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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로맨싱 사가 : 백발마녀전
작가 : 백발마녀
작품등록일 : 2020.8.23

똥싸개, 스토커, 시너테러범을 상대로 성장하는 쌍둥이 남매와 친구들의 이야기.

 
21화 ~ 24화
작성일 : 20-08-31 08:41     조회 : 257     추천 : 0     분량 : 23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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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화. 수정궁

 

 “아빠…?!” 수정궁 ‘고추방’에선 난데없이 아빠가 튀어 나왔다.

 

 나도 눈이 커지고, 아빠도 눈이 커지고, 수정궁 사장님도 눈이 커졌다.

 

 “안 그래도 네 목소리가 자꾸 들리는 것 같아서, 나와 봤는데, 너 공부 안 하고 여기서 뭐해? 희주는?”

 

 “아빠는…. 등산 간다더니, 벌써 끝난 거예요?” 내가 물었다. 희주 얘기에 불안해진 표정을 애써 감추며.

 

 “어 전무님, 안녕하십니까!” 수정궁 사장은, 방안에 앉아계신 아빠 회사 분에게 인사를 하며, 열린 방으로 들어갔다.

 

 “등산은, 이미 끝났지,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아빠가 내 질문에 답을 하고는, 방안을 스윽하고 쳐다보고는 다시 나를 쳐다봤다. 마치, 당신의 고등학생 아들이 지금 여기서 중국집 사장님하고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느냐는 듯이 말이다. 내가 지금 중국집 사장님을 찾아온 설명을 하면, 분명 황당해하실 것이었다. 먼저 집 앞 똥이며, 그다음엔 오줌이며, 커피숍 CCTV에, 오거리 추격전에, 고속도로 그리고 지금 손에든 발찌까지 뭐하나 이해하실 수도 없으실 테지만 말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희주 얘기로, 아빠가 질문한 희주 얘기에 대해, 답을 했다.

 

 “희주는…, 집에 있죠. 피곤한가 봐요. 어제 공부를 많이 해서….” 거짓말이었다.

 “그래, 피곤하겠지…. 따로 얘기할 기회도 없었겠구나…”

 “...네, 아직”

 

 “근데 여긴 무슨 일로…?” 아빠가 내가 내민 손 위에 발찌를 보며, 다시 생각이 난 듯, 물었다.

 “아 그게…. 이 발찌요! 이거를 요기 문 앞에서 주워서, 혹시 누가 중요한 건데 떨어뜨린 건가 해서요.”

 

 “그래? 분실물이면 저기 저분한테 맡겨,” 아빠는 대수롭지 않은 듯 발찌를 집어서 홀 매니저에게 건네셨고, 이어서

 “여기 들어와 아빠 회사, 전무님께 인사하고 가라.” 하고 말씀하시며 나를 회사분들에게 인사시키셨다.

 

 “안녕하세요.” 하고 꾸벅꾸벅 모두에게 인사했다. 가운데 자리한 높은 분이 아마 오래전에 한 번 뵌 적이 있는 어익후 전무님이라는 분 같았다.

 

 “어, 그 쌍둥이 중 첫째? 허허 그놈 잘 생겼다! 안 그래도 여기 오 사장이 서비스로 요리하나 준다고 하니, 앉아서 먹고 가!” 어 전무라는 분이 나에게 자리를 권했다. 중국집 사장님은 웃으며, 하지만 깍듯이 인사를 하고 “음식 금방 내어 오겠습니다” 하고 나갔고, 아빠는 나를 보며, “편한 대로 해” 하고 말했다.

 

 “아, 죄송해요. 저 내일모레부터 중간고사라서.” 내가 조심스레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하, 저런, 저런. 중요한 시기네, 내가 괜히…” 그가 멋쩍은 듯 아빠를 쳐다보자, 아빠가 답했다.

 

 “다음에 사주십시오, 전무님.” 그리고는 나를 보고 손짓하며 말했다.

 “가서 혼자 먹고 어여 들어가. 희주 잘 도와주고.”

 

 “안녕히 계세요” 내가 크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다.

 

 내 자리에는 이미 고추 잡채밥이 놓여있었다. 또 마주치지 않기 위해 허겁지겁 밥을 입에 욱여넣었다. 중국집 사장님이 주방에서 엄청나게 큰 접시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이 가지고 나오며, 나를 보고는,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던졌다.

 

 “애초에 그 사진만으로 누구인지 어떻게 특정을 해. 머리가 긴게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겠던데.”

 

 ‘내 눈에만 정확하게 보인는 건가? ... 왜 커피숍 아저씨도, 중국집 사장님도 다 헷갈려 하시는 거지? 머리만 길뿐, 남학생이 맞는데?’

 

 혼란스러웠다. 그렇지만, 더 지체하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

 

 희주는 역시 집에 없었다. 문자를 보냈다.

 

 [아빠, 저녁 전에 오실 거야. 내가 뭐라고 둘러대냐.]

 [...]

 

 여러 번 지웠다, 썼다를 반복하는 것인지, 아니면 길게 쓸 말이 있는 건지, [...] 표시가 대화창에 오래도 걸려있었다. 무엇이 되었던 마음이 편치 않았다. 희주가 힘들어 보였다. 가끔 나를 때리고, 장난 섞어 욕설을 할지언정, 이렇게 거리를 둔 적은 없는데 말이다.

 

 한참 후에, 문자가 들어왔다.

 [독서실이야. 이제 들어가.]

 

 식탁 위에 놓인 마지막 고구마를 집어 들고 먹었다. 목이 메었다.

 

 ---

 

 시험공부를 한답시고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희주가 집에 들어오고 나서도, 다시 희주 방에 들어가서, 내가 보고 들은 남자친구 얘기를 꺼내기가 조심스러웠다. 그러다가, 또 집을 나가면, 아빠를 뵐 낮도 없지만, 희주가 너무 걱정돼서였다.

 

 하지만 왠지 똥을 싸다 끊은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월요일 오전, 잠을 너무 설쳐서 평소보다 눈이 빨리 띄어졌다. 간만에 오전 통학 버스를 타고 등교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방문을 열고 나오자, 이제 막 씻고 자기 방으로 다시 들어가는 희주와 마주쳤다. 괜히 혼자 어색해져서 눈을 쳐다볼 수 없었다.

 

 “...야.” 희주가 먼저 말을 걸었다.

 “응?”

 

 “꼴값 떨지 말고, 시험이나 잘 봐. 궁금한 거 있으면 내가 시험 끝나고 전부 다 말해줄 테니까.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눈치 보지 말고. 그때까지 아빠 걱정시키지 말고.” 담담하게.

 

 “...그래.” 내가 희주에게 답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시험 끝나고 얘기해도 된다. 희주가 만나는 놈이, 영양쌤과 모텔에서 나오는 걸 봤다는 얘기를 지금 할 필요는 없다. 시험 끝나고 하자’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

 

 버스를 타고 학교에 도착해서, 핸드폰으로 인강 자료를 보고 있는데, 현주가 다가왔다.

 

 “희준이 니가 웬일로 벌써 왔어?”

 “너야말로, 웬일로 이쪽 자리로 아침부터….” 내가 퉁명스레 대답하자, 뒷자리 영진이 끼어든다.

 “원래 너 없을 때, 현주가 여기 와서 자주 놀아, 니가 너무 늦게 와서, 맨날 못 봐서 그렇지 큭큭.”

 

 “이건, 또 무슨 소리래?~” 내가 능글맞게 눈썹을 움직여대며 말하니, 현주가 냉큼 말을 잘랐다.

 

 “희준이 넌, 희주랑 얘기 좀 해봤어?” 그리고는 이어서 영진을 향해 쏘아댄다.

 “영진이 넌, 나 좋아하냐?”

 

 나와 영진이 둘 다, 답을 못하고, 입만 벌린 채, 붕어처럼 뻐금거렸다.

 

 그제야 본론을 꺼내듯 아랑을 보고 현주가 말했다.

 

 “그때 너희가 때렸던 애, 지난주에 떡볶이집 앞에서. 그쪽 공립 쪽에서 이번 주에 애들 모아서 온대. 니가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중간고사 기간이니까 선생님들한테 얘기하던지, 아니면 뭐 경찰서에 얘길 하던지.”

 

 “넌 그걸 어떻게 알았냐?”

 

 “지난번에 너희들이 때린 애들 중에, 수미라는 여자애. 걔한테 끌려다니면서 이상한 짓 하는 뭐 나름 불쌍한 여자애들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알려줬어. 나랑 수미랑 걔랑 다 예전에 같은 중학교에 다녔거든….”

 

 다들 경청하는데, 아랑이 딱히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듣고는, 대뜸 말했다.

 

 “음…. 근데 너 쫌 이뻐진 거 같다?”

 “!...너 내 말 듣니?” 현주가 당황해하더니, 쏘아댔다.

 “이거 장난 아니야~, 거기 진짜 무서운 애 있다니까!?”

 

 “그래, 알았어. 고마워. 알려줘서. 뭐 경찰서 신고하면 되지 뭐.”

 

 아랑이 그렇게 말하고는, 갑자기 생각난 듯, 나를 보며 다시 화두를 바꿨다.

 

 “아 참, 희준아, 그때 우리 경찰서 가서 만났던 그 눈썹 흉터 난 경찰형, 그 사건은 어떻게 되었어? 똥 싼 새끼 잡았어?!”

 

 “어? 응…. 뭐 거의 잡았나 봐. 아니, 똥 싼 놈 말고, 그 시너 테러범. 거의 잡았겠지. 나도 잡았는지까지는 확인 못 했고.” 대답을 하면서도 괜히 현주 눈치를 살폈다.

 

 현주는 진짜 아랑이가 걱정되어 보였는지 말을 잇지 못하고, 아랑이만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아랑이는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보며 다음 이야기를 듣자고 눈을 반짝였다.

 

 ----

 

 조용한 월요일이었다. 내일부터 중간고사라서 일부는 호들갑을, 또 다른 일부는 아예 포기한 듯, 하지만 학교라는 장소에서 시험 기간은 특별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지그재그 코너링을 앞둔 레이싱 차량처럼 핸들 그립을 좀 더 타이트 하게 쥐고, 눈을 부릅뜬채 악셀에서 발을 떼고, 감속을 조절한 후, 빠르게 하지만 동시에 침착하고 묵직하게, 턴. ’스무스‘하게 돌 수 있다면, 다시 다음 코너를 바라보며 핸들을 부여잡고, 재빨리 악셀에 발을 올린다.

 

 직진코스와는 주행법이 다르다. 그리고 그런 시험시간을 겪는다는 것. 그것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과, 학교에 다니지 않는 청소년과의 차이를 나누기도 한다.

 

 내일부터 시험이라, 대부분 학생이 야자에 남지 않았다. 희주는 독서실에서 마무리한다고 하며, 야자에 남지 않았고, 따라가 볼까 하다가,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리곤 그냥 야자에 남아서 혼자 공부를 하기로 했다. 바로 어제 각오를 다졌는데, 금세 내 걱정만 앞세워서 희주를 곤란하게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러려면, 늦게 오는 희주를 집에서 혼자 기다리느니 그냥 학교가 나을 것으로 생각했다.

 

 [아직 학교?]

 5시 방과 후 종이 울리자마자, 쏜살같이 뛰쳐나간 아랑이 밤 9시가 넘어서야, 문자로 물었다.

 [응. 넌?]

 

 [나 차 탈 때 보니까 희주는 혼자 가던데?]

 [응, 걔는 독서실] 내가 답했다.

 [난 집. 우리 반에 애들 많아? 난 다 했는데, 학교나 가볼까?]

 [아니, 반도 없어. 영진, 재곤은 집 감. 이 시간에 뭘 타고 오게. 걍 쳐 자라]

 

 그렇게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잠시 바람 좀 쐴 겸 교실 밖으로 나왔다. 당직을 서고 계시는 것인지, 영어 선생님이 교실 밖 복도를 어슬렁거리셨다. 귀에는 보청기인지 무선이어폰인지 모를 것을 한쪽에만 끼우고 계셨다.

 

 괜히 걷다가 갑자기 뒤로 돌아서서 나를 보기라도 하면, ‘어디 가냐’, ‘야자시간에 돌아다니지 말아라’, ‘희주는 어딨느냐?’ 등등의 소리만 하실 것이라, 냉큼 가까운 계단으로 까치발을 하고 내려왔다.

 

 막상 아래층으로 내려오니, 불 켜진 교무실이 보였고, 그럴 리 없겠지만 싶으면서도, 괜스레 별관 조리장 2층의 불은 혹시 켜져 있을까 궁금해졌다.

 

 ‘한 번…. 걸어가 볼까…’

 

 단지 학교 본관 뒤편이 조용하니 학생이 야자 하다가 바람 좀 쐴 겸 걷는 것뿐인데, 왜인지 마음이 콩닥콩닥 뛰었다.

 

 ‘내가 뭐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니고…’

 

 푸른 달빛이 본관 후문 쪽 반쯤 열린 창문을 통해 은은하게 들어 왔다. 내 손끝에 맺혀있던 땀 바늘이 바람에 식어, 손이 시원해지는 걸 느꼈다.

 

 ‘살짝 보기만 하는 건데…’

 

 문고리를 잡고 창문에 얼굴을 가까이, 그리고 천천히 가져다 대었다. 한눈에도 별관 불은 모두 꺼져있었다.

 

 ‘휴…’ 왜 한숨이 쉬어졌는지 모르겠다. 안도의 한숨인지, 안타까움의 그것인지도.

 

 4월의 말일이 가까워서 그런지, 별관 건물 위 아주 동그란 달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몇 분이나 있었을까?

 

 조리실 2층, 영양사 선생님 방을 초점 풀린 눈동자로 넋 놓고 쳐다보고 있다가, 창문을 닫으려고 정신을 차리었다. 그리고 그때야, 불 꺼진 조리실 별관 건물 1층 앞, 짙게 드리워진 건물 그림자에 조용한 눈동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22화. 영양쌤과 희주 남친

 

 “....!”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창문에서 멀리 떼었지만, 이미 늦었다. 이미 달빛에 나의 당황한 표정은 여실히 드러났을 터였다.

 

 몸을 살짝 옆으로 움직여, 살며시 다시 별관 1층을 쳐다봤다.

 

 바스락.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마치 귀신이라도 돌아다니는 듯.

 

 아니다, 열린 창문으로 들려오는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였다. 발자국 소리도 아니고, 봄날 밤, 잔디 위를 스치듯 걸어오는 소리. 조심스럽지만, 마치 꼭 확인하겠다는 듯한 결연이 느껴지는 소리.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두근거렸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차라리 귀신이어라!’

 

 열린 창문 사이로 달빛 조명에 하얗게, 아니 푸른 달빛에 어쩌면 창백하게까지 보이는 아담한 여자의 손, 그 손끝이 창문 안으로 들어왔다. 창틀에 손을 걸친 채. 작은 손에서 뻗어 나오는 길고 단단하게 보이는 매끄러운 손가락이 마치 잡아달라는 듯, 미세하게 움직인 것 같았다.

 

 그리고, 들려오는 촉촉한 목소리. 마른 입술에 이슬 한 방울 떨어지듯, 적셔주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희준이니?”

 

 심장이 벌렁거려서 답을 못했다. 그러면서도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서 창문 사이로 들어온 손끝 아래로 내 손을 가져다 대었다. ‘저 가녀린 손가락을 잡아 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폐 안쪽에서부터 숨이 차오르듯, 차올랐다.

 

 그리고 손을 잡았다. 내가 먼저 잡은 것인지, 영양 선생님이 먼저 잡은 것인지 모르지만, 두 손은 손끝에서부터 말아 들어가듯 잡혀 있었다.

 

 그렇게 1초 혹은 그보다 짧은 시간.

 

 그리고는, 선생님 쪽에서 먼저 천천히 말아쥔 손을 풀면서, 큰 의미는 없었다는 듯 일상의 선생님들의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촉촉함이 조금은 건조해지는 듯한 공기가 전해졌다.

 

 “이 시간에 여기서 뭐해?”

 

 ‘...’ 정신을 차리고, 내밀은 손을 어색하게 빼며 내가 말했다, “아 그게…. 선생님께 궁금한 게 있어서요….”

 

 “나한테?”

 “네….” 호흡을 가다듬고, 창문에서 한걸음 옆으로 비켜서서, 후문의 손잡이를 잡고 힘껏 밀어 문을 열었다. 전신에 힘을 주니, 좀 더 정신이 맑아졌다. 아무리 왕성한 성장기 고등학생 남성의 본능이라지만, ‘금지된’(?) 색정에 홀려버린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문을 열고 있는 동안은 말이다.

 

 ‘젠장.’

 

 문을 다 열고 돌아서서 다시 보니 여전히 이쁘시다. 달빛에 드러난 전신은 마치 서큐버스처럼 온몸으로 ‘날 좀 안아줘.’ 라고까지 말하는 듯 보였다.

 

 ‘에잇! 이 미친 상상!! 머리에서 나가!!!’

 내가 내 머리를 아주 세게 때렸다. 두 번, 세 번! 퍽! 퍽!

 

 “어머, 희준아, 왜 그래?” 영양쌤이 깜짝 놀라시더니, 다가와 자해하는 내 팔을 잡았다. 그제야 얼굴을 보니, 조금은 서큐버스의 보라색이 옅어지는 걸 느꼈다. 숨을 머금은 채 물었다.

 

 “...선생님, 남자친구 있으시죠?”

 “...? 갑자기…?”

 

 그녀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듯, 대답을 주저했다. 통상적인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 혹은 대화였다면 이런 상황에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김유신이 기생집 앞에 멈춰선 말의 목을 치는 듯한 심정이 이러했으랴. 나는 마음속 근본 없는 욕정을 누르고 말을 꺼냈다.

 

 지지난 토요일 모텔에서 나오는 영양사 선생님과 어떤 사내를 내 눈으로 직접 보았고, 지난주에는 오거리 커피숍 아저씨가 보여주신 CCTV에 같은 사내가 찍혔으며, 그 사람이 바로 희주가 만나는 사람 - 희주 전화기에 ‘다리털 대딩’이라고 적힌 사람 - 이라고 말해주었다.

 

 내가 보고 들은 게 맞는다면, 희주가 만나는 사람과 여기 내 눈앞에 영양사 선생님이 만나는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고.

 

 “선생님, 그날 모텔에서 나오실 때, 그 남자분 얼굴을 제가 정확히 봤어요….”

 “...그렇구나.”

 

 달빛 때문인지, 진짜 그녀의 미모 때문인지. 아니면, 내 머릿속 불순한 상상들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서인지. 그녀가 놀라야 하는데, 오히려 말을 하는 내가 위축되어 있었다.

 

 한편으로는 희주와 먼저 얘기를 완전히 나누지도 않고 이렇게 다른 이에게 희주 얘기를 한다는 게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 남자가, 제 동생하고…” 거기까지 말하다 말을 멈추고, 다시 물었다. “그날 모텔에서 선생님하고 나온 분이 선생님 남자친구 맞는 거죠?”

 

 정확한 관계 확인을 하고 싶었다. 그날 이후 영양쌤과는 완전히 헤어지고 희주를 만났을지도 모르니. 하지만 영양쌤은 혹여나 모텔얘기를 누가 들을까, 서둘러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희준아, 시험공부 때문에 힘든 거 같은데…. 여기서 이렇게 말할 거는 아닌 것 같고, 우리 시험 끝나면 얘기하자. 내 개인사지만, 네 동생하고도 뭔가 연결된 게 있는 거 같은데, 시험 끝나고 하면 어떨까?”

 

 내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니었다.

 

 “아뇨, 지금도 희주는 그 사람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고…” 내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지금 그냥 알려주세요. 그래야 제가 희주를, 희주한테 조심하라고….” 말끝이 떨렸다. 희주가 어떤 놈의 ‘세컨드’ 따위라는 생각이 들어 목이 메여왔다.

 

 “...그래, 그러면 여기서 말고,”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조리실 2층을 가리키며, “저기 올라가서 얘기하자. 나도 내 개인사를 여기서 얘기할 수 없으니까.”라고 말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희주 생각에 감정이 복받쳐 올랐으면서, 동시에 조리실 2층으로 가는 그녀 뒤를 따라가니, 아주 난잡한 상상이 다시 비집고 들어왔다.

 

 ‘난 도대체 어떤 결과를 원하는 걸까? 대체 영양사 선생님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와주기를 원하는 걸까?’ 이런 질문조차 자신에게 이성적으로 대답해줄 수 없었다. 조금전 창틀, 그녀의 손끝의 여운이 아직 내 손끝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내 각오은 ‘참마대성‘이었는지 몰라도, 나는 김유신처럼 말의 목도, 아니 내 신체 부위도 어디 하나 잘라내지 않았으니, 이게 생각처럼 잘 될 턱이 없었다.

 

 --

 

 별관 조리실 2층에서 그녀는 불도 켜지 않고 그녀의 과거를 나에게 얘기했다. 그녀도 사실 성별이 다른 이란성 쌍둥이 남동생이 있었는데, 불의의 사고로 명을 달리했다고 말이다. 그때 그녀를 많이 위로해준 사람이 있었다고.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많이 변했고, 점점 더 왜곡된 성 본능을 드러내서, 이제는 헤어졌다고도 말했다.

 

 “왜곡… 된 이요? 가령 어떤…?”

 

 그녀가 말을 멈추고 불 꺼진 방, 작은 원탁 테이블 너머로 내 눈을 마주 보며, 웃었다. 그리곤 믿기 어려울 것이라는 듯, 나지막이 속삭였다.

 “젊은… 어린 학생들?”

 

 “그래서, 설마 희주를…!” 마치 누가 들으면 큰일 난다는 듯, 나도 모르게 테이블 위로 몸을 가까이 기대며 속샀였다.

 

 “....응 맞아.” 그녀가 곧바로 단아한 그녀의 얼굴을 내 얼굴 가까이 가져다 대며 답했다. 그녀 입안에서 푹 젖은 체리 향 내음이 내 콧속으로 깊게 들어왔다. 순식간에 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내뱉는 모든 말은, 선생님으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말들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보여주는 행동 하나하나는 반대로 절대 선생님들이 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과한 손짓, 잘못된 방향으로 상상하게 만드는 거리,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움직임들. 내 볼과 귀를 스치듯 만지고, 내 손을 잡으며, 이렇게 가까이에 얼굴을 가져다 대며 내뱉는 숨소리가 그랬다.

 

 “미성년자 보호법 이런 거로 경찰에 신고하면 혹시….” 내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아니 그런 거로는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고 도움을 얻을 수도 없어. 지금의 너처럼, 부모님만 걱정하시겠지.”

 

 그녀가 그렇게 말하고는 갑자기 일어서서 내 옆으로 다가가 내 머리를 안아 품었다.

 

 따뜻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나를 정신 차리게 했다. 마치 내가 엄마가 없어서, 이렇게 나보다 나이도 많은 선생님과의 이상한 분위기에 취하게 된 건 아닌가, 싶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어색해지기 전에, 그녀를 보며, 희주 일에 대한 마지막 질문을 했다.

 

 “한 가지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희주가 만약에 제 말을 안 믿으면, 그때는 희주에게도 저한테 얘기해주신 것을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럼. 근데, 희준이가 얘기하는 거로 충분할 거야. 그래야 하고. 만약 희준이가 아니고 내가 희주 앞에 이런 얘기를 한다고 생각해봐. 남자친구의 전 여자친구가, 그것도 알고 보니 학교 선생님이, 남자친구가 나쁜 사람이다, 어린 학생들만 좋아한다 어쩐다 그러면….” 그녀가 말을 멈추고, 마치 내가 그녀의 말을 끝내주기를 기다리는 듯, 나를 쳐다봤다.

 

 “안 믿겠죠.” 바보처럼 퀴즈라도 푸는 마냥 내가 답했다. 그 모습을 보더니 그녀가 싱긋 웃고 말을 이었다. 숨 막힐 듯 귀여운 모습.

 

 “모함이라고도 하겠지. 질투? 라고 할 수 있고. 여자는 사랑 앞에 그럴 수 있거든. 선생이나 학생 같은 사회적인 관계를 떠나서.”

 

 “...”

 

 “시간이 늦었다.” 그녀가 다시 선생님의 목소리로 돌아왔다. 나도 모르게 작게 한숨이 나왔다. 이번엔 확실했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10시야. 버스 타고 가야 하는 거 아냐?”

 “헉! 네. 아, 저 그럼 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귀가 버스는 몇 분 더 기다려주는데도, 내가 괜스레 부산을 떨며, 인사를 하고 뒷걸음치며 조리실 2층 방을 나섰다. 그녀의 팔짱을 끼며, 이런 내가 귀엽다는 듯이 쳐다보는 눈빛이 느껴졌다.

 

 별관 건물을 내달려 나오면서, 얼굴을 만져보니 뜨거울 정도였다.

 

 ‘저 선생, 지금 나 데리고 뭘 한 거지?’

 

 귀신에 홀린 듯이 넋이 나갔다가, 본관으로 돌아오니 제정신을 차린 기분마저 들었다.

 

 그리고, 기억해냈다. 내가 할 일을. 우선은, 그 ‘다리털 대딩’을 잡아야 한다. 더는 희주 눈치를 보며, 언제 대화할지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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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요일 오전, 아빠가 일찍 나가시는 소리를 들었다. 곧이어 희주도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날 깨우지도 않는다.

 

 ‘우선은 시험이다.!’ 오늘은 중간고사 첫날이다. 지난 몇 주간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공부를 제대로 못 했지만, 그렇다고 시험 첫날부터 지각하면, 정말이지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을지 모른다.

 

 방문을 열고, 나와 보니, 아빠의 조식 만찬이 진수성찬처럼 차려져 있었다.

 

 [화이팅!] 아빠의 메모.

 

 꾸역꾸역 먹고, 설거지까지 마친 후 학교로 향했다. 메모에 답장은 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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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실에 도착하니 아랑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뭐해?”

 “쉿. 공부한 거 새어 나간다.” 아랑이 본인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말한다.

 

 “너 같은 전국권 플레이어도 이런 모의고사 신경 쓰냐? 대충해도 일등 아니냐?”

 “쉿. 늑대는 토끼 한 마리를 사냥할 때에도 최선을 다한다. 모르냐?”

 “사자 아니냐, 그거?” 내가 물었다.

 “쉿.”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걔를 여자를 소개해줘 봐.” 뒷자리 재곤이가 착석한다.

 “뭐야 얘가 뭐 삼손이냐? 여자 생기면 힘 빠지게?” 영진도 대화에 끼어든다.

 

 “어? 머머리되면 힘 빠지는 거?”

 “힘 빠지지~, 얘가 아무리 키 크고 돈 많고 잘나도, 머머리되면 끝이지 큭큭큭” 내가 말했다. 그래도 아랑이 반응이 없자, 내가 한마디 더 던졌다.

 

 “머머리되면, 현주도 관심 없을걸?”

 아랑 눈이 번뜩 뜨이더니, 현주 자릴 먼저 슬쩍 한번, 그리곤 나를 쏘아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엮지 좀 마~. 넌 공부나 좀 해라. 또 성적 떨어졌다고 질질 짜지 말고.”

 

 “큭큭큭큭.” 나를 포함 세 명이 그의 집중을 막은 데 성공했다는 듯이 서로를 쳐다보며 승리의 웃음을 지었다.

 

 

 

 

 

 23화. 애무

 

 “후우~ 비 온다.”

 1교시 화학을 마치고 넋 나간 듯 창 쪽을 쳐다봤다.

 희주는 웬일인지 웃고 있었다.

 ‘쟤는 저거 시험 잘 봤나 보네. 나쁜 것, 아빠 걱정하게 외박까지 하더니. 쯧. 다행이네 그나마 시험이라도 잘 봤으면.'

 

 내 생각을 비집고 아랑이 얼굴을 들이밀며 깐죽댔다.

 

 “힘내라. 오후 수학도 꼴등 하려면 분발해야지. 꼴등도 쉬운 거 아니잖아?”

 “꼴등 아니거든? 어쩌다 너 같은 거 하고 어울려서, 맨날 공부 못하는 캐릭터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정말.”

 

 “괜찮아, 넌 못생겼잖아. 비 오는데 우울하기 딱 좋은 날이다. 화이팅!”

 “...”

 

 생각할 게 많아서인지, 아랑의 장난이 딱히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아 쉐끼. 장난이야 인마. 비도 오는데, 이따 2교시 시험 끝나고, '파터' 콜?”

 “그래 네가 사라. 난 두 개 먹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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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전 시험이 다 끝나고, 대부분 교내 카페테리아 식당으로, 나머지는 버스를 타고 귀가. 밖은 아직도 봄비가 보슬보슬.

 

 우리는 건물 앞 처마 밑에서 뛰어갈지, 차를 타고 갈지 고민 중이었다.

 

 “야 우리 비 맞으면 ’머머리‘된다~ 우산 써” 같이 오기로 한 영진과 재곤이 우산을 폈다.

 “핫! 그까짓 거 비쯤이야! 내가 바로 백두 장군 손 아랑이다!”

 

 아랑이 장난스레 기합을 넣고는, 우렁찬 목소리만큼,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저 자식 지금 ‘백두’…, 라고 한 거야?”

 “자기는 대머리가 되어도 문제가 없다는 거겠지?”

 

 “재수 없네.” 갑자기 현주가 스윽 영진과 재곤 사이에 끼어들어 말을 했다.

 

 “아, 깜짝이야….” 영진과 재곤은 갑자기 튀어나온 현주에 흠칫 놀랜다.

 “아 저 병신, 시험 기간만 되면 자기가 무슨 무적인 줄 알어. 야 저 새끼 대머리 되면 ‘자살각’이다. 내가 따라가서 우산 씌워 줘야겠다. 너희도 빨리와~.” 내가 현주를 슬쩍 보고 눈인사 후, 곧바로 우산을 퍼 올리며 아랑의 뒤를 따라 뛰어갔다.

 

 교문 앞을 나서서, 코너를 돌았다.

 우산이 늦게 펴져서 머리카락에 떨어진 빗방울이 눈앞에 살랑거렸다. 뛰어오느라 신발은 물론이고, 바짓단도 젖어 버렸었다. 양말에 물이 스며드는 썩 좋지 않은 기분.

 

 앞에, 아랑이 멈춰서 있었다. 뒤에서 보자니, 덩치도 큰 놈이 양발을 어깨너비까지 벌린 채 서 있으니 무슨 ‘장판교’에 지켜선 장비처럼 거대한 느낌마저 들었다.

 

 “야 뭐해? 비 처맞으면서 오줌 싸냐?” 그렇게 말하고,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맞은편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공립 쪽 패거리이었다.

 

 “너가 먼저 앞장서라 오늘은. 지난번처럼 비겁하게 뒤에서 치지 말고.” 5인조 중 한놈이 말했다.

 “어디로?” 아랑도 예상치 못한 등장에살짝 긴장이 된 것인지 목소리를 낮게 깔아 답했다. 설마 시험 기간에 나타날 줄은 아랑도 몰랐을 것이었다.

 

 “저 새끼, 지난번에 같이 있던 그 ‘찐따’새끼…, 아냐?” 내 머리속 '5번'으로 기억되는 놈이 나를 보자 말했다.

 ‘지난번에 존나 처맞던 새끼 주제에…’ 내가 입을 삐죽였다.

 

 “맞네, 저 새끼. 야 너도 따라와!” 5인조 중 현주 중학교 동창인 수미가 나를 보고 소리쳤다. 공립 쪽 패거리는 준비를 단단히 하고 왔는지, 자신에 차 보였다.

 

 그새 빗방울이 굵어졌다.

 

 ‘젠장, 조금만 시간을 끌면, 뒤에 영진이랑 재곤이가 따라올 텐데.’

 

 ‘어쩌면, 현주가 같이 걸어오다가 우릴 보고, 다시 뛰어 들어가서 경비아저씨던지 학교 선생님을 불러오지는 않을까?’

 

 툭.

 

 “걱정하지 마라.”

 내 등을 가볍게 툭 치고는, 살짝 미소까지 보이는 아랑이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 고가 도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10분 정도 거리에, 고속도로 두 개가 고가에서 교차하고, 또 다른 왕복 4차선 고속화도로가 바로 그 옆을 지나는, 분기점이자 교통의 요충지. ‘빌라길’이 있는 오거리 동네를 포함해서 더 안쪽에 있는 마을(면이나 읍)까지 인근 모든 상권은 대부분 이 도로들을 통해 도시 간 이동을 하고 있었기에, 일대는 항상 빠른 차 소리로 시끄러우면서도, 고가 다리 밑은 출퇴근 시간이 아니면,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사각지대였다. 어둡고 습한 곳을 찾아다니는 학생들에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패거리들을 뭐가 좋은지 아까부터 키득키득하고, 수미라는 애는 계속 나와 아랑이를 힐끔거렸다.

 

 나야 도망치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아랑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듯, 어느새 마치 도서관이라도 가는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 표정이 다시 진지해진 것은, 우리가 고가 밑에 도착해서야 발견한 또 한 무더기의 패거리들을 보고 나서였다. 기다리던 인원만 10명도 넘었고, 5인조까지 합하니, 지난번 떡볶이집 때보다도 많은 인원이었다.

 

 ‘16명….’

 

 그때 지난번 떡볶이집에서 우리를 처음 데리고 나간 녀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걱정 마라, 네가 공부도 잘하는 새끼라고 들어서, 우리도 시끄러운 건 싫고, 말이지.”

 

  ‘그때, 이름이 승현이었던가….’

 

 “그래서?” 아랑이 물었다.

 “우리도…, 몇 대는 맞아줄게. 뭐 쌍방과실 이런 거 적용되려면, 우리도 조금은 맞아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 큭큭. 한 명 정도는 병원에 실려 갈 의향도 있어. 뭐 뼈 부러지면, 전치 4주는 무조건 나온다고 하니 말이야.”

 “그래서 너가 대표로 나한테 처맞겠다고 지금 아가리 터는 거야?”

 “아니.”

 

 승현이가 꺽이지 않은 아랑의 호기가 맘에 들지 않았는지 갑자기 표정을 사뭇 진지하게 바꾸더니 말을 이었다.

 

 “적당히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미리 알려주는 거야.”

 

 “큭큭큭큭.” 공립 패거리가 일제히 웃었다. 한 명만 빼고. 그리고, 보릿자루 꿰맨 듯 입술을 닫고 긴장하고 서 있던 나는 그에게로 자연스레 눈이 갔다.

 

 ‘어?!’

 

 후드에 마스크까지 끼고 있었지만, 아는 사람이라는 문득 느낌이 들었다.

 

 아랑이에 비하면 훨씬 작았지만, 그래도 175는 넘어 뵈는 키. 주변 패거리들과는 다른 이질적인 느낌. 다부진 근육질이 느껴지는 늘씬한 바디 라인. 어깨부터 손끝까지, 축 늘어지는 게 예사롭지 않은 전체 팔의 길이. 허벅지 양쪽에 터질 듯이 꽉 끼는 요가복 같은 트레이닝 바지, 그리고 매끈한 종아리와 발목.

 

 그리고, 자연스레 눈이 가는 그의 발목에 걸쳐진…

 

 '발찌!'

 

 인근 고속도로 담벼락에서, 그날 내가 주운, 바로 그 발찌!!!

 

 … 똥을 싸고, 도망친 그놈이 찬 발찌!!!

 

 “그게 왜…!” 생각이 옆길로 새면서, 내가 또 상황파악 못 하고, 필터 없이 떠오르는 대로 소리쳤다.

 

 “너 혹시 일요일 우리 집 근처에서 발찌…, 똥 싼 새끼! 그 새끼 맞지!?”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더니, 당황한 듯 눈이 커졌다. 그리고 사납게 소리쳤다, 자기 쪽 패거리 모두를 향해.

 

 “뭐해 X발, 빨리 안 해!?” 그리고는 허리춤 어디선가 커다란 호미를 꺼냈다.

 

 ‘...농부도 아니고 호미라니?’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앞에 있던 승현이 먼저 아랑에게 주먹을 휘두름과 동시에, 이제 생각은 무의미했다.

 

 ‘부디 아랑이 함께 도망갈 타이밍만이라도 만들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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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거리 쪽 승현이라는 애의 첫 타를, 아랑은 몸을 옆으로 기울여 뱀처럼 스르륵 피하더니 그의 목과 그가 내지른 팔을 어깻죽지까지 통째로 감아 잡고 그대로 스탠딩 암 트라이앵글(조르기의 기술)을 시전했다. 마치 킹코브라가 사람을 선 채로 조여 죄듯. 큰 키와 육중한 몸무게로 애를 위에서부터 천천히 찌푸려뜨리며, 그렇게 바닥에 주저앉게 만들고는, 터질 듯이 꽉 조인 양손을 풀지 않은 채.

 

 1초, 2초, 3초….

 

 잡고 있던 팔을 풀자마자, 눈과 척추가 풀려버린 애의 얼굴을 망치 같은 주먹으로 파운딩하기 시작했다.

 

 한대, 세대, 여섯대… 너무 빨라서 숫자를 세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게다가 빠른 만큼, 무거웠다.

 

 그리고는 허리를 펴서, “후!~ 장갑만 끼고 하자. 너흰 15명도 넘잖냐.”라고 여유 있게 대사를 쳤다. 승현이라는 애는 이미 병원에라도 가봐야 할 지경이었다. '전치 4주'는 가뿐하게 넘어 보였다.

 

 ‘장갑’ 얘기는 자기가 먼저 해놓고, 어이없게도 아랑은 바로 박차고 나가서 가장 가까이 서 있는 놈의 턱주가리에 어퍼컷을 정확히, 그것도 왼손으로, 아니 손바닥을 편 채로 쳐올렸다. 190 가까이 되는 놈이 무게중심을 급속히 낮추고 내지른 어퍼컷은, 정말이지 맞는 놈을 걱정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비쥬얼이었다. 그리고는 떠오른 듯한 뒤꿈치가 다시 땅에 닿기 전에, 오른손 주먹으로 풀 스윙을 그의 얼굴에 찍어 박았다.

 

 단 두 방에 맞은 놈은 전의를 상실.

 

 땅 위에 쓰러진 채 꿈틀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승현이가 맞는 걸 봤으니, 마치 ‘더 때리지만 말아 달라는 듯한 작은 ‘몸의 속삭임’.

 

 일전의 떡볶이집 앞에서의 날아 차기는 단순한 요행이 아니었다.

 

 아랑이의 무위는 가히 명불허전이었다. 괜히 학교에서 운동부며 일진이라는 애들도 몇 수 접고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껄렁한 아저씨들도 길 가다 아랑이를 쳐다보면 쳐다본 적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곤 하는 게, 다 이유가 있었다. 과도한 체급 격차, 그리고 마치 격투기라도 배우는 사람 같은 기민함.

 

 수미가 애처롭게 외쳤다. “잠깐. 네가 장갑 낀다며!” 절절하게까지 들렸다.

 

 “야이 개~” 거기까지 내뱉고, 또 한 놈이 뛰어들었다. 온 체중을 실어 앞으로 찍어차기를 시전하며. 그러나, 추켜올려 들은 발이 아직 얼굴 높이에서 내려오지 못한 채 공중에서 아랑에게 붙잡혀 던져졌다.

 

 “허억~.” 하며 그 자세 그대로 공중에 붕 뜨더니, 그의 발이 땅에 다시 닿기도 전에 이어지는 아랑이의 태풍 같은 뒤돌려 찍어차기에 족구 공이 스파이크를 맞고 땅에 떨어지듯, 퍼억.

 

 육중한 몸이 땅에 떨어지자, 아지랑이처럼 천천히 피어오르는 흙먼지.

 

 비가 오는 날임에도 모습을 드러내는 ‘먼지의 신’, 애무. ‘애무’란,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먼지가 안개처럼 뿌옇게 일어남, 혹은 그 먼지]를 말한다.

 

 무협지도 아니고, 이런 게 가능한 줄 처음 알았다. 찍어 차려던 놈을 통째로 들어 공중에 띄운다니 말이다. 10살짜리 사촌 동생도 아니고.

 

 “‘개~허억~’은 새끼야, 아직 중간고사 중인데 무슨. 큭큭.” 나만 이해할 수 있었던 아랑의 웃기지도 않은 조크.

 

 “너 눈에 실핏줄 터졌다. 빨개.” 내가 아랑을 보고 말했다. 이미, 2대16의 싸움이 무섭지가 않아졌다. 아니, 나는 그냥 쳐다만 보고 있었는데, 내 옆에 아랑이가 있다는 것만으로, 상대측 패거리가 100명이어도 무섭지가 않을 것 같아졌다. 그런 폭력이었다.

 

 그때, 갑자기 호미가 휙휙 소리를 내며 날라와 아랑이 앞에 꽂혔다.

 

 던진 놈은 ‘발찌 똥싸개’.

 

 그걸 보고서야 사태가 점점 더 심각해짐을 깨달았다.

 

 그건 호미가 아니고, ‘낫’이었다. 날이 서슬 퍼렇게…는 아니고, 잔뜩 녹슬어서, 살짝이라도 베이면, 파상풍에 걸려 죽을 것 같은 그런 녹슨 낫.

 

 좀 전까지 저걸 호미로 본 내 눈을 파버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무슨 고등학생이 그냥 싸움하는데 낫까지 가지고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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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찌’가 아랑이 쪽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거리가 좁혀지면서 점점 걸음걸이가 이상하게 바뀌었다. 힙합 하는 애들처럼 건들건들, 아니 좀 더 흔들흔들한다고 해야 하나? 저걸 어디서 봤더라?

 

 긴 팔이 마치 무릎에라도 닿을 것처럼 축 늘어졌어도, 눈빛과 어깨는 언제라도 주먹을 뻗어낼 듯 긴장감을 타이트하게 잡고 있다. 낮춰진 무게중심에, 탄력 있는 허벅지와 까치발로 세워진 종아리 근육은 언제든지 튀어 올라, 주먹에 체중을 실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

 

 ‘위빙!!’

 

 그렇게 생각이 듦과 동시에, ‘발찌’가 주먹을 두 번 휙휙.

 

 퍼벅!

 

 한방처럼 보인 ‘원투’ 펀치에 아랑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얼굴로 주먹을 받았다. 뒤늦게 올라오는 손. 가드를 하려던 건지, 이미 치고 빠진 손을 잡아 보려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늦었다는 것.

 

 허공에서 헛돌고 있는 아랑의 두 손 사이로, 또다시 두 번 휙휙.

 

 퍼벅!

 

 두 방. 또다시 얼굴에 정확히 가격.

 

 아랑이 수비를 하려는 듯, 커다란 덩치를 웅크리며, 이번엔 얼굴과 몸통에 확실한 가드. 마치, 한 번 더 주먹이 날아오면, 그대로 웅크린 몸으로 부딪쳐 견디고, 잡아 ‘조져’버리겠다는 단호한 의지.

 

 그렇지만, 상대는 자신의 장단점을 잘 아는 듯했다. 자기들 편이 때리고 있는데도, 잔뜩 긴장한 채 구경만 하는 패거리를 향해 소리친다.

 

 “병신새끼들, 구경만 할 거야?!”

 

 떡볶이 집앞에서 쳐맞았던 '4번'놈이 정신을 차리고 갑자기 튀어나와, 아랑에게 온몸으로 태클을 건다. 하지만, 아랑이 무게중심을 낮춰 버티며, 그놈의 몸통을 두 손으로 눌러 잡아 멈춘다.

 

 그러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주 정확하게, 또다시 두 번 휙휙.

 

 퍽! 퍽!

 

 키 높이가 맞춰져서인지, 아랑의 안면을 가격하는 ‘발찌’의 주먹이 더 무거워졌다. 아랑의 얼굴이 점점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이 개새….” 이번엔 아랑이 욕을 하며 그를 쳐다보는데, 또다시 날라온 주먹에 말을 미처 끝마치지 못했다.

 

 아랑의 얼굴에 정확히 스트레이트 한방. 190센티의 키가 170은 되는 듯 낮춰졌다. 휘청한다. 겨우 힘을 끌어모아, 허리춤에 매달려있는 '4번'놈을 옆으로 밀쳐 치운다.

 

 아랑이 지면, 나도 온전할 수 없을 터인데, 내 걱정보다는, 아랑이 지는 모습이 보고 싶지 않았다.

 

 내 친구지만, 그전에 약간은 우러러보게 되는 그였다. 폭력이 다인 양 우르르 몰려다니며 시비 거는 애들도 피해 가는 체격, 성적이 다인 양 학생들을 내려다보는 선생 같지 않은 선생들도 잔소리하지 못하게 만드는 두뇌, 졸부 부모만 믿고 까부는 이도 저도 아닌 무리를 상회하는 부와 외모. 성장하는 또래 중에서 가장 완벽에 가까운 모습. 그런 그가, 이런 동네 잡배 무리 따위에게, 저런 ‘똥싸개’ 따위에게 처참히 지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이 개X끼들아!”

 

 내가 또 선을 넘고 뛰어들었다. 뛰어 들어가서, 바닥에 꽂힌, 호미…, 아니 녹슨 낫을 뽑아 들고 마주 섰다. 시선은 가장 위험해 보이는 그놈을 향한 채로.

 

 그때, 낫의 손잡이 부분이 덜렁덜렁하더니 낫의 손잡이에서 낫의 칼날 부분 쑥하고 빠져 땅에 떨어졌다.

 

 “푸하하하하.” 누구랄 것도 없이 패거리 모두가 파안대소했다.

 

 “그래도 무기까지 들었었으니, 뒤져도 정당방위네.” 뒤에서 구경하던 수미라는 애가 말했다.

 

 ‘젠장….’

 

 더는 방법이 없었다. 아무말이나 뱉어보자. 확신은 없었지만, 거의 그럴 것이라고 믿으면서.

 

 “너, 정훈이지?” 아무런 답이 없었지만, 동요한 눈빛. 내가 말을 이었다.

 

 “맞지? 후드 쓰고 마스크 해도 알아볼 수 있어. 신갈 초등학교 육상부.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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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화. 아랑 v. 정훈

 

 패거리들 눈빛이 동요한다. 모두 정훈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대장님께서 아시는 놈들입니까?’ 같은 바보 같은 표정.

 

 “너 나 알아? 아까부터 뭔 개소리야!” 정훈이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 후드를 젖히자, 뒤로 질끈 동여맨 단발에 가까운 머리가 드러났다. 하지만 여전히 마스크는 벗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커피숍 CCTV에 찍혔던 그의 모습을.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오정훈이였어. 6학년 때, 소각장 뒤편에서 나와 싸웠던 그 녀석.’

 

 “나, 희준이야. 기억 안 나? 초등학교 6학년 때?”

 “...?”

 “내 동생, 희주. 이란성 쌍둥이 여동생. 소각장에서.”

 “...!!!”

 

 아까와 달리, 이제는 확연히 알아본다는 듯한 모습. 그리고, 점점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 그가 말을 더듬으며, 나를 가리켰다. 좀 전의 패기 가득 찬 모습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었다.

 

 “....너…너, 그…”

 “그래. 그때 봤지 우리…. 그리고 며칠 전에도 여기 근처 고속도로에서도.”

 

 하지만, 내 말은 듣지 않고 이어지는 그의 나지막한 독백.

 “...그, 그… 마녀…”

 

 이 녀석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눈빛은 자신이 어릴 적 봤던 희주의 모습을 정확히 그려내고 있었다. 이질적인 기운, 그리고 은은히 반짝이는 그 머리카락 색, 눈빛, 그 모든 것을 마치 지금 다시 보고 있듯 그려내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퍽!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아랑이 어느새 옆으로 치워둔 4번을 발로 내리밟는 소리가 들려 왔다.

 

 “오~, 땡큐 희준. 덕분에 숨 좀 돌렸어~. 4명째 눕혀 드렸고~.” 여전히 눈은 충혈되었고, 얼굴은 좀 부었지만, 그가 다시 여유로운 목소리로 내 옆에 섰다. 그리고 말했다.

 

 “너 아는 새끼야?”

 “아니…. 어릴 때 나하고 싸운….”

 “아~주 나쁜 새끼네. 어릴 때 때린 놈을 또 때리려고 하고, 거기다 낫도 들고 다니고. 듣자 하니 저 새끼가 너희 집에 똥도 싼 그 새끼라는 거지?”

 “...어? 으, 응. 그런 거 같아….”

 

 “땍! 근데 뭘 정당방위야, 이 미친것아.” 아랑이 ‘정당방위’ 운운하던 수미를 향해 대뜸 소리쳤다. 그리고 다시 차분히 말을 이었다.

 

 “우리 삼촌이 체육관을 하시잖냐. 근데 그게 무슨 체육관인지 알어?”

 “...아니? 헬스장? 웨이트?”

 

 정훈은 희주 생각에 정신이 팔린 상태 같았다.

 

 “아니, 복싱 체육관이야. 저 새끼, 마스크 좀 벗겨 버려야겠다. 답답하네, 복싱하는 새끼가 마스크 따위를 끼고. 큭”

 

 “야! 똥싸개! 아까 스트레이트는 좀 아팠다. 저 쓰러진 놈이 다리를 잡고 있어서 못 피했네. 뭐 겨우 그 정도가 너희들 작전이겠지만 말이야.” 아랑이 정훈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으음?. 그 전 주먹들도 못 피했던 것 같던데….” 내가 혼잣말처럼 나지막이 속삭였다.

 

 “아이씨, 그 건 솜 주먹이고… 그건 제대로 된 주먹으로 안 쳐야지 새끼야.” 아랑이 나를 보고 대꾸했다. 그리곤, 다시 정훈을 쳐다보며 말했다.

 

 “각 잡아라, 형 준비됐다.”

 

 그렇게 2라운드 시작.

 

 분명한 건, 패거리들도 이미 4명이나 쓰러져 일어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여유로워 뵈는 아랑에게 쉽게 덤빌 생각은 더는 못한다는 것이었다. 아직 생각이 복잡해 보이는 정훈도 아랑이 성큼성큼 다가오자 다시 자세를 고쳐 잡으며 뒤로 위빙 하듯 자세를 취했다. 운동하는 애여서 그런지 금세 집중력을 발휘하며 눈빛이 전투적으로 빛났다.

 

 뒤로 물러서며 가볍게 잽을 한번 아랑 얼굴 쪽으로 휙.

 

 아랑이 처음에 동요가 없자, 다시 한번 허공에 잽을 휙.

 

 그리고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아랑이 다가오자 사정권 내 들어왔다는 듯이, 금세 허릴 숙여 긴 리치를 이용해서 주먹을 훅! 퍽!

 

 하지만, 아랑이 맷집으로 버티고, 상대의 몸통이든 팔이든 잡아챌 것처럼 더 다가오자, 정훈은 좀 더 빠르게 뒤로 통통 스텝을 밟으며 거리를 벌리고.

 

 또다시, 훅훅! 퍽! 퍽!

 

 정훈의 후드티 앞주머니에 아랑의 손이 닿았다가 아쉽게 놓쳤다. 아랑이 눈인지 코에서 흐르는 피를 소매로 스윽 닦으며, “아 원숭이 같은 새끼 팔 존나 기네” 하더니, 다시 거침없이 돌진.

 

 정훈은 그런 부류도 여러 번 봤다는 듯, 허점투성이인 체로 돌진해오는 아랑을 오른쪽 옆으로 스텝을 밟아서 휙 하고 피하더니, 텅 빈 몸통, 왼쪽 옆구리에 바디 블로우를 강하게 날리고, 그 충격에 아랑의 얼굴 쪽 상체만 가리던 가드가 살짝 내려오자, 그 틈에 보이는 아랑의 왼쪽 관자놀이에 또다시 스트레이트를 연속으로 퍽!!

 

 보는 이도 무기력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아랑은 쉬지도 않고, 다시 돌진했다. 그도 속도는 지지 않는다는 듯이, 이번엔 대놓고 앞발을 크게 내질러 구심 축을 만들고 쑤욱 낮은 자세로 들어갔다. 정훈이 반대로 이번엔 왼쪽으로 스텝을 밟아서 휙 하고 피하니, 아랑의 허리가 꺾이면서, 중심이 휘청.

 

 그때 또다시 가드가 텅 빈 옆구리를 향해, 이번엔 아랑의 오른쪽에 정훈이 왼손으로 블로우를 훅! 퍽!

 

 그리고 이번엔 연속으로 때리지 않고, 조심스레 바로 뒤로 백 대시. 혹시나 유사한 공격에 다리라도 잡힐까 자연스레 신경 쓰는 프로.

 

 정훈인 프로 아웃복서 같았다.

 

 하지만, 아랑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웃으며 묻는다. “새끼. 한 대 더 칠 틈을 줬는데, 빠지네?”

 

 ‘무슨 소리지? 한대도 못 때리고 졸라 처맞기만 하더니, 혹시 허세를 부리며 이어지는 심리전?’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그렇게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그 둘만의 다이내믹이 있었다. 바로 옆에서 봐도 알 수 없는, 오로지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호흡의 간극. 마치 격겜러(“격투 게임 lover”)들이 느끼는 비트, 흐름, 그리고 기세의 이동에서처럼, 동일한 패턴으로 이뤄진 연속기 사이에, 단 1프레임(1/60초) 차이를 알아채고, 찔러 넣을 수 있는 공격.

 

 “자아, 간다~앗.” 대놓고 이렇게 말하고는 또다시 후욱 몸을 낮춰 돌진하는 아랑.

 

 무릎으로 찍거나 위에서 누르기엔 아랑의 체구가 너무 크다, 그리고 빠르다!

 어쩔 수 없이, 옆으로 퀵스텝을 밟으며, 허리를 쑤욱 돌려 아랑을 피하고는 때릴 곳을 찾는 정훈.

 

 그때, 갑자기 한 번 더 몸체를 급격히 낮추는 아랑. 무게중심이 급격히 낮아져서 마치, 땅에 주저앉은 듯 보이기까지 했다. 훅훅!

 

 190cm의 덩치가 130cm도 안 되게 웅크려져, 정훈의 주먹은 뻗는다 한들 기껏해야 잔뜩 웅크려진 두툼한 어깨나 등에만 각도가 나왔다.

 

 아직도 몸을 틀어 회피 이동하면서 주먹을 날리지 못하고 아랑의 웅크린 몸을 바라보는 정훈.

 그런 정훈을 향해, 괴이한 뒤틀림과 함께 강력한 도약을 뒤받침 삼아, 손을 내지르는 아랑.

 마치 물리 법칙을 어기듯, 불과 1초도 안 되는 순간에 뻗어 나온 아랑의 길고 두꺼운 손끝이, 정훈의 얼굴을 향해 주욱 늘어났다.

 

 정훈이 타격점을 충분히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점점 길게 늘어져 다가오는 아랑의 손.

 

 그것을 피하려 고개를 돌리자, 바로 그때 아랑의 오른손 끝이 정훈의 머리를 잡았다. 단정히도 묶여있던 정훈의 뒷머리 채를!

 

 “이 장발충! 잡았다! 하하하!!!”

 

 그리고는 이어 말했다.

 

 “어디 운동하는 새끼가 머리를 쳐 기르고 지랄이야.”

 

 그리고는 꺾여진 목으로 놀란 정훈의 눈을 향해, 아니 얼굴을 향해 큰 주먹을 찍어 내렸다. 마치 손에 돌멩이라도 쥐고 있는 듯, 이질적으로 커다란 주먹을 말이다.

 

 퍼벅!!

 

 그 주먹에 정훈이 입을 가리던 마스크가 벗겨져 내렸다. 그리고 피떡이 된 정훈의 얼굴이 드러났다.

 

 “꺄약!~~~” 수미가 소리쳤다.

 

 ---

 

 수미의 소리 때문인지, 근처에서 우리를 찾아 고가다리 아래로 오고 있던 영진, 재곤 그리고 현주가 우리 이름을 부르며 뛰어 왔다. 나중에 들으니, 현주가 지난주부터 이어진 수미의 협박이 생각나서, 이쪽으로 오게 되었다고 했다. 우리가 이미 '파터'까지 뛰어간 줄 알았기에 별생각 없이 걸어가다가, 너무 빨리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 이상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들려본다는 것이, 이제야 뒤늦게 오게 되었다고 말이다.

 

 “아랑아!” 현주 눈에는 널브러져 있는 상대편 5명은 들어오지도 않았던 것 같았다. 아랑의 얼굴과 셔츠에 범벅이 되어버린 핏자국을 보며, 눈시울을 붉히며, 몸을 떨었다.

 

 “야, 내가 이겼어. 그렇게 쳐다보면 내가 진 거 같잖아 큭큭큭.” 아랑이 웃으며 현주를 한번 보고는, 나를 쳐다봤다.

 

 “으, 응. 현주야, 얘가 혼자 이런 거야….” 내가 답하고는 패거리 쪽 애들을 쳐다봤다.

 

 그들은 아직도 거의 10명이나 되는 인원이 멀쩡히 서 있었지만, 이미 전의를 상실했다. 우리 쪽 인원이 충원된 것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정훈이나, '4번'놈 그리고 처음부터 쓰러진 승현이 등 5명이나 아예 움직일 기운도 없이 피떡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말이다.

 

 2주 전 학교 앞에서 아랑이에게 처음 얼굴을 맞았던 준후라는 녀석이 조금씩 다가오더니 가까이에 쓰러진 놈 한 명을 끌어 붙잡았다. 그리고는 자연스레 나머지 패거리들에게, “야 빨리 부축해”라고 하더니 수습하기 시작했다.

 

 “너는 괜찮아?” 영진이 나에게 물었다.

 “응…. 나야 뭐….” 나는 주먹 한번 뻗지 않고 구경만 한 셈이라, 괜스레 미안한 듯 대답했다. 그러자 아랑이 장난스레 말을 던졌다.

 

 “희준이가, 이 새끼 이거 똥 싸는 거 알아내서, 내가 호흡을 좀 가다듬을 수 있었지. 희준이 아주 대단했어! 크하하핫.”

 “큭큭큭.” 나도 ‘이놈이 괜찮아 보이니, 그거면 됐다’라는 생각에 그제야 여유를 차리고, 같이 웃었다.

 

 ‘내가 부족했던 게 뭐 대수랴.’

 

 쓰러져 업혀 가는 정훈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발목에 채워진 발찌도.

 

 ---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도, 아랑이는 '파터'에서 버거를 꼭 먹어야겠다고 했다. 5명이 앉아서 중간고사 얘기는 온데간데없고, 싸움에 대한 무용담 얘기로 오후를 채웠다. 내일 중간고사 이틀째가 아니었다면 아마 우리들의 수다는 저녁까지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웃으며 가게를 나와서 다들 헤어졌다. 집까지 걸어오면서 이런 재미있는(?) 시간에 희주가 함께 없었다는 게 아쉬웠지만 우선은 집에 가서 씻고, 다시 내일 시험을 위해 준비를 해야 했다.

 

 희주는 그날도 늦게 들어왔다.

 중간고사 시험 얘기 말고도, 영양사 선생님께 들은 얘기부터, 우리 집 앞에 똥 싸고 간 놈, 그리고 중간고사 첫날부터 싸운 얘기까지 너무나 할 얘기가 많았지만 희주는 방문을 닫고 말이 없었다.

 

 ----

 

 젊은 사람들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 어제 일은 어제 일이고, 이미 감정의 저편으로 흘려보낸 채, 깊은 잠을 자고, 그렇게 평소와 같은 수요일 오전을 맞았다.

 

 중간고사 둘째 날은, 1교시 물리, 2교시 영어 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아랑은 반창고 몇 개만 붙이고는 일찍부터 나와서 자습을 하고 있었다.

 

 “너 괜찮냐?” 내가 물었다.

 “나야 뭐. 까짓거 오늘 확 일등 해버리지 뭐 크흐흐.”

 “넌 원래 일등이잖아? 재수 없는 새끼. 이건 뭐냐?” 아랑 손에 들려있는 버츠비 연고를 보았다.

 “아, 이거? 아침에 현주가 주던데?”

 “....”

 “그런 거 아니다. 자꾸 엮지 마라” 아랑이 내 눈빛에 걸려있는 장난기를 읽고는, 엄포라도 놓듯 말했다.

 “큭큭큭 아무 말도 안 했어 인마 쫄지마. 백두 장군 그러다 작아진다.”

 “어휴 이 쉐끼 이거~.” 아랑이 잡아먹을 듯 양손을 호랑이 발톱 세우듯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

 

 둘째 날 시험을 적당히 마치고, 삼삼오오 모여서들 급식실로 향하는데, 희주가 부산스레 움직이는 게 눈에 띄었다.

 

 마침 현주가 우리 쪽으로 걸어오기에 물었다.

 “희주, 어디 가냐?”

 “니네 남매 맞니? 아 맞구나, 네가 모르는 거 보니까” 현주가 우리 상황을 모른 채 장난하듯 말했다.

 “어디 가는데?” 내가 다시 물었다.

 “나한테 묻지 마. 적어도 ‘나’는 알려줄 수 없다.” 현주가 샐쭉하니 입을 내밀며 말했다.

 하지만 나에겐 그 말이면 충분했다. 대단히 비밀스러운 듯 말한 것으로, 충분했다.

 

 ---

 

 결국 점심도 안 먹고, 희주를 미행했다.

 여동생 뒤를 밟는다는 게 치졸하다는 생각이나, 시험 끝나고 얘기하자던 약속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영양쌤’의 설명까지 들었겠다, 이제는 진짜 내가 본 놈이 그놈이 맞는지, 내 이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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