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혁이 가을의 손에서 핀을 받아들고 취침등 불빛에 비춰봤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모양은 그의 기억 속에서 선명하게 빛나던 자스민꽃핀을 꽂고 있는 여자아이들을 흐릿하게 떠올리게 했다.
"혹시 이거 보육원에 있을 때 하고 있던 건가?"
"네, 왜 그래요?"
"잠... 잠깐. 그때 혹시 정원에서 숨바꼭질 한적 있어?"
그 답지 않게 흥분한 말투였다. 지혁은 그때 숫자를 세고 있던 아이 위로 가을이 겹쳐지는 것 같았다.
"맞긴 한데..."
"나무 밑에서 숫자 세고 있었고?"
"그것까지 제가 지혁 씨한테 말했나요?"
"하!"
지혁이 짧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밝게 웃었다.
"이가을! 당신이었구나. 그때 그 아이가!"
"무슨?"
"기억 안 나? 당신한테 100까지 세는 걸 알려주겠다던 남자아이."
지혁은 양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잡고 볼우물이 패인 곳에 짙게 뽀뽀했다.
"그리고 여기. 상처 났다고 말했다가 엄청 화냈었는데."
가을은 놀란 눈으로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는 지혁을 바라보자 그의 얼굴 위로 지금보다 시야가 한참 낮은 작은 남자아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쪼끄만 게 너 몇 살이야?'
'너 이거 상처 뭐야?'
'100까지 알려줄 테니깐 거기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어!'
"그때 그... 나보다 키 작던 오빠?"
가을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멍하게 중얼거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윽! 이 가을 기억을 해도 꼭. 당신 때문에 그때 이후로 우유를 엄청 많이 마셨거든."
그때와는 정반대의 시야로 지혁이 가을을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그녀를 꽉 껴안았다.
"왜 안 기다렸어. 다녀온다고 했는데."
"아... 왜 안 기다렸지?"
가을은 그를 만난 기억은 있어도 그 후까지의 기억은 나지 않았다. 그냥 엄마를 울면서 찾아다닌 것 말고는...
"엄청 찾았었어. 그래서 이가을한테 끌렸나 봐. 입사할 때부터 당신 보조개가 계속 신경 쓰였거든."
처음 봤을 때부터 끌린 이유가 있었다. 그때 사라진 아이를 지혁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에 계속 담아 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 안 쪼끄만데.'
'나 5살!'
'아빠 보물이야!'
어릴 때도 그러더니 작은 입술로 지지 않고 말을 하는 건 여전한 것 같았다. 지혁은 가을의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다 갑자기 그때 가을이 했던 말이 떠올라 생각을 멈췄다.
"잠깐, 그때 당신 분명 나한테 5살이라고 했어. 그럼 당신이랑 나랑은 2살차이가 나야되는게 맞는데..."
현재 지혁이 32살이고 가을이 29살이니 그들은 3살 차이가 났다. 서로가 그때 만났다는건 정확히 기억을 했지만 나이는 서로 맞지 않았다.
"어릴 때라... 잘 못 알고 있는 게 아닐까요?"
숫자도 제대로 못 세는 아이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가을은 생각했지만 지혁은 달랐다. 자스민 꽃 핀이 낯이 익었던 건 그 핀을 가을에게서만 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집안의 소개로 어린 시절 류 회장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 그곳에 살던 여자아이도 그 핀을 하고 있었다.
'혹시 가을씨 30살은 아니지?'
'기증자가 가을씨거든. 그런데 입양된 흔적은 없어.'
혹시나 기대를 했다가 실망한 표정으로 바뀌던 세린의 얼굴이 떠올랐다. 류 회장의 집에서 봤던 어린 세린의 모습이 어린 가을과 다른 듯 보였지만 많이 닮아있었다.
"이가을 혹시..."
지혁은 입양되기 전 언니가 있었냐고 질문을 하려다 가을보다는 세린에게 먼저 확인을 하는 게 낫다고 판단이 들었다.
"아니야. 어쨌든 우린 이렇게 만날 운명이었네. 당신이 회사에 입사한 것도 그때 내 팔짱을 낀 것도."
"후훗. 좋은 기억은 없는 곳이지만 유일하게 좋았던 건 지혁씨 만날 수 있게 해준 거네요."
기억을 찾고 보니 그곳에서 계속 울고만 있던 게 아니었다. 생모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때도 지금도 가을의 곁에는 지혁이 있어서 외롭지 않았다.
옷 방 문을 열었다. 그때 열어보고 나서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 두었던 상자는 여전히 뚜껑이 열린 채로 사진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가을은 이제 전부 다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기억도 대부분 다 돌아왔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금의 상황에서 더 이상의 과거에 주춤거리는 건 무의미 한것 같았다.
"엄마, 고왔네."
차마 마주칠 용기가 없어 제대로 보지 못했던 영정사진 속의 엄마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늘 집에 찾아갈 때마다 반겨주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가을은 사진을 걸어둘 생각으로 액자에 쌓인 먼지를 마른 수건으로 닦고 아빠의 사진을 들었다. 그때 바닥으로 툭 하고 편지봉투가 떨어졌다.
"어?"
처음 상자 안을 봤을 때는 보지 못했던 편지봉투였다. 아마 액자 뒤 고리에 걸려 있어서 발견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편지의 봉투는 뜯겨져 있었고 앞면에 적힌 주소를 확인해 보니 엄마가 가을에게 보낸 편지였지만 잘못적힌 주소로 반송되어 가을이 직접 받아보지는 못한 편지인것 같았다.
"집 정리를 하면서 들고 온 건가?"
주소 불명으로 직인이 찍힌 반송 날짜는 부모님의 사고 후에 보내진 것이었다. 봉투 안에는 세 장의 편지지가 함께 접혀서 동봉되어 있었다. 가을은 편지지를 꺼내어 첫 장을 읽어 내려갔다.
[가을아. 엄마야.
아빠가 진료받는 동안 이 편지를 쓴다.
엄마가 정말 미안해. 잘못했다. 너에게 진실을 숨겼다는 사실을 해가 지날수록, 네가 크면 클수록 죄책감도 커졌지만 가을아, 그래도 엄마는 널 딸로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어. 그때 너에게 그렇게 변명하듯이 말한 것도 미안하다... ]
첫 장에 쓰인 내용은 가을이 죽은 딸의 존재를 알았던 그날에 대해서 엄마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죽은 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난 후 가을은 복잡한 마음을 정리할 길이 없어 그대로 택시를 타고 나간 뒤 커피숍에서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리고 해가 뜨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간 집에는 아빠는 없었고 엄마가 거실에 불조차 켜지 않고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가... 가을아. 전화도 안 받고...'
엄마의 불안해 보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가을은 더 이상 다가가지 않고 현관 앞에 그대로 서있었다. 차마 얼굴을 보고 말할 수 없어 가을은 불조차 켜지 않았다.
'거기서 말해요.'
'가을아...'
엄마는 자리에 일어나려다 가을의 단호한 목소리에 다시 소파에 엉덩이를 앉혔다.
'거기서 설명해봐요. 이가을이 누구예요?'
'가을아...'
'밤새 생각해봤는데 나 혼자서는 정리가 안돼. 제발 좀 속 시원히 말해봐요. 네?'
'아니야. 가을아 네가 내 딸...'
'죽은 딸이 있다면서요? 그런데 이름은 이가을이고. 하하하. 내 이름이랑 같네."
'그게 아니야. 가을아.'
'그만 좀 하세요. 제발! 이제 사실대로 말해줘요. 왜 가족관계증명서에는 죽은 딸 흔적이 없어요? 아니, 내가 없는 건가?'
가을은 엄마의 울먹이는 소리가 듣기 싫어 소리를 질렀다. 누군가의 껍데기로 살고 있는 건 자신인데 왜 엄마가 더 피해자처럼 구는 건가.
'제발 좀요. 엄마. 사실대로 말해줘요. 나 어디서 온 거예요?'
가을은 자신이 울고 있는 건지 소리치고 있는지 애원하는 건지 모를 심정으로 말했다.
'그 사람들이 널 한 번 찾고 다신 안 찾았어! 그래서 엄마도!!'
'그 사람들...이라니요?'
'그... 그게...'
'날 누가 찾았어요?'
가을은 엄마의 말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
'엄마... 이거 유괴에요! 날 찾았으면 찾아줬어야죠!.'
'가을아... 아니다... 그게 아니야.'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변명하듯이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아빠 오면... 집으로 돌아가세요. 당분간 얼굴 보기 힘들 것 같아요.'
'가을아... 아니야. 가지 마...'
울먹이며 옷자락을 붙잡는 엄마의 손길을 힘겹게 뿌리치며 가을은 그대로 집을 나서며 아빠에게 문자를 보내고 핸드폰 전원을 껐다.
다시 집으로 왔을 때 가을이 보낸 문자 내용대로 부모님은 고향집으로 돌아가셨는지 집에는 부모님의 흔적이라곤 없었다.
그리고 사고 나기 전 엄마와의 통화가 마지막이 되었다.
가을은 자신이 유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이미 그전에 다 알고 있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편지는 잊어버린 과거를 한 번 더 상기시켜줬다.
[널 처음 봤을 때 엄마는... 죽은 가을이가 다시 내게로 온 것 같았다. 그래서 열감기를 앓고 기억을 잃은 너를 보자 욕심이 생겼다. 잠깐만 정말 잠깐만... 기억이 돌아오기 전까지, 아니 널 찾는 사람이 있을 때까지만 데리고 있자라고 생각했는데, 한번 널 찾는 전단지를 발견하고 경찰서까지 같이 갔었다. 그런데 그때 '엄마'라고 날 부르는 너에게 그만 욕심이 나서... 그래서 허겁지겁 이사를 가고 널 숨겼다.]
가을은 이장이 자신에게 한 말이 생각났다.
'... 그리고 얼마 후 이 집이 이사 가서 이 집 딸 죽고 유괴라도 한 줄 알았다고...'
[미안하다 가을아. 정말 미안해. 엄마 욕심 때문에. 아빠는 너를 돌려주자고 했지만 엄마는 네가 없으면 죽을 것 같았다. 미안하다. 변명 같겠지만 엄마는 그 이후로 널 한 번도 죽은 가을이와 같다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넌 그냥 내 사랑스러운 딸이었어... 죄책감에 버리지 못했던 전단지를 같이 동봉한다. 가을아... 용서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으마. 하지만 사랑한다는 것만 알아다오. 미안하구나... -사랑하는 우리 딸에게 엄마가 - ]
툭 툭
눈물이 떨어지면서 편지를 적셨다. 이미 편지를 쓰면서 울었던 듯 마지막 글자에 눈물자국이 번져 말라있었다. 가을의 눈물이 그 위를 적시며 종이에 스며들자 꼭 엄마도 함께 우는 것 같았다. 편지에 글씨가 더 번져 글자도 못 알아보게 되기 전에 대충 손등으로 눈물을 흘려 닦고는 마지막 장을 펼쳤다.
함께 넣었다는 전단지였다. 종이의 색이 노랗게 바랬지만 전단지 속의 아이는 누군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자스민꽃핀을 꽂고 말갛게 웃고 있는 여자아이는 바로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