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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로맨싱 사가 : 백발마녀전
작가 : 백발마녀
작품등록일 : 2020.8.23

똥싸개, 스토커, 시너테러범을 상대로 성장하는 쌍둥이 남매와 친구들의 이야기.

 
13화 ~ 16화
작성일 : 20-08-27 00:39     조회 : 247     추천 : 0     분량 : 23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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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화. 충혈

 

 평일은 아빠도 회사에서 바쁘시고, 나나 희주도 학교 수업에 야자가 있는 날들은 밤 10시가 넘어서야 귀가하였으며, 야자가 없는 화요일과 목요일은 인강으로 빡빡한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원래는 희주와 같이 ‘인강’을 들었는데 지난 몇 주간 희주는 독서실에서 따로 공부한다고 하였기에, 근래 들어서, 나 혼자 따로 듣는 날이 많아졌다.

 

 화요일에도 “다리털 만나냐?” 라고 떠봤지만, 대꾸도 안 하고 버스에서 내려서는 혼자서 집이 있는 빌라길 쪽이 아닌 오거리 교차로 방향으로 다시 길을 내려가 버렸다.

 

 진짜 독서실을 가는 것인지 뒤를 밟아 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걸 남매간의 애정 어린 우려나, 혹은 웃어넘길 수 있는 무언가로 받아줄 것 같지 않아서 그만뒀다.

 

 커피숍 아저씨가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고, 혼자서 빌라길 집 방향으로 뛰어 올라갔다. 물론, 희주에 대한 염려를 떠나, 혼자서 이 길을 올라가는 것이,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난 한 주간 일어난 일을 생각하면 말이다.

 

 ---

 

 수요일은, 야자가 있는 날이었다. 석식 급식비도 다 내서, 카페테리아 식당으로 갈 수 있지만, 영양쌤은 저녁에는 이미 퇴근해서 없기에, 아랑이랑 밖으로 나가서 학교 앞 떡볶이나 먹자고 했다.

 

 “음…, 그럴까?” 아랑이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좋다고 했다.

 

 나도, 잠시 지난주 5인조 사건이 머릿속에 살짝 스쳤지만, 딱히 학교 앞인데 무슨 일이 있겠나 싶었다. 게다가 아직 해도 안 졌는데 말이다. 뒷자리에 영진이랑 재곤이가 “너희 떡볶이 먹게? 같이 가자 우리도,” 라고 해서 우르르 일어났다.

 

 “야 너희 밥 안 먹고 다들 또 어디가?” 교실을 나서는데 희주가 물었다.

 

 “신경꺼라” 내가 대꾸하고 아랑이를 밀었다. 아랑이가 밀려 나가며 “떡볶이”라고 입 모양을 하며 찍어 먹는 시늉까지 했지만, 그걸 희주가 알아봤는지는 모르겠다. 그랬다면, 분명 “아빠가 급식비까지 내주셨는데 자꾸 따로 돈 쓸래?!”하고 한소리 했을지도.

 

 서둘러 학교를 빠져나왔다. 4명의 새파랗게 어린 청춘이 학교를 나서는 순간은 이유를 불문하고 무엇인지 모를 에너지가 넘친다. 후련함을 넘어, 언뜻 상쾌하기까지 하다. 영화 ‘친구’에서처럼 말이다.

 

 “아저씨 즉떡 4인분이요. 라면 사리 2개 추가요!” 영진이가 자리에 앉자마자 큰소리로 주문했다.

 “2개?” 아랑이 놀란 듯 반문했다.

 “1개?”

 “그럴 리가. 묻고 떠블로 가!”

 “...아저씨 사리 2개 말고 4개요!” 영진이가 다시 큰소리로 주문했다.

 재곤이 조금 어색하게 웃었다.

 

 “재곤 씨, 자신 없나요?~~” 내가 웃으며 재곤을 봤다.

 “아니, 다 못 먹을까 봐…” 재곤이 답했다.

 

 이런 저런 잡담을 나누는데, 잠시뒤 떡볶이집 비닐 문이 - 나무로 된 문틀에 비닐을 잘라 맞춘듯한 미닫이문이 - 열리고, 공립 애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괜스레, 얼굴을 돌리게 되었다. 우리 학교 옆에 있는 떡볶이집인데도 말이다. 그중에서 특별히 꾀죄죄하게 생긴 한 명이, 가게 안을 둘러보다가 우리 테이블을 보더니, 재곤이를 알아봤다. 그리고는 다가와 반가운 척 인사를 건넸다.

 

 “이야, 여기서 또 보네. 아주 우연히도 말이야 크흡.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응? 응….” 재곤이 어색하게 그를 보고 인사한 후, 우리를 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한 번에 설명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는 듯.

 

 “친구들이야?” 가까이서 보니 얼굴이 시커먼 게 꼭 뭐랄까.. 세수를 안 해서인지 때가 낀 것 같았다.

 “응….”

 “난, 천승현이야. 알지? 길 건너 개나리 고(高).”

 

 “응 알지. 개나리 고등학교” 내가 이죽거리며 대답했다. 시건방진 분위기가 묘하게 도전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알아?! 하하하. 너가 준후 죽방치고 도망간 새끼냐?” 꾀죄죄한 놈이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일전에 ‘5인조’ 중 아랑에게 맞았던 애 이름이 ‘준후’였나보다.

 

 “야! 너희 싸울 거면 나가!” 떡볶이집 아저씨가 주방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아무리 (주방에서) 칼 들고, 불 쓰는 아저씨라도 17살 남자애들만 잔뜩 모여있으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아저씨, 우리는 먹고 갈 거예요. 승현아, 네가 데리고 나가. 준후랑 애들 밖에 있잖아~.” 공립 쪽 애들 중 대여섯 명이 먼저 자릴 잡고 있었는데, 저렇게 얘기하는 걸 보니 밖에 그 ‘5인조’가 더 있는 거 같아 보였다.

 

 ‘젠장. 많다.’

 

 “야, 너흰 나와. 아저씨, 얘네가 주문한 거 저쪽 테이블로 주세요” 꾀죄죄한 승현이라는 애가 우리를 보고 먼저, 그리고 나서는 주방을 향해 외쳤다. 그리고는, 가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아저씨의 답은 없었지만, 몇 놈이라도 밖으로 나가는 듯하니 안도하는 느낌이었다.

 

 “너 친구야?” 승현이라는 놈이 나가자, 아랑이 재곤이에게 물었다. 여느 때와 달리 진지한 목소리였다.

 “아니…. 중학교 때 잠깐 알던 앤데, 우리 엄마가 쟤네 집 식당에서 일하시다 보니…”

 “그래서?”

 “...너 나갈 때 한 번만 알려주면 된다고… 미안하다, 이렇게 일이 커지는 상황이 있는지는…. ” 재곤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야이 씨, 같은 반인데, 지금 우리 속이고, 여기 온 거야?” 영진이 황당한 듯 말을 뱉었다.

 “...”

 

 “됐고. 지금 나갈 건데, 같이 나오던가. 이참에 본때를 보여주지 뭐.” 아랑이 호기롭게 말했다.

 “...응.” 재곤은 한껏 긴장한 표정이었다. 저런 표정.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나도 어릴 적 애들이 내 짧은 손가락을 보고 이상하다고, 병신같다고 하면서 시비를 걸어올 때, 대부분 저렇게 겁이 났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말이다. ‘엄마가 식당에서 일하시는 게 뭐 어떻단 말인가!’ 짜증이 났다.

 

 “나와서 옆에 서 있기만 해. 너한테 최대한 피해 안 가게 할게. 그렇게라도 시작해야 하지 않겠냐?” 아랑이 사뭇 어른처럼 말하고는 여유롭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와 영진이도 호기롭게 일어나자, 재곤이도 주저하더니 일어섰다.

 

 “아저씨, 여기 돈 먼저 낼게요. 저희 주문한 거, 테이블에 놔둬 주세요. 식기 전에 올게요.” 아랑이 지갑에서 만 원짜리를 꺼내 아저씨에게 건네고 먼저 식당 문을 나섰다.

 

 “너가 관우냐?” 아랑이 보여주는 여유에 나도 모르게 동화되어 농을 건넸다.

 “야, 관우가 즉떡 먹은 거야?” 아랑이 답했다.

 

 '큭.'

 

 ---

 

 밖에는 예상대로 방금 먼저 나간 꾀죄죄한 ‘승현’이라는 애와 지난번 ‘5인조’가 담배를 피우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번에 아랑이에게 기습적으로 맞은 놈, ‘5번’ 준후가 험상궂은 얼굴로 “존나 오래 걸리네!”라고 하자, ‘4번’이었던 놈이 “야, 저쪽으로 가자.”라고 하고는 그를 진정시키고, 일행을 이끌고 떡볶이 가게 뒤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당연히 우리보고 따라오라는 명령이자, 일종의 신호였다.

 

 누가 들어도, 절대, 지금 여기서 싸움을 하자는 신호는 아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아랑이 눈 한번 깜짝할 새도 없이, 달려나가더니, 온몸의 체중을 실어서 4번을 발로 밀어 찼다. 이미 체급에서도 그렇지만, 작정하고 달려 나오던 놈과 무방비상태로 몸을 틀어서 옆으로 돌아선 놈의 충돌은, 그 녀석을 저 멀리 도로 앞까지 날려버리기에 충분했었다. 술취한 사람 마냥 균형을 잃고 게걸음으로, '어, 어! 어, 어~!'하는 꼴.

 

 아랑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재빨리 뛰어 따라가서는, 쓰러져 몸을 일으키려던 4번의 가슴팍 옷깃과 허리춤을 두 손으로 움켜잡고, 왕복 2차선 도로 한복판까지 그를 집어 던지듯 밀어 내쳤다. 바로 앞에 차 한 대가 지나간 직후였다.

 

 공립 쪽 애들은 물론이고, 나를 포함해서 우리 쪽도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랑은 숨 한번 내쉬지 않고, 그 자리에서 다시 한번 공중에 붕 하고 뜨더니, 쓰러진 그놈의 머리를 발로 내리찍었다. 축구공처럼 머리가 도로 위에 ‘텅~’하고 부딪혀 튀어 올랐다.

 

 끼~익!

 

 도로 양쪽에서 다가오던 차들이 급정거하며 급브레이크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지만, 아랑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리고는 쓰러진 놈의 상의를 머리 위로 뒤집어 재껴 씌우더니, 한 손으로 젖혀진 상의와 목덜미를 잡아 누르고, 다른 한 손을 어깨 위로 높이 치켜들더니, 가차 없이 후려치기 시작했다.

 

 손바닥으로 떡이라도 메치듯, 평평하지 않은 부분만 골라서. 평평해질 때까지.

 

 이제 도로 양쪽에는 꽤 많은 차가 멈춰 서 있었지만, 아랑이는 여전히 개의치 않고 미친놈처럼 '4번'을 손바닥으로 내리찍었다. 가려진 얼굴을 진짜 떡으로라도 만들 것처럼.

 

 퍽! 퍽! 퍽!

 

 거의 190 cm 가까이 되는 덩치가 눈이 돌아간 사람처럼 미친 듯이 주먹을 내리쳐대는 모습에는 누구도 감히 나서서 말릴 수 없는 위압감 같은 게 있었다. 마치 눈앞에서 큰 범이나 곰이 그 앞발을 휘두르는 모습을 상상해 볼 때처럼 말이다.

 

 불과 몇 초도 되지 않는 장면이었지만, 대기가 멈춘 듯, 모두 그저 지켜만 보았다. 얼마 후, 아랑이 숨을 고르느라, 주먹질을 잠시 멈추었고, '4번'이 잔뜩 움츠러든 경직된 자세로 길 한복판에 그렇게 웅크려 있자, 그때야 여자친구로 보이는 ‘3번’ 수미가 ‘오빠!’ 하며 도로 한복판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나서야 나머지 무리도 뒤따라 가서, 그놈을 부축해 떡볶이 식당 앞쪽으로 왔다. 길에 멈춰선 차들도 우리만 쳐다보고 있었고, 식당에서도 안에 있던 무리가 우르르 기어 나왔다. 수미라는 여자애가 ‘오빠’라고 부른 거 보니, 아마 그놈이 고3이거나, 일 년 꿇은 게 아닌가 싶었다.

 

 그때 아랑이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잘 못 본 것인지는 모르지만, 약간 신이라도 난 듯.

 “보는 사람 많다. 난 상관없는데. 어떻게, 더 할까?”

 

 그는 때리기만 했는데, 아드레날린이 과다 분비해서인지, 그의 양 눈에 실핏줄이 터졌다.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호흡은 뜨겁게 달아올라, 추운 겨울도 아닌데 입에서 하얀 김이 나오는 것 같았다. 내가 이런 무서운 놈과 친구였다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중학교 때도 덩치는 남달리 컸지만, 뭔가 싸움을 피하는 순둥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말이다. 또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며칠 전에 대뜸 저 '5번' 준후라는 놈을 때리고 학교로 들어간 것도, 이젠 이해가 된다는 생각 말이다. 무언가, 꾹꾹 눌려서 터트리고 싶은 ‘네거티브’한 에너지를, 이런 순간들이 왔을 때 주저하지 않고 한 번에 분출하는 느낌이었다.

 

 공립 애들은 누구 하나 먼저 나서질 못했다. 지금 처맞은 '4번'이 멘탈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예를 들어 ‘다굴치는데 장사 있어!? 다 조져!’라도 외쳤을 텐데, 그놈은 전혀 그럴 상태가 아니었다. 압도적인 선빵은 무서웠다. 그나마 남자들 판에 유일한 여자여서 그런지, 수미라는 애만이 차가움을 유지한 채 소리쳤다.

 

 “이대로 끝날 줄 알아!? 각오해. 너희 학교 애들 싹 각오하라고!”

 

 시비는 본인들이 걸어놓고, 저런 소리를 할 수 있다는 게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스스로가 창피해서 나오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 눈빛을 읽었는지 그녀는 나를 좀 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노려봤다. 그리고 읊조렸다, “어디서 찐따 병신같이 생긴 게…”

 

 아랑을 마주 보며 하지 못하는 분노를 만만해 보이는 나를 향해 뱉는 것 같았다.

 

 “...가자, 야자 늦겠다.” 내가 아랑이 팔을 잡으며 말했다.

 영진이도 재곤이도,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이곤 학교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아랑이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하더니 이내 내 팔에 이끌려 못내 따라왔다.

 

 학교까지 걸어가는 동안에도 영진이와 재곤이는 말을 걸지 못하고 있었다. 슬쩍 쳐다보니 아랑이도 아직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야, 즉떡은 어떡하냐.” 내가 말했다.

 아랑이 날 보더니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그러게 다 식었겠다.”

 

 “오늘 일은 학교 가서 소문내지 말자.” 내가 말했다. 영진이와 재곤이에게 하는 말이었다. 뭔가 너무 일방적인 폭력이라 누군가에게 얘기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우리가 먼저 시작한 것도 아닌데, 누가 들으면 고등학생 수십 명이 패싸움이라도 했다고 오해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러면 아랑이에게도 좋지 않을 것 같다고 말이다.

 

 “근데, 넌 어디서 그렇게 싸움을 배웠냐? 학교 수업에 전교 일 등만 따로 배울 수 있는 싸움 수업이라도 있냐?” 내가 분위기를 가볍게 해보려고 우스갯소리로 물었다.

 “아니…. 우리 아빠.”

 “너희 아빠? 아빠가 기술 같은 거 알려주신다고.? 아까처럼 옷 뒤집어서 얼굴 덮고 그러는 거?”

 “아니, 큭큭 그건 내가 한번 그렇게 맞아보니까 답답해서, 그냥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나온 거고…” 아랑이 나의 바보 같은 질문이 민망하지 않도록 웃으며 대답했다.

 

 “아…, 내가 괜한 소리를….”

 “아냐, 뭐 우리 아빠만 때리겠냐. 다 맞고 사는 거 아냐? 집에서도 맞는데 밖에서 저런 ‘쪼랩’들한테까지 맞을 순 없지 흐흐.”

 “...”

 

 나는 집에서 맞은 적이 없었다. 엄마가 떠난 후로 오히려 나나 희주를 떠받들며 사셨던 것 같다, 우리 아빠는.

 

 화가 나는 것은 모두 회사에 두고 오시는 것처럼 말이다. 아니, 오히려 집에서 나나 희주 때문에 화가 치밀어 오르는 순간에도 그걸 다시 회사로 가져가시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매일 늦게 오시는 게 아닌가 생각도 들었었다. 그래야 다음날 아침밥을 기분 좋게 차리고 나설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빠도 회사에선 절대 쉬운 사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다.

 

 

 

 

 14화. 시너 냄새

 

 (회상)

 

 공부보다는 게임에 한참 정신이 팔려있을 시기였다. 방학이라, 그날도 낮에 학원을 빠지고 집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중학교 때 일이었다. 희주는 학원에 있었기에, 혹시라도 아빠가 갑자기 들어오시면 재빨리 숨으려고, 희주 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텅! 하는 소리와 함께 빌라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곧이어 아빠의 가쁜 숨소리가 들려왔다. 3층에서 빼꼼히 방문을 열고, 아래층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서 차장님, 경찰 올 때까지 문 꽉 잡고 있으셔야 해요!”

 

 “안되긴 뭐가 안됩니까. 내가 겨우 몸으로 막아 놨잖아요! 그 새끼 대화하러 온 거 아니야!”

 

 ‘뭐가 뚫린다는 거지?’ 자리에 앉아서 좀 더 몸을 기울였다.

 

 “...아니 차장님. 나 참, 거기서 우리 애들 얘기가 왜 나옵니까? 내 가족 걱정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봐요, 서 차장! 이 사람이 진짜…. 거기서 애들 엄마가 없다는 얘기가 왜 나와!?”

 

 아빠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뭔가 수화기 반대편에서, '문을 잡고 누군가를 막아야' 하는데, ‘가족 걱정도 하셔야죠~’, 같은 얘기를 들으신 것 같았다.

 

 “그 새끼 차가 포르쉐야! 말만 중소기업이지, 이건 계약도 안 하고, 미팅 몇 번 한 거로 발주한 적도 없는데, 지들 악성 재고까지 다 가져가라고 쇼하는 거라고!”

 

 “법대로 안되니까, 시너 처바르고 온 거라고! 깡패 새끼라고!”

 

 “경찰 올 때까지 뚫리면 안 돼! 그럼 다 사표 쓰고 나가는 거야! 문 꽉 붙잡고 있어요!”

 

 그리고는 아빠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닫지 않고 문 뒤에 숨어 기척을 숨겼다. 게임은 이미 스피커와 모니터를 꺼 둔 상태였다.

 

 부스럭부스럭하는 소리가 나더니, 아빠가 옷을 갈아입고 다시 계단을 바쁘게 내려갔다. 그리고 세탁기 문이 열리고,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아닙니다. 지금 다시 나가고 있습니다. 네. 네.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이번에 좀 더 높은 분과 통화를 하시는 것 같았다. 아빠가 다시 전화로 그렇게 간략히 말하고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살며시 방에서 나가서, 아빠 방을 먼저 봤다. 신발 자국이 바닥에 있었다. 아빠가 구두도 벗지 않고 3층까지 올라온 것이었고, 그런 일은 내가 기억하기로는, 희주가 어릴 적 혼자서 아무도 없을 때 오래된 고추를 먹고 배가 아프다고 했을 때 말고는 없었던 것 같았다.

 

 구두 발자국을 따라 2층으로 내려가니, 역한 냄새가 올라왔다. 시너 냄새였다. 현관 옆 캐비닛 위에는 회사 소화기와 소화기 분말로 보이는 밀폐된 봉지가 눈에 들어왔다. 회사 이름과 ‘소방방재팀’이라고 적힌 스티커가 큼지막하게 붙어 있는 것으로 봐서 회사에서 들고 오신 듯했다. 세탁기 안엔 속옷만 돌아가고 있었고, 화장실 욕조에는 아빠 회사 잠바가 비누 거품 잔뜩 먹은 욕조 물 안에서 무겁게 잠겨있었다.

 

 무슨일인지는 나중에 뉴스를 통해서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어떤 중소기업 대표가 시너로 가득 채운 통을 들고 아빠 회사 정문을 돌파해서 거래 잔금을 달라고 방화 소동을 벌였다는 얘기였다. 경찰이 올 때까지, 회사 임직원들이 온몸으로 막았고, 그 과정에서 그 중소기업 대표가 일부 회사 임직원 몸에도 시너를 뿌리는 바람에, 자칫하면 심각한 인명 사고가 날뻔했다는 뉴스였다. 그게 아빠가 연관된 일이라는 것은 분명했지만, 차마 물어볼 수는 없었다. 내가 그날 집에 있었던 것도 설명하기 어려웠지만, 그날 아빠의 분위기를 기억해 볼 때, 분명 시치미를 뚝 떼고, 당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얘기하고 넘어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연히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날 아빠가 지친듯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 조바심에 와이셔츠 버튼도 제대로 풀지 못하시는지 바느질이 뜯어지는 소리. 걸려오는 전화를 받기 직전 땅이 꺼질 듯 크게 내쉬던 호흡. 부엌 찬장을 열어젖히고는 약통을 꺼내 개수도 세지 않고 입에 털어 넣는 소리. 수도꼭지 틀어놓은 채, 수돗물을 받아서 벌컥벌컥 드시던 소리까지.

 

 나는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아빠가 얼마나 필사적이신지. 나나 희주에게 보여주지는 않으시지만, 회사에 다니시면서, 참아 내시는 것과 끌어 오르는 화에 지지 않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으로 노력하시는지를 말이다.

 

 ---

 (현재)

 

 야자를 마치고 버스를 타고 오는 길, 희주에게 아랑과 공립 애들과의 상황을 알려주려하니, 희주는 역시나 '사고 좀 그만' 치라는 소리만 해댔다.

 “근데 넌 어제부터 뭐가 그렇게 불만이냐?” 내가 물었다.

 “뭐가 또.” 희주 대꾸가 시큰둥하다.

 

 “아니 그냥, 이런 엄청난 사건에 잔소리만 하는 거 같아서 말이지. 난 너무 놀라서 소문도 나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현주가 얽히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으이그.”

 “근데 내가 한 게 아니라니까?”

 “옆에서 말렸어야지. 그리고 지난주에도 오늘도 너는 다 있었으니, 누가 봐도 너가 한 거나 마찬가지야. 모르겠어?”

 

 “그게 왜 내가 한 거나 마찬가지야? 지난주에도 오늘도 아랑이만 때렸는데. 내가 시작한 것도 아니잖아. 이렇게 말하면 안 될 수도 있지만…, 난 피해자지, 어떻게 보면!”

 “헐~ 퍽이나 피해자겠다. 지난주에 아랑이가 없었으면, 이미 그때 쥐어 터졌겠지.”

 

 “뭐야, 그래서 아랑이가 살려줬으니까, 나만 잘 못 했다 이거야? 나만 나쁜 놈이야? 난 때리지도 않고, 내가 애초에 시비 건 적도 없고, 아랑이가 먼저 시비 건 그놈들하고 싸웠고, 난 그냥 옆에만 있었는데, 내가 나쁜 놈이다?! 지금 그런 얘길 하는 거야?” 그녀의 빈정어린 잔소리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올라갔다.

 

 “워, 워~ 진정해 타이거. 그러다 나나 아량이 없을 때 사고라도 나면, 어쩌냐는 얘기일 뿐이야. 아빠 걱정하실라.”

 

 “후우….”

 호흡을 가다듬었다. 뭔가 희주가 짜증 난 게 있는 듯 했다. 단지 그걸 내 얘기에 쏟아낼 뿐.

 

 “다시 묻지. 넌 어제부터 뭐가 그렇게 불만이냐?”

 “...” 하지만 희주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토픽을 바꿀 겸, 며칠 전 내가 주워온 홍고추를 혹시 봤는지 물었다.

 

 “아, 야. 너 내가 지난주에 주워온 홍고추 말린 것 봤어?”

 “홍고추? 그건 왜?” 희주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놀란 듯 대답했다.

 

 “아니, 내가 가져온 거니까. 근데 내방에 둔 거 같은데 어디 갔는지 안 보이네 갑자기?”

 “고추 먹고 싶은 거면, 냉장고에 있잖아. 요리할 때 쓰는 거. 너랑 아빠랑 먹는 거.”

 

 “아니 그거 말고, 내가 주워온 거. 마른 고추. 그게 그 옥상 빌라집에서 떨어진 거랑 같은 거 같거든.”

 “근데?”

 “너가 가져갔어?” 희주가 분명 뭘 알고 있는듯한데, 말을 하기 싫어하는 느낌이 들었다.

 “...응, 왜? 그냥 네 방에 갑자기 마른 고추가 있길래.”

 

 “왜? 너 먹지도 못하잖아.”

 “아~ 버렸어. 그래서.”

 “야, 그걸 왜 버려. 그게 무슨 증거인 줄 알고?”

 “뭔 소리야 무슨 증거?”

 

 “무슨 증거냐니, 내가 요사이 무슨 일을 겪……!”

 “...?”

 “아니. 하…, 됐다…. 진짜 너 내방에서 아무거나 가지고 가지 좀 말아라.”

 “뭔데? 그거 중요한 고추야?”

 

 “됐다~. 꺼져라.” 이미 버렸다는데, 거기다 대놓고 ‘영양쌤’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왠지 희주가 이상한 느낌이라도 알아채면 더 큰 오해만 살 것 같아서, 대충 둘러대고 말았다.

 

 ‘고추는 마트 가서 아무거나 하나 들고 와야겠다…. 설마 돈 내고 사야 하려나, 하나만 가져오는 것인데도?’

 

 지이잉. 지이잉.

 희주 핸드폰에 문자가 왔다.

 

 “너 문자 왔다” 내가 말했다.

 “알어. 신경 꺼.” 희주가 답했다.

 

 --

 

 버스가 오거리를 지나 커피숍을 조금 못가서, 정거장 근처에 멈춰 섰다.

 “너 먼저 들어가.” 희주가 버스에서 내려서 나를 보고 말했다.

 “어디 가는데?”

 “잠깐 독서실에 뭐 놓고 온 거 생각나서.”

 

 그렇게 말하고는 내가 붙잡기도 전에 혼자 오거리 방향으로 내려갔다.

 

 “야, 너 시간이 몇 시인데, 지금 독서실을 가!” 내가 뒤늦게 소리쳤지만 이미 길거리 소음에 묻혀서 들리지 않은 것 같았다.

 

 “밤이 늦었는데, 조심해야지”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커피숍 아저씨가 가게에서 나와서 뛰어가는 희주를 보며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정거장이 커피숍 바로 앞도 아닌데, 굳이 여기까지 내려오셨나 싶었지만, 그냥 고개만 살짝 숙여 인사를 드렸다.

 

 “어디 간 데? 독서실?” 커피숍 아저씨가 물었다.

 “..? 아니 아저씨가 그걸 어떻게…” 내가 당황해서 물었다.

 “맨날 보이던데 뭐. 연애도 하는 거 같던데, 아빠 걱정하실라. 흐흐” 아저씨가 능글맞게 웃으시며 '툭' 하니 내 등을 치고는 다시 가게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혼란스러웠다. 먼저 발걸음을 옮기시는 아저씨의 등을 보며, 희주 남자친구를 실제로 보신 적이 있는지 묻는다는 게, 나도 모르게 갑자기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어쩌면, 그냥 매번 불편한 여유를 보이는 아저씨를 당황하게 하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아, 아저씨.”

 “응?” 커피숍 아저씨가 능글맞은 웃음을 지우지 못한 채 뒤를 돌아봤다.

 

 “아저씨 커피숍 건물 옆에 만화방 건물에서 시너, 눈에다 집어넣었다는 사건은, 어떻게 된 거예요? 혹시 범인 잡혔나요?”

 일순간 그의 동공이 커지며 미간이 한껏 찌푸려졌다.

 

 “몰라. 어떤 새낀지. 동네를 아주 지랄을 만들어놔서, 이쪽 여대생들 여기로 커피도 안 마시러 와 아주. 만화방에 화장실은 왜 자물쇠로 안 잠가놓고 지랄을 해 가지고 그냥, 어중이떠중이 다 돌아다니게 말이야. 쯧.”

 

 그가 커피 매출이 줄어서 그런지, 특정도 안된 범인을, 그리고 현재 상황을 싸잡아 비판했다. 더 물어보기엔 너무 짜증을 내셔서, 희주 생각은 다 잊으신 것 같았다.

 

 “네…. 뭐 잡히겠죠…. 여기 CCTV라도 있으면, 좋았을 텐데, 이 동넨 너무 시골이라”

 

 커피숍 앞에까지 도착해서, 이제 ‘빌라길’로 들어서기 전에, 내가 말했다. 하지만 아저씨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으셨다.

 

 “무슨 소리야? 있어, CCTV”

 

 “네…?!”

 “이거 내 건물이잖아. 너희 아빠도 아시는데?” 아저씨가 손가락을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경찰이 없다고…”

 “어떤 놈이 그래? 내가 조사 협조한다고, 가게도 일찍 닫고 찾아서 줬더니만.”

 

 “근데 그럼…, 혹시….”

 내가 어떻게 물어야 할지를 생각하며 말을 더듬는데, 그가 대뜸 답했다.

 

 “찍혔지!”

 

 “뭐가요?!” 내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사람들이 잔뜩, 아주 잔뜩 왔다 갔다 하는 게 다 찍혔지.”

 “그래서요?”

 “근데…, 경찰 하는 말이 다 알리바이가 있어서,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이었데. 여기 여대생들, 그 남자친구인지 하는 애들, 동네 고삐리들, 대리기사, 배달통 들고 배달하는 애들, 뭐 엄청 많아.”

 “...”

 

 “어여 들어가. 밤길 조심하고. 너희 아빠 걱정하실라.” 내가 질문 호흡을 놓치자, 그가 이제 들어가라는 듯 나를 손으로 스윽 밀고 나서는, 커피숍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죄송한데, 아저씨. 다음에 저도 한번 볼 수 있을까요?”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는 아저씨를 향해 소리쳐 물었다.

 

 나한테 진짜 궁금한 건, 시너 테러가 일어난 그 날 일이 아니었다. 나한테 궁금한 건, '그다음 날 일'이었다. 그다음 날 밤에, 여기서 오줌 쌌던 놈, 그리고 어쩌면 내 뒤에 숨어있었던 놈, 그놈들을 확인할 수 있을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저씨는 그제야 어린 애랑 너무 많이 말을 섞은 게 지친다는 듯이, 손짓으로는 가라고 하며, 고개는 끄덕이는 이상한 ‘제스처’를 보이고는 커피숍 유리문을 닫고 들어가셨다.

 

 희주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빌라길’을 혼자 이 시간에 지나가는 게 역시 겁이 났지만, 더 늦기 전에 나라도 들어가야 아빠가 걱정하시지 않을 것이었다.

 

 걸어가면서, 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고추를 말리던 옥상 빌라를 쳐다봤지만, 양복을 입고 고추를 조물딱 거리던 그는 없었다.

 

 조금 이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차라리 있었으면...’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희주 말마따나 그도 이상하고 또 무서웠지만, 적어도 어디에 있고 어떤 사람인지는 드러낸 사람이기에, 그날 빌라 틈 뒤에서 나를 몰래 보던 그놈보다는, 막연히 안전하다는 생각을 했다.

 

 

 

 

 

 

 15화. 보여줘, 그 고추

 

 목요일.

 

 “아~ 졸라 할 거 많은데, 피시방이나 한번 뛸까?” 아랑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쉬는 시간에도 문제지를 풀면서 입으로는 피시방이라니.

 

 “아서라. 좀 있으면 중간고사다.” 내가 책상에 엎드린 채 답했다.

 

 어제 늦게 들어와서, 아빠한테 엄청나게 혼나고, 희주랑 같이 안 왔다고 또 엄청나게 혼나고, 그러다 12시가 다 되어서야 희주가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시고는 그제야 방문을 힘주어 닫고 들어가시는 것을 보고 생각이 복잡했다.

 

 “야, 피방 안가? 너 뭐 어제 야구 동영상 보다 잤냐? 왜 이렇게 힘이 없냐” 여전히 문제지를 풀면서 아랑이 말했다.

 

 “야동이라도 봤으면 좋겠다. 희주 저 바보 같은 것 때문에…. 에혀, 몰라 인마. 나 좀 냅둬라. 오늘 집에 일찍 가야 해. 우리 아빠 저러다 우신다.” 야동 얘기에 잠시 영양쌤 생각이 스쳤지만, 아직 희주가 버린 고추 대신 집에서 새로 하나 가져오지도 못했기에 영양쌤을 보러 갈 빌미가 없었고, 또 아빠가 저렇게 화내신 게 오래간만인 것 같아서 신경이 쓰였다.

 

 ---

 

 “너희, 어제 공립 애들이랑 싸웠다며?” 점심을 대충 먹고 자리에 누워있는데, 현주가 옆에 아랑이에게 말하는 게 들렸다. 엎드린 채 겨드랑이를 슬쩍 들어 뒷자리를 보니, 영진이와 재곤이도 눈이 똥그래져서 현주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응, 근데 어떻게….” 아랑이 신기한 듯 물었다. 그리고는 슬쩍 재곤을 쳐다봤다.

 “이번엔 나 아냐~!” 재곤이 손사래를 쳤다.

 

 “걔 말고, 수미가 굳이 전화해서 알려주더라. 너희 이름 전부 물으면서.” 현주가 답했다.

 “그래서?”

 “뭘 그래서야. 전혀 모른다고 했어. 키 큰애는 특히. 그냥 여기저기 무서운 거 없는 부잣집 일진이라고 했어. 나는 잘 모른다고. 같은 학교 여자애 이름나오니까, 싸움이 하고 싶었는지, 그냥 그런 거 같다고. 난 지금 전화 받고 처음 알게 된 거라고 너희들 싸운 거. 뭐 실제 그렇기도 하고.”

 

 그리고는, 기억을 더듬는 듯 멍한 표정을 하더니 대뜸 나를 가리키며, “아 좀 찐따같이 생긴 애도 누군지 모른다고 했고…. 재곤인 이미 아는 것 같고, 영진인 딱히 묻지도 않더라.”라고 말했다.

 

 “왜 내가 찐따같이 생긴 애지? 아 진짜. 외모 차별.” 사실 '찐따 룩'은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나를 기억한다는 것은 불편했다.

 

 “내가 고맙다고 해야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수미가 날 찾다가 생긴 일이긴 하니까…. 중간고사도 곧 있는데, 조심들 해.” 현주가 새초롬한 표정으로 아랑을 힐끗 보며 말을 뱉었다.

 

 “그리고, 네가 때린 애, 수미 남자친구. 걔가 한 게 아니야, 우리 학교에 점심시간에 혼자 오토바이 타고 와서, 3반 일진회 애들 야구방망이로 때리고 간 애. 나도 예전에 한번 봤는데, 학교를 계속 다니는지도 모르겠어. 머리가 여자애들처럼 길어. 문신도 했고. 사람도 죽였다는 소문도 있어.”

 

 “...” 아랑은 별 대답 없이 그렇게 말하는 현주 얼굴만 쳐다봤다.

 

 “...그냥 그렇다고. 난 이제 그 애들 잘 모르지만.”

 

 현주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보며 갑자기, “넌 희주한테 좀 잘해! 오빠가 되어서 애가 뭐가 힘든지도 모르냐? 니 얼굴값 하는 거야? 얼굴만 바보 같은 거로 족해야 하지 않겠어?!” 라고 소리치고는 희주 쪽을 보더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쟤도 이상해…희주만큼이나…”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지으며 아랑을 쳐다봤다. 나와는 달리 아랑은 진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들썩이고는,

 

 “야, 이따 피방가자.”라고 말했다.

 “안 간다고 이 쉐끼야~~.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 이 코끼리같이 똥만 싸는 쉐끼야~~.”

 

 ‘사람을 죽였다니… 무슨 무협지도 아니고…. 고등학생 주제에….’

 

 ---

 

 학교 수업이 끝나고, 희주와 버스에 올라타며 물었다.

 “너 무슨 일 있어?”

 “있긴 뭐가 있어. 말 걸지마 병시나.”

 

 “...너는 고2가 돼서도 여자애 말투가…. 에혀…, 네가 내 동생이 맞긴 한 건가 싶다. 점점 더 이상해지는 것 같아.”

 “뭘 이렇게 또 진지해. 별일 없어.” 내가 조금 진지해진게 느껴졌는지, 희주가 장난섞인 짜증을 지우고 답했다.

 “뭐, 그럼 다행이고.”

 

 차창 밖으로는 걸어서 귀가하는 학생들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대학생이랑 만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이상한 거 같아?” 내 질문을 넘어 의도를 읽고 묻는다. 희주는 대체로 그런 편이었다. 장난스레 말을 할 때도 많지만, 진지한 얘기를 할 때면, 사실관계를 먼저 묻는 나와는 달리, 화자의 의도를 넘겨짚고 그랬다.

 

 “누가 너보고 이상하대?”

 “아니.”

 “...커피숍 아저씨가 너 연애하는 거 봤대. 그게 뭔 소린지 몰라서 내가 뭐라 말을 못 했어. 알고 있으라고. 아빠한테 또 이상한 소리 할라, 그 아저씨가.”

 “그래, 알아서 할게.”

 

 희주는 거기까지 말하고,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어제 들은 CCTV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

 

 아빠는 그날도 우리보고는 일찍 들어오라고 하시고는, 또 일이 많아지셨는지 많이 늦으셨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우리 딸]이라고 시작하는 문자를 나에게 잘못 보내시고는 한참이 지나서야 [아, 미안 아들. 잘못보낸네]라고 하시는 것으로 봐선 회사분들이랑 약주라도 하시나 보다 싶었다. 희주에게 [아빠 문자 받았냐?]고 물었더니, [무슨 문자?]라고 하는 걸 보면, 희주에게 다시 보내실 정신이 없으실 만큼 힘드신 하루인가보다 싶었다.

 

 새벽에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서 잠에서 깨니, 아빠가 숙취때문인지, '컥, 컥'하는 소리를 내시면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계셨다. 괜히 민망해하실까 봐, 귀마개를 끼고 다시 눈을 감았다.

 

 --금--

 

 “미쳤어! 미쳤어!! 야! 야, 정희준!!!” 희주의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떠보니, 내 방문이 열려있고, 방문 틈으로 희주가 부산스레 왔다 갔다 뛰어다니는 게 보였다.

 ‘저 요망한 것이 또 왜 저러나?’ 생각하던 찰나, 희주가 머리를 쑥 내밀더니, 전쟁 소식이라도 알리듯, 소리쳤다.

 

 “야! 지금 9시야 이 미친놈아. 학교 늦었어.”

 그렇게 말하고는 입에 도토리를 물고 뛰어다니는 다람쥐처럼 멈추어 섰다 뛰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을 보니, 잠깐이라도 희주가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입가에 생겼다가…,

 

 다시 생각해보니 9시면 이미 1교시 수업이 시작했다는 뜻이었고, 오늘은 영어가 첫 수업인 시간이었다.

 

 ‘젠장!’

 

 서둘러 준비하며, “야 기다려 같이 가. 같이 택시 타자!”라고 외쳤지만, 희주는 “택시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아빠 어제도 일 때문에 술 드신 거 안보이냐!!” 라고 소리치고는 먼저 뛰어나갔다.

 

 나도 황급히 쪽지에 ‘아빠, 미안!’이라고 써서 식탁 위 아빠가 준비해두신 아침 요리 옆에 던져두고는, 세수도 하지 않고 바로 따라 뛰어나갔다.

 

 그리고는, 다시 튀어 들어와서, 냉장고에서 작은 청양고추 하나를 꺼내 주머니에 넣고는 다시 정신없이 뛰쳐나갔다.

 

 ---

 

 스윽-.

 

 내가 조심스레 교실 뒷문을 열고 있는데,

 

 드르륵. 텅.

 

 희주가 뒤에서 그냥 문을 확 당겨서 열어 버렸다. 수업시간에 늦은 것도 모자라서, 이런 소요라니...

 

 조용히 넘어갈 영어 선생님이 아니셨다.

 

 “...너희 왜 늦었어?” 남매가 동시에 자리에 없으니, 바로 소리부터 지르지는 않으셨다.

 “아…. 죄송합니다. 그게….” 내가 변명거리를 찾느라 쭈뼛거리자, 희주가 말을 이어 받았다.

 “저 어제 배가 너무 아파서, 아침에 희준이가 병원 데려다줘서, 이제 왔어요.”

 

 “...배가 아파? 그럼 희주는 부모님께 얘기해서 병원을 가던가 하면 되고, 희준이는 학교를 제때 왔어야지. 뭐 아플 때마다 둘 다 학교 안 나올 거야? 아픈 건 그래서 좀 나아?” 말투는 매섭게, 어휘는 걱정하는 흉내 정도 내며, ‘영어’가 말했다.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이에 질세라, 희주가 얌전히, 하지만 눈빛은 매섭게 영어쌤을 째려보며 말했다.

 “아빠가 회사 다녀요. 엄만 없고요.”

 

 잠시 정적. 엄마가 없는 게 이럴 때 쓰임이(?) 있을 줄이야.

 

 “됐고! 앉아! 수업 흐름을 깼으면 미안한 자세가 먼저지, 변명이나 하고 말이야…, 쯧.” 영어가 혀를 찼다.

 “희준이가 사과부터 했거든요?” 희주가 지지 않고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내가 뒤에서 다시 고개를 숙이고 용서를 구하고, 자리에 앉았다.

 영어쌤이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뭐라 할 말이 없는지, 다시 영어 수업을 이어갔다.

 

 --

 

 “희주 무섭다.” 쉬는 시간이 되어 영어쌤이 교실에서 나가자 아랑이 나에게 말했다.

 “몰랐냐? 너보다 싸움도 잘할걸? 내가 몇 번 맞아봤는데, 영어는 오늘 개발릴 뻔했어.” 내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건 네가 나한테 안 맞아봐서 그렇고” 아랑이 책상에 엎드리며 말했다.

 “내가 너 정돈 그냥 바르지 마.” 하며 내가 엎드린 아랑의 등에 장난치듯 팔꿈치 찍기를 했다.

 

 “아! 아! 아파! 인마…! 어제 중간고사 준비 땜에 문제지 보느라 너무 늦게 잤어. 나 이따 점심도 쨀 거니까, 너 혼자 많이 먹고 좀 더 커서 와라.” 그러고는 아랑은 엎드린 채 커다란 팔을 축 늘어뜨리더니, 잠을 청하려 노력했다.

 

 --

 

 점심은 영진과 재곤이랑 먹고, 나는 볼일이 있다고 하고 먼저 일어섰다. 아침에 부랴부랴 가져와서 주머니에 넣어둔 고추를 쪼물딱 쪼물딱 거리며, 별관 인근에서 어슬렁거렸다.

 

 영양사 선생님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는 하셨지만, 그렇다고 용건도 없이 찾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고, 주머니의 고추는 며칠 전 내가 얘기한 홍고추도, 건고추도 아니었기에, 주저하게 되었다.

 

 점심시간 종료종 첫 번째 벨이 울렸다. 수업이 시작하는 두 번째 벨이 울리기까지 이제 5분밖에 남지 않았기에, 운동장, 그리고 학교 구석구석에서 점심시간을 때우던 애들이 곧 있으면 우르르 교실로 이동할 시간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다음엔 제대로 홍고추를 챙겨와야겠다.’라고 마음먹으며, 별관 건물을 등지고 본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위에 별관 건물 위 창문이 열리면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희준아!”

 

 고개를 들어 별관 2층 창을 쳐다보니, 영양쌤이었다. 봄날 햇살이 그녀의 얼굴에 비스듬히 내리쬐니, 살짝 찡긋하며 인상을 구기셨다. 선명한 입술 라인이 양옆으로 벌어지며 광대가 올라가고 치아가 드러나는 미소를 지은 그녀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심장박동기가 달려 ‘두근두근’ 거리듯, 나를 심장이 큰 소리를 냈다. 봄날의 지긋지긋한 알레르기 꽃가루마저 그녀가 웃어 주니, 향기가 나는 듯 했다. 마치 프리지어 꽃향기가 시각화되어 실제로 눈에 보이듯 날아다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아…. 선생님”

 “뭐해 거기서? 올라와~.” 그녀가 반가운 듯 손짓했다.

 

 “지금 점심 종 쳤는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몸은 내 의지와 달리 주춤했다. 마치 내 본의는 그게 아니라는 듯이.

 

 “아 그래? 어머, 난 못 들었네. 근데 왜 왔어? 계속 아래 있었어?”

 “아, 아뇨, 그때 고추 말씀드린 거….”하며 내가 손으로 청양고추를 주머니에서 꺼내 보였다. 하도 조물딱 거려서 이미 형태가 무슨 음식물 쓰레기 같이 구겨져 있었다.

 

 “아 그거야? 그럼 이따 방과 후에…, 오늘 야자 있지? 야자 전에 와서 보여줘, 그 고추.”

 “헉. 아, 네… 저 수업 가볼게요, 그럼.”

 

 조금만 더 말을 섞으면 수업이고 뭐고 냉큼 뛰어 올라가서 가까이서 얼굴이 보고 싶을 지경이었기에, 서둘러 발걸음을 본관 쪽으로 옮기며 답했다.

 

 내 뒤로 그녀가 말없이 지긋이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뭔가 별일이 아닌데도 누가 보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수업 종이 울렸고, 나는 다짜고짜 뛰어 본관 건물로 쑥 들어갔다.

 

 오후 수업 내내 영양쌤 생각만 났다.

 

 

 

 

 

 16화. 오줌이 마려워 졌다

 

 오후 수업 내내 영양쌤 생각만 났다.

 

 분명, 단순히 고추만 보여 드리고, 내가 “이게 어떤 고추죠?” 하면, “이건 청양고추지, 너 이거 물어보러 여기 왔니?’ 하고 질책하며 “빨리 수업이나 들어가” 하고 끝나야 할 ‘정상적인 선생님과 학생 간의 대화’였어야 하는데, 무엇인가 조금 달랐다.

 

 내가 특별히 나쁜 짓을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청양고추 아니 그냥 평범한 고추를 궁금해하는 것 자체가 지금 내 상태가 이상한 것은 분명 맞는데, 이게… 선생님도 ‘쿵 짝’을 맞춰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그녀가 모텔에서 나오는 순간을 생각했다. 단아하고 예쁜 인상에 진하게 화장을 하셨지만 어색하지 않은 느낌. 아니, 오히려 묘하게 요염한 이국적인 색감이 그녀의 수줍은 듯한 표정과 함께, 모텔이라는 단어의 네온사인이 밤이 되면 형용 색색이 빛나는, 그런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러다 학교 배식 때는 정반대로 하얀 가운을 입고, 타액이라도 튈까 투명한 구강 보호대를 착용하고, 아기처럼 작은 두상에, 하얀 피부에, 화장 하나 없이 깨끗한 얼굴로, 건강한 치아를 수줍음 없이 한껏 드러낸 모습. 특별한 대조였다. 마치, 나만이 알고 있는 그녀의 숨겨진 짜릿함을 알게 된 것 같은 느낌말이다. 금지된 것을 본 듯한 느낌. 이어 가고 싶었다. 선을 넘지만 않는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이런 상상이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망상이라는 것을 알지만, 잠시 눈을 감았다.

 

 “너 뭐하냐.” 누워 있는 줄 알았던 아랑이 나를 툭 치며 물었다.

 “...잔다, 말 걸지 마라.” 에둘러 대답했다.

 

 “이따 저녁 밖에서 햄버거나 먹을까? 야, 너희 햄버거 먹으러 안 갈래?” 아랑이 먼저 나에게, 그리고는 뒷자리 영진이와 재곤이에게 물었다.

 

 “오 좋지, 어디? '파터'까지 갈라면 너무 멀지 않아?” 재곤이 말했다. 다행히 더는 식당 주인집 아들인 ‘승현’이라는 애로부터 불필요한 압박은 받고 있지 않은 듯해 보였다. 지난번 떡볶이집 앞 사건 이후로는.

 

 “됐어, 너희끼리 다녀와. 난 오늘 저녁은 굶는다.”

 “뭐? 햄버거 안 먹어? 왜? 너 뭐 아프냐? 아까부터 얼굴이 시뻘게 가지고. 너 뭐 야한 생각 하냐?” 아랑이 나를 보며 말했다. 뜨끔했다.

 

 “뭐래 개변태새끼. 야 현주야, 얘가 너 좋아한 데!” 내가 위기도 모면할 겸, ‘아무렇게나 똥이나 싸자’라는 맘으로 흰소리를 던졌다. 희주가 고개를 돌려 우리를 쳐다봤다.

 

 “뭐야, 이 미친 새끼! 아냐 아냐, 이 또라이 새끼 이거 완전 또라이네!” 아랑이 과히 당황해하며 나에겐 욕을, 현주에겐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현주가 같잖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

 

 드디어, 오후 수업이 끝났다. 아랑은 영진, 재곤과 햄버거를 사서 온다고 하며 일어섰고, 희주를 보니 몸 상태가 안 좋은지 머리 관자놀이를 누르며 인상을 찌푸린 채 수업 필기 내용을 보고 있었다.

 

 ‘중간고사로 걱정이 되나?’ 아니면 아침에 아프다고 뻥 친 게 뻥이 아닌 건가?’ 하며 잠시 생각했지만, 이내 생각을 털고 일어나, 별관 쪽으로 향했다.

 

 본관 후문을 통해, 석식용 요리와 배식 집기가 줄줄이 본관 쪽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보통은 석식 때는 영양사 선생님이 이미 퇴근을 하셔서, 주방 아주머니들과 아저씨들만 있었는데, 나는 알고 있었다. 오늘 저기 별관 위층에는 영양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

 

 똑똑.

 

 “선생님-.”

 “어, 들어와” 영양쌤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문을 열자 바로 앞에 아주 작고 동그란 티테이블이 보였고, 그 너머로, 마주 보는 두 개의 책상이 창가 쪽에 붙어 있었으며, 양쪽 벽으로는 서류철이 잔뜩 꽂혀있는 책장이 하나씩 있는 게 보였다. 문을 끝까지 다 열자 문 옆 오른쪽 코너에 커피포트와 맥심 커피 통 그리고 이제 막 설거지를 끝낸 듯 물기가 사라지지 않은 머그잔 4잔이 뒤집혀 플라스틱 쟁반 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문 옆 왼쪽 코너에 쪼그리고 앉아 숨어서, 내 오른발이 문 너머로 들어오자,

 

 “어흥!!” 하며 내 코앞에 그 작고 하얀 얼굴을 들이밀었다.

 

 “하하하, 놀랬지! 놀랐어?” 도대체 어떤 선생님이 학생과 예정된 면담에서 이렇게 행동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것으로 당황하기에는, 이미 그녀의 얼굴을 빤히 볼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아…. 하하…. 네 깜짝 놀랐어요…. 하하….”

 

 내가 어색해하자, 그녀는 머리를 찰랑거리며 내 앞을 스쳐지나, 맥심 커피 하나를 들더니, 전기 커피포트에 버튼을 눌렀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뭘 그렇게 멀뚱멀뚱 서 있냐는 듯이, “앉아” 하고 말했다.

 

 “네…” 그렇게 답하며, 바로 고추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티테이블 왼편 의자에 앉았다.

 

 “어!? 그거야?” 그녀가 답하며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커피포트는 물 끓이는 소리를 요란스레 내기 시작했다.

 

 “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누가 봐도, 청양고추 같은데, 그리고 내가 일전에 말한 홍고추도 아니고, 건고추도 아닌데, 만약 이걸 왜 들고 왔냐고 물으면, 그리고 왜 아래층에서 그렇게 오래 있었냐고 물으면, 딱히 변명할 자신이 없었다.

 

 아니 만약 그런 질문을 하신다면, 그녀는 이미 이 정신 나간 젊은 남자애의 불순한 의도를 꽤 뚫어 보고, 세상에서 가장 차갑고 건조한 표정으로, ‘궁금한 거 해결되었으면, 그만 수업 들어가거라”라고 하지 않을까 싶었다.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번에도 달랐다.

 

 “오! 청양고추? 같지만, 또 좀 따르네? 평범하지만 비범한 뭔가가 숨겨져 있는 건가? 호호.”

 “아…. 하하, 네…. 저도 그걸 잘 몰라서….”

 “어디서 났어?”

 

 그녀는 이미 고추를 들고 코에 가져다 대며, 영화에서 시가 냄새를 맡든 고추 냄새를 맡고 있었다. 이미 내가 수없이 조물딱 거린 그 고추를 말이다.….

 

 “아 그게, 집 앞에 어떤 아저씨가 길에서 떨어뜨렸는데, 제가 먹어보니까, 맛이 있어서…. 근데 아저씨한테 다시 묻기에는 좀….”

 

 횡설수설하는 티가 나질 않길 바랐는데, 내가 생각해도 이상했다. ‘무슨 길에 떨어진 고추 맛을 학교 영양사에게 가져온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듯, 답했다. 여전히 인중에 고추를 비벼대며.

 

 “오오~ 그랬구나. 그래, 내가 살펴볼게. 두고 가.”

 “....”

 

 ‘두고 가’라는 소리가 이제 가라는 얘기로 들려서, 앉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키려는데, 그녀가 말했다.

 

 “희준이, 오거리 쪽에 살지?”

 “...아 네. 그 오거리 교차로 지나서, 끝쪽에…. 학교에서 제일 먼 쪽에 있는, 그 길이요….”

 

 “응, 그래. 자꾸 사람 쳐다보는 아저씨 있잖아. 그 아저씨가 사장님 맞지? 그 코너 커피숍, 맞지?”

 “...”

 

 뭐 학교 근처이니, 알 수도 있는 것이지만, 조금은 상세하다고 느꼈다.

 

 “네, 맞아요, 어떻게…”

 “나도 가끔 가 그쪽 오거리에서 그쪽 방향에 있는 가게들. 조용하잖아, 손님도 없고. 주말에도 서울 집에 안 올라가고, 오거리 동네에 있을 때도 있고.”

 “아…, 네….”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앞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던 중에, 갑자기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티테이블 위로 내 몸이 많이 쏠려 있는 불편한 자세였다. 그때 영양쌤이 나처럼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양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그녀의 상체가 점점 다가오더니, 그녀의 얼굴이 내 앞, 이마 앞까지 다가왔다. 그녀가 내쉬는 숨이 내 앞머리에 느껴질 정도였다. 내 시선은 자연스레 그녀의 가슴골에 있었기에, 황급히 눈을 치켜 올리고는, 그녀를 쳐다봤다.

 

 화장을 아예 안 한 줄 알았는데, 그렇게 가까이서 보니, 그녀의 입술에 뭔가 향기 좋은 것이 발라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로션 냄새인지, 분 냄새인지 모르지만, 하얀 피부에도 비비크림인지, 뭔지가 발라져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무엇보다, 그녀의 표정이, 그녀의 눈빛이, 그날 모텔에서 걸어 나올 때처럼, 묘하게 요염한 이국적인 느낌이 베어 나왔다. 커피포트가 뜨거운 수증기를 뿜으며, 터질 듯이 요란스레 덜그럭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탕!

 

 커피포트의 버튼이 튀어 오르는 동시에 그녀가 물었다. 고개를 약간 비스듬히 기울이며.

 

 “희준이 너 토요일에 나 봤지?”

 

 “....!!!!!”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는 게 이런 뜻이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근데, 왜 아는 채를 안 했지? 뭐 이상한 상상 했나? 그날? 그리고 오늘도?” 그녀는 불편해질 수 있는 질문들을 단번에, 던졌다.

 

 “아….” 내가 말을 잇지 못하고, 의자를 부여잡고, 허리를 세워 자리를 고쳐 잡았다. 그러던 중, 오른손 중지를 의자 아래 날카로운 나사에 찢기기도 했다.

 

 "앗, 따거.."

 

 우선 저 입술, 그리고 눈빛으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했다. 내가 불손한 상상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막상 이런 질문들을 거침없이 받으니,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멀어지는 나를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좀 더 얼굴을 티테이블위로 가까이 숙이며 눈을 살짝 치켜떴다. 그녀의 양팔은 이제 테이블을 완전히 감아서 그녀의 상체 아래로 깊숙이 당겨지고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잘못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 근데 네가 너무 부끄러워하는 거 같아서.”

 

 “아, 그게…. 너무 갑자기 봐서, 선생님인지 잘 알 수 없어서…” 내가 에둘러 대답을 했다.

 

 영양쌤은 개의치 않고 자기 말을 이어갔다. 테이블 테두리를 부여잡고 중지 손가락 끝으로 살살 비벼대며.

 

 “그래, 뭐 그렇더라도 말이지. 뭐 잘못한 건 아니잖아. 선생님이 연애하는 게. 그리고 학생이 이렇게 선생님 보러 방에 찾아오는 게. 그치?”

 “...아…. 네….”

 

 두 가지 비교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잘못한 게 아니라는 결론이 틀린 게 아니라서, 뭐라고 대꾸할 논리를 찾지 못했다.

 

 “그래. 그런 거야. 그러니까, 불편해하지 않아도 돼. 그냥 그 나이 때는 그럴 수 있어. 희준이 나이 때는,” 그렇게 말하면서, 영양쌤이 내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살짝 옆으로 쓸어 넘겼다.

 

 ‘터치!’

 

 “묻고 싶은 게 있으면, 이렇게 따로 와서 물어, 고추도 좋고, 뭐가 되었든 간에.” 하고 말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내 얼굴을 건드릴 듯 말듯, 내 볼을 타고 귀 뒤로, 그리고 내 귓불을 살짝 붙잡듯 건드리고 멈췄다.

 

 “그 나이 때는 연애도 많이 하지? 그런 것도 궁금하면 물으러 와도 좋고. 선생님이 요리도 잘하지만, 상담도 잘하거든.”

 

 싱긋. 그렇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인스턴트커피를 뜯어 머그잔에 붓고는, 커피포트의 물을 따랐다. 그 소리에 갑자기 오줌이 마려워졌다.

 

 “네…. 저 그럼, 저…, 화장실 좀….” 나도 모르게 솔직히 말하게 되었다.

 “뭐? 하하하하 그래, 그럴 수 있어. 어서 가봐.”

 

 그녀가 내 말이 그렇게나 웃겼는지, 한껏 눈이 커져서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고추는 담에 받으러 오고. 내가 알아볼 테니까.”

 

 “아 네…. 그럼, 다음에…” 쭈뼛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도망치듯 그 방을 나왔다. 의자 아래 날카로운 나사 끝에 다친 오른손 중지를 왼손으로 지압하며 움켜쥔 채.

 

 본관으로 걸어가면서도,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뒤로 돌아 그녀의 방 창문을 힐끔 쳐다봤다. 마치, 저승에서 아내 에우리디케를 데리고 생환하려다, 돌아보지 말라는 하데스와의 약속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는 오르페우스처럼 말이다. 물론 여기서 에우리디케는 나의 ‘이성’ 이겠다. 영양쌤이 아니라.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 같으면서도, 모든 일이 있었던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마치 호랑이 굴에 들어와, 컴컴한 어둠에서도 푸른 광채를 내는 두 눈동자를 마주한 것처럼,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내 영혼은 이미 통째로 잡아먹혀 버린 것만 같은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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