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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추리/스릴러
안의 너
작가 : 녹슨등잔
작품등록일 : 2020.8.18

과거의 악몽이 되는 3인방의 잔재를 떨치지 못한 부식이란 남자가 있다. 우연찮게 박나리라는 미스터리한 남자와 친구가 된 고독한 사람이다. 나리는 신비스런 힘의 소유자로,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객체로서 마주 보게 한다.
나리는 씻지 못한 죄를 저지른 자들로 하여금 낙인을 먹인다. 그가 모르는 곳에서는 X교라는 사이비 종교의 신봉자들이 세상을 잿빛으로 만들고 있다. 나리가 그들의 소굴로 흘러 들어간 건 순전히 우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 모두 지독한 악인들임에는 부정할 수 없고 부식의 소용돌이 또한 거기서 소멸되어야 한다.

 
15. 살인
작성일 : 20-08-25 04:06     조회 : 241     추천 : 0     분량 : 8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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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액정에 뜬 이름 탓에 전화를 받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부식은 통화 버튼을 누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받지 않는다면 끝이 나지 않을 걸 알았다.

 “여보세요?”

 부식이 말했다.

 “씨발놈아 뭐 하다 전화를 이제야 받아?”

 용문이었다.

 “화장실에 있었어요…….”

 수화기 건너에서 욕을 한정 없이 뽑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숨 소리가 전부였다.

 “지금 만나자. 시간 있냐?”

 “전화로 얘기하죠, 형.”

 “전화론 안 돼. 에 그러니까 안 된다고.”

 부식은 멍하니 벽만 응시했다. 미쳐보지 못하고 살았던 검은 점을 발견했다. 대단치 않은 것이지만 직접 가서 확인했다. 손가락으로 문지르니 사라졌다.

 “갤러리아 근처에 있는 스타벅스 알지? 거기서 만나. 에 그러니까…… 11시까지 나와라. 낮이야. 밤이 아니라 낮.”

 전화가 끊겼다. 부식은 스마트폰을 쳐다보았다. 짧은 통화로도 알 것 같았다. 지금 용문은 무척 곤란한 상황이다. 간신히 목소리를 붙잡고 있지만 제자리에 서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제 그의 옆에는 윤재도 없고 민수도 없다. 3인방 체제는 이 인방에게 깨졌고 그마저도 하나가 죽었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배불뚝이가 작은 소리에도 방귀를 뀌어댈 걸 생각하니 조소가 나왔다.

 용문은 지금 거의 노이로제에 걸린 상황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거기서 재밌는 전개가 펼쳐졌다. 부식은 더 이상 용문을 피하지 않게 된 것이다. 만남에 있어서 저쪽이 우선권을 갖고 있는 건 나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용문은 자꾸만 조언을 구했다. 하지만 어떻게 하루 칼로리가 성인 여성의 평균치보다 낮은 거식증 남자가 도움을 주겠는가. 오히려 이 거식증 남자는 그에 의해 살인 방조자가 되었다. 이젠 삼인조가 아니니 그, 단수라 부르리라.

 부식은 삼인조가 저지른 살인을 덤터기 썼다. 살인을 저지른 양 비디오가 저당 잡혀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진짜 살인을 했다고 증명되어 있다. 신뢰할 만 한 상품 표시 마크처럼 윤재의 피살 사건이 지역 뉴스에도 나오지 않았던가. 배불뚝이는 쌍둥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친구를 잃었다. 물론 사고사였다.

 달리 사족을 붙일 필요가 없었다. 수사관들이 이미 사고당해 죽은 반건달이 탄 차량의 동선을 확인했다. 혈중 알콜 량도 예의상 검사해야 했다. 깨끗할 수밖에. 사고사니까. 졸음운전이라 결론이 났다.

 부식은 왼팔에 눈을 줬다.

 /././.

 눈을 뗐다.

 

 해연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이불을 둘러썼다. 땀이 진탕 흘렀지만 이불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브래지어가 없어 빈약한 젖가슴이 축 늘어져 있었다. 엄마가 물건을 때려 부수고 있었다. 아빠는 외출하고 없었다. 아빠가 외출하자마자 저런다. 남편을 보낼 때까지는 얌전하던 사람이. 아빠에게 연락을 할 수도 없었다. 엄마를 타박하러 나갔을 때 핸드폰을 뺏겼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힘도 없던 사람이 그렇게 우악스러울 수가 없었다. 엄마는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지금 엄마는 통곡한다.

 

 스타벅스 2층. 용문이 먼저 나와 있었다. 약속을 했다 하면 절대 먼저 나오는 법이 없는 인간이. 부식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창가 자리로 걸어갔다. 자신은 웃고 있어도 남들이 보기엔 무표정해 보일 사람이지만. 평균 체격을 가진 사람을 반쪽으로 내어 살린 것과 같은 사람이라 얼굴도 삭막했다. 그는 속으로 용문을 씹었다.

 용문은 테이블에 두 손을 포갠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눈은 바깥을 보는 게 틀림없었다. 실내에서 마스크를 쓰고 있는 꼬락서니가 우스웠다. 만약 한국이 총기 자유화 시대였다면 분명 그가 보고 있는 장소가 국제 뉴스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오늘따라 손님이 별로 없었다. 백화점 근처에다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임을 감안 하면 말이다. 그러면 모순이 생긴다. 쫓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런 멋진 창가 자리를 선택하다니. 십자선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하는가 보다 하고 말기엔 부식의 감정이 몹시 안 좋았다.

 “형님……?”

 “어어!”

 용문이 깜짝 놀라며 엉덩이로 의자를 밀면서 일어났다. 안 나자빠진 게 용하다 싶을 정도로 오버가 심했다. 마스크 위에 드러난 눈으로 보아 겁이 났던 게 거짓은 아니었다. 눈이 심각할 정도로 퀭했다. 눈 밑의 보라색 그림자가 참담했다. 사람들이 일제히 관심을 보였다. 용문과 부식이 자리에 앉자 자연스레 관심의 시간도 지나갔다.

 부식은 땀으로 젖은 겨드랑이 사이를 식히는 에어컨 바람을 느꼈다. 통유리 밖은 펄펄 끓는 열대였다. 너무도 밝아서 선글라스가 필요했다.

 “무슨 일이에요? 안색이 좋지 않아요.”

 용문의 눈가가 움찔했다.

 “너만 하겠냐, 씨……. 에 그러니까 그렇다는 거야. 내 말은 말이지, 후…….”

 “커피 드실래요?”

 “나는 됐어. 커피는 지랄.”

 “이야기가 길어요?”

 “불만이냐?”

 “서로 기분 나쁠 일 만들지 말죠.”

 “우와 이 새끼 존나 기어오르네. 세상 살다 이런 날도 온다 그지? 형이 이런 꼴로 돌아다니니까 존나게 만만하다 그지? 에 그러니까 넌 자유의 여신상이다 이거잖아?”

 “예?”

 부식이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대충 알아들어, 씨……!”

 “마스크 때문에 잘 안 들려요.”

 용문이 오른쪽 검지를 후크처럼 걸어 코 옆으로 마스크를 약간 내려썼다. 눈을 왜 그리도 굴려대는지 부식은 꼴사나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동시에 서로 간 위치가 바뀌었다고 확실히 느꼈다.

 “부식아. 동영상 하나 더 찍자.”

 “네?”

 “알잖아! 윤재!”

 “쉿. 조용히 하세요.”

 부식이 말했다. 사실 용문은 쇳소리를 섞어 말했기에 큰 소리를 낸 건 아니었다. 그 증거로 사람들은 별 관심이 있었다. 기껏 힐끔거리는 것도 싸우는 낌새를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윤재……!”

 “무슨 말인지 알겠네요. 형님?”

 용문은 진지하게 기다렸다. 마치 자신의 요리를 품평하는 유명 쉐프 앞에 선 견습생처럼.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초점이 너무도 명확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말해. 왜 뜸을 들여?”

 “형님.”

 부식이 마음을 다잡은 것처럼 말했다.

 “어?”

 용문이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카키색 티셔츠 안에는 물살과 젖살이 출렁거리고 있을 터였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얼굴의 털마저 빳빳하게 일어나 있을 테지만 살의 접히는 부분에는 식은땀이 고여 있을 것이었다. 부식의 예상이 맞아떨어졌는지 용문이 몸을 긁적였다. 점점 신경질적으로. 가렵고 따갑기 시작한 것이다.

 “엿이나 먹어요.”

 용문은 넋이 나간 듯 긁던 그대로 아무 말 없었다. 그저 눈만 휘둥그레 하고 있었다. 마스크 안의 있는 입은 헤벌쭉 벌어졌다. 마스크 앞부분이 습기로 약간 젖어 드는 듯했다.

 “겨우 그딴 개짓거리 부탁하려고 불렀어요? 형님? 용문아 이 씹새끼야? 내가 이때까지 너 때문에 무슨 일을 했는지 몰라? 미안한데 윤재 그거 나 아니야. 경찰 말이 맞아. 못 믿으면 네가 어쩔 거야? 그리고 비디오?”

 부식은 잠깐 말을 멈췄다. 비디오라면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증거가 될 터였다. 그는 시체가 있는 데서 그 짓을 했다. 지금에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하면 자신을 버릴 작정으로 카메라 앞에 선 것이었다. 삼인조에게 불만이었고 무력한 자신에게 환멸감이 들었다. 자해를 하는 심정이었다.

 ‘비디오!’

 그는 비디오를 탈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각의 전이로 인해 그의 얼굴이 화사하게 변했다. 용문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시체 같은 게 웃어서 소름이 끼치는지 아니면 대화의 국면이 다르게 진행될 걸 예상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용문도 마음이 스르르 풀어지게 되었다.

 

 저녁 시간이 되었지만 돌아오지 않는 남편 탓에 점숙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벌써부터 체념한 듯한 기색이었다. 가만히 있다가 웃는 건 따로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폭삭 늙어 버린 손을 만졌다. 예전에는 손가락이 하얗고 길다며 남편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한여름에도 이 손을 꼭 붙잡고 놓을 줄을 몰랐다.

 냄비가 넘치는 소리에 그녀는 황급히 일어났다. 딸을 위해 된장찌개를 끓였다. 냄비가 턱을 놀리며 거품을 웩하고 쏟아냈다. 그녀는 불 세기를 낮춘 후 냄비 뚜껑을 열어 수저로 휘저었다. 부글부글하던 것이 가라앉았다. 네모난 두부, 애호박이 고소하게 무르익어 있었다. 수저가 조개껍데기를 딱 때렸다. 조개가 고무 튜브처럼 들어갔다가 나왔다.

 그녀는 바다에 피서를 갔을 때를 생각했다. 현오가 열 살 때니 해연이는 네 살 무렵이었다. 장난꾸러기 오빠들 틈에서 해연이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해연이는 자꾸 쫓아다니면서 물을 뿌리는 오빠들을 피해 고무 튜브를 탔다. 그러다가 바다 멀리 떠내려갔는데 오빠들은 재밌다고 그저 웃었을 뿐이다.

 급박한 순간에서야 그녀는 딸의 부재를 알았다. 남편과 연애 시절을 흉내 내느라 바빴던 것이다. 무릎이 깨져도 울지 않는 현오가 겁에 질린 얼굴로 뛰어왔을 때 그녀는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알았다. 현오는 하염없이 눈물을 쏟으며 바다를 가리켰다. 그녀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소리만 지를 수밖에 없었다. 회색 빛깔의 지느러미가 해연이 주위에서 원을 그리고 있었다.

 물속 상황은 훨씬 심각할 것이었다. 모든 근육이 아가리에 집중된 수중 짐승이 몇 겹으로 된 갈고리 송곳니로 소금물을 마시면서 으르렁대고 있을 터였다. 제 꼬리 질에도 열이 받는 이 분노 조절 장애자는 근처에 있는 것이라면 뭐든 찢어발길 기세다. 자비심이라곤 눈곱만치도 없어서 어린애든 뭐든 상관없을 것이다.

 스푼으로 물약을 넣어주면 다정한 그 사람의 손까지 삼켜버리는 정신병자처럼 끊임없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살덩이에만 집착할 것이었다. 어린애의 발장구에 넋이 나가 마치 모터로 뛰어드는 고양이처럼 굴 것이다. 물 위로 튀어나와 한 번 물어서 흔든 다음부턴 태곳적부터 가지고 있던 울분을 풀 것이었다. 수면이 피로 물든다. 귀여움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흉물스런 파편들만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주리라.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바다로 뛰어든 남편은 평생 말해 준 적도 없는 수영 솜씨를 뽐내며 딸을 구해왔다. 상어는 빙그르르 돌기만 하면서 남편의 부성애가 빛을 발하는 걸 지켜보기만 했다. 그날 점숙은 결혼을 하고 실로 오랜만에 이 남자와 평생 함께하기로 한 결정이 옳았음을 알았다.

 아이를 다섯이나 낳은 탓에 시동생 부부처럼 금실 좋은 부부로 오해받고 있었다. 실은 비밀이 있었다. 큰 싸움을 하는 사이는 아닌 건 맞았다. 하지만 그녀는 불감증이 있어서 성관계를 기피하는 주의였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은 변태적인 성벽이 있었다. 부부관계 때만은 거칠어져서 손찌검도 서슴지 않는 것이다. 원하는 걸 들어주지 않으면 화를 내는데 주로 부부관계에 국한되어 다행이었다. 하지만 바다의 일이 있은 후 그녀는 남편이 원할 때면 운전할 때도 입으로 해주게 되었다.

 취이익. 그녀는 프라이팬에 돼지고기를 볶았다. 양파와 피망을 넣고 고추도 좀 넣었다.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고 단맛은 올리고당으로 내기로 했다. 그녀는 관심을 바꿔 된장찌개의 간을 보았다. 맛이 좋았다. 뚜껑을 닫고 최고 약불로 했다. 프라이팬에 볶이고 있는 걸 기다란 나무 주걱으로 뒤집길 여러 번 했다. 냄새가 좋았다. 국과 달라 맛을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해바라기가 그려진 주방 장갑을 끼고 조리된 음식들을 식탁으로 옮겼다.

 “해연아?”

 

 부식은 용문을 따라 원룸 밀집 지역으로 향했다. 용문은 시종 경계를 하면서 쓸데없이 첩보원 놀이를 했다. 커브를 먼저 돌아간 뒤 손짓으로 오라는 것이다. 그렇게 할 바에야 자신이 한다고 해도 못 믿겠다는 퉁이 들려왔다. 사람을 가려도 자신이 잘 가린다는 거였다. 대체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면 대답도 하지 않다.

 그렇게 말이 많던 사람이 부쩍 말수가 준 것부터 이상했다. 지금의 모습은 이전에 보았던 그 어떤 모습보다 사람다웠다. 그래서 부식은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쓰레기 같은 인간들은 편집증 증세가 있어야지 일반 사람과 비슷해진다는 걸. 알고 보면 내면에는 평범한 것이 있다는 것을. 남에게 피해만 주고 살아서 몰랐지 본인이 그런 피해자의 입장이라면 드러난다는 걸.

 용문은 이사를 두 번이나 했다. 이사를 할 거면 왜 굳이 같은 도시냐고 부식이 물었으나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럴 것이다. 부식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옭아매야 하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교란을 준다고 이사를 하는 것이겠지만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상대는 천하제일의 능력자라 모르는 것이 없는데. 왜냐면 자기 자신을 상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용문이 생각하는 건 적도 한다. 그가 하고자 하는 건 적도 안다.

 501호. 창문이 큰길 쪽으로 나 있어서 유동 차량을 확인하기 편했다. 굳이 물을 필요도 없이 용문은 그런 생각으로 이쪽 방을 구했을 터였다. 부식은 어느새 자신의 병적인 몸도 잊었다. 부쩍 용문과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그런 만큼 곯고 곯았음에도 불구하고 싸우면 상대를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현실적으론 저 뚱뚱한 팔에 한 대만 맞아도 골로 갈 것이다. 명색이 무에타이 관장이니 로우킥으로 부식의 가냘픈 몸을 절단 낼 수도 있을 테다. 하지만 부식은 환상을 계속했다. 잘못 맞추어진 구멍에서 비롯된 자기 위안이었다.

 중문을 열고 들어간 방 안은 단출 했다. 가구라곤 원룸의 기본 옵션인 TV장과 붙박이장이 다였다. 오래된 냉장고인지 팬 소리에 질겁할 거 같았다. 이불은 방바닥에 헝클어져 있었다. 중문과 마주 보는 벽에는 이사할 때 쓰는 박스가 개봉도 되지 않는 채 쌓여 있었다. 아직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것이다. 몰랐던 건 아니지만 이런 꼴을 보니 부식은 당한 기분이었다. 비디오테이프를 훔쳐 갈 생각으로 온 것이었다. 높이 40센티쯤 되는 박스는 대충 봐도 10개나 되었다.

 “진짜 비디오 찍을 거지?”

 용문이 말했다.

 “예?”

 부식이 시선을 올리면서 되물었다. 못 들은 건 아니었다. 변명거리를 구상하기 위한 방편으로 되도 않은 수를 부리는 것이었다.

 “네가 죽였다고 자백하는 비디오 말이야. 찍을 거지?”

 “강박증에 걸린 것처럼 너무 비디오에 집착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 거 없어도…….”

 부식이 말을 삼켰다.

 “있어야지? 있어야 사람들이 알지.”

 “사람들이 알아요?”

 순간 욱한 부식이었다.

 “대단한 거 아니야. 아무한테도 유출되지 않을 거라고. 나 좀 편하게 살게 도와주라.”

 “솔직히 말하면 제가 너무 경솔하게 대답한 거 같아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야!”

 “옛날 비디오나 좀 보여줘요.”

 “에 그러니까 네 말은 추억의 비디오를 보여 달라 이거지? 그거 보면서 딸따리라도 치게? 그 좆같은 비디오를 보면서 좆을 잡고 남의 방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겠다 이거지? 아하, 내 말이 맞네? 한 마디로 나한테서 그거 뺏겠다 이거 아냐, 지금?”

 “도저히 어울리지가 않네요.”

 “뭐가!”

 “몰골하고.”

 “뭐?”

 “생김새는 눈치가 하나도 없게 생겼는데 이렇게 알아맞히잖아요.”

 “야이 씨발새끼야 네가 지금 내 앞에서 뭐라고 한 줄 아냐? 귓방망이 한 대만 맞아도 머리하고 몸뚱어리하고 분리될 거 같은 새끼가 너 진짜 실성했냐? 에 그러니까 미쳤어? 내가 쫓기는 몸이라고 만만하다 이거지? 나 누군지 몰라? 곽용문이야! 곽용문! 천하의 곽용문이가……!”

 용문은 뱃살을 접으며 주저앉더니 오열을 하기 시작했다.

 “비디오 주면 비디오 찍어 줄게요. 옛날 비디오 이제 와 필요도 없는 거잖아요? 누가 알아요, 대체? 그렇게 마음이 불편하면 내가 윤재 형을 죽였다고 고백하는 영상 찍어주면 될 거 아니에요? 아니, 경찰도 자살이라고 판명하는 마당에!”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부식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자신의 이런 물렁한 마음이 얼마나 어이가 없는지 몰랐다. 그는 기다리기로 했다. 결국 그가 원하는 걸 가질 것이다. 결론은 50킬로가 채 되지 않는 남자가 40킬로그램은 더 나갈 남자를 협박해서 이겼다는 것이다.

 

 현금인출기 앞을 서성이는 그림자를 보며 용범은 초조하게 웃었다. 해낼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솔직히 믿음은 가지 않았다. 불 꺼진 상가 앞을 지나는 사람들이 저주스러웠다. 저들 중 누군가 저 안에 들어간다면 그도 움직여야 할 터였다. 이윽고 구부정한 남자가 ATM 밖으로 나왔다. 주차장 앞으로 들어오는 경차 불빛에 여러모로 놀라는 것 같지만 그저 작은 움직임일 뿐이었다. 성대를 제거한 개를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것처럼 호문쿨루스는 곧장 용범의 차가 있는 곳으로 왔다.

 용범은 미리 조수석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돈다발을 뺏다시피 안아 들었다. 그 순간에야 현실감이 났다. 돈을 셀 필요는 없었다. 남자가 가지고 있는 현금카드를 이용해 계좌에 있는 것들을 다 인출하면 그만 아닌가. 은행 3곳을 더 들러야 했다. 돈을 합산하면 6천만 원은 되었다.

 차를 타고 도시 투어를 나서기 전에 이미 남자의 집에 들렀었다. 남자는 은화 재테크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실버 바를 발견했을 때는 무겁기만 하다고 투덜댔었다. 그가 원하는 건 현금이었으니. 하지만 일이 잘 풀리니 뒷좌석에 놓인 것들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전세 계약도 해제했다. 조금 손해를 봐도 그만이었다. 공리주의 입각한 재화의 분배였으니.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갔을 때 그는 전봇대에 목을 매달고 있는 큰숙모를 발견했다. 차가운 콘크리트 덩어리에 매달려 있는 다리에 설사가 굳어 있었다. 그는 차에서 조용히 내려서 시체를 올려다보았다. 다리 안쪽에는 긁힌 상처로 가득했다. 다리 놓는 곳이 없는 거로 보아 기를 쓰고 기어오른 거 같았다. 큰숙모에게 그런 완력이 있었나 의아스러웠다.

 신발은 보이지 않았다. 작정하고 왔는가 본데 자살 장소로는 안성맞춤 같았다. 길이 양쪽으로 뚫려 있고 그녀의 집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그녀의 죽음이었으니 안성맞춤인 것이다. 죽음에도 등급이 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발가락을 어루만졌다. 두 번째 발가락이 특히 길었다. 발톱이 깨져 있었다. 냄새도 좀 났다. 그는 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호문쿨루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근사한 미소로 그 먼 시선을 받았다. 돌연 그는 차가 있는 곳으로 향하다가 마음을 바꿨다. 호문쿨루스 군단을 갖고자 하는 욕심을 되찾은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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