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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기타
흘러내림(제4권) - 열매
작가 : 말레이
작품등록일 : 2020.8.20

이 소설 "흘러내림"은 언어의 시작 점인 창세 때부터 2040 여 년 대의 미래까지를 언어와 문자를 소재로 이어가는 소설로 하나님이 주신 사랑과 언어 등의 모든 것이 오늘 우리모두에게까지 흘러 내려왔으며 이 흘러내려옴은 막힐 수 있는 강과 내처럼 수평적 흐럼이 아니라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수직적인 흘러내림이고 그렇게 우리에게 주신 것 중의 귀한 우리의 문자(한글)와 언어(한국어)를 세계에 널리 알리며 그 배에 복된 소식도 나누어야 한다는 주제로서 제1권 - 뿌리, 제2권 - 나무, 제3권 - 가지, 제4권 - 광합성 중의 제4권이다.

 
파송과 사역 현장의 언어
작성일 : 20-08-30 19:10     조회 : 263     추천 : 0     분량 : 1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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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송과 사역 현장의 언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내가 믿음 안에서 내가 의도하거나 계획한 대로 되어 왔다고 생각을 하였는데 지나고 나서 보니 결과적으로 볼 때 나의 삶이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가족을 갑자기‘몰리샤(Molliyshya)’의 수도에 있는‘크룸(klum) 한인연합교회’의 부목으로 보내셨던 것이다. 어학에 대하여 그렇게도 자신이 없던 나 같은 촌놈을 하나님은 여지없이 언어의 첨단인 선교지의 현장 속에 던져 버리신 것이다.

  신학연구원을 마치고 1995년 12월 22일! 나는 서울 역 뒤의 청파동에 있는 청파중앙교회에서 목사 안수와 더불어 선교사 파송 감사예배를 드렸다. 서울노회의 임시 노회를 통하여 그날 나는 단독으로 목사 안수 및 선교사 파송을 받은 것이다.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찾아 주셨고 안수 위원 및 노회의 많은 목사님들이 오셔서 안수 및 파송 식을 통하여 축하와 격려를 해 주셨다.

 나는 그 동안 준비해 왔던 후보생 시절의 모든 준비가 결실을 보는 날이었기에 나의 기쁨은 말 할 수가 없었다. 비록 '몰리샤'의 수도에 있는‘한인교회’의 부목으로 가는 것이지만 이번 기회에‘몰리샤’의 문화를 익히고 언어도 익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에 가슴에 사명감이 가득 차올랐다. 드디어 목사안수와 더불어 선교사 파송장을 받아들고 나는‘몰리샤’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말이 전세금이었지 당시에 가장 최소의 전세금 이라고 할 수 있는 1,000만원을 찾아들고서는 친구에게 대학원 입학금을 내기 위하여 빌렸던 200만원 갚고 또 이가 좋지 않아서 신경치료를 한 이후에 이를 덮어씌우는 등 이런 저런 준비를 하니 손에는 달랑 300만원이 남아 있었다. 김포공항에서‘몰리샤’의 돈으로 환전을 하니 돈의 외형적인 분량은 그야말로 10분의 1로 줄어들었었다. 당시에‘몰리샤’의 돈 대 한국 돈에 대한 환율의 비율이 300대 1 정도였고 더구나‘몰리샤’에 한국 돈으로 30만원에 해당하는 금액의 지폐가 있었으니‘몰리샤’의 돈으로 환전하기 위해 한국 돈으로는 두툼한 만 원짜리 100장 인 세 다발인데 현지 돈의 30만에 해당하는 지폐로 10장을 받아 들었으니 당연히 그 줄어든 지폐의 분량에 허전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여러모로 부족한 상태에서‘몰리샤’의 수도에 있는‘한인연합교회’의 부목으로 부름을 받아서 가게 되었는데 적지만 부목으로서의 사례비를 받기도 할 것이고 또 갑자기 가게 되어 후원을 받을 만한 준비나 받을 곳도 없었기 때문에 파송선교사로서의 후원은 전혀 없이 가서 적은 사례비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교회의 행정중심의 역할을 담당하여 크고 작은 일들을 감당하면서 그리고 사람과 사람 속에서의 여러 가지 다양한 일들을 겪으면서 늦게나마 조금씩 더 성장을 하여갔고 더불어서 한인 주부들을 대상으로 한 합창단을 조직하여 주부합창단을 창단 하여 공연을 하는 데는 교회음악 전공을 배경으로 한 오랜 세월의 성가대 지휘가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러는 중에‘몰리샤’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렇게 2년여의 시간이 지나면서 그 때부터 하나님이 주시는 새 비전을 바라보면서 기도하기를

 

 “하나님!

 저에게도 단독사역의 기회를 주신다면

 그 사역을 감당하겠습니다!”

 

 라고 기도를 하였다.

  내가 어떤 일에 자신감이 있어서 알아서 하려고 할 때에는 하나님이 기다려 주셨지만 그것이 무위로 끝나거나 턱없어서 버거워 할 때는 하나님께서 바로 역사를 하여주시되 모든 것은 때에 맞게 하여 주셨다. 그리고 단독 사역의 문제도 마찬가지였고 하나님은 그 기도에 바로 응답을 하여 주셔서‘몰리샤’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인‘타우‘로 보내어 주셨다.

  그렇게 수도에서 2년여를 보낸 후에 그 교회에서 부교역자의 생활비를 받던 비용을 지원 받으면서‘몰리샤’의 지방에 있는‘타우’로 재 파송을 받아 갔었고 그곳에서 단독 사역을 시작하게 되면서 3년여 동안 작은 한인교회의 목회사역과 아직 언어도 제대로 여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현지 신학교에서 교회음악을 가르치게 하셨고 그러는 과정에서 현지 언어를 한마디씩 익혀가며 서서히 성장해 가도록 해 주셨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말 많은 일들을 겪었으며 그를 통하여 훈련과 연단을 받는 기간이 되어 비로소 인생과 사역의 어떠한 일들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자라갔다.

  그러다가 다시‘소로’주의 수도인‘코키’시로 옮기도록 하셔서 이곳에서 ‘소로‘주 전체를 바라보면서 이 나라를 향하여 맡겨주신 역할을 실행 할 수 있도록 해 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사역을 감당 할 수 있는 재정적 후원이 가장 큰 어려움 이었다. 현지교회의 일부 공간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던‘타우한인교회’에서 다시‘코키’로 이전하여 예배를 드리는 10여 명 정도의‘소로한인교회’목회는 교회 그 자체를 유지하는 것이나마 다행 이었고 현지에서 생활하는 생활비는 턱 없이 부족한 상황이었지만 한해 한해를 그냥 버티고 견디면서 보내었다.

 그런데 그나마 그렇게 재 파송을 해주었던‘한인연합교회’에서 내부적으로 문제와 갈등이 생기게 되자 교회의 선교부장님으로 부터 연락이 오기를 이제 파송 비를 더 이상 보내 줄 수 없으니 알아서 대책을 세우라는 것이다. 단독 파송을 받아서 그 교회에서의 지원이 유일하던 입장에서 인간적으로 그 소리는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절망감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파송에 대한 무책임한 현실을 보면서 교회가 세상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를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절망감 속에서 그러한 상황을 당연히도 내가 속해 있는 총회의 선교부에 긴급 보고를 하고 대책을 강구해 주시기를 의뢰 하였지만 선교부에서는 기다리라는 말만 메아리처럼 연이어 들려 올 뿐이었고 이제 오직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일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몰리샤’에서의 사역은 과연 어떤 사역이어야 하는가? 에 대한 사역의 방향성에 대하여 고민을 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그렇게 기도를 하면서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몰리샤’에서의 핵심 사역은 역시 교육사역이 가장 효과적이고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당장에 생활자체도 위기에 처한 상태에서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 교육 사역을 한다는 것은 정말 꿈만 같은 일이지 않을 수가 없었지만 다만 한 가지 유익이 있었다면 그것은 사역에 대한 분명한 방향성과 비전을 같게 되었다는 것 하나가 긍정적인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기도를 하면서 주어진 상황을 극복하고자 할 즈음에 소속된 노회에서 연락이 왔다. 노회에서 선교부장을 맡으신 목사님이 선교대학원에서 선교학을 공부하시면서 논문에서 대부분의 선교사가 사역비로 인하여 사역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노회의 모든 교회가 노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들 중에서 후원비의 많고 적음을 떠나 각 교회의 역량 안에서 후원할 선교사를 지명하고 그 선교사의 후원회를 조직하여 앞으로 매월마다 꾸준히 지원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논문을 쓰시고 그 내용을 노회에 상정하여 우리노회에서부터 이 일을 실행하자고 제안을 하였다. 그에 노회의 회원들이 적극 찬성하면서 가결이 되어 선교사들에게 그러한 사실을 연락을 하면서 이번 노회에 참석을 하여 후원회를 구성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게 그러한 사실을 알리면서 선교사의 뜻에 따라 할 터이니 어떠냐며 나의 의견을 물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그동안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하심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큰 기대감을 가지고 노회의 요청대로 급히 귀국하여 노회에 참석을 하였다. 그러나 알고 보니 상황은 전혀 엉뚱한 상태에 있었다.

 1987년에 신학 연구원에 진학하여 한 학기를 공부하다가 군 입대를 하고 1991년 2월에 전역을 하여 2학기에 복학을 할 때까지 학비라도 마련할 생각에 제약회사에 들어가서 약국을 대상으로 한 세일즈맨을 하다가 2학기에 신학연구원에 복학을 하여 공부를 재개 하였던 터라 함께 공부를 하던 동기생들에게서 조차도 이미 나는 잊혀진 존재였고 새로 만난 동문들은 짧은 시간으로 인하여 아직 낮선 사람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졸업 후 바로 선교사로 파송 받아서 나오게 됨으로 인하여 함께 자주 만나지 못하게 되자 노회 내에서 선교사를 지원하기 위하여 지원할 선교사를 지명하라고 하였을 때에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자신들이 잘 알고 있는 다른 선교사들을 지명한 상태였고 나를 지명한 분은 나를 기억하고 있던 목사님 한분과 선교사들을 잘 모르는 개척교회의 어떤 목사님 한 분이 나를 지원하겠다고 나선 전부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다행인 것인지 노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후원회를 구성해 달라고 요청하며 노회에 참여한 선교사가 나 혼자뿐이었다. 그렇게 되자 노회의 임원이신 목사님들이 이러한 상황을 노회의 회원들에게 설명을 하면서 다른 선교사를 지원하겠다고 지명한 목사님들에게 지금 여기가 더 급한 상황이니 이쪽을 지원하라고 권면을 하면서 십여 분의 후원 목사님들을 주선해 주셨고 그분들이 모여서 긴급 후원회를 구성하여 우선 급한 대로 감사하게도 매월 60만원을 지원하는 후원회가 생기게 되었다. 이것은 한 교회에서 단독으로 후원을 하던 후원비의 절반 정도의 금액에 불과하였지만 나는 그나마 사역의 맥을 이을 수 있게 되었다는 측면에서는 얼마나 다행이요 감사한 일 이었던지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휴! 하고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한다.

 그렇게 사역을 이어갈 수 있게 되면서‘몰리샤’에서의 사역의 가치와 결실을 맺을 수 있는 방향성을 평가하여 두었던 것을 실제로 실행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여전히 어떻게 꼼짝 달싹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그 기회와 방법이 전혀 보이지를 않았다. 그래서 그저 여전히 10여명의 한인교회 목회와 더불어 겨우 존립을 유지해 가고 있는 현지의 신학교에 가서 무급으로 교회음악을 강의해 주는 역할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얼마 전에 조성된 후원회에서 현지를 방문하겠다고 오셔서 한국의 지형으로 비유하여 본다면 제주도의 서귀포에 해당하는 곳에서 사역을 하기 보다는 제주시로 옮겨서 제주도 전체를 바라보면서 사역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사역지에 대하여 조정 할 것을 권유하여 주셔서 그에 동감을 하면서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왜냐하면 사역을 하고 있는 곳이 한국의 제주도처럼 그 나라의 끝에 있는 섬 중에서도 최 끝단에 있던 곳으로서 사역에 여러 가지의 제약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제주도의 서귀포 같은‘타우’에서 제주시와 같은 곳인‘코키’로 사역지를 변경하는 좋겠다고 후원회에서 말씀을 해 주셨다. 그렇지 않아도 내심 그렇게 하고는 싶었으나 여러 가지 사정상 쉽지 않아서 망설이고 있던 차에 그 권면을 통하여 전격적으로‘코키’로 사역지를 옮겼는데 그에 대하여 필요한 비용들을 후원회에서 어느 정도 지원을 해 주었기 때문에 이동을 할 수 있었으니 사역을 위해서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코키’시로 이전을 하였으나 여전히 현지 침례교회의 예배 공간을 무상으로 빌려 한인 예배를 드리다 보니 12시 30분에 예배를 드려야 하는 한계점이 있었다. 그래서 다시 2년여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독립 공간을 마련하려 하였으나 자체적으로는 어려운 상황임으로 한국교회에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지원을 요청 드린 목사님은 연세는 많으시나 함께 연구원에서 공부를 하였던 동기 분으로서 어느 교회의 장로님으로 계시다가 늦게 신학을 하였고 교회도 잘 성장하였으며 또한 기도원을 운영하면서 교단 선교를 주도하시는 분으로서 현지의 사정을 설명 드렸더니 2년간을 지원해 줄 터이니 자립하라고 하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지원을 받아 시내의 상가를 임대하게 되었고 예배 시간도 비로소 주일 오전 10시로 조정을 하여 독립적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내가 이 땅에 태어나서 별별 일들을 통하여 연단과 훈련을 받도록 하신 하나님의 훈련은 이로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바로 이곳이 진짜로 훈련의 본 과정이었음은 그러고도 4~5년이나 후에나 알게 되었다. 이곳에서 목회자로서 그리고 선교사로서와 NGO의 지부장으로서 실무현장의 다양한 실습과 훈련이 있었던 것이다. 아이러니 한 것은 그 중의 하나가 비슷한 일을 하는 다른 사역자와의 작은 경쟁과 충돌을 통한 연단과 훈련이 그 절정이었음은 그 얼마를 지난 후에나 알 수 있었다.

  분야는 조금 달랐지만 이미 교육대학원에서 교육학을 공부하며 교육의 중요성을 체감하였던 나는 이 땅에서 태어난 한국의 아이들이나 현지에서 오래 생활하는 학생들이 한국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서 또, 나의 두 아이가 두 살과 네 달 되던 시점에 이곳에 와서 그 날부터 집안에서는 오직 한국어만을 사용하도록 하여 왔지만 역시 한국어에 대한 진한 아쉬움을 느끼는 처지였었다. 그러니 다른 가정들은 오직 더 하겠는가?를 생각하니 아이들에게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이곳에서도 한글학교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한글학교를 운영하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을 이겨냈던 것은 고집과 인내의 결과이었지만 이것을 못 견뎌하거나 이견이 있는 교사들 중에는 이 일이 지속되는 동안에 떨어져 나가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그 고집과 인내가 없었다면 결국 학교는 지금까지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해외라고 하는 곳의 환경이 그렇게 어렵고 힘든 조건과 상황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동안 많은 교사와 자원봉사자들의 수고와 땀이 뭉쳐진 열매이기에 이 일에 참여하였던 모든 교사들에게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지금까지 더 인내하고 함께 왔었더라면 하는 아쉬운 마음만이 내 마음 한 구석에 자를 잡고 남아있다.

  그리고 이어서 현지인의 한국어 교육과 한국인들의 말레이어 교육을 위하여‘한국문화센터’를 만들고 그 인원수에 상관없이 지금까지 한국어를 가르쳐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본연의 임무를 위하여 여러 가지로 사역이 어려운 이곳에서 한국의 NGO인 한 기구에서 훈련을 받고 이 기구가 현지에 들어오기를 희망하였으나 이 기구는 긴급 구호가 필요한 지역이나 여러모로 대단히 어려운 지역이나 나라에 가서 돕는 거지‘몰리샤’처럼 경제규모가 일정수준 이상인 나라는 안 들어간다는 소식에 그만 절망의 마음이 들었으나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몰리샤’에 NGO 기구를 세워 함께 타국을 도울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계획에 한국의 기구가 움직였고‘몰리샤’에 지부를 허락하였지만 처음에 지부는 외형적 이름뿐이고 기구에 대한 실제적인 상황을 보면 아무런 지원이 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책임자 되신 분이 현장을 방문하고 평가하여 달라는 요청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그 해 10월경에 방문을 하겠다는 연락이 왔지만 책임자 되신 분이 바쁘신 관계로 연말이 지나도록 현장방문의 계획은 이루어지지를 않았다. 아무리 요청을 하여도 현지의 상황과 본부의 상황은 달랐다. 그래도 방문을 강하게 요청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그때의 그 안타까움과 아쉬움의 심정으로 오래전에 학교에서 공부할 때 배웠던 형편없는 작시의 실력으로 다음과 같은 시 한 수에 마음을 담아 본부에 보내면서 나의 뜻이 전달되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를 하였다.

 

  임은 아는가?

 

 임은 아는가?

 목마름의 이 갈증을

 

 임은 아는가?

 기다림에 지친 이 마음을

 

 임은 아는가?

 저들의 갈망을

 

 임은 아는가?

 저들의 원성을

 

 임은 아는가?

 저들을 사랑함을

 

 임은 오시는가?

 언제나 오시는가?

 

  이 시를 메일로 받았던 담당간사가 이번에‘몰리샤’에 가지 않으시면 안 되실 것 같다고 강조해 드린 결과 결국은 책임자가 현지에 오시게 되었고 현장을 방문하여 살펴보는 과정에서 수많은 불법체류 자들의 아이들이 공부를 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시고 안타깝게 여기시며 학교를 건축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시고 직접 학교를 건축할 기금을 모금하여 주셨고 그것을 토대로 하여‘몰리샤’에서 기구 사역에 대한 꽃을 피울 수 있게 되었다.

  처음으로 진행이 된 사역은 소망학교건축 프로젝트 이었다. 대표이신 회장님이 건축비를 보내주신 것은 알고 보니 회장님의 형님께서 같은 교회의 안수집사님으로 장군으로 군대에서 근무를 하다 전역한지 몇 개월 만에 병원에서 암 3개월의 선고를 받았는데 그때 재산을 정리하여 그중의 일부를 ‘하늘나라 유산 쌓기’라는 운동에 동참하여‘몰리샤’의 소망학교를 건축하는데 건축기금으로 기부를 해 주셨다. 그리고 기부하는 날 안수집사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렇게 하여 도착한 건축 기금 3,000만원으로 건물 설계를 하고자 하니 현지의 설계사가 감사하게도 그런 일이라면 무료로 설계를 해 주겠다며 설계 재능을 기부를 해 주었다. 그렇게 하여 나온 설계도로 몇몇 건축업자에게 건축을 의뢰하고 비용을 문의 하니 대부분 1억에서 1억 오천만원 사이의 금액이 들어간다는 견적서를 주었다. 현금이 3,000만원 밖에 없는데 그 3~5배의 건축비가 나오는 일은 도저히 할 수가 없는 일 이었다. 그래서 현지의 동역자인 목사님의 교인 중에서 건축을 하시는 분에게 이런 목적으로 하늘 일이니 저렴하게 해 달라고 요청을 하니 정말 자신의 이득금을 대폭 줄인 견적으로 8,000만원이 나왔다. 그러나 아직도 확보된 건축자금의 두 세배가 되는 이 금액으로도 건축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목수들을 고용하고 자재를 사다가 학교를 직접 건축을 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건축을 시작하여 학교가 완성되는 과정 중에는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점은 건축 비용이 부족하다는 문제였다. 생각해보면 당시 3,000만원은 내 생애에 있어서 내가 현금으로 만져보는 최고의 금액이었다. 그래서 뿌듯하고 또 자심감도 생겨 그 금액을 가지고 마치 무엇이라도 어떤 어렵고 큰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같이 생각 되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실제로는 건축에 턱 없이 부족한 그 비용으로 건축 자재를 직접 구입하여 공급을 하면서 한 푼이라도 아끼면서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전에 살던‘타우’에서 합판 공장을 크게 하던 한인 사업체에 합판을 만들다가 약간 문제가 생겨 수출을 할 수 없는 합판을 저렴하게 공급해 달라는 공문을 보냈더니 필요한 전량을 무상으로 제공해 주어서 큰 도움을 입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는 직접 자재상을 전전하며 자재를 저렴하게 공급해 주겠다는 자재상을 찾았다. 그리고 그렇게 약속을 한 자재상에 처음에는 주문한 자재들에 대하여 현금을 꼬박꼬박 지불하였다. 그러다가 건축의 현장에 바쁜 일이 있어서 직접 자재를 구입하러 갈 수 없게 되었을 때에는 많지 않은 양을 주문하면서 직원을 보낼 테니 자재를 보내주면 내일 가서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하여 자재를 받았고 그러면 약속한 대로 다음날 바로 가서 비용을 지불해 주고는 하였다. 중국인 자재상들의 특성상 현금이 아니면 절대로 물건을 내주지 않았지만 그렇게 점차 신용이 쌓이면서 후에는 자재를 주문하면서 나중에 자재 값을 지불해 줄 터이니 건축 자재를 보내달라고 하여 외상으로 자재를 가져다 사용하기를 시작하였다.

  그렇게 하여 건축을 마치고 나니 약 2,000여 만 원의 외상값이 남아 있었다. 학교는 건축을 마쳤는데 외상값을 속히 갚지 않으면 그것도 문제가 되어 자칫 사기꾼으로 전락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그렇다고 그 어디에서고 부족한 건축비를 보전해 줄 곳은 없어 보였다. 그래서 자체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 해야만 하였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 한국본부가 시작을 할 때 일본 본부에서 자금을 받아서 처음 시작을 하였던 것처럼‘몰리샤’의 본부를 만들어 모금사업을 시작하려면 재활용 가계를 내어서 현지인들에게 시범을 보여야 할 필요성이 있기에 현지에 재활가계의 지점을 낼 테니 허락해 달라고 요청을 하였다. 그러나 본부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라고 연거푸 거절을 해 왔지만 나는 현지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라고 강변을 하여 거듭 요청한 결과 결국은 본부의 허락을 얻어 내었다. 그리고 현지의 동역자이며 사업가인 장로님으로부터 사용하지 않는 빈 가게를 무상으로 제공을 받아‘즐거운 나눔(Happy sharing)’의 가게를 열 준비를 하였다.

  드디어 첫 번째의 컨테이너가 도착을 하였다. 한국의 한 유명 장난감 회사에서 창고에 쌓인 재고를 정리하여 40피트 한 컨테이너를 기부하여 주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관세가 문제였다. 현지의 관세청에서는 자국의 NGO가 아니므로 세금을 면제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당신의 나라를 도울 수 있겠는가 물품을 가져오고 거기에 세금까지 내면서 도와주기는 어려운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설득한 결과 그럼 한국대사관에서 이 기구가 한국의 공식 NGO라는 레터를 받아오면 무관세로 통관을 시켜 주겠다는 다는 답변을 듣고는 한국 대사관의 담당 영사에게 연락을 하여 이에 해당하는 레터를 발급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생겼다. 당시의 담당 영사가 레터를 써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왜 그러냐니까 레터를 써주고 물건을 들여온 후 문제가 생기거나 당신이 이 물건을 사사로이 써서 문제가 되면 자신이 그 책임을 지고 그 자리에서 퇴직을 당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자신이 책임을 질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일부였겠지만 그것이 당시 교민을 돌보고 현지에 진출한 한국 사업체들을 도우며 현지에서 생긴 한국교민들의 문제를 해결되도록 해야 하는데 반대로 당시‘몰리샤’의 한국 공관인 한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한 외무부 직원인 영사의 당시 근무자세 이었다. 그런 일을 당하니 정말 갑갑하고 속이 터질 일이었다. 그리고 심정 같아서는 외무부에 항의를 하고 문제의 심각성을 부각시켜 그런 영사를 한국으로 소환하도록 만들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마음을 추스리고 외무부의 홈에 들어가 그러한 상황에 대한 글을 올리고 정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외무부 역시 그러한 글에 아무런 답변이 없었다.

  이제 할 수 없이 현지의 관세청 실무자에게 다시 찾아가서 한국 대사관의 레터를 받는 것은 복잡한 문제가 있다면서 관세를 풀어주어야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게 된다고 항변한 결과 담당자가 이리저리 문의한 이후에 결국은 무관세 통관이 되도록 도와주었고 오히려 그 이후의 컨테이너 문제들을 용인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통관 허가를 받은 나는 그 이후에 창고를 얻어 물품을 보관 하고는 멀리 정글이나 오지의 아이들에게는 무상으로 나누어 주고 도시지역에는 아주 저렴하게 판매를 하는 재활용 가게에 전시를 하고 판매를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이 가게의 정신에 따라 집에서 사용하지 않는 중고 물품들을 들고 와서 기부를 해 주고 자신들이 필요한 물품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을 해 갔다. 그리고 심지어 구입해 간 물품이 일정 시간이 지나 사용하지 않게 되면 다시 기부를 해 주었다. 그 중에서도 의류 등의 실제 생활용품 보다 장난감의 인기가 좋았다. 왜냐하면 생활용품은 중국에서 나오는 저가의 제품들이 하도 많아서 싸게 구입하여 사용하다가 못쓰게 되면 버리고 다시 사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중국 제품들이 저렴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장난감은 달랐다. 한국의 좋은 제품이 그렇게 저렴하게 판매되는 것에 대하여 인기가 좋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 나라에 수출하지 않는 그 장난감 회사가 이곳 사람들에게 대대적으로 홍보되어 이 회사의 제품이 좋다고 간접적인 효과도 있었다.

  그렇게 하여 매일 매일 모이는 적은 수익금들은 직원들에 의하여 현지 법인의 은행구좌에 입금이 되고 그 수익금으로 소망학교의 건축비를 커버 할 수가 있었고 본부에는 그 수입과 지출에 대한 보고를 통하여 투명하게 운영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현지 직원들의 봉급과 학교 학생들에게 필요한 학용품을 제공하는 등 약 6년간 재활용가게를 운영하여 학교 운영에 큰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가게는 어려워져 갔다. 왜냐하면 일반 가게들처럼 판매하기 위하여 필요한 제품을 필요한 크기들을 고려하여 필요한 만큼씩 구입해 오는 것이 아니라 기부를 해준 물품이기에 필요한 크기는 조금밖에 되지 않고 너무 크거나 작은 물품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재활용가게의 직원 봉급도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어 재활용가게를 그만 두고 물품은 모두 무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돌아보면 그렇게 하여 건축비를 해결하고 학교 운영에 큰 힘이 되었다는 사실과 이에 도움을 주시고 함께 관심과 힘을 기울여 주신 분들과 기구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리고 이 외에도 기구를 통하여 성공적으로 진행된 큼지막한 프로젝트 들은 여러모로 참 많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일들이 그냥 간단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본부와 현지의 시각과 관점의 차이로 혹은 일을 진행하는 현실적인 어려움의 문제들로 인하여 본부와 어렵게 일이 처리되는 경우도 있고 특히 모든 일에 계획단계에서부터 진행단계 그리고 결과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하여야 함으로 인하여 신경을 쓰는 데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많았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 모든 것들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셨다는 면에서 정말 모두가 감사한 일이었다. 이렇듯 소망학교의 일이 성공리에 진행이 되자 많은 분들이 현지를 방문하여 보시고는 이런 저런 일에 관심을 가져 주시고 또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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