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걸었다. 걷고 걷고 또 걸었다.
그의 몸은 마물들의 가죽으로 둘둘 싸여, 보이는 것이라곤 언뜻 보이는 형형한 검붉은 동공과 그 위 부시시한 머리칼뿐.
크르르릉-
오른쪽에서 들려온 짐승의 울음소리.
남자의 동공이 소리의 진원지로 돌아갔고 마주한 것은 코앞에서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수축하는 빨간 마물의 동공이었다. 그의 머리통에 정확히 내려꽂히는 발을 겨우 피한 남자의 귀 옆 머리칼 몇가닥이 팔랑이며 떨어진다.
모래바닥을 구른 남자는 최대한 감각을 잊으려 하며 마물이 떨어진 곳을 향해 다시 일어섰다. 역시나 마물은 이미 준비를 마치고 다시 그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씨발"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남자는 허리춤에서 꺼낸 쇠막대기로 자신을 물어뜯으려 돌진하는 아가리의 이빨 사이들에 끼워넣었다. 챙하고 이빨과 쇠막대가 부딪히는 소리와 물끓는듯한 마물의 울음소리가 귀를 채운다. 마물의 뜨거운 침이 남자의 손목에 뚝뚝 떨어졌다.
썅... 남자는 중얼였다.
검푸른 색의 동물 표범과 비슷한 형태를 한 마물이었다. 그 크기는 일반 표범보다는 훨씬 커보이지만.
남자의 팔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점점 밀려나는 몸. 곧 쓰러지는 것은 시간 문제다. 남자의 턱 아래로 식은땀이 흘러 떨어졌다. 남자는 필사적으로 생각을 하는듯 동공을 이리저리 굴렸다.
크아아아앙!!!
"씨,아"
마물의 힘이 그를 훅 밀어붙이는 순간.
남자는 그 힘에 맞춰 막대를 자신의 방향으로 확 끌어당겼다. 그 찰나 짐승의 머리가 아래쪽으로 깔리는 동시 남자는 짐승의 등에 올라타 허벅지춤에서 꺼낸 단도를 꽂아박는다.
그가 단검을 잡은순간 손잡이로부터 푸른 불꽃같은 것들이 튀었고 남자의 얼굴은 일그러진다. 하지만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문채 손아귀에 더 힘을 주었다. 소름끼치는 비명과 함께 마물의 몸이 튀어올랐고 남자는 단검을 한 개 더 뽑아들어 짐승의 몸에 박아 떨어지지않고 매달렸다. 마물의 피부에 단단히 박힌 단검으로부터의 푸른 빛이 점점 빠르게 소리내기 시작했다. 부싯돌이 불을 피어내듯 약했던 파직거림은 곧 폭발했다.
끼아아에에에아악-
마물의 몸을 감싸는 푸른 불꽃을 코앞에서 마주하며 남자는 손을 놓고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바닥에 가장 먼저 떨어진 왼쪽 어깨에 격통이 찌르르 울렸다. 신음을 내뱉듯 거친 숨을 들이마쉬었다.
마물의 몸에 피어나는 푸른 불꽃. 끔찍한 울음과 함께 이리저리 발광하며 튀어나가던 마물의 몸은 곧 바닥에 떨어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숨들을 내뱉던 남자는 왼쪽 어깨를 오른팔로 지탱한 후 비척비척 일어섰다. 아직까지도 활활 타오르고 있던 푸른 불꽃 속 단검을 마물의 시체에서부터 빼내며 숨을 컥 들이마쉬었다.
챙그랑.
일그러진 남자의 표정 위 식은땀들이 뚝뚝 떨어진다. 부들부들 떨리며, 탄 상처에서 붉은 피가 떨어지고 있는 손들을 주먹 쥐며 남자는 나머지 단검도 빼내었다.
두 단검을 빼내자마자 시체 위에서 활활 타오르던 불꽃은 훅 사그라들었고 남자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하-"
곧 남자는 몸을 끌듯이 마물의 시체에 다가가 망토 안쪽에서 또 다른, 낡아 변색되고 부식된 단검을 꺼내들었다.
주욱. 부욱. 하고 마물의 가죽이 갈라내는 소리가 울린다. 이리저리 살가죽을 잘라내던 그는 곧 손을 멈추었다.
마물의 배 가운데 빛나고 있는 엄지손톱만한 검은 돌 하나.
손바닥에 올려놓은 그 돌을 남자는 조용히 내려다보다, 입에 넣었다.
꿀꺽. 딱딱한 돌덩이가 목구멍을 타고 떨어진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붉은 하늘.
그녀는 자주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매일 쉬지도 않고 자신을 혹사시키며 사람들을 구하던 그녀.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들어 쳐먹지를 않는 여자.
또 근무일도 아닌데 출근했다는 익숙한 소식에 그녀를 찾아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발견한 종탑 꼭대기 위 그녀.
위험천만하게 난간에 앉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를 그는 조용히 뒤에서 바라보았다. 그녀의 공허한 표정에 화가 치밀어 당장 다가가고 싶다가도, 유일하게 지금이 그녀가 아무일도 안하고 있는 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바로 멈추어 섰었다.
검은 생머리가 바람에 휘날리고 그 사이 하얀 얼굴이 언뜻언뜻 보였다. 긴 속눈썹 아래 금색 눈동자는 푸른 하늘로 가득 차 있었다.
늘 생글생글 웃고 다니는 여자이기에 흔히 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조금은 권태로워 보이기도, 지루해보기도 한 표정. 그러나 날카롭고 형형한 눈동자는 누구도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고요했다.
비능력인인 자신조차 가끔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분위기에 멈칫하는데, 전사들은 어쩔까. 힘을 체감할 수 있는 그들은. 마치 광신도집단처럼 그녀를 숭배하는 그들의 심정도 이해를 못하겠지는 않을것 같기도 했다.
ㅡ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그녀의 저 고요한 세계에 침범하고 싶은 열망이 명치 깊숙한 곳에서부터 끓어 나왔다.
금방이라도 바람에 날아가 떨어질 것 같은 그녀를, 사라져버릴 것같은 그녀를 자신의 부름으로 이 지상에 꽁꽁 묶어버리고 싶었다. 그녀의 세계를 산산히 조각내고 바닥에 떨어뜨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평생 그러지 못했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그곳을 찾던 그녀와 그런 그녀를 보기 위해 종종 들르던 자신.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녀와 함께 했지만 그녀는 언제나 얇은 유리벽을 두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주위를 끊임없이 맴돌며 관심을 구걸한다. 그녀는 아는지 모르는지 웃으며 자신의 어깨를 친다. 그 누구보다도 그녀를 잘 안다고 자부할 수가 없다. 아주 어린 유년시절부터 함께했는데도. 자신의 일을 잘 말하지 않는 그녀는 늘 자신을 애타게 했다.
자신의 인생의 모든 이유와 목적들.
그것들 중 그 어느 하나 그녀를 생각하지 않고 결정한 것들이 없고 이런 자신을 그녀는 절대 모르고 신경조차 쓰지 않겠지만. 자신의 감정이 그녀에게 전해질 일은 절대 없을테지만-
그녀의 뒷모습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걸음을 뗐다.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녀의 휴식. 그것뿐이기에. 감히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로 그녀의 얼마되지도 않는 휴식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그래.
그는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의 세계에서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그는 그것이 그녀를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ㅡ그것이 그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곧 깨닫게되었지만.
"컥"
깊숙한 어금니에서부터 고통이 끓어올랐다. 목이 타들어간다.
"아...끅..."
손바다의 화상들이 검은 재가 되어 날아가고 깨끗한 피부가 들어났다.
남자의 흰 목에 붉은 현관들이 꿈틀대며 기어다닌다. 그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곤 거친 숨들을 몰아 내쉬었다. 거친 숨들 사이 벌어진 입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한층 더 자라 빛났다.
검붉던 동공에 새빨간 색채가 나타나고 둥글게 돌아 정착한다. 붉게 더 물든다. 이윽고 남자는 깊고 긴 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그는 사체쪽으로 걸어가 주저앉았다.
푸른 불꽃에 지져진 사체. 그는 마치 짐승처럼 그 사체에 송곳니를 찔러 넣었다. 익은 고기는 그에게 익숙한 맛이었다. 최대한 생각을 배제하고, 감정을 배제하고 씹는 것에 집중한다.
짐승과 다름없어가는 자신에 대한 고찰을 기피한다.
짐승의 붉은 피로 목을 충분히 적시고, 살점으로 배를 채운 그는 뒤쪽에서 들려오는 낮은 으르렁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또 다른 마물이 그를 경계하며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피 냄새에 예민한 망할 것들은 그를 한순간도 쉬지 못하게 한다.
"후..."
그는 비척비척 다시 일어섰다. 그가 마주하는 마물의 두 눈은 그의 눈과 똑같아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