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손에 들고 가만히 화면만 쳐다보고 있었다. 배터리 충전도 다 된 상태에서 이제 켜기만 하면 되는데 가을은 전원 버튼 누르기가 망설여졌다.
"그전에는 그렇게 열어보고 싶었는데."
자신이 가을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때는 모든 답이 핸드폰에 있을 것 같아 빨리 고쳐지기만을 기다렸는데, 지금은 과거의 모든 기억이 들어 있을 것 같아서 두려웠다.
"이가을. 언제부터 이렇게 겁쟁이가 됐어."
스스로를 질책하며 가을은 전원 버튼을 눌렀다. 낯익은 통신사 로고가 열리고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문구가 나타났다.
39****
짧은 로딩 후 메인화면이 켜졌다. 오랜만에 보는 화면이라 잘 정돈된 폴더 속에 어떤 어플이 있는지 생소하기만 했다. 가을은 폴더를 이곳저곳 눌러보다 사진 폴더 속에 있는 갤러리 어플을 눌렀다.
"아... 기억난다."
마지막으로 찍은 것은 지혁과 함께 한 사진이었다.
"풋, 계약 연애하고 며칠 안됐을 때네."
할머니께 보낼 인증 사진이 필요하다고 찍은 사진이었는데 지금보다는 짧은 머리에 지혁의 팔짱을 끼고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누가 봐도 커플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과연 이 사진을 보고 할머니께서 속아 넘어가셨을까?
"지혁씨도 굳어있네"
손자의 어처구니없는 재롱에 장단을 맞춰주신 것 같기는 한데, 이때의 가을은 지혁과 정말 애인 사이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잘생기고 부담스러운 회사 대표였고 혹시나 회사에 소문이 날까 봐 전전긍긍하기도 했었다.
"별거 없구나."
사진첩을 계속 넘겼지만 원래 찍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잘 찍지도 못해서 남겨져 있는 사진이 많이 없었다. 가을은 갤러리를 닫고 옆에 있는 노트를 눌렀다.
"와, 많이도 적어뒀었구나."
마찬가지로 잘 정돈된 폴더를 하나하나씩 내리면서 먼저 기억 찾는데 도움이 될만한 폴더를 찾아보기로 했다.
"디자인... 고정지출... 일정...?"
제일 가능성 있어 보이는 일정을 클릭했다. 하지만 쭉 날짜별로 잘 적어두다가 기억이 비어있는 구간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이때까지 잘 쓰다가 왜 안 쓴 거지... 어?"
맨 아래쪽 공간에 가을은 자신의 이름이 적혀있는 걸 발견했다. 이가을 이라는 이름 뒤에 물음표가 적혀있었고 그리고 죽은 가을이라고 적혀있었다.
"죽은 가을? 뭐지 이게?"
가을은 의아함을 느꼈지만 이름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 창을 닫고 다른 폴더로 내려봤다. 그중 비밀이라고 정말로 비밀스러워 보이는 폴더를 발견했다. 그리고 폴더 위에는 잠금 표시가 되어 있었다.
"여기에 뭐가 있겠군."
폴더를 열자 비밀번호를 입력하라고 커서가 깜빡였고 메인 잠금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어? 왜 안 열리지?"
틀렸다는 표시에 다시 한 번 더 입력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이게 아니야? 아 그럼 뭐지"
가을은 인상을 찌푸리며 다른 번호를 떠올려 보려 했지만 생각나는 번호가 없었다. 혹시나 싶어 지혁의 생일, 가을의 생일도 입력했지만 3분 뒤에 시도하라는 메시지만 받았다.
"와, 미치겠네"
한숨을 내쉬고 그대로 핸드폰을 소파에 툭 던지고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정말 비밀이라고 생각도 나지 않는 비밀번호 지정해 두다니. 가을은 기대했었지만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한 허탈함에 아무런 죄도 없는 핸드폰만 가만히 노려봤다.
'흐윽흑, 흑흑.'
'그만 울어. 여보.'
'흑흑, 가을아... 가을아...'
'여보. 가을이 깨. 여기서 이러면 안 돼.'
가을은 잠결에 엄마의 우는 것 같은 소리에 잠에서 깼다. 아빠가 달래고 있었지만 소리만 낮출 뿐이지 엄마는 계속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그리고 간간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몇 시지?'
핸드폰 시간을 확인해보니 새벽 1시였다. 그리고 오늘은 8월이 넘어간 9월 1일이 되는 날이었다. 익숙한 날짜를 보고 엄마 아빠가 이맘때쯤 늘 여행을 떠났던 것이 갑자기 생각이 났다. 가을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잡이를 자고 문을 열려다 엄마의 울음소리에 멈칫했다.
'허엉, 우리 딸. 가을 아... 엉엉'
'여보. 그만...'
달깍.
'엄마, 나 여기 있는데 지금 누굴 부르는 거야?'
이상함에 문을 열고 엄마를 부르자 오히려 아빠가 흠칫 놀란 표정으로 가을을 보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가을아, 깼구나. 엄마가... 악몽을 꿔서 그래.'
꿈을 꿨다고만 하기에는 엄마는 너무 서럽게 울고 있었다. 하지만 가을도 한참 프로젝트로 인해서 피곤한 상태였고 일찍 출근해야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신경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부엌으로 가 꿀물을 타서 아빠에게 건넸다.
'엄마 진정되면 드시게 하세요. 저 일찍 출근해야 해서...'
'그래, 어서 들어가서 자.'
방으로 내쫓는 듯한 아빠의 손짓에 가을은 의아함을 느꼈지만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새벽 내도록 뒤척여서 그럴까. 잠이 깬 이후로 잠도 잘 오지 않아 컨디션이 엉망이었고 그 덕에 하루 종일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가을은 어쩔 수 없이 오후 반차를 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병원이라도 갔는지 부모님은 집에 없었고 가을은 방으로 들어가 약을 먹고 깊은 잠을 청했다. 얼마나 잠들었을까. 가을은 밖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
'가을 엄마, 집으로 돌아갑시다. 당신 또 밤에 그럴까 봐, 그래서 가을이 알까 봐... 두렵구려.'
'안 그래요. 어제 그랬으니깐... 오늘은 괜찮을 거예요.'
'당신은!... 아니, 됐소... 그리고 이제 좀 놓아주구려.'
'어떻게 놓아요! 흐윽 시체도 못 찾은 가엽은 내 딸. 가을이 찾아서 예쁜 곳에 묻어줘야 하는데. 흑'
'당신이 못 놓으니까... ㄴ...?!'
부모님의 대화가 너무 이상해서 가을은 문을 벌컥 열었다.
'지금 무슨 소리예요? 가을이를 찾아야 한다니...?'
'가... 가을 아.'
'언제... 와 있었니?'
'저 말고 가을이가 있어요?... 죽은 딸..이라니요?'
갑자기 속이 메슥거리고 어지러워서 손잡이를 덜컥 잡았다. 놀란 듯 아빠가 부축하려했지만 가을은 자신도 모르게 아빠의 손을 찰싹 쳐내며 거부했다.
'죄.. 송해요. 잠시만 생각 좀 정리할게요.'
가을은 그대로 핸드폰과 지갑만 들고 집 밖으로 나갔다. 변명하듯이 말하며 쫓아오는 아빠를 봤지만 가을은 그대로 집을 나와 택시를 타고 도망치듯이 멀어졌다.
자신은 죽은 자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허억!!"
가을은 식은땀에 젖은 채로 잠에서 깼다. 심장은 터질 듯 두근두근 걸렸고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의문을 남겼던 모든 것들이 하나둘씩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입양된 흔적도 없던 게... 다 이것 때문이었어."
한번 겪었던 일이라서 그럴까? 생각보다 덤덤하게 정리가 되었다. 하지만 기억보다 정확한 확신이 필요했다.
[내일 시간 괜찮으면 그때 갔던 고향집에 같이 가줄 수 있어요?]
늦은 시간이었지만 아침에라도 확인할 수 있게 지혁에게 문자를 보냈다.
띠링
[그래. 내일 11시까지 집으로 데리러 갈게.]
자고 있는 줄 알았던 지혁에게서 바로 문자가 왔다.
"그때 이후로 다시 올 줄 몰랐는데..."
가을은 여전히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집의 외관을 보고 중얼거렸다. 지혁이 가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오늘은 같이 들어가자."
아직 그녀에게 이곳에 오자고 한 이유를 듣지 못했지만, 아침부터 무거워 보이는 표정에 지혁은 물을 수가 없었다. 그저 생각이 다 정리가 되면 가을이 먼저 말해 줄 거라는 걸 알았기에 그녀를 믿고 기다리고 있었다.
"네, 고마워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따라와 준 지혁이 고마워 가을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댔다. 아직 그에게 자신이 입양되었다는 것조차 말하지 못했는데 점점 알수록 비밀은 커져만 가는 느낌이라 어떻게 말문을 띄어야 할지부터 정리가 되지 않았다.
"오늘은 2층만 가면 돼요."
가을은 찾고자 하는 무언가가 2층 방에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들어갈까?"
지혁이 문을 열자 또다시 케케묵은 먼지가 뿌옇게 날렸다. 두 사람은 손으로 입을 막고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후에도 아무도 오지 않은 듯 2층의 모습은 떠날 때와 같은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뭘 찾으면 돼?"
"사진요. 어떠한 사진이든..."
"... 이런 거 말하는 건가?"
지혁이 책 사이로 빼꼼 나와있는 사진을 꺼내어 들고는 그녀에게 보여줬다.
"... 맞아요."
가을은 홀린 듯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사진을 건네받았다. 사진 속 아이는 자신이 들고 왔던 가족사진의 아이와 같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목에는 가슴에는 이름표를 달고 누군가를 향해 해맑게 웃고 있었다.
"이가을..."
이름표에는 선명하게 이 가을이라고 이름이 적혀있었다.
"맞구나... 네가 진짜 이가을이였어..."
가을은 사진 속 이름표를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그녀의 이상한 중얼거림에 지혁은 사진 속의 아이와 가을을 보고 그녀가 쓰러졌었던 이유가 이곳과 연관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가..."
쾅쾅 쾅!!
"거기 누구요!"
그때 밑에서 문을 거칠게 두드리며 누군가 소리 질렀다. 가을은 깜짝 놀라며 자연스럽게 시선이 밖으로 향했다.
"내가 내려가 보지."
"아니에요. 이제... 다 찾았어요. 같이 가요."
혼자서 밑으로 가려는 지혁을 만류하고 가을은 사진을 주머니에 넣고 그의 손을 잡으려다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이 손이 떨리는 걸 알아차렸다. 떨리는 걸 숨기려 주머니에 손을 넣으려 하자 지혁이 가을의 손을 꽉 잡고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괜찮아. 이가을."
"... 좀... 추워서 그래요."
"그래. 곧 따뜻해질 거야."
지혁의 말이 힘든 이 순간들이 전부 다 괜찮아질 거라고 따뜻하게 몸이 녹듯 편안해질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도 분명 사진을 보고 이상함을 느꼈을 건데 아무것도 묻지 않고 기다려주는 게 가을은 너무 고마웠다.
"... 내려가 봐요."
조금 더 그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지만 성난듯한 남자의 목소리에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아까보다 떨림이 잦아들자 가을은 지혁의 손을 꼭 잡고 1층으로 내려갔다.
어둠에 있다가 밝은 빛을 보자 자연스럽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몇 초 뒤 빛에 적응되고 사물이 선명하게 보이자 50대 후반정도로 보이는 아저씨가 문 앞에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