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의 깊은 탄식소리가 뒤에서 들렸지만 그라함은 개의치 않았다. 통로 안, 계단을 내려가자 문 하나가 보였다. 그라함은 문을 여는 순간 환한 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크지 않은 방. 책장 두 개 정도와 책상 다섯 개가 놓여 있었다. 바닥에 이리저리 책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책상 앞에 앉은 다섯 사람이 열심히 무엇인가를 적고 있었다.
그라함이 들어왔으나 그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이게 대체….”
그라함이 놀라며 천천히 책장으로 다가갔다. 책장에 꽂힌 것은 마법에 관련된 서적들. 그 중에는 그라함이 읽었던 것도 있었고, 아직 읽지 못한 것도 있었다. 그 중 그라함의 눈에 띈 것은 아이칸 제국의 역사서인 ‘제국통사’였다.
이미 한 번 읽어봤던 책이었지만 그라함은 그 책을 펼쳐들어 천천히 한 번 읽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라함의 표정이 바뀌었다.
“테, 텐크라에 대한 기록이…. 이럴 리가…. 분명 없었는데.”
예전에 봤을 때는 없었던 구절들. 문장들이 적혀 책에 적혀 있었고, 그라함이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뒤 쪽에서 바쁘게 손을 움직이던 사람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이보시오. 일을 하게 좀 나가주시오. 이렇게 방해를 하면서 어떻게 일을 하라는 거요.”
그 사람의 말에 그라함이 책을 놓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의 책상을 바라봤다. 낡은 종이에 책을 베껴 적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베끼는 책, 베껴 적는 책. 두 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종이도 한 장 있었다. 그 종이에는 ‘텐크라 관련 문구 제외, 아이칸 이후 사서에 기록된 도인, 마법사에 관한 부분 제외’라고 적혀 있었다.
그라함이 거칠게 그가 베끼고 있던 책을 빼앗았다. 그것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책. 옆에서 필사를 하던 사람들이 중얼중얼 불평을 토했지만 그라함은 개의치 않고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텐크라는 후세에도 영원히 나와서는 안 되는 마법이니. 그 사용법을 기록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며, 말로도 전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것이…. 누구나 욕심은 있기 마련이고, 희귀한 것을 아까워하는 마음이 있는 지라….”
그라함이 작게 소리 내 책을 읽었다.
“아, 이제 그만 내놓으시오. 이러다가 늦으면 책임질 거요?”
그라함에게 책을 빼앗겨 일하지 못하는 서기가 툴툴 거렸다. 그라함은 그의 말 따위는 귀에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책에 집중할 뿐.
“결국은 나에게 까지 전해졌으니, 통탄스러울 뿐이다.”
그라함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책을 뒤집어 표지의 제목을 확인했다. ‘아이칸 야사’라는 제목의 처음 보는 책이었다.
그라함이 이번에는 그 옆에 사람이 필사하고 있는 책을 집어 들었다. 서기가 살짝 놀랐다가 이왕 이렇게 된 거 좀 쉬자 생각한 듯 양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라함이 집어든 것은 ‘고대의 마법’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그 책을 읽던 그라함의 눈이 커졌다.
[텐크라는 선택받은 자만이 사용할 수 있으며, 무한에 가까운 마나가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선택받은 자란,]
“찾았다. 드디어…. 텐크라….”
그라함이 감격한 표정으로 책을 꽉 쥐었다. 마법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알고 있는 삼대마법. 페틴스, 라코타홈, 그리고 텐크라. 이미 삼대마법 중 둘을 사용할 줄 아는 그라함에게 텐크라는 반드시 배우고 싶은 숙원이었다.
[아이칸 황족의 피를 이어받은 자이다. 아이칸 황족의 피를 제대로 이어 받은 자는 그 증표로 ‘은발’의 머리카락이 나타나며, 이 머리색은 전 대륙에 아이칸 황족의 피가 몇 대를 거치면서도 희석되지 않고 제대로 남아 있는 자에게서만 나타난다.]
책을 다 읽은 그라함이 멍하니 서있는데 누군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라함이 얼른 책을 책상 위에 놓고 문 쪽을 바라봤다.
가까워지는 발소리.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라함 군단장. 잠시 나와 이야기를 좀 나눕시다.”
대공 코리옌이었다. 그라함은 생각지 못한 인물의 등장에 살짝 놀랐으나 이내 그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서재는 어느새 벽의 등불이 모두 밝혀져 있었고, 네 남자는 사라진 뒤였다. 그라함과 코리옌은 책을 열람해 읽는 커다란 책상을 사이에 둔 채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그라함 군단장. 그대가 이 서재에 들락거리는 것은 알고 있었소.”
“그렇습니까?”
“그리고 그대가 고대 마법에 관한 책들을 읽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소.”
코리옌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라함은 가만히 그 말을 듣고만 있었다.
“텐크라를 찾고 계십니까. 그라함 군단장?”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그라함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라함 군단장. 아무래도 우리의 목표는 같은 듯한데, 서로 도움을 주는 것이 어떻겠소?”
코리옌의 말에 그라함이 지하실로 향하는 문 쪽을 바라봤다.
“아까 보던 ‘고대의 마법’이라는 책. 그 책을 좀 봤습니다.”
“하하. 그럼 말이 빠르겠군요.”
“그곳에 적힌 말이 사실이라면….”
“그렇소. 그대가 텐크라를 사용할 수 있는 선택받은 자. 아이칸 황족의 후손이오.”
“그래서 내가 필요한 겁니까?”
“물론 그대 말고 다른 아이칸 황족을 찾고 있소. 그러나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 그라함 군단장이 도와준다면 내 입장에서는 편하겠소.”
코리옌의 말에 그라함이 피식, 한 쪽 입 꼬리를 올렸다.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별 지장은 없지만 도와줬으면 좋겠다. 이겁니까?”
그라함의 말에 코리옌은 대답하지 않고 은근한 미소만 보였다. 그라함이 계속 말을 이었다.
“저렇게 필사본을 원본인 척 서재에 놓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텐크라에 대한 정보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혹시 모르니, 새어나가지 않게 하려는 게요.”
“저들이 필사하는 책들은 모두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군단장은 모르는 비밀스러운 곳이 있소.”
“대공, 혼자 꾸미는 일입니까?”
“군단장. 젊은이에게 내 한 가지 충고하리다. 마음속에 있는 말을 모두 밖으로 뱉으면 제 명대로 살지 못하는 법이오.”
코리옌의 말은 그라함에게 충분한 대답이 됐다. 그라함이 굳은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코리옌이 손목시계를 한 번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군단장. 잘 생각해보고,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답을 해주시오.”
코리옌이 느릿느릿 서재를 나갔다. 그라함은 잠시 그곳에 앉아 생각을 하던 중 자리에서 일어나 지하로 내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올라온 그라함의 손에는 책이 몇 권 들려있었다. 그라함은 앉은 채 책들을 하나, 둘 빠르게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책을 다 읽은 뒤, 그라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재에 거대한 불길이 일고, 수비하는 병력들이 이를 끄기 위해 서재에 접근했으나 모두 살해당했다.
역대 최고액 현상수배범의 탄생이었다.
현재, 페이도스와 레오트 지방 접경의 숲-
빠르게 걷던 그라함이 도착한 곳은 세 갈래 길이었다. 그라함이 달려온 페이시티 방향, 길이 커지는 마오텐 방향, 그리고 레오트의 남쪽 지방으로 향하는 길.
그라함이 그곳에 멈춰서 마오텐으로 향하는 길을 바라봤다. 머릿속에 아직도 훤하게 떠오르는 그날, 그 책의 내용.
[텐크라로 인해 세상이 한 번 멸망할 뻔했다. 땅이 갈라지고, 산마다 용암이 솟았으며, 어떤 곳은 숲이 사막으로 변하고, 어떤 곳은 비가 쉬지 않고 내리며 벼락이 여기저기 땅에 떨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세상이 멸망하는 듯하였으나 천신님의 힘으로 다시 회복하였다.]
일개 야사. 그 야사를 읽고 그라함은 지하실에 있던 ‘제국통사’ 원본을 읽었었다. 그 결과 그라함이 내린 결론은 하나.
“8년 전 없애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내 손으로 텐크라를 없앤다.”
그라함이 중얼거린 뒤 마오텐으로 가는 길을 걸어갔다.
“스승님! 스승님!”
날이 밝자 타윈이 사방으로 그라함을 찾아 부르짖었다. 그것을 자단이 겨우 붙들어 말리고 있는데 일환이 입을 열었다.
“그라함 군단장이 네게 말을 전하라고 했다. 네가 아버지의 복수를 할 것이 아니라면 더 이상 그 일을 캐지 말라고 하더구나. 나는 자세한 사정을 알 수는 없으나 가겠다는 그를 막을 순 없었다.”
일환의 말에 타윈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안 돼. 스승님! 아직 스승님에게 못 들은 것이 많단 말이야! 내가 왜 이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며 마법을 배웠는데, 함께 하기로 했단 말이야!”
타윈이 주먹을 부들부들 떨다가 눈빛을 번뜩였다.
“나도 마오텐으로 가겠어.”
“뭐? 너 미쳤어?”
타윈의 말에 자단이 놀란 표정으로 더욱 강하게 그를 붙들었다.
“놔. 나도 마오텐으로 가서 스승님과 함께 하겠어.”
타윈의 말에 일환이 앞을 막았다.
“그만 둬라. 그가 그런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거다. 게다가 그는 죽으러 간 게 아니야. 우리에게 아초피로 가있으라고 했으니 그곳에서 기다리는 게 나아.”
일환의 말에도 타윈은 꽤 오랜 시간 동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며칠 뒤, 수도 마오텐-
도르의 호텔 방, 코리옌이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 맞은편에 앉은 도르 또한 편안한 자세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도르 공. 가만히 앉아서 조그마한 일까지 다 알고 있군요. 그 천주윤 공에게 심어뒀다는 자는 믿을만 합니까?”
코리옌의 말에 도르가 살짝 소리 내 웃었다.
“하하, 필요한 곳에만 사람을 배치해뒀을 뿐이죠. 아직 완전히 제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렇게 정보까지 준 것을 보니, 얼마 남지 않은 듯합니다.”
“완전히 자기 사람이 아닌데도, 믿고 아초피로 사람을 보내신 겁니까?”
“밑질 것은 없지 않습니까?”
도르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때 안으로 크라타프가 들어와 살짝 허리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
“공작 각하. 방금 그라함을 미행하는 자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그라함이 마오텐 인근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좋아. 들키지는 않았겠지?”
“예. 기척을 확실히 감추도록 일러뒀으니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무공을 하는 자라면 모를까, 마법사는 감지 마법을 쓰지 않으면 확실하게 미행하는 자를 잡아내기 힘듭니다.”
“그래. 각문에는 말을 해놨나?”
“예. 검문을 하지 말도록 명령해놨습니다. 코리옌 대공의 명이라고 하니 바로 먹히더군요.”
크라타프의 말에 도르가 코리옌 쪽을 바라봤다.
“역시 대공의 명령이니 안 되는 것이 없군요.”
“너무 안하면 더 수상하게 여길 것이니 하는 척은 하도록 말해 두게.”
코리옌은 도르의 말을 무시한 채 크라타프 쪽으로 말했다. 크라타프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서있었다. 도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크라타프가 허리를 숙여 명을 받고 밖으로 나갔다.
“이제 중요한 것은 바리엔이군요.”
도르가 숨을 한 번 길게 쉬며 말했다.
“바리엔에게는 말을 해놨습니까?”
“안 그래도 며칠 전에 만나 삼일 안으로 답을 달라 했었습니다. 음, 마침 오늘이 딱 삼일 째군요.”
“바리엔이 생각대로 움직이겠습니까?”
“천운에 달렸지요.”
도르의 말에 코리옌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천운이요?”
“예. 어차피 세상사 운칠기삼 아니겠습니까.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으니 이제, 하늘의 뜻을 기다려 보시지요. 하하.”
도르의 웃음소리가 방 안에 울리고, 코리옌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