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봉투를 들고 안에 있는 서류뭉치를 꺼내었다.
"아... 아직 신고도 안 했었나?"
봉투 안에는 사망진단서와 기록부. 그리고 가족관계증명서 등 관련 서류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병원 진료 영수증이 들어있었다.
"어? 왜 이것만 날짜 다르지?"
사망한 날짜와 관련 없는 몇 달 전의 영수증이었다. 항목을 쭉 읽어보니 꿈속에서 기억했던 아빠의 사고 후 퇴원할 때 받은 영수증이었다.
"그때... 아빠를 집으로 모셨는데..."
가을은 고개를 돌려 열린 문 너머의 거실로 시선을 향했다.
"당분간 거실에서 생활하기로 했고."
가을은 방문으로 한 걸음씩 걸음을 옮겼다. 그때의 상황이 환각처럼 과거의 잔상이 보이는 것 같이 거실에는 아빠가 불편한 팔을 부여잡고 소파에 앉아있었다.
'엄마는 어디쯤이래?'
'지금 올라오고 있으시데요.'
한동안 환기를 제대로 못해서 열어둔 현관문을 통해 맞바람이 불어왔다. 가을은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짐을 거실 바닥에 내려두고 주저하듯 아빠 옆에 앉았다.
'아빠... 있잖아요.'
평상시답지 않는 가을의 머뭇거림에 아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한 팔로 가을의 손을 잡았다.
'우리 딸, 무슨 걱정거리 있어?'
가을은 물어보기가 싫으면서도 사실을 확인해야만 한다는 걸 알았다. 며칠 동안 고민해봤지만 혼자의 생각만으로는 결론을 지을 수 없었다.
'나... 입양한 거예요?'
'무... 무슨 소리야? 누가 그런 소리를 해'
내색하지 않으려는 듯 웃었지만 아빠의 잡고 있는 손이 가늘게 떨렸다. 가을은 아빠의 손을 빼고 양손을 무릎 위에 모으며 차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해 일부러 현관으로 눈을 돌렸다.
'사고 난 날. 혹시 수혈해야 되나 싶어서 알아봤어요. 그런데... 아빠가 예전에 말했던 혈액형이랑 완전히 달랐어. 아빠 밑에서 내가 나올 수는 없잖아요?'
'아니다. 가을아. 그건...'
'그럼 엄마가 나랑 같아요? 아니잖아요.'
가을은 눈물이 날것 같은 걸 꾹 참고 아빠와 눈을 마주쳤다. 입술 끝이 바르르 떨렸다.
'아빠, 나 이제 성인이에요. 그러니깐 말해주세요.'
'... 그ㄹ...'
'여보!!'
갑작스러운 비명에 가을은 현관으로 고개를 돌렸다. 엄마가 어느새 올라왔는지 창백한 얼굴로 신발을 벗고 성큼성큼 걸어와 가을을 와락 안았다.
'넌 내 딸이야 가을아. 너 아무 데도 못 보내.'
'엄마...'
가을의 어깨를 붙잡고 마주한 얼굴은 억지로 웃어 보이려 했지만 울음을 참고 있는 이상한 표정으로 엄마는 다급히 말했다.
'그... 그래. 입양이야! 입양! 너 엄마가 입양했어.'
'... 가을 엄마...'
아빠는 이상하게도 안쓰럽다는 듯이 엄마를 불렀다. 강하게 껴안는 손길이 거칠어서 가을은 어깨가 아파졌다.
아직도 그 느낌이 남아있는 것 같은 통증에 가을은 정신을 차렸다. 그러다 문득 사진이 생각났다.
"그럼 그 사진이..."
가을은 침대방으로 들어가 협탁의 서랍을 열었다. 계속 누군지 궁금했던 아이. 행복해 보이는 가족 속의 아이.
"원래 딸이었나..."
그것 외에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부모님의 딸이 죽자 자신을 입양했다는 것 외에는. 그러지 않고서야 이 아이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서류..."
가을은 한 손에 쥐고 있던 서류 속의 가족관계증명서가 생각이 나 서류를 찾아봤다. 한동안 멍하니 종이에 인쇄되어 있는 활자를 보다가 그대로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없어."
서류에는 사망신고된 엄마 아빠 외에 이가을. 본인의 이름 외에는 누구의 이름도 적혀 있지 않았다.
"가을아, 여기야."
진아가 자리에 앉아 가을을 불렀다. 마음은 뒤숭숭했지만 오랜만에 보는 친구의 얼굴에 가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오랜만이야. 다들 잘 지냈어?"
가을이 자리에 앉자 주변에 있던 친구들도 하나둘씩 안부를 묻기 시작했다.
"잘 지내긴. 힘들어 죽겠다."
일찍부터 결혼해 애가 둘인, 그것도 남자아이로만, 은실이 한숨을 푹 내쉬면서 말했다.
"그래서 오늘! 나 집에 안 갈 거야!"
육아에 찌들려 있다가 오랜만의 외출인지 마음먹고 온 듯 화장을 진하게 하고 옷차림 또한 요즘 트렌드에 맞춰 입고 있었다. 은실의 불타오르는 눈빛에 가을은 오늘 집에 못 들어가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살짝 앞섰다.
"근데 가을이 너, 아직도 최인호 만나ㄴ... 읍 읍!"
"호호, 얘! 무슨 소리야."
"유은실 너 취했어?"
은실의 악의 없는 말에 오히려 옆에 있는 친구들이 더 화들짝 놀라며 그녀의 입을 막고 팔뚝을 찰싹 때렸다. 그 모습에 이미 다 소문이 퍼졌다는 생각이 절로 들어 가을은 피식 웃었다.
"아, 아파! 왜왜? 무슨 일 있었어?"
"그 새끼 바람피웠어."
가을의 담담한 말에 오히려 은실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어? 그럼 헤어진 거야? 아니 그럼 저놈은 뭐가 당당해서 여기 와있는 거래?"
은실이 열받는다는 듯 삿대질한 손끝에는 인호가 뭐가 즐겁다고 동창들과 히히덕 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 가을은 한 모금 마시던 맥주 맛이 뚝 떨어짐을 느꼈다.
"원래 뻔뻔한 놈이니깐."
그러고 보니 최인호와 헤어진 지 벌써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대학 때부터 C.C였고 같이 지내기 편했기에 나중에 결혼까지 생각했었지만 바쁜 와중에도 생각나서 찾아간 자취집에서 딴 년이랑 뒹굴고 있을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리고 뻔한 레퍼토리로 네가 외롭게 해서 그렇다는 둥.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기에 가을은 상대할 가치도 못 느껴서 그곳을 발로 한번 차 주고 나왔었다.
"풋"
얼빠졌던 얼굴이 떠올라서 가을은 웃음이 터졌다. 그래도 덕분에 지혁과 사귀게 되었으니 자신도 모르게 사랑의 큐피드 역할을 하게 된 인호를 가을은 이만 용서해 줄까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자, 신경 쓰지 말고 우리끼리 즐겁게 놀자."
"가을이 넌 신경도 안 쓰여? 난 완전 열받는데."
"아, 덕분에 벤츠 왔거든."
"벤츠? 무슨 소리야? 너 사귀는 사람 있어?"
"나중에 말해줄게. 내 얘기로 시간만 보낼 거야? 오늘 즐겁게 놀아야지. 은실이한테 어떤 기횐데."
가을은 일부러 말을 끊으려 맥주잔을 들었다. 각자의 취향에 맞게 소주부터 막걸리까지 다양한 잔을 들고 함께 건배했다.
뎅!
둔탁하게 울리는 소리에도 기분이 좋은지 서로 마주 보고 깔깔 웃었다. 가을은 웃음소리에 전염되듯이 무겁게 가라앉았던 마음도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가을"
어우, 재수 없어.
방금 전 용서해 주겠다는 마음은 어디로 갔는지 쏙 사라진 채 가게 앞에 서 있는 가을을 인호가 부르자 속으로 가볍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고개를 돌리자 예전에 그녀가 좋아했던, 저 얼굴만 하면 화를 풀어줬던 미소를 짓고는 가을을 보고 있었다.
"나 보기 쪽팔리지도 않나 봐?"
한때는 저 미소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가을은 화내기조차 귀찮아서 그냥 넘어간 것 같았다.
"그때는... 미안했어. 네가 내 말을 안 들어주니깐..."
"됐고요. 쓸데없는 소리 듣고 있을 시간 없거든."
미소도 통하지 않는지 가을이 귀찮다는 듯 손으로 휘휘 내젓자 인호가 울컥하며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너도 아직 나 못 잊어서 아무도 안 사귀는 거 아니야?"
가을에게 쪽팔림을 당해 도망치듯이 달아났을 때는 몰랐지만, 그 후 정신을 차렸을 때 인호는 그때 본 남자가 누군지 떠올랐다. 가을이 다니는 회사 대표였고, 그가 가을과 애인 사이 일리는 1%의 가능성도 없었다.
"헐... 너 요즘 연극하니? 무슨 대사를 읊고 있어."
가을은 정말 벙찐 얼굴로 인호를 바라봤다. 요즘 옆에 붙어 있는 사람이나 이쪽이나 느끼한 대사 내뱉는 게 유행인가 싶었다. 그래도 지혁은 얼굴이 모든 걸 다 커버해 주지만 여기는 영.
"쯧쯧. 너 어디 가서 그런 대사 치지 마. 뺨 맞는다."
한때 사귀었던 사람에 대한 평으로 정말 박했지만, 요즘 보는 사람이 지혁과 지운이다 보니 대학교 다닐 때 잘생겼다고 소문났던 인호가 너무 평범하다 못해 오징어같이 보였다.
"그래, 그 손 놓지?"
그때 뒤에서 기분이 좋지 않은듯한 저음이 들려왔다.
가을이 뒤를 돌아보자 지혁이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걸어오고 있었다. 오늘 주일 그룹의 임원 회의가 있다고 하더니 복장 또한 남색의 타이트한 슈트 핏을 하고 인호의 앞에 서니 더 험악한 분위기를 풍겼다. 인호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며 손에 힘을 풀었다.
"누구야?"
인호가 잡았던 손목을 어루만지며 지혁이 가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전 남자친구와 현 남자친구 사이에서 가을은 찔릴 것은 없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아, 그때 주차장에서..."
"그 동영상?"
인호는 동영상이라는 말에 이제야 창피한 듯 얼굴이 새빨게졌다. 같은 남자가 보기에도 자신과 비교가 되지 않은 비주얼에 그리고 그때 도망쳤던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줬던 남자인 걸 깨닫자 더 자존심이 구겨졌다.
"에이 씨."
인호는 그 모습이 더 없어 보인다는 걸 모르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뒤돌아 가게로 들어갔다. 한때 사귀었던 사람의 찌질한 모습에 가을은 창피함을 느끼며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 이가을. 눈 너무 낮았던 거 아니야?"
도망치는 모습만 보는 것 같은데.
지혁의 어이없어하는 중얼거림에 가을은 자신이 저런 놈과 사귀었다는 사실이 창피해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들어가고 싶었다.
"하하, 이제는 너무 높아져서 탈이죠?"
지혁은 괜히 발개진 얼굴로 어색하게 웃는 가을에 피식 웃으며 그녀의 관자놀이에 가볍게 키스했다.
"당신은 이제 이 얼굴 말고는 누구도 못 만날걸?"
본인도 본인이 잘난 걸 잘 알고 있기에 지혁이 하는 말에 가을은 뭐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괜히 연락한 거 아니에요?"
가을은 손을 뻗어 반나절 사이 수척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니, 오히려 당신 얼굴 보니깐 피로가 풀리네."
지혁은 얼굴을 쓰다듬는 가을의 손목을 붙잡고 손바닥에 키스하고는 그대로 손깍지를 끼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참, 당신한테 줄 게 있어."
나란히 걷다 갑자기 지혁이 걸음을 멈추고는 그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가을에게 건넸다.
"핸드폰 수리 다 완료됐어."
몇 주 전 가을이 그에게 부탁했던 고장 났었던 핸드폰이었다. 그리고 그 핸드폰에는 그녀가 습관적으로 적었던 내용이 모두 다 기록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