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4  5  6  7  8  9  10  >  >>
 1  2  3  4  5  6  7  8  9  10  >  >>
 
자유연재 > 현대물
심장 밀렵꾼 : 비존재
작가 : 날개이름
작품등록일 : 2020.8.20

타인의 심장을 갈취하여 생계를 이어나가는 심장 밀렵꾼 준명. 그리고 그런 그의 심장을 원하는 한 여신. 그 애증 섞인 관계는 이윽고 서울을 한바탕 뒤흔들게 되는데....
아노미의 끝자락, 혹은 타락한 도시의 말로. '심장 밀렵꾼 : 비존재' 많은 감상 부탁드립니다.

 
비존재_ 07
작성일 : 20-08-28 19:29     조회 : 271     추천 : 0     분량 : 7889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3년 전, 그러니까 서예린이 심장을 잃기 1년 전의 일이었다.

 매니저 권한으로 연습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휴대폰으로 틀어놓은 곡에 맞춰 안무를 연습하고 있는 마린이 있었다. 방해되지 않게 몰래 들어가고 싶었지만 거울을 통해 나를 발견한 것인지, 그녀가 안무와 노래를 멈추고 이쪽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생각보다 늦게 왔....어라?”

 그녀는 내 손에 들린 상자를 보더니 손바닥을 마주 대고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건 혹시.....”

 “그래. 나더러 갖다 주라더라.”

 내 손에 들린 것은 어느 팬에게서 건네받은 선물 상자였다. 호박색의 앙증맞은 디자인. 직접 주긴 쑥스럽다며 매니저인 나한테 맡기고 간 것이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것을 낚아챈 그녀는 열어보지도 않은 그것을 소중한 듯이 꼬옥 안고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하아..... 이런 날도 오는 구나아....”

 “.....내 선물 받았을 때랑 너무 차이 나는 거 아니야?”

 째릿. 나를 돌아본 그녀는 그 의성어가 들릴 만큼 적나라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건 설레는 거고, 이건 기쁜 거지! 종류가 다르잖아 종류가.”

 검지를 세우며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볼을 부비며 하아하아 숨을 내쉬는 그녀였다. 조금 있으면 코피라도 흘릴 것 같았기에 포트로 물을 데워 안정 효과가 있다는 녹차 팩을 우려냈다. 내 것을 들어 한 모금 홀짝인 후 다른 손으로 그녀의 것을 건네주려고 했을 때였다. 계속해서 하악대던 그녀는 문득 떠오른 듯 고개를 바로 세우더니,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이거, 절대 잊지 않을 거야!”

 “아 깜짝아.”

 ”성공해서 해외로 진출해도, 몇 명이 팬이 생겨도, 절대로.”

 다소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그런 말을 하며 배시시 웃는 그녀가 너무도 예뻐 보였다. 그래서 건네려던 녹차도 잊은 채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불만스러운 투로 말했다.

 “방금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지?”

 “아니 뭐 딱히 그런 건...”

 “두고 봐, 보여줄 테니까. 잊지 않고 성공해서, 무대 위에서 오늘의 일을 말해줄 거야.”

 말을 마친 뒤 그녀는 창가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다가갔다. 뭐하나 싶어 팔랑거리는 분홍색 머리를 쫓아가 그녀의 뒤에 서자, 그녀는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말했다.

 “바로 저기서 말이지!”

 그녀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내다보자, 그곳에는 엄청난 크기의 야외 공연장이 있었다. 이 초라한 연습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화려하게 빛나며 함성 소리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선물상자를 가슴 앞에 안아 든 채로 몸을 기울여, 그 광경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지 느물느물 풀어진 표정이 엿보였다.

 “.......근데 저거, 임시 공연장인데?”

 “응?”

 “그러니 저기 서려면 당장 이번 주 안에 세계적인 인기를 얻어야 해. 서둘러야겠다.”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진지한 척 말했다.

 “하여간 꼭 초를 쳐요 초를!”

 뒤로 돌아 노발대발하는 그녀를 무시하고 녹차 한 모금을 홀짝였다. 언젠가 진짜로 이루어지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그리고 그녀가 정말로 그 몇 배의 수용 인원을 자랑하는 공연에 초청받은 것은, 그로부터 1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귀를 멎게 만들 듯한 함성소리. ‘마린’을 연호하는 수천 개의 목소리가 무대 뒤편까지 전해져 왔다. 매 공연 때마다 한 명 이상씩은 꼭 혼절을 하지만 아무래도 신기록을 갈아치울 모양이었다.

 무대 옆의 틈으로, 끝없이 펼쳐져 일렁이는 군중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정말, 이럴 때마다 신이라도 공양하는 것 같다니까.”

 적어도 신의 질투를 살 만한 인기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였다.

 1년 전 그 날. 선물 상자에는 초콜릿 몇 봉지와 편지가 들어있었다. 그 편지에 감동을 받은 그녀가 답장을 하였고, 팬이 그것을 SNS에 올려 일파만파 소문이 퍼진 것에서 상승세가 시작되었다. 그 후로는 정말 마법과도 같이 명성이 치솟아 이곳까지 이르게 되었다. 물론 좋은 일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소속사와의 마찰, 다량의 스캔들과 악플 등. 참다못해 소속사를 뛰쳐나간 적도 있을 만큼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밑거름으로 삼아 그녀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팬들의 우상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퀭하게 마모되었을 동공은 갈수록 그 빛을 더해갔다.

 그렇게 일하기를 1년, 어느새 그녀는 신에 필적하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관중의 함성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곡을 전부 마치고 퇴장할 줄 알았던 마린이 마이크를 잡고 한동안 가만히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숨을 고른 그녀가 말했다.

 [오늘은 팬으로부터 처음으로 선물을 받은 지, 정확히 1년이 되는 날이에요.]

 결연하고도 당찬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것이 저를 이 자리 서게 한 원동력이 되어주었죠. 갈피를 잃을 때마다 그 기억을 떠올려 극복할 수 있었어요. 매번 팬미팅 때 항상 뵈지만 그래도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1년 전 제게 선물을 보내주셨던 그 분도, 또 공연을 보러 와주신 여러분들도,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허리를 한차례 꾸벅 숙인 그녀는 잠시 후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다시금 쏟아지는 함성. 그런 관중들에게 손을 흔들며 그녀가 이쪽으로 걸어 나왔다. 무대장치 해체 작업이 끝난 뒤 그녀에게 다가가 롱 패딩을 덮어주었다.

 “수고했어. ....1년 동안.”

 “그러네. 진짜 엄청 수고했어.”

 그녀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살피며 헝클어진 그녀의 앞머리를 슬쩍 정리해주자, 그녀는 손가락으로 V사인을 만들어 내 얼굴 앞에 내밀었다.

 “히히-. 약속, 지켰지?”

 “그래 장하다 장해.”

 손을 피하며 건성으로 답했지만, 그것은 절대로 빈말이 아니었다.

 더 정확히는 대단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 귀여운 자세를 보고도, 가장 먼저 찾아온 감정은 그런 경외심이었다. 가까이서 그녀의 분투를 목격해 온 매니저이자, 남자친구로서. 괜스레 울컥하면서도 도저히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까지 올곧고, 이렇게나 큰 책임을 짊어지고서도 한결같이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지금까지도, 분명 앞으로도 없을 터였다. 그래서. 그렇기에.

 그런 그녀라도 무너지는 순간이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날 저녁. 모든 일정을 소화하고 그녀를 기숙사로 바래다주는 동안의 일이었다.

 “준명아, 큰일 났어.”

 “왜? 무슨 일인데.”

 조수석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경직된 목소리로 말했다. 묘하게 담담한 그 어투 탓에 별 일 아닐 것이라 생각했지만, 잠시 눈을 돌려 그녀를 보니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마침 신호등에 걸려 잠시 정차하자 그녀가 화면을 내 쪽으로 돌려 보여주었다. 그곳에는 한 장의 사진이 착신되어 있었다.

 “어....?”

 오늘 공연이 끝난 뒤 그녀와 내가 차 안에서 입을 맞추고 있는, 존재해서는 안 될 사진이. 심지어 송신자의 프로필은 1년 전의 첫 선물부터 지금까지 매달 선물을 보내온 바로 그 팬의 것이었다.

 “드, 들킨 것 같아, 우리.”

 폰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당시 그녀의 인기는 절정에 이르러 있었다.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팬덤에, 그녀와 그녀의 매니저가 연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별 일 없이 끝날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신호가 바뀐 것도 모르고 멈춰 있다가 뒤에서 빵빵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떠밀리듯 엑셀을 밟았다.

 “그거, 개인 DM으로 온 거지?”

 “응. 아직 공개된 것 같지는 않아.”

 그녀의 기숙사로 향하며 잘 굴러 가지도 않는 머리를 쥐어짜내는 동안, 핸드폰을 한참동안 노려보던 그녀가 말했다.

 “......내가 한 번 잘 말해 볼게.”

 “뭐? 아니 일단은 소속사에 전하는 게 가장.....”

 “그러면 이 사람에게 뭔가 보복이나 조치가 가해질 거 아냐. .......그런 거, 싫어. 그래도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해 준 은인 같은 사람이니까.”

 말릴 새도 없이 그녀는 핸드폰을 열심히 두드리기 시작했다. 팬들을 대할 때만큼은 어떤 말도 듣지 않는 그녀다. 말려도 듣지 않겠지 싶어서 잠자코 운전에 집중하며 한 마디만을 건넸다.

 “냉정하게 말해서 그런 방식으로는 언론에 알려질 확률이 크다는 거, 알고 있지?”

 “......응.”

 “그럼 됐다.”

 “응.”

 그녀는 착실하게 대답하면서도 답변을 작성하는 데에 열을 올리고, 자동차는 말없이 집으로 향하는 바퀴를 굴렸다.

 지금에 와서 보면 그때 어떻게 해서든 그만두게 만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나는 그녀에 대한 막연한 환상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라면 분명 원만하게 처리할 것이라고 멋대로 믿어버린 것이다. 그녀도 인간이라는 것을, 실수를 할 때도 있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는데.

 몇 분 후, 긴장한 표정으로 답장을 읽던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뭐래?”

 내가 묻자, 그녀는 문자를 그대로 읽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그와는 헤어질 마음이 없다는 말이군요. 말씀대로 외부에 알리지는 않겠습니다. 당신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테니까요. 하지만 마린님은 모르시는 것 같네요. 제가 얼마나 당신을 사모하고 있는지를. 그딴 널린 남자들보다 훨씬, 훨씬 더 당신을 아끼고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 보여드리겠습니다.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근시일 내에 제 사랑의 크기를 확인하실 수가 있을 거에요. 그 때가 되면, 저만이 진짜라는 것을 알아봐 주시겠죠? -래.”

  워낙 두루뭉실한 이야기라 무엇을 말하려는 지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환하게 웃는 그녀의 표정을 보아 적어도 나쁜 의미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출세하여 떳떳하게 그녀 앞에 서겠다는 의지의 표명 쯤 되겠거니. 그냥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생각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안일하기 짝이 없는 판단은

 한순간에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주, 준명아. 내 몸이 이상해.”

 

 그것이 다음 날 아침 그녀에게서 걸려온 전화의 첫 마디였다. 완전히 패닉 상태에 접어든, 다급한 목소리.

 “뭐? 무슨 일이야 천천히 설명을...!”

 “그 사람한테서 선물이 도착해서 여, 열어봤는데 끔찍한 게 들어있었어 그래서, 어 그랬더니, 그랬더니...!”

 “가만히 있어 지금 바로 갈게.”

 횡설수설하는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서둘러 신발을 신었을 때였다.

 “왼쪽 가슴 쪽이 투, 투명해져서, 심장이 보이....읍! 으읍!!”

 “어, 어어...?! 야, 예린아, 서예린!”

 더이상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윽고 창문이 깨지는 소리만이 전화기를 넘어 전해져 올 뿐이었다. 당시 매니저라는 직업 관계상 내 집은 그녀의 기숙사에서 1분 거리에 있었다. 집 밖으로 뛰쳐나가 그녀의 집을 향해 달려갔다. 근처에 다다르자 어느 새까만 경차의 문이 닫히더니 급하게 출발하는 모습이 보였다.

 “안 돼, 예린아, 예린아!!”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도 전에 나의 다리는 한층 격하게 땅을 박차기 시작했다. 인간의 다리로 따라잡을 수 있을 리 없건만, 멀어져 가는 뒤꽁무니를 사력을 다해 쫓았다. 동네 골목을 지나 점차 넓어지는 차로, 그리고 어느덧 사거리의 한복판까지. 신호를 무시하고 질주하는 그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무렵. 나는 교차로의 한복판을 단신으로 달리고 있었다.

 빠-아아아앙!!

 사방에서 경적이 울리고, 내 탓에 궤도가 뒤틀린 차량들이 앞뒤를 위태하게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당시 나는 그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 중 한 개의 트럭이 급제동을 걸며 내게 들이닥치는 그 순간까지도, 나는 그녀가 사라진 도로의 저편을 향해 발을 구르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 처음 보인 것은 병실의 천장이었다. 심전계가 별 탈 없이 정상 궤도를 그리고, 팔에는 닌겔이 꽂혀 있었다. 병실 곳곳에 설치된 TV는 모두 같은 내용을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때문에 현재 의학계에서는 이러한 상태를 ‘언링크’라 규정하여....”

 마린의 실종과 CCTV에 잡힌 기이한 신체의 상태에 대한 이야기였다. 붕 떠오른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나를 병실 한 가운데에 방치해두고, 환자들은 화면을 주시하며 각자 자신의 가족들과 무어라 속닥이기 바빴다. 앵커의 목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왔다.

 “기숙사 내부를 수사했던 경찰에 의하면 현장에는 뚜껑이 열린 선물 상자 안에 절단된 귀 한쪽이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곁에 놓여있던 편지의 내용으로 봤을 때 그녀의 팬이 자신의 귀를 잘라 포장한 것으로 추정되며, 사건 직전 마린이 그것을 열어보았을 가능성이 크다고도 언급했습니다. 이에 따라 국과수는 언링크라는 이번 돌연변이적인 사건은 감정의 동요가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일 수도 있다며, 앞으로의 부검 방향성을....”

 겹쳐 울리는 여러 앵커들의 목소리, 창 밖에서 흘러드는 도시의 소란과, 새로운 언링크 사상자의 속출을 알리는 광역 경보음.

 그 많은 것들이 뒤섞여 들려오는 혼란 속, 멀쩡한 몸을 시체처럼 병실에 뉘여 놓은 내 곁에서. 세상은 소용돌이치듯이 엄청난 속도로 변화해갔다.

 그로부터 6개월 후. 세상은 격변한 시스템에 완전히 적응을 마쳤다.

 마린의 심장은 어느 여자의 이름으로 1000억이라는 가격을 내걸어 공표되었으며, 나는 그 금액을 모으기 위해 지석에게 부탁하여 싹수 노란 밀렵꾼의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당시에는 ‘가장 돈을 모으기 쉬운 일이니까’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실은 불신이 싹튼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분풀이에 가까운 선택이었겠지.

 그 뒤로는 그 여자와 지석의 말처럼, 한심하고 꼴사납게. 상황이 등을 떠미는 대로 저항 않고 그대로 떠밀려왔을 뿐이다. 그러다 언젠가 문득 돌아보니, 시체는 20구가 넘게 쌓여 있었다.

  

  

 자신의 귀는 마린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있으니, 잘라서 보내주었다. 이것으로 자신의 사랑의 크기를 알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그딴 허울뿐인 사랑을 그만두고 자신과 진실된 사랑을 하자.

 편지의 내용은 대강 그런 것이었다. 답장을 보내왔던 팬이 그 편지와 함께 절단한 자신의 귀를 상자로 동봉하여 마린의 기숙사 앞으로 보내 놓았던 것이다. 그것을 목격한 그녀가 놀란 나머지 언링크 상태에 이르렀고, 그 때를 노리고 있던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하고 말았다. 이제 와서 보면 그 누군가는 아마도 신의 수하였겠지.

 어디서부터 신이 개입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절단한 자신의 귀를 보낸 행위는 확실히 그 팬의 자의였다는 것을 조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자신의 행동이 마린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알았기에 그런 괴기스런 행동을 보인 것이겠지.

 좋든 나쁘든 상대의 기억 속에 커다란 존재로 남기를 갈망하는 것.

 사랑이란 정말 딱 그것뿐인 감정이다.

 단지 그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에, 대개 호의의 형태를 빌려 쓰는 것일 뿐이겠지.

 다만 그렇게 된다면, 내가 그녀와 보내왔던 세월은 무엇으로 정의해야 하는가. 그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걸어온 이 핏빛의 발자취는, 도대체 어디로 향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답을 내리지 못한 채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빗발이 조금 더 거세진 까마득한 밤의 도시는

 조용하고 화려하게. 어둠과 빗발 속에 그 실체를 암약하고 있었다.

  머리가 축축하게 젖어서 어쩔 수 없이 실내로 들어갔다.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었다. 헐어 빠진 로브는 쓰레기통에 처박고, 움직이기 편한 검정색 계열의 운동복으로 환복했다. 물론 얼굴을 가릴 만큼 커다란 모자가 달린 후드 집업을 위에 덧대 입었다.

 조금 누워 있다가 출발할까 싶었지만, 비좁은 5평 남짓한 오피스텔에는 편안하게 몸을 뉘일 자리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나갈 채비를 하다가 습관적으로 들고 다니던 뜰채가 지금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찌할 줄 몰라 한동안 멈춰서 있다가, 선반 위에 놓인 그것에 불현듯 시선이 갔다.

 특제 다마스커스. 가죽으로 된 칼집에서 그것을 뽑아내자, 물에 회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무늬가 희미한 전등의 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났다. 밀렵꾼의 일을 시작하고 지석이 던지듯 내어준 단도다. 지금껏 한 번도 사용해본 적 없지만 지금 보니 새삼 비싼 걸로도 줬구나. 이렇게까지 지원을 해줘 놓고 왜 이제 와서 순수하게 있기를 강요하는 건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인간이다.

 서슬 퍼런 검신을 칼집에 도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각오의 크기만큼 꽉 붙잡은 채로.

 나는 현관문을 밀어 젖혔다.

 목적지는 광화문 광장.

 밤12시부터 오프라인 경매가 열린다고 공지된 장소였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10 비존재_ 10 (END) 2020 / 9 / 1 251 0 10331   
9 비존재_ 09 2020 / 8 / 31 259 0 10289   
8 비존재_ 08 2020 / 8 / 31 264 0 7612   
7 비존재_ 07 2020 / 8 / 28 272 0 7889   
6 비존재_ 06 2020 / 8 / 25 271 0 8213   
5 비존재_ 05 2020 / 8 / 24 273 0 9982   
4 비존재_ 04 2020 / 8 / 23 277 0 12644   
3 비존재_ 03 2020 / 8 / 21 277 0 5436   
2 비존재_ 02 2020 / 8 / 20 286 0 12123   
1 비존재_ 01 2020 / 8 / 20 427 0 1549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Guernica for the city
날개이름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