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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추리/스릴러
안의 너
작가 : 녹슨등잔
작품등록일 : 2020.8.18

과거의 악몽이 되는 3인방의 잔재를 떨치지 못한 부식이란 남자가 있다. 우연찮게 박나리라는 미스터리한 남자와 친구가 된 고독한 사람이다. 나리는 신비스런 힘의 소유자로,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객체로서 마주 보게 한다.
나리는 씻지 못한 죄를 저지른 자들로 하여금 낙인을 먹인다. 그가 모르는 곳에서는 X교라는 사이비 종교의 신봉자들이 세상을 잿빛으로 만들고 있다. 나리가 그들의 소굴로 흘러 들어간 건 순전히 우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 모두 지독한 악인들임에는 부정할 수 없고 부식의 소용돌이 또한 거기서 소멸되어야 한다.

 
21. 가족회의
작성일 : 20-08-28 07:02     조회 : 248     추천 : 0     분량 : 8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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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하하하!”

 웃음이 절로 터졌다. 용범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호문쿨루스를 보았다. 마치 아기에게 걸음마를 가르치듯 최대한 눈높이를 맞췄다. 웃통을 까고 있는 그는 분홍빛이 도는 젖꼭지로 아기를 유혹하듯 조금씩 뒤로 움직이면서 오라고 손짓을 보냈다. 정말이지 그의 젖꼭지는 크고 분홍색이었다. 그렇게 함몰 유두일 수 없었다. 동전도 끼워 놓을 수 있을 거 같았다.

 버러지와 같았던 큰숙모의 재탄생이 얼마나 감동스러운지 그는 빨개진 눈을 찔끔거렸다. 큰숙모는 몸을 꺾어대며 그를 향해 왔다. 첫 번째 호문쿨루스 보다 느리고 약해 보이지만 감동으로 말하자면 비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첫 번째보다 빠른 탄생이었다. 아직도 구더기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낙제생도 있는 마당에 얼마나 기특한지 몰랐다.

 “자, 이리 온. 괜찮으니까 천천히 와도 된단다.”

 용범의 눈썹 밑에서 무지개 두 개가 자라났다. 그는 호문쿨루스의 늘어진 젖가슴과 음모를 보면서 웃었다. 호문쿨루스의 맹한 눈을 보고도 웃었다. 자신의 뒤를 지키고 서 있는 첫 번째 호문쿨루스를 연상해서도 웃음이 나왔다. 큰삼촌이 저 젖가슴을 물고 늘어졌을 걸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었다. 사람의 팔을 물고 늘어지는 맹견을 자연 연상했다. 이 인간들 대단했을 것이다.

 마침내 호문쿨루스가 머리를 옆으로 젖히고 마주 섰을 때 그는 턱을 잡아끌어 자세히 보았다. 부패의 냄새가 나는 거 같기도 했다. 쓰레기더미에서 비를 맞는 더러운 인형을 본 적이 있는데 바로 이런 느낌이었다. 그는 호문쿨루스 두 기를 나란히 세웠다. 시험 삼아 앙가슴을 있는 힘껏 때렸다. 그는 표정만 유심히 살폈다. 당연히 무표정. 심드렁하게 맞고는 약간 주춤했을 뿐이었다. 그의 입술이 장난기로 인해 말려 올라갔다. 그는 뭐가 좋을까 싶어 주위를 살피다가 흔한 아이템을 선택했다. 식칼을 가져와 번갈아 가며 찔렀다. 자주색의 걸쭉한 피가 쪼르륵 흘렀다. 첫 번째 것은 검은 게 뽀글뽀글 나왔다. 그는 칼을 툭 던졌다. 거실 바닥에 떨어진 식칼이 마치 통발로 건져 올린 12월의 물고기처럼 기력 없이 몸을 들썩였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내 맘 알지? 너희들만큼은 정말 내가 사랑한다.”

 그가 호문쿨루스의 어깨 하나씩을 각각 잡고 안았다. 다시 낙인 사냥을 가야 했다. 두 가지 의미로 중요하니까. 돈을 번다. 죄인 청소를 한다. 그는 오로지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에만 매달리는 사람이었다. 가끔씩은 억울하기도 했다. 남들은 다 자기네 인생을 사는데 자신은 오로지 남을 위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이런 생활에 만족했다.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다워질 수만 있다면! 그는 인간, 반신, 신이 아닌가? 아니, 신이 아닌가?

 “너희들이 말을 할 수만 있다면 더 좋을 텐데. 그럼 내 외자 이름을 가르쳐 주었을 텐데 말이야. 신. 어려운 이름도 아니잖아? 한 글자라 발음하기도 어렵지 않고. 신…….”

 자신이 말하고도 전율이 일어 전신에 경련이 왔다. 몸에 더러운 오물이 묻고 있었음에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단단하게 선 젖꼭지가 호문쿨루스의 얼음장 같은 살결에 짓눌렸다. 돌덩이처럼 단단하기에 시체들의 거무죽죽한 외피에 손상을 입힐지도 몰랐다. 당연히 상상 속의 상황이지만.

 “너희들은 내 거야. 알지? 응? 너희들은 내 거란다. 대답 좀 해주면 안 될까?”

 

 일흔넷이다. 적은 나이는 결코 아니었다. 석구는 일가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늘이 대체 무엇에 노했기에 이리도 힘든 시련을 주는 것이란 말인가. 그는 접어놓은 휠체어를 굳이 펼쳐서 상석의 맞은편에 두고 있었다. 마치 어머니와 마주하고 있듯이. 아직도 모친의 온화한 눈웃음이 선했다.

 “어머니, 대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또 장례를 치렀습니다! 또 죽었어요!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요? 저는,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누구란 말입니까? 도와주세요. 좀 도와주세요……!”

 흐느낌으로 시작한 것은 금세 오열로 변했다. 그는 살갗이 흘러내리는 손등으로 두 눈을 가린 채 흑흑 울었다.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렸다.

 

 해연은 불 꺼진 방에 누운 채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만 감았다가 뜨고 감았다가 떴다. 갑자기 웃음을 터트린 이유는 웃긴 생각이 나서였다. 그뿐이었다. 웃긴 생각이 좀 나더랬다.

 

 진리는 힘없이 우유 그릇에 시리얼을 부었다. 엄마아빠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두 번 다시는 보지 못한다는 걸 안다. 시리얼 상자를 옆에 둘 때 시리얼이 몇 개 흘렀다. 그걸 가지고 편 가르기 놀이를 했다.

 “언니?”

 진리가 말했다. 작은 소리라 문 닫힌 방까진 전달되지 않을 터였다.

 “해연이 언닌 같이 놀아 줄 것처럼 해놓고 혼자만 놀아. 이게 뭐야…….”

 

 아까부터 집 안을 온통 번잡하게 돌아다니던 현승이었다. 뭔가 생각날 듯하면서 안 난다는 듯 그는 눈 밑 살만 부풀렸다. 그는 몸을 풀듯 어깻짓을 하면서 숨을 후후거렸다. 솔직히 그는 집안의 종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마치 손에 흙을 묻히고 있는 기분이었다. 온몸이 꿉꿉했고 사흘 정도를 씻지 못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마을을 떠나야 할 거 같았다. 아무래도 터가 문제인 듯했다. 가족들이 이렇게 죽어 나가는데 평온하기만 한 일상이라니. 뭔가 잘못 돼도 단단히 잘못된 게 분명했다. 이럴 게 아니라 낙인 수집가 녀석에서 전화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연락을 했지만 용범은 졸린 소리로 받는 것이다. 전화도 불통인 느낌에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천불이 났다. 하지만 그는 가까스로 화를 삼키면서 요즘의 상황에 대해 논하고자 했다.

 “너무 과민 반응 아니야?”

 “과민 반응? 너 미쳤냐?”

 “형, 피곤해. 나중에 전화해 줄래? 어제 낙인 채집하러 갔다가 공쳤다고. 좀 봐줘.”

 “야!”

 “끊어.”

 “야!”

 믿을 수 없게도 전화가 끊겼다. 현승은 결단코 이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현관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는 그였다. 지금 용범만큼 집안의 대들보격인 존재가 없었다. 자신과 저울질을 하자면 용범에 대한 모욕이었다. 자신의 위치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위상이었다. 그럼 누가 용범을 조져놓을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하고 다시 생각해도 조부뿐이었다. 그리고 생각이 위임으로 옮겨갔다.

 제사장 자리가 누구에게로 돌아갈 것인가? 그는 심각한 현 시국에도 불구하고 절망감에 몸서리쳤다. 용범이 얼마나 막대한 존재로 여겨지는지 몰랐다. 285밀리미터 밑창이 죽음의 그림자를 만들며 지나가는 걸 올려다보는 개미가 된 기분이었다. 그는 허탈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서 볼이 볼록해질 정도로 너털웃음을 했다. 탈주 닌자의 심정이 이런 게 아닐까 단정을 지었다.

 

 “그래, 나중에 전화할게.”

 은샘의 전화를 끊은 현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방안을 서성였다. 자신이 가진 돈이 얼만지 셈을 하면서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은 맞았다. 계좌에 있는 걸 다 털어도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일단 작은 집을 얻을 생각이었다. 그 뒤는 알바를 하든 뭘 하든 할 것이었다. 낙인 수집을 시도해도 되지만 혼자서는 자신이 없었다. 그는 용범이 아니었다.

 나중에 자신의 가족이 생긴다면 그때는 모른다. 그는 선택받은 혈통이 아니었던가. 살다 보면 이 능력이 사라질 수도 있었다. 그런 가능성을 배제 못 한다. 하지만 당장의 일이 시급했다. 이곳에 역병이 돌고 있었다. 신이 어떤 끔찍한 실수를 저지른 게 분명했다. 여기서 더 있다간 살아남지 못한다. 그는 초조하게 웃으면서 몸을 털었다.

 

 하얀 안개등이 후덥지근한 밤공기 중에 부슬부슬 피어올랐다. 헤드라이트가 꺼지자 승합차는 마치 전설의 동물처럼 자취를 감췄다. 용범은 운전석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혀로 딱딱 소리를 내다가 앞니를 훑었다. 오면서 먹었던 홍삼 캔디 맛이 났다. 허탕을 치고 돌아오는 길이라 허탈하기만 했다. 그는 손을 뻗어 조수석의 4연발 마취 총을 무릎 위로 가져왔다. 새로 얻은 천상의 피조물인 듯 조심스럽게 엄지로 문질러댔다. 문득 룸미러를 본 그는 여러모로 놀라고 말았다. 웃음꽃이 핀 얼굴이 너무도 낯설었기 때문이다.

 

 일가의 통솔자이자 제사장은 무릎을 탁 치고 일어났다. 잠에서 깬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명료한 눈을 하고 있었다. 새벽인 걸 안 이상 잠옷 바람으로 방 안만 배회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이 밝자마자 가족들을 소집할 생각이었다. 꿈에서 어머니의 계시가 있었다.

 아들아 가족들을 이끌고 떠나가라.

 아직도 그 목소리가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그는 주먹으로 손바닥을 딱딱 때리면서 연신 시간을 확인했다.

 

 용범은 손을 더듬어 머리맡의 스마트폰을 찾았다. 얇은 커튼 너머가 하얗게 번져 있었다.

 “여보세요?”

 용범이 졸음이 깨지 않은 음성으로 말했다. 어제 많이 활동을 했지만 체력이 뺏길 일이 없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할애비다. 건너오너라.”

 “네?”

 “건너오너라. 가족회의를 좀 하려고 한다.”

 그렇게 전화가 끊겼다. 용범은 시간부터 확인했다. 아직 오전 7시도 안 되었다. 그는 팔로 눈을 가리고 누워 있다가 짜증을 내며 일어났다. 머리는 물 칠만 좀 하고 세수 정도만 했다. 간밤에 자란 턱수염을 손바닥 끝으로 쓸어대면서 가글 액을 한 모금 입에 넣고 뱉었다. 막 현관을 나서는데 좀비들처럼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는 가족들이 보였다. 뜬금없이 반갑게 느껴졌다.

 밖에 진리가 보이기에 가서 조심스럽게 놀라게 했다.

 “아…… 하지 마.”

 진리가 싫은 티를 내며 말했다.

 그는 진리를 앞질러 가서 먼저 조부의 현관문 초인종을 눌렀다. 진리가 노려보고 있었다. 볼을 꼬집자 치워냈다. 한 마리 나비처럼 그의 검지가 작고 하얀 코에 내려앉았다. 코에 크림을 묻힌 것처럼 아이는 노려보기만 했다. 나중에 크면 저 작고 앙증맞은 코가 꽤 날렵해질 것이다. 이 아이가 커서 얼마나 예뻐질지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자신과 같은 눈웃음을 가진 건 아니지만 이 아이만큼은 다른 식으로 크길 바랐다.

 엑스교를 부정하고자 하는 건 아니지만 때 하나 없는 눈망울을 보자니 숙명이 가혹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는 약간은 웃었다. 적대감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고자 함은 아니었다. 꽃을 먹는 토끼에게 장난으로라도 으르렁거리는 인간이 있다면 정신이 멀쩡한 상태는 아닐 것이다. 더욱이 그 토끼가 같은 혈통이라면.

 하지만 현관문이 열리면서 그의 표정에 이상한 것이 스쳐 지나갔다. 할아버지에게 안기기 위해 달려가는 어린 여자아이가 완전히 남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순수하기 그지없고 만지면 부서질 듯 약한 개체가 실은 망각이 빚어낸 환상이라고 여겨졌다. 그는 엑스교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해 냈다. 정확하게는 거기서 저 여리디여린 아이가 무엇을 했음을 상기했다. 아이는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피도 마셨다. 눈물 한 방울 흘리는 법 없이.

 “뭐 하고 있냐? 안 들어오고!”

 조부가 으름장을 놓았다.

 “아, 예. 네.”

 들어가는 순서대로 소파에 앉았다. 당연히 상석은 조부의 차지였다. 조부는 두 팔을 무릎에 올리고 근엄한 얼굴로 식구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크게 헛기침을 했다. 자손들이 다섯밖에 되지 않았다. 그중 큰집 식구가 3명으로 제일 많았다. 천지고아가 되어버린 진리지만 해연이 돌봐주고 있다. 용범이야 나이를 먹을 대로 먹었고 원래 족제비 같은 놈이라 걱정할 것이 없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조부가 따져 묻듯 말했다.

 용범은 네모지고 큰 고개를 숙인 채 눈만 움직이고 있었다. 눈웃음이 어찌나 알록달록한지 진리는 아까의 일에도 불구하고 싱글벙글 쳐다보았다. 해연이 진리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서는 할아버지에게 관심을 돌렸다.

 “이사 가죠.”

 현승이 대번에 말했다. 용범 쪽으로 시선이 슬쩍 지나간 건 아까의 앙심 때문이었다. 전화 받는 태도가 그 꼴인 데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이제는 아주 무시하기로 작정을 한 것이다. 그는 혀로 입 안쪽을 쑤셨다. 왼쪽 볼이 튀어나오면서 두 눈에는 살기 어린 미소가 피어올랐다.

 현호는 가족들의 눈치를 슥 살필 수밖에 없었다. 마치 자신의 계획이 들통이 났고 지금 그것을 취조하기 위해 모인 게 아닌가 한 것이다. 허상 같은 일이지만 무서운 생각이 버럭 났다. 그는 반바지에 올라가 있는 손을 은근히 소파에 닦았다. 절로 땀이 배어났다. 최대한 눈썹을 들어 올려 편안한 척하려 했으나 쉬운 일은 결코 아니었다.

 “이사아아?”

 조부가 버럭 했다.

 ‘오늘따라 주둥이가 왜 저래? 평소보다 더 지랄이네.’

 용범의 눈웃음 뒤에 있는 생각이었다.

 진리는 다리를 흔들고 싶은 나머지 최대한 소파 깊숙이 들어갔다. 또래보다 성숙한 탓에 다리도 길었다. 양팔로 중심을 잡고 두 다리를 번갈아 가며 수직으로 흔들었다.

 “김진리!”

 조부가 꾸짖듯 말했다. 하지만 양쪽 광대가 솟아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해연이 진리의 다리에 손을 올렸다.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잖니?”

 어느 때보다 의욕이 없는 목소리였다.

 “이사라. 왜 이사를 생각했지? 다른 여러 가지 중에서 왜 이사를 가야 한다는 거지?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런 생각이 나온 이유가 뭐인가 하는 게다.”

 “아, 이유요?”

 현승의 눈 밑이 길게 늘어났다. 생각지도 못한 참변이었다. 가슴에서부터 불덩이 같은 게 치고 올라오는 걸 겨우 삼켰다. 노인네가 노망이 났나 싶었다. 갑자기 조부의 하나부터 열까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는 노인네 주제에 별 지랄을 다 하는구나 싶은 것이다. 엑스교? 엿이나 먹으시지! 그의 머릿속에 있던 가족이란 관념이 파괴되고 있었다. 누가 낫고 누가 하자고 하는 것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어제오늘 많은 일이 있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는 가족들을 모두 둘러보았다. 마치 초면인 양 두루 살폈다. 이런 생각을 안 하고 산 건 아닌데 갑자기 모두를 죽이고 싶었다. 목구멍이 근질근질했다. 혹시 오늘 죽고 싶으냐고 물어 보고 싶어 환장을 할 거 같았다.

 “할애비가 묻잖느냐! 예끼 이놈아! 꼴 보기 싫다! 뒤돌아 서 있어!”

 “네?”

 현승이 빨개진 얼굴로 되물었다.

 그만 그런 게 아니었다. 모두들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현승이 어떻게 나올까 하는 게 초미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현승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초긴장 상태였다. 하지만 현승이 순순히 뒤돌아서는 걸 택함으로써 긴장감이 사라졌다. 그날 안건 중 최고는 이사였다. 이사를 가기로 합의를 본 것이다. 그 순간 현승의 동공이 떨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사람의 표정을 흉내 내는 그로테스크한 로봇 마네킹이나 지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벽장문이 떨어져 나가며 안에 있는 것들이 쏟아져 내렸다. 현승은 왼쪽 볼을 볼록하게 만들면서 야구 배트로 바닥을 콩콩 찍어댔다. 욕은 일절 없었다. 배트를 휘두를 때만 목 막히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 배트로 내리치자 못으로 박은 두 개의 받침대에 올려진 선반이 떨어졌다. 그는 발을 양쪽으로 크게 벌려 간신히 장식물들을 피했다. 오기까지 생겨버린 그는 닥치는 대로 깨고 부수기 시작했다.

 그러다 사금파리가 발바닥에 박히는 바람에 엉거주춤 쓰러졌다. 신고 있던 슬리퍼가 날아간 걸 찾아 신지 않은 탓이다. 마치 누군가 보고 있기라도 한 듯 자존심 때문이라도 슬리퍼를 무시한 결과였다. 발바닥이 금세 피로 흠뻑 젖어서 꺼끌꺼끌한 주름살을 타고 진하게 흘렀다. 그는 씩씩거리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발바닥이 귀두만큼이나 예민해져 버려서 쉬이 손이 가지 않았다. 웃음만 나왔다. 열이 받아서도 있지만 갑자기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왜 자신이 시커멓게 살고 있나 싶었다. 남들처럼 색을 띠고 활기차게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31살이었다. 서른이 되기 전 겨울에는 세상이 끝난 듯 참담한 생각밖에 없었다. 인생의 말기에 있다는 지론까지 생길 뻔했다. 하지만 그는 서른을 무사히 넘기고 한 살을 더 먹었다. 누가 보아도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이였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를 무시한다. 명백하게 말이다.

 그는 천장을 노려보았다. 마음을 가라앉히려 이를 딱딱거렸다. 집안의 우두머리인 조부와 대들보라고 할 수 있는 용범이. 하필 두 사람이 그를 힘들게 하고 있었다. 아까의 처사는 정말이지 잔인했다. 얼마나 굴욕적이었는지 모른다. 속으로 간 칼날 만으로만 해도 전국 팔도를 시커멓게 물들이고 남을 정도였다.

 그는 끙 소리를 내며 발이 있는 곳으로 상체를 움직였다. 발바닥의 신경이 마치 귀신 들린 피아노 건반에 호응하는 끔찍한 선율 같았다. 온몸이 다 시큰거렸다. 그는 비틀린 소리를 내면서 겨우 발바닥에 박힌 걸 뽑아냈다. 손가락 마디 정도밖에 안 되는 거였다. 결국 그런 거였다. 그는 이리도 나약하고 겁이 많은 얼뜨기 같은 놈인 것이다. 순간 용범의 얼굴이 생각이 난 그는 매트리스를 움켜쥐었다. 그러다 몸을 재빨리 돌려 빨간 토막 지문을 찍어내던 손으로 주먹질을 시작했다.

 홧김에 한 주먹질이었다. 온몸에 불길이 번지는 바람에 그는 더 이상 제 몸을 가눌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염력을 쓸 수 있었다면 팔만 뻗어 배트를 불러들였을 것이다. 아까는 어떻게 방 안을 누빌 수 있었는지 그도 모른다. 발바닥에 뭐 하나 정도 들어간 걸로 끝난 게 기적이었다. 지금 보니 살벌한 전쟁 통이 따로 없었다.

 살생을 피하겠다는 의지로 발길 앞을 빗자루질하는 땡중들이 생각났다. 그들이 가는 길마다 싸리 빗자루의 시그니처가 남는다. 이 잔인무도한 대량학살자들처럼 뭐라도 있어야지 안 될 거 같았다. 그런 뒤에도 분노가 남아 있다면 눈에 띄는 걸 모조리 박살 낼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30분이 지난 뒤에도 조립식 건물은 고요하기만 했다. 이 집의 상황을 아는 누군가라면 건물 밖에 있기도 무서울 정도의 적막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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