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지 않았다. 14년 동안 철저하게 꼭꼭 숨겨왔던 것을 누군가에게 드러낸다는 건 정말 어렵고 힘든 결정이었다.
하지만, 뭐에 씌었는지 강이는 꼭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 거렸고, 말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듯한 절박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결국 뱉어내고 말았다.
“나 돌아갈래... 여자로..”
우르르 쾅쾅!!
하지만, 하늘의 뜻은 그게 아니었는지 ‘나 돌아갈래’를 내뱉는 순간 번개가 번쩍 치더니, ‘여자로’ 이 말을 하는 순간엔 아주아주 큰 천둥소리가 세상을 뒤덮었다.
“아악! 깜짝이야!”
너무 큰 소리에 두 사람은 귀를 막으며 깜짝 놀랐다.
“뭐? 뭐라고?”
천둥소리가 ‘여자로’ 말을 먹어버렸기에 혁은 고함을 지르며 재차 무슨 소린지 물어야 했다.
우르르 쾅쾅쾅! 또다시 막사가 무너질 듯 천둥이 쳤다.
‘내가 지금 뭐라 그런 거야?’
그제야 강이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어딜 돌아간다고? 못들었어.”
궁금해서 미칠 것 같은 혁의 얼굴을 보며, 강이는 매우 당혹스러웠다.
“어머니! 혁한테는 말해도 되지 않아요? 가장 친한 친군데”
“절대 안된다. 혁이 알게 되면 혁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고, 동생도 알게 될 것이다.”
“혁은 절대 말하지 않을 거예요. 믿어도 돼요 어머니.”
“벽에도 귀가 있고,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했다. 설마 했던 일이 사람 잡는다는 말도 못들어 봤느냐.”
“예,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어머니.”
얼마 전, 어머니와 나눴던 얘기가 스쳐지나갔다.
‘그래, 아직은 때가 아니야. 아직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은 혁이 강이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내가 잠시 미쳤나봐...’
강이는 고개를 숙이고 눈길을 피하고 말았다.
우르르 쾅쾅!!
또다시 귓가엔 쩌렁쩌렁 천둥소리가 들렸다. 바람은 또 얼마나 거세게 부는지, 돌풍에 막사도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악~~~ 날아갈 거 같아!”
“괜찮아.”
“벼락 떨어지는 거 아니야?”
“걱정마.”
괜찮다면서 혁은 막사를 잡고 있었다. 그제야 강이는 막사 안을 둘러봤다. 나무줄기를 엮어 기둥을 만들었기에 흔들거리긴 해도 날아갈 것 같진 않았다. 중간 중간 아주 큰 돌로 막사를 고정시켜놔서 튼튼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불안한 강이도 막사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으으~~ 진짜 바람세다!”
둘은 한동안 그렇게 막사를 잡으며 있었다.
“바람이 잠잠해졌어. 지나갔나봐.”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바다에서 거센 풍랑을 만났다 잠잠해진 느낌이랄까, 밖이 조용해졌다.
“강이야!”
“응?”
“아까 한 얘기, 다시 해봐. 어딜 돌아간단 거야?”
“.......”
“너 표정 보며 첨엔 내가 뭘 잘못했나, 겁났는데...”
“.......”
“힘들고 슬퍼 보였어. 아주 많이.”
“........”
“무슨 얘기였어?”
“그러니까...... ”
강이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게 말이야... 어, 그애들... 니 친구들. 아니 친구도 아니야. 그놈들! 하여튼 그놈들 때문에 집에도 못가고, 이러고 있잖아. 돌아가서 혼내주자고.”
‘치이, 거짓말! 그 말에 그렇게 슬픈 표정이 나온다고?’
하지만, 혁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래, 그놈들, 돌아가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조근조근 혼내주자.”
혁이 강이를 보며 애써 웃었다.
“혁아!”
“응?”
“넌 니가 내 가장 친한 친구지만, 난 너에게 못하는 얘기도 있어.”
“응.....”
“서운하지? 넌 비밀도 없고, 숨기는 것도 없는데...나는...”
“아니야, 서운하긴.”
“고마워. 이해해줘서.”
“말 못하는 덴,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역시 넌 마음이 넓은 친구라니까.”
강이가 혁을 향해 씨익 웃자, 혁도 강이를 향해 웃었다.
‘이젠 나도 너한테 말 못하는 거 있어. 너를 향한 마음, 너만 보면 미친 듯이 뛰는 내 심장...말못해, 절대. 누구한테도.’
혁은 강이를 지그시 바라봤다.
“하아~~~~”
한동안 거세게 몰아치던 비바람이 잠잠해지자 강이는 하품이 나고 잠이 쏟아졌다.
“조금 자.”
“아냐, 안 졸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강이는 막사를 잡은 채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있더니, 툭! 막사를 잡고 있던 손이 떨어지며 몸도 옆으로 휘청했다.
“아구구 넘어지겠다.”
혁은 얼른 달려가 강이를 잡아, 바닥에 눕혔다. 새근새근~ 강이는 잠들어 있었다.
“안졸리다더니, 애기처럼 금방 잠들었네.”
혁이 강이를 가만히 내려다 바라보는데, 강이 얼굴로 물이 떨어졌다.
‘어, 물이!’
버드나무줄기를 꺾어올 때 맞았던 비가, 아직도 혁 옷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강이 볼에 떨어진 물을 손으로 얼른 닦아냈는데, 강이 살이 참으로 보드라웠다.
“피부도, 꼭 아기 같네!”
물이 또다시 떨어지자, 강이가 손으로 얼굴을 훔치며 돌아누웠다. 혁은 잠든 강이를 멍하니 바라봤다.
“콧구멍도 기지배처럼 작고 이쁘냐 넌.”
혁은 씨익 웃다 말고, 도리질 쳤다.
‘정신 차려! 정신차려라 혁아, 제발 좀!!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게 말이 돼? 미친놈이지!’
혁은 도리질치며, 얼른 강이한테서 멀어졌다.
“너라도 잘 자라~~ 여긴 내가 지킬게.”
혁은 구석으로 가서 두루마기와 저고리를 벗어 짰다. 비를 얼마나 흠뻑 맞았는지, 물에 담궜다 짜듯이 물이 주르륵 짜졌다.
“으흐흐 춥다.”
젖은 옷을 걸어두자, 으실으실 한기가 느껴졌다.
“얍! 얍!”
추위를 몰아내려고 혁은 무예동작을 하기 시작했다.
“으으윽~~~”
잠자리가 불편한 강이는 이리뒤척 저리뒤척 깊은 잠을 자지 못했고, 아픈 다리 때문에 신음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나 때문에... 미안해 강이야.’
혁은 자는 강이를 안쓰럽게 바라보다 구석으로 가서 쭈그리고 앉았다.
쿵쿵쿵!
잠도 오지 않는 혁은 버드나무 줄기를 더 찧기 시작했다.
* * * * *
‘밤이 참 길구나!’
하룻밤이 이렇게 긴 시간인지, 강이는 처음 느꼈다. 잠들었다 설핏 잠에서 깨면 혁이 상처 난 다리에 버드나무껍질 찧은 걸 붙여주고 있었다.
“너도 좀 자. 자야 낼 집에 가지.”
“자다 깬 거야. 걱정 말고 자.”
너무도 고되고 고돼 강이는 스르르 다시 잠이 들었다 또 깼는데,
‘읍읍!’
이번엔 혁이 운동을 하고 있었다.
‘쟤는 잠도 없나.. 아침은 대체 언제 와.’
기절하듯 또다시 자다 바람 소리에 깨 일어나보니, 혁이 버드나무껍질을 찧고 있었다.
“나 괜찮으니까, 너두 좀 자!”
잠꼬대 하듯 중얼대고 또다시 잠들어버렸는데, 얼마나 지났을까? 비 소리도 그치고, 바람도 잠잠해졌다. 자다 깨기를 반복하던 강이는 무슨 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으으으으~~”
혁한테서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혁이 저쪽에서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 안은 채, 무릎에 한쪽 얼굴을 대고 잠들어 있었다.
“으으으으~~ 추워”
끙끙 앓는지 입에선 또다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뭐야, 아픈 거야?’
강이가 깜짝 놀라 가까이 가 이마를 만졌다.
‘열은 없네. 다행히. 깜짝 놀랐네.’
혁이 마르라고 걸어둔 옷을 보니 아직도 축축했다.
‘춥지. 옷을 입어도 추운데.’
강이는 자기의 두루마기를 벗어 혁한테 덮어줬다.
“으으으으~~”
그래도 혁은 추위에 덜덜 떨고 있었다.
“이깟 상처가 뭐라고, 그 빗속을....너두 참...!”
자기 다리 상처를 낫게 하려고 버드나무줄기를 구하러 빗속을 뛰었던 혁을 생각하니, 강이는 미안하고 고마웠다. 혁은 자면서 또다시 몸을 떨기 시작했다.
‘이러다 병나는 거 아냐?’
혁을 잠시 바라보던 강이는 자기 한 손으로 혁을 감쌌다. 처음엔 살짝 팔만 올렸는데, 혁의 옆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어깨동무 하듯 감싸 안았다.
“이제 좀 덜 추울 거야.”
혁하고 바싹 붙은 강이는, 혁의 팔을 문지르기 시작하다, 혁의 얼굴을 가까이서 바라봤다.
‘코가 오뚝했구나.’
오뚝한 콧날에 베일 것 같은 턱선, 조각 같은 옆모습에 강이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이 터져 나왔다.
‘이래보니 뭐 쪼금 잘생겼네.’
한동안 혁을 바라보던 강이는, 혁의 이마부터 턱 선까지 손가락으로 따라 그려보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이마선을 지나 코선을 지나더니 입술에서 멈춰졌다. 강이가 혁의 입술을 보는데, 자기도 모르게 침이 꿀꺽 삼켜졌다.
‘세상모르고 잘도 자네.’
강이는 손가락으로 혁의 아랫입술을 잡아당기며 놨더니 뽁! 하고 소리가 났다. 그게 재밌는 강이는 또다시 혁의 아랫입술을 살짝 잡아당기며 놨더니 뽁! 소리가 났다.
“으으으으”
혁이 또다시 신음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깜짝이야. 깨는 줄 알았네.”
으으으으~ 무릎을 감싸고 잠든 혁은 계속해서 떨고 있었다. 한쪽팔로 혁을 감쌌던 강이는 혁을 빤히 쳐다봤다.
‘뭘 어찌해야 안추워?’
강이는 혁을 쳐다보며 생각하다, 혁의 뒤로 가서 살며시 안았다. 백허그!
“몸이 얼음장처럼 차갑네....이제 좀 덜 추울 거야.”
강이는 혁의 넓은 등에 조심스럽게 자기 얼굴을 대고 혁을 꼭 안았다. 혁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이 들어가 혁의 가슴쯤에서 깍지를 끼었다.
“아프지마. 니가 아프면 내가 미안해지잖아...”
강이는 혁의 등에 얼굴을 조심히 대고 중얼댔다.
쿵쾅쿵쾅! 쿵쾅쿵쾅!
혁의 심장이 또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사실, 혁은 깨어있었다. 강이가 입술을 건드릴 때,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눈이 떠졌다. 입술에서 나는 ‘뽁’ 소리가 재밌는지 강이는 웃고 있었고, 혁은 얼른 눈을 감고 자는 척 했다.
‘너 왜 이렇게 웃겨 강이야. 별 게 다 재밌대. 하하.’
강이가 또다시 손가락으로 입술을 잡아당기고, 뽁! 소리에 좋아하는 걸 느끼자, 혁도 웃음이 나려 했다. 그래서 으으으 추운 소리를 내고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던 것이다.
‘나 깬 거 모르겠지? 후~~’
후유, 강이가 느끼지 못하게 살짝 숨을 토해내는데, 글쎄, 강이가 백허그를 하는 게 아닌가!
“몸이 얼음장처럼 차갑네....이제 좀 덜 추울 거야.”
심쿵! 숨멎!
심장이 쿵 떨어지고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저 아래로부터 몸이 서서히 뜨거워지더니, 강이 말대로 온몸이 따뜻해지고 있었다. 등에선 식은땀도 나는 것 같았다.
“으으으~ 추워”
하지만 혁은 일부러 춥다고 중얼댔다.
‘추워, 강이야. 더 꼭, 꼭 안아줘.!’
“계속 떠네!”
‘떠는 거 아니야, 떨리는 거야!’
혁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후! 후~ 강이 몰래 숨을 쉬었고, 강이는 추위에 떠는 혁을 더욱더 꼬옥 감싸 안으며 혁의 몸을, 가슴을 문질렀다.
“이럼 좀 따뜻할 거야.”
‘아흐흐흐~’
강이의 손이 지나간 자리마다 혁의 몸에선 감각이 살아나 알알이 숨 쉬는 거 같고, 온몸으로 점점 퍼져,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것 같았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지만, 혁은 계속 자는 척 할 수밖에 없었다.
‘미친 놈, 좋아하면 안되잖아. 정신 차려!’
머리론 안된다고 정신 차리라고 외쳐댔지만, 혁은 꼼짝도 안했다. 강이의 품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았다. 이 밤이 계속 됐으면 좋겠고,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고,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 싶었다. 그렇게 한동안 혁의 가슴은 요동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