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내 남친이 걔 짝남이라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책상 앞에 앉아 거울 속의 내 얼굴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흠. 내 얼굴이 그렇게 달라졌나? 어디 고친데도 없는데… 대체 왜?!”
분명히 눈이 딱 마주쳤는데 날 못 알아 봤다고? 아니면 일부러 모른 체한 걸까? 아니 왜…
“하아-”
나는 들고 있던 거울을 휙 던지고 침대 위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자니 훌쩍 커버린 우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키도 엄청나게 컸던데. 한 178 정도는 되겠어. 뽀얀 피부랑 맑은 갈색 눈은 그대로 인 것 같고. 염색한 것 같았는데 엄청나게 잘 어울렸단 말이야.
“악! 너무… 멋있어! 표우진!”
침대에 누워 발을 동동 굴리는 내 모습을 누가 볼까 무섭다. 흐흐
“가만, 표우진. 너 날 모른 척했다 이거지? 주거써…”
-그 시간
<스타 왕국 엔터테인먼트 연습실>
댄스연습에 앞서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있던 우진.
갑자기 부르르 몸을 떤다.
“아우. 왜 갑자기 소름이 돋지?”
팔뚝에 오소소 돋은 소름을 두 손으로 쓱쓱 문지르는 우진이었다.
***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고 오늘이 금요일. 며칠째 우진이와는 다시 마주칠 수 없었다. 다시 만나야 아는체라도 하던 너 어떻게 날 기억하지 못하냐고 멱살이라도 잡아채든 할 텐데 말이다.
턱을 괴고 우진이 생각에 잠겨있는데 교실 스피커에서 방송이 나왔다.
[오늘은 예배가 있는 날이니 모두 강당으로 모여주시길 바랍니다. 예배는 9시 정각에 시작합니다]
예배? 아, 우리 학교는 기독교 제단으로 매주 금요일 1교시에 전교생이 강당에 모여 설교를 듣고 예배를 한다고 또 홈페이지에서 본 것 같았다.
“가자.”
나영이가 수연이의 팔짱을 끼며 얘기했다.
복도에는 방송을 듣고 강당으로 향하는 학생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강당 내부로 들어서니 큰 무대가 보이고 그 위에는 고급스러운 그랜드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몇몇 학생들이 분주하게 오가며 스탠딩 마이크를 설치하고 음향을 점검했다.
나는 친구들을 따라 빈자리로 가서 앉았다. 학년별, 반별로 구분해서 앉는 듯 보였다.
“오늘 특송은 어느 반인가?”
나영이가 자리에 앉아 고개를 쭉 빼고 무대 쪽을 살피며 말했다.
“특송?”
“어~ 예배 때 한 반씩 나와서 노래해.”
“우왓, 대박! 표우진네 반인가 봐!”
무대 위로 올라오는 한 무리의 학생들이 보였고 나는 그 속에서 우진이를 찾기 위해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애쓰지 않아도 쉽게 우진이를 찾을 수 있었다. 뽀얀 얼굴에 늘 웃는 얼굴, 멀리서도 빛이 나는 그 아이.
순간 강당 안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이어 ‘어우, 뭐야’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애들의 환호성이 섞여 들려왔다.
“헐, 저건 에반데?”
나영이 짜증스런 말투로 작게 속삭였다.
“뭐야, 왜 그래?”
수연이 휴대전화를 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봐봐! 왕미나 언니, 왜 저깄냐?”
“어디? 헐. 꼭 티를 내요.”
무대 위엔 왕미나로 추정되는 긴 생머리에 아이보리색 왕 리본을 단 날씬한 여자애가 피아노 쪽으로 사뿐사뿐 걸어가 앉는 모습이 보였다. 곧이어 무대 왼편 단상에서 마이크를 잡은 한 남학생이 방송을 시작했다.
[오늘의 특송은 1학년 5반 미술과 학생들의 찬양입니다. 반주는 2학년 8반 무용과 왕미나 학생입니다]
안내멘트가 끝나자 곧 반주가 시작되었고 경쾌한 찬양이 율동과 함께 울려 퍼졌다. 전교의 모든 학생은 유치원 재롱잔치 같은 율동에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고 익숙한 듯 함께 소리높여 노래를 불렀다. 찬양에 익숙하지 않은 나도 어느덧 흥얼거릴 정도로 신나는 곡이었다.
특송이 끝나자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이것으로 오른 흥이 끝나는 게 아쉬운 듯 갑자기 누군가가 외쳤다.
- 표우진! 표우진! 표우진!
무대 아래로 내려가려다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뒤를 돌아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우진이의 모습이 보였다. 단상 앞에서 설교를 준비하던 교장 선생님께서 마이크를 잡으셨다.
[뭐라고요? 표우진 학생이요? 왜요?]
- 춤춰라!
또 누군가 호기롭게 외쳤다.
- 댄스! 댄스! 댄스!
교장 선생님은 손짓으로 우진이를 불렀다. 우진이는 쪼르르 교장 선생님께 달려갔다. 그리고는 옆에 안내방송을 하던 범생이와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 무대중앙으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한 손을 번쩍 들어 좌우로 크게 흔들어 인사를 했다.
“우와-!”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대박! 진짜 추려나 봐!”
“소장각~ 소장각!”
수연이와 나영이는 다급하게 휴대전화를 꺼내 동영상 찍을 준비를 했다.
무대 위 우진과 함께 두 명의 남자애들이 양옆에 섰고 우진은 교복 타이를 쭉 잡아 늘이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양팔을 아래로 뻗어 두 손을 모았다.
[빰빠빠 빠빠 빠라라 빠라라라]
- 꺅!
이 노랜? 요즘 역주행으로 난리 난, 화려한 조명이 감싼다는 그것!
쿵쾅거리는 비트에 맞춰 멋진 춤을 추는 저 아이는 내가 알던 수줍음이 많고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12살 표우진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을 환호하게 하고 주목받기를 즐기는 천상 연예인의 모습을 한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무대 위 아이돌을 팬처럼 입을 쩍 벌리고 마냥 바라볼 뿐이었다.
환호성이 가득했던 공연이 끝났고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드는 표우진. 내가 없던 5년 동안 아빠와의 거리뿐만이 아니라 우리 둘 사이의 거리도 한국과 미국만큼 멀어졌음을 느꼈다.
멀리서 눈으로 우진이를 쫓고 있던 나는 무대 아래에서 밝은 미소로 다정하게 우진과 이야기를 나누는 왕미나를 보았다.
내가 모르는 표우진. 그 옆에 나 말고 다른 여자애. 나는 여기에 대체 왜 온 걸까?
***
수업시간 내내 다정하게 얘길 나누며 웃던 우진이와 왕미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기분이…
“엿 같네.”
“어? 뭐라고?”
마음의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옆에 있던 수연이가 고개를 돌려 물어봤다.
“아, 아니야.”
친구들에게 그 재수 없는 왕미나는 누구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호기심 많은 나영이에게 의심을 살까 봐 그럴 수 없었다.
‘누가 먼저 얘기를 꺼내주면 좋을 텐데…’
<점심 먹고 운동장 벤치>
“너희 그거 앎?”
나영이가 팔짱을 낀 채 뭔가 대단한 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듯 호기롭게 물었다.
“또 뭔데?”
나영이의 이런 태도에 익숙한 듯 막대 사탕을 쪽쪽 빨며 수연이가 재촉했다.
“왕미나 언니, 오늘 반주 자기가 한다고 한 거래!”
“그래? 아주 내조의 여왕 나셨네요!”
응? 내조라고? 아내가 남편 바깥일 잘하라고 헌신적으로 우쭈쭈 해주는 뭐 그 내조 말하는 거야?
“내조?”
“아~ 미나 언니 짝남이 표우진 이거든.”
“짝남?”
하아- 말귀를 알아들어 먹어야 끼든지 말든지 하지. 난 지금 친구들이 하는 얘기를 한 번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좀 그렇지 않냐? 음악과에서 반주를 해야지 왜 자기가 나서? 것도 2학년이.”
“그니까 내조 오지다고. 머단하다, 머단해.”
나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둘이 사귀는 거야?”
“아니. 짝남이라니까~”
나영이가 답답한 듯 말했다.
“왕미나가 표우진 좋아하거든. 근데 대놓고 티 내고 다니지.”
수연이가 하는 얘길 좀 더 들어보니 왕미나는 2학년 무용과로 발레 전공이고 몸매 되고 얼굴 되고 집도 잘 사는 엄친딸 롤이란다. 하아, 짜증 나네.
“그 언니 혼자 좋아하는 거 맞아?”
“아직은 그런데… 미나 언니가 고백하면 사귀지 않을까?”
“난 아니라고 봐. 표우진이 데뷔 앞두고 미쳤냐?”
수연이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역시 수연이가 더 좋아.
<설아 방>
방과 후에도 레슨이 있는 친구들과는 내일 만나서 놀기로 하고 나는 집으로 왔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왕미나 때문에 날 모른 척 한 거야?
나는 순간 혈압이 확 올랐다.
“표우진. 날 배신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 텐데?”
숨겨왔던 본능을 자극하는 천진난만한 너의 웃음. 가만둘 수 없지. 그렇게는 안 되지! 씨익-
- 그 시각
<스타 왕국 엔터테인먼트 연습실>
“아우, 왜 또 소름이 돋지…? 아, 맞다. 홍삼! 이걸 안 먹어서 그런가 보네!”
엄마가 챙겨준 홍삼 파우치를 하나 꺼내 해맑게 쪽쪽 마시는 우진이었다.
***
어제는 온종일 무슨 생각으로 하루를 보냈는지 모르겠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표우진, 나, 왕미나, 표우진 그리고 나. 이 루트를 무한 반복했다.
“하아- 그래 내가 순진한 거지. 무슨 초딩때 한 약속 따위를 누가 믿고 기억이나 하겠느냐고. 나만 집착한 거지!”
얼굴이 울그락붉으락 누가 보면 엄마의 갱년기 증상과 똑 닮았다고 할 텐데.
한숨과 욕을 번갈아 하면서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화장품 판매장에 도착했다.
“설아야!”
나영이와 수연이가 손을 흔들며 방긋 웃었다.
어제 하굣길에 친구들이 화장품을 사러 간다고 해서 같이 가자고 했다.
“이거 어때?”
나영이가 틴트를 바른 입술을 쭉 내밀며 물었다.
“음~ 이거로 발라 봐.”
“어? 이게 더 나은 것 같아!”
“그래, 아까 거보다 낫다.”
“유설~ 내 것도 골라줘.”
친구들과 함께하는 이런 사소한 일상들이 참 그리웠는데. 우울했던 기분이 금세 다시 좋아졌다. 우리는 예쁘고 다양한 화장품에 정신이 팔려 이것저것 살펴보고 테스트도 하며 서로에게 잘 어울리는 것을 골라주느라 바빴다.
‘어랏?’
이게 누구야? 창밖으로 낯익은 두 사람이 지나간다. 표우진과... 그 왕재수 왕미나다. 쟤가 지금 여기서 저 여자애랑 뭘 하고 있는 거지? 순간 묘한 질투심이 올라왔다.
‘안 되겠어. 표우진. 이제 널 각성시켜 줘야 할 때가 된 것 같군.’
나는 비장한 결심이라도 한 듯 입술을 꾹 깨물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잠깐만 보고 있어. 나 화장실 다녀올게.”
“응, 그래~ 어서 다녀와!”
“이거 발라볼까?”
여전히 화장품에 정신을 빼앗긴 수연이와 나영이를 뒤로하고 나는 매장 밖으로 나왔다. 저 앞에 표우진과 왕미나가 다정하게 웃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좋아!’
후- 심호흡을 한번 하고,
“표우진!”
우진이의 이름을 불렀다.
우뚝- 표우진이 걸음을 멈췄다.
‘하아- 얼른 안 돌아보느냐?’
“표우진!”
우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크고 맑은 갈색 눈동자가 확 커졌다.
‘그래, 이제 알아봤느냐? 나야 유설아!’
근데 쟤가 아직도 꿈인 줄 아나? 행동이 왜 이렇게 굼뜬 거야? 마지막이다.
“우진아!”
“유설...아?”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우진이의 입꼬리가 죽 올라간다.
“설아야!”
그래, 나야. 안녕 오랜만이야, 나의 귀여운 댕댕이 표우진.
두 팔을 활짝 펴고 나를 향해 달려오는 우진이가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눈이 왕방울 만해져서는 우진이의 뒤통수와 나를 번갈아 노려보는 왕미나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