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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기타
흘러내림(제3권) - 꽃잎
작가 : 말레이
작품등록일 : 2020.8.20

이 소설 "흘러내림"은 언어의 시작 점인 창세 때부터 2040 여 년 대의 미래까지를 언어와 문자를 소재로 이어가는 소설로 하나님이 주신 사랑과 언어 등의 모든 것이 오늘 우리모두에게까지 흘러 내려왔으며 이 흘러내려옴은 막힐 수 있는 강과 내처럼 수평적 흐럼이 아니라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수직적인 흘러내림이고 그렇게 우리에게 주신 것 중의 귀한 우리의 문자(한글)와 언어(한국어)를 세계에 널리 알리며 그 배에 복된 소식도 나누어야 한다는 주제로서 제1권 - 뿌리, 제2권 - 나무, 제3권 - 가지, 제4권 - 광합성 중의 제3권이다.

 
한글 비밀 프로젝트
작성일 : 20-08-30 19:01     조회 : 289     추천 : 0     분량 : 11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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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 비밀 프로젝트!

 

 “너희가 설총은 옳다고 하면서

 제 군주가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까닭이 무엇이냐?” (세종대왕)

 

 이렇듯 많은 산고 끝에 한글이 탄생이 되었는데 문제는 이러한 한글에 대하여 후세의 사람들이 이 한글을“세종의 단독적인 작품이다.”혹은“아니다.”로 나름대로 한글에 대하여 연구한 학자라면 양쪽 중에서 어느 한쪽의 입장에 서서 나름대로 역사적인 기록들을 근거로 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의 주장에 대하여 자료를 살펴보면서 과연 어떤 것이 진실일까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이렇듯 한글이 누구의 작품인가? 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크게 세 가지의 주장이 있었는데 그 주장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글은 세종의 작품이라는 주장, 둘째 한글은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의 공동 작품이라는 주장, 셋째 한글은 이전에 있던 문자였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들에 대한 내용을 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무엇이 더 사실과 일치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과연 한글은 세종의 창작품인가? 아니면 세종이 다시 세운 집현전의 작품일까? 오늘날 대부분의 책이나 교과서에는 훈민정음의 창제는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공동으로 만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상식은 정확한 것일까? 이에 대하여 몇몇 학자들의 주장을 볼 수 가 있었다.

 

 - 이기문 교수(서울대 국문학과 명예교수)

 “한글 창제 무렵의 기록으로는 그런 증거가 하나도 없다.”

 

 - 강창석 교수 (충북대 국문학과)

 “친제했다고 하는 것을 잘 모르는 시절에 그런 말이 나와서 모든 사람들한테 마치 사실인 것처럼 유포가 된 것이죠.”

 

 - 여증동 교수 (경상대 국문학과 명예교수)

 “실록에 전혀 그런 말이 없다. 잘못된 걸 모든 백성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데 세종이 알면 무덤 속에서 통탄하고 있을 거다.”

 

 이에 대한 역사를 기록한 실록은 “한글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443년, 세종 25년의 일이다.” 매우 간략한 기록만이 남겨져 있을 뿐이다. 이러한 훈민정음의 창제는 당시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관료들이 집단으로 상소를 올려 한글 창제를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집현전 부제학이었던 최만리를 대표로 하여 신석조, 김문, 정창손 등 모두 일곱 명의 학자들이 반대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이들은 모두 집현전 소속으로 집현전 내에서도 높은 지위에 있던 원로 학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상소를 올린 까닭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굳이 언문을 만들어야 한다 하더라도

 마땅히 재상에서 신하들까지 널리 상의한 후행해야 할 것인데

  갑자가 널리 펴려 하시니 그 옳음을 알지 못 하겠나이다.“

 

 이들은 상소를 통해 한글 창제가 세종의 독단적 행동이었음을 비난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들이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에 대한 강한 반발이기도 하였다.

 

 - 박종국(세종기념사업회 회장)

 “최만리도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을 그때 안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면 그 전에 그런 기록이 없고

 집현전 부제학이라면 실제 실무담당 책임자다.

 미리 알았으면 그런 게 벌써 나오지

 그 때 나왔다는 것은

 집현전의 최고 책임자였던 그분이 전혀 모르신 게 아닌가?”

 

 이렇듯 최만리가 한글 창제를 몰랐다면, 한글을 만드는 과정에 집현전 학자들이 참여했다는 이야기는 또 어떻게 된 것 일까? 한글 만드는 일에 간여한 것으로 알려진 학자는 정인지, 최항, 신숙주, 성삼문 등 모두 일곱 사람이다. 반대 상소를 낸 학자들이 원로라면, 이들은 대부분 젊은 나이로 소장학자들로 이들의 이름은 조선시대 문헌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집현전 7학사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이에 대하여 가장 오래된 기록은 '성현'의 용재총화로 세종이 신숙주, 성삼문에게 명해 언문을 지었다고 기록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집현전 7학사 가운데서도 한글 창제와 관련해 가장 주목을 받는 학자는 신숙주이다. 그는 세종의 총애를 받았을 뿐 아니라, 한글 관련 사업에 있어서도 가장 많이 동원된 사람이 바로 신숙주 이었기 때문이다. 신숙주는 외국어에도 능통하여 중국어, 일본어 등 5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 같은 사실도 그가 한글 창제에 참여했을 거라는 주장을 뒷받침이 되고 있다. 이러한 신숙주의 문집인‘보한제집’에는 그의 행적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신숙주가 직접 쓴 글을 비롯하여 당대의 학자들이 기록한 그의 일대기가 실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한글 스물여덟 글자를 만든 것은 세종이라고 적고 있는데 신숙주가 한 일은 세종의 명을 받아 한글 서적을 편찬하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동안 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신숙주가 요동에 다녀왔다는 기록이다.

 그 무렵 요동에 귀양 와 있던 중국의 언어학자 황찬을 만나기 위해, 성삼문과 함께 여러 차례 요동을 방문했는데 신숙주가 황찬을 만난 것은 훈민정음을 창제하는데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이에 대하여 강창석 교수(충북대 국문학과)는

 

 “질문 한 것은 한글을 만드는 문제에 대해서 질문 한 것이 아니고,

 한자를 바로 잡기 위해서 한자음에 관한 질문을 하러 간 것이다.

 한자음에 대한 이론인 성운학에 관해 질문하러 간 것이지,

 한글을 만드는데 어떤 직접적인 조언을 얻기 위해 간 것이 아니다.

  그 연도 등은 조선실록을 보면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숙주가 황찬을 만나기 위해 요동으로 간 것은 언제일까? 신숙주가 최초로 요동에 간 것은 1447년 1월. 한글이 만들어진 뒤 1년 2개월 후의 일이었다. 이에 대하여 이기문 교수(서울대 국문학과 명예교수)는

 

 “실제 일은 성삼문 신숙주 또래들이 했다고 볼 수 있는데

 성삼문은 조금 전에 집현전에 왔고

 신숙주는 세종 25년 말에 훈민정음이 창제됐는데

 신숙주는 23년 즈음 집현전 학자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일본에 갔다.

 그 일에 관여할 시간이 없었다.”

 

 결국 한글을 만드는 일에 집현전 학자들이 참여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오히려, 원로 학자들은 한글 창제 자체를 반대했고, 젊은 학자들도 한글 서적을 만드는데 참여했다는 사실만을 밝혀냈을 뿐이다. 결국, 세종 25년에 만들어진 한글 스물여덟 자는 집현전 학자들의 공로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훈민정음에 관한 책 중에, 현재 전해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훈민정음 해례본으로서 세종 28년, 한글 반포를 위해 집현전 학자들이 만든 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해례본은 한글의 글자 하나하나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는 책으로서 집현전 학자였던 정인지가 쓴 이 책의 서문 가운데 한글을 만든 사람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전하 창제(殿下創制) - 전하가 지으셨다.”라고 함으로 훈민정음의 스물여덟 자를 만든 것은 세종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강창석 교수 (충북대 국문학과)는

 

 “신하들이 만들었는데 관례에 의해서

 임금이 한 것으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다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세종대왕 때 한글만 만든 것이 아니라 다른 사업도 많이 했는데.

  그런 것들은 다 한 사람들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공을 임금한테 돌리기 위해 했다고 하더라도

 그 무렵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은

 한글을 만든 것은 대단한 공이 아니고

 해서는 안 될 일을 임금이 하고 있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공을 임금에게 돌리기 위해서 친제라는 표현을 썼다.

 이건 전혀 근거가 없는 그런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내용은 최만리의 상소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번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재주에 지나지 못하는 것으로

 학문에 방해됨이 있고 정치에 유익함이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옳은 것이 없습니다.” (최만리 상소문)

 

 한글을 만든 것은 신기한 재주에 불과하며 전혀 유익할 것이 없다고 혹독한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세종은 다음과 같이 반박을 하는데

 “너희가 설총은 옳다고 하면서

 제 군주가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까닭이 무엇이냐?”

 

 이는 설총이 만든 이두는 옳다고 하면서 제 군주가 한 일을 그르다고 하는 까닭이 무엇이냐며 반박하며 세종 스스로 한글을 만든 것이 자신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세종이 직접 쓴 글 속에서도 한글 창제를 다른 사람에게 명해서 만들게 했다는 말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이 같은 사실은 훈민정음 서문의 글을 통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한글의 스물여덟 글자는 자신이 직접 만든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기문 교수(서울대 국문학과 명예교수)는

 

 “친제라고 하는 표현은 훈민정음에서만 볼 수 있다.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것을 보면 훈민정음은 역시 친제다.

 세종이 이것을 만들 수 있는

 그런 여러 가지 학문적인 배경이나 능력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 역시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 유력한 증거가 되지 않나 생각한다.”

 

 세종은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고 한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책에 몰두해, 건강이 나빠지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아버지였던 태종이 글을 읽지 못하도록 책을 모두 빼앗았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세종은 왕자시절에 이미 학문에 상당한 경지까지 올라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세종기념사업회 회장인 박종국은

 

 “세종께서 학문의 대왕이다.

 어릴 때부터 공부를 좋아했으니,

 임금이 되어서는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 공부한다.

 그분 말씀이 나는 경서 가운데서 안본 책이 없다.

 그 무렵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을 다 보신 분이시다.”

 

 세종이 언어학에서도 조예가 깊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가볍게 옛사람들의 운서에

 터무니없는 언문을 붙이면 되겠습니까?”

 

 라는 최만리의 상소를 통하여 한글로 운서를 번역하는 것에 대해 최만리 등의 학자가 그것이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주장하자 이에 대한 세종의 반박은 다음과 같이 단호했다.

 

 “너희가 운서를 아느냐?

 또 너희가 사성 칠음과 자모가 몇인 줄 아느냐?”

 

 세종 스스로 언어학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으로 세종의 반박에 대해 당대 이름난 학자였던 집현전의 학사들이 단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강창석 교수(충북대 국문학과)는

 

 “최만리라고 하는 분이 집현전 책임자로

 다른 말로 당대 최고의 학자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당대 최고의 학자를 앞에 두고

 당신이 이걸 아느냐고 얘기할 수 있는 건

 아무리 임금이라도 자신이 학문적 역량이 없으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이렇듯 한글을 만든 직후 세종은 동국정운을 편찬하도록 명하는데 이것은 방대한 분량의 치나 음운 값을, 모두 한글로 옮겨 적는 일로 상당한 일이었는데도 실무자였던 신숙주가 쓴 서문에 따르면 음 하나 하나까지 모두 왕에게 직접 재가를 받았다고 한다. 이것은 음운학에서 당대 최고의 학자가 바로 세종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훈민정음 창제과정에서, 집현전 학자들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정인지가 쓴 훈민정음해례의 서문에서 그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세종은 “상세하게 덧붙이라”고 명했다.” 이러한 세종의 명을 받아 한글 스물여덟 글자의 원리와 용례를 해석하는 일을 맡음으로 집현전의 학자들은 한글 스물여덟 글자의 해석과 동국정운 등 한글 서적의 편찬사업에 관여 했을 뿐이었다. 그것도 세종의 지시를 일일이 받아서 이루어 낸 일들이었다. 이에 대하여 강창석 교수(충북대 국문학과)는

 

  “세종이 임금이기 때문에 학자라고 하는 사실이 가려지는데

 세종은 왕이면서도 아주 뛰어난 언어학자였다.

 언어학자라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는데

 만약 임금이 아니었다면 언어학자라는 부분으로

 세계사에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을까?

 워낙 많은 일을 하고 또 임금이다 보니까

 학자라는 사실이 가려지는데 여러 가지 업적이나 기록을 보면

 세종은 뛰어난 언어학자였다.

 

 고로 한글은 세종대에 이뤄진 한글 관련 사업의 최고 책임자요

 그것은 바로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였던 세종 자신이었던 것이다.”

 

 이 외에도 훈민정음을 만든 것을 두고 떠도는 이야기는 많지만, 그 중 믿을 수 있는 내용은 거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의 가문에서 구체적인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안국승(죽산 안씨 대종회 부회장)은

 

 “우리 어릴 때 들은 이야긴데 한글을 만든 다음에

 민간에 실험시키는데 동원되었다는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다”

 

 한글을 만들었다고 까지 이야기되는 세종의 둘째 딸 정의공주는 죽산 안 씨 가문으로 출가한다. 그런데 이 가문의 족보에 시집온 그녀가 세종의 명을 받아 한글 창제를 도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안명국(죽산 안 씨 대종회 사무국장)은

 

 “족보를 보니까 여기에 기록과 같이 유사가 나오잖아!

 한글의 변음과 토착을 세종이 대군들에게 풀어라 하니

 대군들이 못 풀어서 세종이 정의공주에게 하명 하였어…….”

 

 여기에 정의공주가 변음과 토착을 풀어 올리니 세종이 극찬하시고 상으로 노비 수백 구를 하사하셨다는 기록이 있지만 정의공주가 해결했다는 변음과 토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이것이 민간에서 사용되던 언어나, 사투리 등이 아니었을까 막연히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이다. 한글을 만드는 과정에서 정의 공주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기록은 한글을 만드는 과정에 세종의 직계 가족들이 참여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집현전 학자들을 중심으로 추진된 한글 서적 편찬 사업에도 왕자들이 깊숙이 개입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글을 창제한 다음에 처음 실시한 사업이 바로 운회를 번역하는 것이었는데 이 일에 왕자들이 동원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이기문 교수(서울대 국문과 명예교수)는

 

  “세종이 한글을 만드는 과정에서 문종,

 수양대군들과 상당히 서로 의견교환을 했지 않았나?”

 

 생각한다. 훈민정음을 공표하고 그 다음 해인 세종 25년에, 그리고 두 달 뒤에 훈민정음으로 사업을 하는데 그 총책임자를 세자와 왕자를 임명했다는 것은 그들이 내용을 알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 때 처음 집현전의 젊은 학자들이 참여했고 그 후 최만리의 반대상소가 나오는 것이다.

 운회를 번역하는 일에 참여한 왕자는 모두 세 사람은 훗날 문종이 되는 세자와 수양대군. 그리고 안평대군이 그들이다. 이들이 번역 사업의 책임자가 된 것은 왕의 아들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한글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이들이 세종을 도와 한글 자모 스물여덟 자를 만들 때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박종국(세종기념사업회 회장)은

 

 “아들 세분이 세종 못지않게 학문, 글씨 등에서

 능가할 수 있는 분들이다.

 심지어 어떤 기록에는 세종과 문종이

 같이 만들었다고 하는 기록도 나오고

 또 세종께서 대군들과 식사하시면서 대화를 한 기록이 나온다.

 이런 것으로 봐서…… 세조가 석보상절을 만들었잖습니까?

 그게 그러한 것이 없으면 안 되거든요.”

 

 문종과 관련해서 ‘직해동자습’ 이라는 책의 서문에, 재미있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이것은 신숙주와 함께 한글을 만든 장본인으로 지목되는 성삼문이 쓴 기록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끄는데 성삼문은 이 글에서 한글을 만든 것이 세종과 문종이라고 적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뒷받침해줄 다른 기록은 없지만 한글을 만드는 일에 왕자들이 참여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결국 한글 창제는 세종이 신하들 몰래 자식들을 데리고 10여 년 간을 추진해 온 비밀스런 연구의 결과인 것이다. 한글이 완성된 직후 세종이 큰 곤경에 처하게 되는데 한글 창제를 찬성하는 이는 없는 반면, 가장 신임하던 집현전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최만리 등의 학자들은 상소를 통해 왕의 행동은 사려 깊지 못한 일이라며 강력하게 비난한다. 이들의 태도와 어조는 매우 당당한 반면, 이에 대하여 세종이 오히려 변명을 하는 형상이 되었다.

 

 “어찌 옛날부터 쓰는 폐해 없는 글자를 고쳐

 낮고 천하고 속된 말인 이익이 없는 글자를 새로 만들어 쓰겠습니까?”

 

 이들이 감히 세종에게 도전할 수 있었던 까닭은 중국과의 문제 때문이었다. 만약 이 사실이 중국에라도 알려지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최만리는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기문 교수 (서울대 국문학과 명예교수)는 이에 대하여

 

 “상식적인 태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때 학자들로선 그런 소양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우리나라는 중국의 한문으로 글자 생활을 했고

 한문으로 이뤄져 있었기 때문에

 한글을 만드는 것은 그들에게는 필요치 않았고

 이것은 오히려 오랑캐가 되려는 것이라고

 반대하는 것이 당연했다고 볼 수 있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서 새로운 글자를 만든다는 생각은 그 무렵으로서는 매우 위험한 생각이었던 것이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사대 관계에 있던 조선이 이미 쓰고 있는 한문을 두고 따로 국어를 가진 다는 것은 중국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 질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여증동 교수 (경상대 국문학과 명예교수)는

 

 “집현전 학자들에게 명령을 하면 하라고 할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

 남 몰래 만들 수밖에 없어...

 집현전 학자에게 명령을 내렸을 때 전

 하 절대로 안 됩니다 하고 반대할 터인데... ”

 

 만약 한글이 창제되기 전에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다면 한글 창제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 같은 가능성을 엿보게 하는 것이 바로 내불당 사건이다. 세종이 궁궐 안에 법당을 지으려 하자 신하들이 대대적으로 반대를 하고 나선다. 나라의 국교가 유교 즉 성리학인데, 왕이 불교를 숭상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해동잡록에는 무렵 신하들의 반대가 어느 정도 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 있는데 집현전 학자들은 자신들 의견이 관철되지 않자 업무를 중단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가 버렸던 것이다. 이에 세종은 영의정이었던 황희를 붙잡고 “이를 어쩌면 좋을까!“ 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아무리 임금이라고 하더라도 명분을 앞세운 신하들의 주장을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글 모르는 백성을 위한 한글창제는, 양반계층의 이익과는 상반되는 것이었기에 반대는 더욱 거셀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강창석 교수 (충북대 국문학과)는 이렇게 말한다.

 

 “그 무렵 최만리라든가 이런 사람들은 한문으로 글자생활을 하고

 그것이 다른 서민들과 자신들이 구별되는 어떤 근거이기도 했기 때문에

 굳이 모든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는 글자를 만들 필요가 있겠는가?

 

  자기 고유의 글을 가지고 있는 일본이라든지 여진, 서하를

 오랑캐라고 무시하는 대목을 보면 한마디로 말해 필요 없다..

 자신들의 입장에서 보면 필요 없지만

 세종은 그들 입장이 아니라 글 모르는 백성을 입장에서 보면

  필요하다고 의견차이가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불당 사건 때와는 달리, 세종은 반대론자들에 대해 매우 단호하게 대처를 하는데 반대 상소를 올린 집현전 학자들을 전원 하옥시키면서까지 한글의 사용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만약 한글 창제 전에 이 사실이 신하들에게 알려졌다면 한글은 탄생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 무렵의 명분에는 어긋나는 한글을 만드는 것, 한글은 혼자만의 고독한 작업 뒤에 비밀작업으로 이루어낸 업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 가지의 주장중에서는 세종이 홀로 만들었다는 것에 무게가 실리게 된다.

 결국 이 모든 주장과 조사 내용들을 총합하여 볼 때 한글을 만든 것은 세종이 혼자서 자녀들의 도움을 받아서 만들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 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전혀 아무런 자료가 없이 세종 혼자서 창안하여 글자를 만들었는가 하는 또 다른 문제가 남아있다. 이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반론의 제기가 있는데 이전에 있었던 문자라는 주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받아 되었고,

 새 글자는 아니다.

 언문은 〈녹도문자〉전 조선시대(고조선)에 있었던 것을

 빌어다 쓴 것이다.(세종실록 103권)”

 

 “이 달에 상감께서 친히 스물여덟 자를 지으시니,

 그 자는 고전을 모방한 것이다.(세종실록 25년)”

 

 “계해 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옵서 정음 스물여덟 자를 창제하시고,

 간략하게 예의를 들어서 보이시면서

 이름 지어 가로되 훈민정음이라 하시니,

 상형 하되 글자는 옛날의 전자를 본 따고……(정인지의 해례서문)”

 

 “언문은 모두 옛글자를 근본 삼은 것으로 새로운 글자가 아니며

 곧 자형은 비록 옛날의 전문을 모방했더라도

 용음과 합자가 전혀 옛것과 반대되는 까닭에

 실로 근거할 바가 없는 바입니다.

 (최만리와 당대 유학자들의 집단상소문 중에서)”

 

 결국 이 역시 이상의 자료들과 주변의 다양한 요소를 고려하여 볼 때 한글은 이미 태초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문자들이 점점 더 발전해 오는 과정을 통하여 마지막에 세종에 의하여 재정리되고 그에 새로운 음가를 붙이며 완성되었던 것으로 정리할 수밖에 없게 된다. 어떻게 보면 바라보는 시각과 견해에 따라서는 세종이 독립적으로 창제하였다는 말이나 이전의 글자를 재정리하였다는 두 주장이 모드 틀렸다거나 맞았다고 이야기 할 수 도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두 주장은 그 만큼 대립도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실 두 가지의 사실이 만나 서로 보완이 되었고 한글을 만드는 주체가 세종이었으므로 결국 이 문제는 이전에 있던 자료를 가지고 세종이 재정립을 한 것이므로 엄밀히 보면 세종이 독자적으로 창안하였다고는 볼 수 없는 일이므로 옛것을 토대로 그것을 정리하면서 그것에 새로운 가치를 불어넣었다고 하는 것이 바른 결론 일 것이다.

 그런데 한발 더 나아가 중국의 글자라고만 알고 있던 한자도 한민족의 선조가 만든 문자라는 주장까지 있는 것을 보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 원리는 모든 만물이 암수와 음양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글에도 음양의 짝이 있는데 한글이 양이요, 한자가 음이라는 것이다.

 한자의 시조로 불리는 창힐은 배달국시대 제14세 치우천황의 후손으로 동이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초기의 문자로서 실증된 최초의 자료는 갑골문(甲骨文)인데 거북이 배 뼈와 소 어깨뼈에 주로 새겨진 갑골문자는 3천4백 년 전 중국의 은(殷)나라 때 사용된 것으로, 황하 이북의 은나라 도읍지였던 지금의 안양(安養)에서 처음 발견되었는데 명지대의 진태하(陳泰夏) 교수(국문학, 한국 국어교육학회 회장)는

 

 “대만에서 문자학을 연구하면서

 갑골문에서 북방민족이 아니면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는 특징을 발견하고

 지금까지 연구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고 한다.

 그리고 그가 결론적으로 말하기를“한자(漢字)라는 명칭은 옳지 않으며, 고대‘한민족의 글’이라는‘고한글’(古韓契) 혹은‘동방문자’(東方文字)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진 교수는 ”한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표의문자도 만들었고, 가장 과학적인 표음문자도 만들었으니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일로 한민족의 큰 자랑이다.”라고 한다.

 만약 이것이 입증이 된다면 한글 전용론 자들의 주장이나 한자와 한글을 혼용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논쟁 자체가 불필요하게 될 터이고 그렇게 되면 한글은 한글로서의 장점이 있고, 한자는 한자로서의 장점이 있는데 이 둘을 합하여 함께 쓰게 된다면 가장 합리적이고 완벽한 언어가 됨으로 한자와 한글의 혼용은 음양의 합덕이라는 것이다. 그럼으로 이 문제에 대하여는 앞으로 시간을 두고 더 살펴보아야 할 문제로 여겨진다.

 이제 한글은 세종의 창작인가에 대한 결론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 앞의 모든 내용들을 종합하여 볼 때 한글은 세종대왕이 배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독특한 관심과 치밀한 연구의 산물인 것이 틀림이 없다 하겠다. 다만, 자모음 문자 한자 한자를 직접 만들면서 디자인 한 것 이라고는 볼 수는 없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언어를 정리하여 기본 문자를 만들었던 기존에 존재하던 그 문자들을 도입하고 그것들이 어떤 형태로 체계를 세우며 의미를 재 부여하고 정리하며 부족한 일부의 문자를 보충하여 넣어가는 방법을 통하여 한글체계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표현한다고 하여 세종대왕의 능력이나 그 분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은 전혀 아니라고 하겠다. 이제까지 존재하는 모든 왕이나 학자들 중에서도 그런 정신과 백성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그런 문자 체계를 세우고 정리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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