친해지면,”
색시, 색시, 색시!
언제부터 생긴 색시라고 그렇게 입에 척척 붙는지, 강이는 질투 나고 화가 나기 시작했다.
“강이 너, 에이~~”
“????”
“나 먼저 혼례 올린다고... 맞지? 지금, 그 표정, 부러운 거?”
“아니거든.”
“그럼 삐졌구나! 그래, 삐진 게 맞네.”
“그런 거 아니래도! 남의 속도 모르고.”
“난 니가 혼례 올린다면, 어떤 색신지 궁금해서, 내가 먼저 가보자 할텐데,”
“.......”
“넌 나랑 젤 친하면서, 내가 어떤 색시랑 혼례 올리는지 안궁금해?”
“당연히 궁금하지, 근데,”
“궁금하다면서 근데는 뭐야, 은근 나 서운해질라 그래.”
“뭐?”
“우리가 함께 한 세월이 얼만데, 내 색시한테 관심도 없냐 말이야. 내 색시는,”
“내 색시, 내 색시, 내 색시! 그놈의 내 색시란 말!”
강이는 ‘내 색시’란 말이 심히 거슬리고 질투 나서 저도 모르게 벼락같이 소리 지르고 말았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혁도 깜짝 놀라 쳐다봤다.
“아 깜짝이야”
“아니. 화가, 아니 너만 색시 생기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
뭐래, 아, 울고 싶다.
마음먹은 대로 안되는 게 사람 마음이라던 분녀 말이 딱 맞았다.
강이는 아무 말도 못하고 우물쭈물 혁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