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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에오렐라 연대기
작가 : 이동글
작품등록일 : 2020.8.3

최후의 10년···.
누군가는 그 시간을 황혼의 시대라 불렀다.

 
하얀 꽃나무의 이름 - 숲과 나무 (03)
작성일 : 20-08-06 18:43     조회 : 225     추천 : 0     분량 : 14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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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한참 동안 오르막을 걷던 테티스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스승님의 작업실 뒤쪽에 이런 산이 있었던가?'

 

  경사가 완만하긴 해도, 이 정도로 오래 걸어 올랐다면 언덕을 넘어 낮은 산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조금 전부터는 폭포가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려왔다. 테티스의 기억에 이 근방엔 산이 없었고 폭포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의문이 커져 갈 즈음, 멜포메네가 걸음을 멈췄다.

  낭떠러지 앞이었다.

  멀리 있는 줄만 알았던 폭포도 어느새 맞은편 절벽 위에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낮은 언덕에서 떨어지는 작은 폭포라면 모르고 지나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일찌감치 사라졌다.

  폭포는 들려오던 소리에 비해 상당히 컸고, 이 정도의 규모라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했다.

 

  그래도 테티스는 그런 의문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무언가 준비하기 시작한 멜포메네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테티스의 머릿속을 떠돌던 의문은 어느새 사라지고, 대신 기대감이 차올랐다.

  '드디어 도착했나?' 하는 생각을 하며 두리번거리던 테티스는 스승의 발치에서 시선이 멈췄다.

 

  한 발만 내딛어도 여신의 곁에서 눈을 뜰 것 같은 낭떠러지 앞에 유독 붉은 꽃이 많이 피어 있었다.

 

  "무궁화, 양귀비, 금어초, 석산··· 또···."

 

  테티스가 익숙한 꽃들의 이름을 하나씩 읊고 있을 때, 마침내 멜포메네가 지팡이를 들었다.

  테티스와 테미스가 두 눈을 한껏 빛내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멜포메네는 지팡이를 바닥에 대고 천천히 한 바퀴 돌며 자신을 중심으로 원을 그렸다.

  그러고는 익숙한 동작으로 원의 내부를 고대어로 채워나갔다.

  멜포메네가 마법진을 완성한 듯 지팡이를 다시 거두자, 테티스는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 제자들의 마음을 모를 리 없는 멜포메네는 빙긋 웃어 보인 뒤 지체 않고 마법을 발동했다.

  마법진이 푸른 빛으로 옅게 빛나더니, 이내 다시 빛을 잃었다.

 

  하지만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두 제자의 부푼 기대감은 당혹에서 의문으로 빠르게 바뀌어 갔다.

  결국, 참지 못하고 테미스가 물었다.

 

  "이게 뭐예요?"

 

  같은 마음이었던 테티스 역시 간절한 눈빛으로 멜포메네를 바라봤다.

 

  "뭐긴? 너희가 그렇게 가고 싶어 하던 환상적인 기록 보관실이잖느냐. 너희야말로 뭘 하는 게냐? 어서 들어가지 않고."

 

  그렇게 말하며 멜포메네가 안내한 방향은 천 길 낭떠러지였다.

  테미스는 황당하다는 듯 말없이 멜포메네를 응시했다.

  테티스는 아주 조심스럽게 낭떠러지 끝으로 가 곁눈질로 아래를 흘겨봤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으며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농담이시죠?"

  "스승님··· 제발···."

 

  두 제자는 오늘도 부푼 기대감이 단지 기대만으로 끝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멜포메네는 괜히 장난을 치고 싶은 짓궂은 마음이 샘솟았다.

 

  "그리 쉽게 열어줄 줄 알았더냐? 자, 그럼 돌아가서 전지식 준비나 해볼까?"

 

  멜포메네가 매몰차게 돌아서서 왔던 길을 따라 내려갔다.

  두 제자의 허탈하고 원망 어린 표정을 본 멜포메네는 둘을 지나치자마자 소리 없이 웃어댔다.

 

  뒤에서 무언가 주저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멜포메네는 그것이 테티스가 뒤로 나자빠지는 소리라는 것을 보지 않고도 단번에 알아챘다.

  입꼬리가 한층 더 올라갔다.

  곧이어 "하아···"하는 기운 빠지는 소리와 함께 두 번째 '털썩' 소리가 들려왔다.

 

  멜포메네는 결국 참지 못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다, 알았어. 장난 한번 쳐본 것이니 그리 실망하지 마라.“

 

  다시 돌아서서 천천히 올라오던 멜포메네는 돌연 걸음을 멈춰 지팡이에 손을 포개고, 그 위에 턱을 괴었다.

 

  "허나 길을 열었다는 건 농담이 아니었다. 다만 너희가 보지 못했을 뿐.“

 

  어느새 몸을 일으켜 바닥에 앉아 있었던 두 제자는 멜포메네의 말이 끝나자마자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보이는 것은 천 길 낭떠러지와 건너편 절벽의 커다란 폭포가 전부였다.

  둘은 다시 느긋하게 지팡이에 기댄 스승에게 눈길을 돌렸지만, 멜포메네는 어깨만 으쓱할 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험이구나.'

 

  테미스와 테티스가 동시에 생각했다.

  어느새 진지한 눈빛으로 변한 테미스가 먼저 일어나 움직였다.

  테미스는 멜포메네가 그렸던 마법진 위로 조심스레 올라갔다.

  그러고는 주변을 세밀하게 관찰했다.

  테티스는 그보다 몇 걸음 뒤로 물러서서 낭떠러지 주변을 통째로 눈에 담았다.

 

  멜포메네는 그런 둘의 모습을 보면서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저리 똑 닮아서 어찌 저리 다를꼬."

 

  하지만 이내 낯빛이 어두워졌다.

 

  두 어린 벗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신의 오랜 벗들도 머릿속에 떠올랐다.

  세레스와 미네르바의 얼굴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오랜 벗으로서 믿고 싶지 않고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관리인으로서는 분명 일어난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라고 생각했다.

  그 모호한 경계에서 끝없이 저울질했지만, 멜포메네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한 판단인지.

 

  그 순간 두 제자가 동시에 소리쳤다.

 

  "어!?"

  "아!"

 

  그리고 두 제자의 시선 역시 한 곳으로 모여있음을 발견한 멜포메네는 다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걷는 길은 달라도 언제나 함께 도착하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두 제자의 시선 끝에는 마법진 중심에 핀 꽃들 중 하나가 놓여 있었다.

 

  붉은 양귀비.

 

  멜포메네의 오른팔에 피어 있는 고유꽃이었다.

  두 제자의 눈은 그 양귀비를 시작으로 다음 양귀비, 그다음 양귀비 그리고 또 그다음 양귀비를 쫓았다.

  시선이 점점 낭떠러지로 향했고, 마침내 그 끝에 핀 마지막 여섯 번째 양귀비에 닿았을 때, 두 어린 발터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마주했다.

 

  더는 없는 줄 알았던 일곱 번째 양귀비가 낭떠러지 앞의 허공에 피어올랐다.

  아니, 드러났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수풀을 밀어내 그 뒤에 숨은 꽃을 찾아내듯, 허공이 안개처럼 흩어지며 그곳에 감춰졌던 공간을 드러냈다.

  두 쌍의 시선이 서서히 갈라지는 환영을 따라 천천히 위로 향했다.

  숨어있던 공간이 서서히 좌우로 확장되며 제모습을 드러냈다.

  그만큼 원래 그곳에 있었던 낭떠러지와 절벽, 쏟아지는 폭포가 흩어지듯 사라져갔다.

 

  두 개의 입이 경이로움에 벌어져갔다.

 

  "···환각은 착각에서 비롯되며···.“

 

  테티스가 홀린 듯 중얼거리자 테미스가 뒷말을 받았다.

 

  "착각은 깨달음으로 흩어진다···."

 

  멜포메네가 환영 마법을 가르치며 했던 말이었다.

 

  어느새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의 눈앞에는 폭포와 절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아름다운 꽃으로 가득한 낮은 언덕과 그 위의 큰 나무집이 나타났다.

 

  "···말도 안 돼. 그게 다 환영이었다고?"

 

  테티스가 넋을 놓고 감탄했다.

  테미스는 멜포메네에게 연신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마법을 걸어야 환영을 보는 거잖아요. 이 환영은 언제 건 거예요? 아니지, 지금 저게 환영인 건가? 아니면 아까부터 계속 환영 속이었던 건가? 아, 모르겠다. 혹시 지각한 벌을 지금 받는 거예요?"

 

  테미스가 혼란스러운 듯 머리를 부여잡으며 말이 빨라졌다.

  천천히 걸어오던 멜포메네는 웃으며 테미스의 등을 다독였다.

 

  "일단, 아주 잘했다. 쉽지 않았을 텐데 생각보다 빨리 풀었어."

 

  테티스의 등도 가볍게 다독여준 멜포메네는 천천히 언덕을 올랐다.

 

  "환영 마법은 기본적으로 대상에게 직접 거는 것이지만, 이런 식으로 공간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단다."

 

  걸음을 멈춘 멜포메네는 뒤돌아서 두 제자를 내려다봤다.

  초롱초롱한 두 쌍의 눈에선 선망과 존경이 여지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기억해두거라. 이것을 공간 왜곡이라고 한다."

 

  두 제자는 동시에 환호성을 내지르며 언덕을 뛰어올랐다.

  바닥을 두드려보고 혹시나 조금 전의 풍경이 어딘가에 남아 있지는 않을까 뒤적거리기도 하며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뒤를 돌아본 테티스는 다시 한번 경악하며 테미스를 불렀다.

 

  "···테미스. 저기 봐."

 

  테미스가 테티스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자 멜포메네의 어깨너머로 뒷문이 활짝 열린 작업실이 눈에 들어왔다.

  멜포메네가 마법진을 그렸던 낭떠러지에서 고작 스무 걸음 남짓 떨어진 거리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제야 테티스가 품었던 의문이 단번에 사라졌다.

 

  "저 때부터 줄곧 환영 속이었구나. 어쩐지··· 그렇게 높은 산이랑 폭포가 이 근처에 있을 리 없었는데."

 

  멜포메네가 천천히 언덕을 오르며 말했다.

 

  "이 공간 왜곡은 아까 내가 열었던 작업실 뒤편의 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관찰력이 뛰어났다면 이미 거기서 눈치를 챘겠지."

 

  그 말을 들은 테미스가 "아!" 하며 머리를 감싸 쥐더니 말했다.

 

  "마법진도 안 그리고 마법을 쓰셨었구나."

 

  테티스도 그제야 "아!" 하며 이마를 탁 치고는 멜포메네를 바라보자, 스승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들. 아직 멀었구나. 자, 이제 진짜로 들어가 보거라. 네녀석들이 그토록 가보고 싶어 하던 기록 보관실이 저기 있잖느냐."

 

  스승의 허락이 떨어지자 두 제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뛰어 올라갔다.

 

  그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멜포메네는 다시 고개를 돌려 언덕 아래를 매섭게 노려봤다.

  멜포메네의 고민엔 이미 정해진 답이 있었다.

  그리고 그 답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마법진의 중심에 핀 꽃들을 노려보며 다짐했다.

  지금부터 세레스와 미네르바는 자신의 벗이 아닌, 구백삼 관리인의 앞에 절도 용의자로 선 두 명의 발터일 뿐이라고.

 

 

 

  테미스와 테티스는 매우 당황스러웠다.

  기록 보관실은 분명 처음 오는 곳임에도 너무나 익숙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처음 안으로 들어섰을 땐, 작업실로 되돌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다행히 그것은 아니었다.

 

  멜포메네가 기록 보관실이라 부른 이곳은 작업실보다 조금 더 복잡하고, 조금 더 정돈되어 있지 않았다.

  한마디로 더 난장판이었다.

  멜포메네가 이곳을 언급하며 '남들이 봐선 안 되는 중요한 자료가 있는 곳.' 이라거나 '숲에 관한 기록은 모두 기록 보관실에 있다'라고 하는 말에만 현혹되어 이곳을 관리하는 사람이 누군지 인지하지 못한 잘못이 컸다.

 

  테티스는 이럴 거면 왜 굳이 작업실과 구분해서 사용하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이럴 거면 왜 굳이 작업실이랑 구분해서 쓰는 거예요? 완전 똑같은데···.“

 

  테티스는 순간 마음의 소리를 밖으로 내뱉은 건가 싶어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 그 말을 꺼낸 것은 테미스였다.

  평소라면 스승님께 무슨 무례라며 발끈했을 테티스였지만, 자신이 하려던 것과 완전히 똑같은 질문이었기에 토를 달지 않았다.

 

  멜포메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닥에 쌓인 문서들을 지팡이로 대충 밀쳐내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거야 여기 있는 것들은 누가 보면 안 되니 그렇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고는 금방 밀쳐냈던 문서 더미에서 아무렇게나 한 장을 도로 집어 들었다.

 

  "이건 새로 태어날 발터의 이름을 짓는 규칙을 적어 둔 것이다. 뜰의 관리인이 아니면 볼 수 없지."

 

  그 말을 들은 테티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명의 뜰이라는 단어에는 언제나 테티스의 마음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테티스가 눈을 부릅뜨고 내용을 읽으려 했으나 종이는 다시 문서 더미 속으로 아무렇게나 던져졌다.

  테티스는 천천히 멜포메네의 뒤를 따르면서도 그 종이가 어디에 떨어졌는지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리고 이건 기디움이 매년 얼마나 자라는지 기록해 둔 성장일지다. 처음 심어졌을 때부터 세레스가 기록한 것을 내가 이어받았지."

 

  이번엔 테미스와 테티스의 눈이 동시에 빛나며 멜포메네의 손끝으로 향했다.

  이번에 집어 든 문서 역시 지저분한 바닥 한쪽 편으로 나풀나풀 떨어지는 것을 두 사람 모두 놓치지 않았다.

 

  "덕분에 기디움이 지금도 계속 자라고 있다는 사실은 나만 알고 있단다."

 

  테미스는 놀람과 동시에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이 셋이 되어도 괜찮은 건지 물어보려다 참았다.

  괜한 소리를 꺼냈다간 더는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같은 생각을 한 건지 두 제자는 눈이 마주치자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대충 이런 식이란다. 여기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숲과 관련된 것들이고, 관리인 자격이 없는 이들에겐 공개하지 말라는 명을 받았던 것들이지."

 

  그렇게 말한 멜포메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뒤돌아서 질문을 건넸다.

 

  "기디움의 키가 한 해에 얼마나 자랐는지, 그걸 기록하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해서 아직 이곳에 남아 있다고 생각하느냐?"

 

  두 제자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하면서도 금세 생각에 잠겼다.

 

  테미스가 먼저 대답했다.

 

  "기디움은 여신 로클라님께서 직접 심으신 신비한 나무니까요."

 

  멜포메네는 테미스의 자신 있는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인 후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하나, 이 로클로르 숲에는 기디움 외에도 로클라님께서 직접 심으신 나무가 수천 그루가 넘는데, 그건 어찌 설명하겠느냐?"

 

  테미스가 눈을 게슴츠레 뜨더니 다시 생각에 잠겼다.

  테미스의 대답이 정답이라 생각했던 테티스도.

 

  이번엔 테티스가 대답했다.

 

  "아! 기디움의 성장이 더뎌지면 어딘가 병든 것일지 모르니까요!"

 

  테티스의 대답에 멜포메네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오, 그건 새로운 접근이구나. 놀라운데? 아쉽지만 그래도 정답은 아니다."

 

  다시 두 제자의 대답을 기다리던 멜포메네는 결국 직접 입을 열었다.

 

  "정답은···."

 

  두 제자가 아쉬움 반, 기대 반의 눈빛으로 스승을 올려다봤다.

  한참 뜸을 들이던 멜포메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작업실로 옮기는 게 귀찮아서다."

  "···네?"

 

  어처구니없는 소리에 테미스가 물었다. 테티스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농담이시죠?"

  "아니. 진담이다. '공개해도 좋다'라는 말을 이미 수백 년 전에 세레스로부터 들었지. 근데 매번 잊어버리거나 귀찮아서 말이다."

 

  그렇게 말한 멜포메네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무슨···."

 

  테티스가 멜포메네에게 처음으로 실망한 순간이었다.

  테미스는 그 옆에서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 속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몸부림이었다.

 

  "여기 있는 거의 모든 기록이 그런 식이다. 세레스의 신중한 성격이 낳은 결과물들이지."

 

  멜포메네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숲의 초기에, 세레스는 그야말로 걱정과 우려의 결정체였다. 아주 사소한 것부터 전부 기록으로 남기면서, 그것을 비밀리에 감추려 했지. 그만큼 이 숲을 맡은 책임감이 막중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멜포메네는 지팡이로 멀찍이 있는 두루마리 하나를 걸어와 손에 들었다.

 

  "기디움의 서쪽에 맺힌 사과와 동쪽에 맺힌 사과의 갯수. 이게 도대체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느냐? 새로 태어날 발터의 이름을 짓는 규칙? 그것도 이미 잊어버린 지 한참 됐지."

 

  멜포메네는 다시 웃음을 터뜨리며 두루마리를 멀찍이 던져놓았다.

  테티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주변에 널브러진 문서들을 들어 내용을 살폈다.

  정말 대부분이 단순한 기록 일지뿐이었다.

  중에는 꽤 중요해 보이는 문서도 있었고, 언젠가 테티스가 벌로 받은 환영 속에서 본 끔찍한 미궁을 그려 놓은 듯한 도면도 있었다.

  심지어 그때의 미궁보다 몇 곱절은 더 복잡하고 난해해 보였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멜포메네의 개인적인 악취미일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것들이 다 부질없는 일이라는 걸 깨달은 게지. 모두 똑같은 로클라님의 피조물인 우리 발터끼리는, 감출 것도 보여주지 못할 것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때 세레스가 내게 말했다. '더는 동족에게 무엇도 감출 필요 없다.'라고."

 

  멜포메네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그 이후로는 뭐, 파기하든 공개하든 내 자유였는데, 늘 해오던 일이라서 여태 붙잡고 있는 것들도 있고,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계속하는 것도 있고, 귀찮아서 그냥 그대로 둔 것도 있고··· 물론, 정말 중요한 무언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마저도 굳이 나서서 알리지 않을 뿐. 비밀로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니란다. 아무튼,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귀중한 '비밀' 문서 같은 건 이곳에 없다. 어떠냐? 실망했느냐?"

 

  두 제자는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의문이 남는 것은 사실이었다.

 

  테미스가 물었다.

 

  "그러면 어째서 저희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거예요? 보여줄 수 없는 중요한 자료들이 가득하다고."

 

  "그래야 너희들이 열심히 할 동기가 되지 않겠느냐?"

 

  이번엔 테티스가 물었다.

 

  "그러면 어째서 지금은 진실을 알려주시는 건가요? ···설마 저희를 내치시려고···."

 

  엄습하는 불안함에 우물쭈물하자 멜포메네가 테티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이젠 너희가 고작 이 정도로 열심히 할 단계는 지났다고 판단했다.“

 

  다시 돌아선 멜포메네는 천천히 걸으며 말을 이었다.

 

  "그만큼 성장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아무런 목표 없이 풀어놓기엔 너무··· 뭐랄까, 너흰 발터답지 않아. 끝없는 호기심이 그렇고,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행동력이 그렇지. 그런 녀석들을 그냥 두었다가는 큰 사달이 날 게 뻔하다. 너희 둘은 발터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다투는 발터'니까. 나 참, 그 옛날부터 전해온 '싸움'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너희를 보고서야 처음 이해했다."

 

  두 제자는 칭찬인지 꾸짖음인지 몰라 어색한 표정으로 뒤를 따를 뿐이었다.

 

  "그만큼 너희가 특별하다는 뜻이다. 자, 그럼 이제 특별한 두 말썽쟁이가 큰 사달을 내기 전에 새로운 목표를 제시해줄 때로구나."

 

  멜포메네가 부드러운 미소를 띠자 테미스와 테티스의 표정이 덩달아 밝게 빛났다.

  이번엔 좋은 소식임이 확실했다.

  두 제자는 마치 연습이라도 한 듯 똑같은 동작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빨리요, 빨리."

 

  참다못한 테미스가 재촉했다.

 

  "조금 전에 이곳의 존재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정말 중요한 무언가가 없지는 않다고 했던 말 기억하느냐?"

  "네!"

  "그럼 그 중요한 것 중엔 뭐가 있을 것 같으냐?"

 

  두 제자는 한참을 고민했지만 좀처럼 그 대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테티스가 멜포메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멜포메네가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눈치 보지 말거라. 대답 못 하는 것이 정상이니."

 

  의외였다.

 

  "네? 어째서···."

 

  테미스의 질문에 멜포메네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아주 중요한 정보는 애초에 말도 꺼내지 않았으니까. 그것이 중요하다는 걸 알리는 것부터가 잘못된 행동이지."

  두 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러니 기뻐해라. 바로 오늘, 그 중요한 정보 중 하나를 너희에게 알려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우연인지 운명인지, 너희는 오늘 이미 그걸 봤다."

 

  두 제자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그 짜릿한 정보가 무엇일지 생각하던 둘은 무언가 퍼뜩 떠오른 듯 동시에 마주 보았다.

 

  "설마···."

 

  테미스가 먼저 입을 열자, 테티스가 뒷말을 이었다.

 

  "순백꽃나무···는 아니겠죠? 아하하, 죄송해요. 저희가 너무 주제넘게···."

  "맞다."

  "와아아악!"

 

  테미스와 테티스가 동시에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둘은 백광화와 구백삼이 어떻게 자라기 시작하고,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에 관한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둘 뿐만 아니라, 숲의 모든 발터가 마찬가지였다.

 

  오래전부터 순례자가 된 발터는 그렇게나 많은데, 어째서 순백꽃나무를 실제로 봤다는 증언은 손에 꼽는지.

  백광화는 어떻게 스스로 빛을 내는지.

  순백꽃나무는 왜 그토록 하얀지.

  알려지지 않은 다른 신비한 특징은 없는지.

 

  찰나의 순간에도 수많은 질문과 의문이 두 사람의 머릿속을 스쳤다.

  이 모든 의문문은 죄다 두 사람의 머릿속에 있었지만, 멜포메네는 마치 그 마음의 소리가 자신에게 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두 제자의 눈은 학구열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묻고 싶은 것도, 알고 싶은 것도 많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오늘은 꽤 여러 번 너희를 놀려줬으니 지체하지 않으마."

 

  테티스는 입을 틀어막았고, 테미스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조금만 더 기대를 안겼다간 흥분으로 폭발할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소개하마. 저곳이 내가 백광화와 구백삼을 관리하는 장소, 하얀 정원이다."

 

  멜포메네는 지팡이를 들어 테티스와 테미스의 사이를 가리켰다.

  정확히는 둘의 어깨너머의 어딘가를.

 

  두 제자는 스승이 들어 올린 지팡이의 끝을 따라 시선을 돌리려다 동시에 멈췄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는 없지만, 뒤쪽에서 밝은 빛이 뿜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뒤를 돌아보면, 분명 지금껏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순간을 맞이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것이 무엇이고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어중간한 마음가짐으로는 감히 마주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도.

 

  테미스와 테티스는 곁눈질로 서로를 바라봤다.

  고개를 더 돌리기엔 아직 각오가 부족했다.

  마치 서로 의지하듯 한참 동안 눈을 맞추더니 테미스가 먼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테티스도 마음을 먹은 듯 마주 끄덕이고는 동시에 심호흡을 했다.

  마지막으로 결의를 다지듯 동시에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두 제자는 눈을 부릅뜬 채 뒤돌았다.

 

  테미스는 새삼 다시 느꼈다.

  자신의 상상력이 얼마나 하잘것없고 초라한지.

 

  그리고 같은 순간 테티스는 자책했다.

  자신의 이토록 얕고 좁은 지식으로 감히 스승님의 도움이 되고자 했음을.

  그리고 경외심 가득한 눈빛으로 멜포메네를 올려다봤다.

  이런 세계를 홀로 오롯이 마주하고 있는 스승님이 존경스러웠다.

  더욱이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비현실적인 세계가 그의 수많은 업무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경악스러웠다.

 

  테티스는 다시 고개를 돌려 하얀 정원을 바라봤다.

  옆에 선 테미스는 입을 벌린 채 넋이 나가 있었다.

  천천히 정원을 둘러보는 테미스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먼지가 켜켜이 쌓인 낡은 문서로 가득했던 장소.

  그 지저분했던 장소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순백꽃나무가 빼곡히 자란 드넓은 정원이 되어 있었다.

  수천 송이의 백광화가 내뿜은 빛을 수만 그루의 구백삼이 반사하자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순백의 광휘가 되었다.

 

  "이런 아름다운 비경을 내가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하는 테미스의 목소리가 크게 떨리고 있었다.

 

  썩은 나무의 악취와 쾨쾨한 먼지 냄새는 홀연히 사라지고, 아까는 미처 맡지 못했던 특유의 상쾌한 향이 진동했다.

  두 어린 발터는 연신 향을 들이마시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가며 빛나는 거대한 회랑을 감상했다.

  하얀 정원이라는 이름이 너무도 잘 어울렸다.

 

  "2,298송이의 백광화. 그리고 20,661그루의 구백삼이 이 숲에 있다."

  "경이로워···."

 

  테티스가 중얼거렸다.

  그것보다 더 좋은 표현을 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다 여기 있었구나. 그러니까 아무도 못 봤지."

 

  이번엔 테미스였다.

  하얀 정원을 마주하기 전까지 품고 있었던 의문 중 한 가지가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그래. 누군가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도록 내가 이런 식으로 관리하고 있다."

  "그렇게 바쁘신 분이 언제 이렇게 많이 옮겨 심은 거예요? 진짜 새삼 대단한 분이시라니까."

 

  테미스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두 눈은 여전히 하얀 정원에서 한순간도 떼지 않았다.

 

  "야! 말투 좀 어떻게 못 하니?"

 

  테티스가 질타하자 멜포메네가 웃으며 어깨를 토닥였다.

 

  "뭐, 실제로 이곳에 옮겨 심은 건 아니니, 그리 대단할 것도 없단다."

  "네? 그럼 이건···?"

  "그래, 이 하얀 정원 역시 환영이다. 그렇다고 가짜인 것은 아니다. 순백꽃나무가 있는 곳을 공간 왜곡으로 감추고, 그 감춰진 공간을 이곳에 투영시킨 것이지. 알다시피 이것들은 로클로르 전역에 분포하고 있는데, 매일같이 그걸 전부 돌아보며 관리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이 하얀 정원을 둘러보다가 이상이 보이면 직접 그곳으로 가 확인하는 게지."

 

  멜포메네가 천천히 하얀 정원으로 들어섰다.

  우물쭈물하던 두 제자도 이끌리듯 스승의 뒤를 따랐다.

 

  테미스는 다시 한번 전율했다.

  정원의 내부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한층 더 강렬했다.

  맹렬히 뿜어져 나오는 순백의 광휘가 마치 자신도 한 그루의 구백삼이 된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어떠냐? 기대한 보람이 있느냐?"

 

  멜포메네의 뒤를 멀찍이 따라오던 둘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자신들이 스승의 뒤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대답했다.

 

  "네! 엄청!"

 

  힘찬 대답에 멜포메네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이후 한동안 말없이 정원의 중심부로 향하던 멜포메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진짜 너희에게 동기를 부여할 시간이구나."

  "엥?"

 

  테미스가 저도 모르게 얼빠진 감탄사를 뱉어냈다.

  테티스 역시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멜포메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하얀 정원을 소개했지, 이게 너희의 새 목표라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우뚝 선 멜포메네가 반쯤 뒤돌아 두 제자를 흘겼다.

 

  "생각하다 보니 괘씸한데? 너희 새 목표가 이 정원인 줄 알았다면 뭐, 너희가 나 대신 하얀 정원의 관리인이라도 되려 했더냐?"

 

  아차 싶은 두 제자의 몸이 긴장으로 굳어갔다.

  테티스가 적당한 변명거리를 찾는 사이, 멜포메네가 먼저 표정을 풀고 넉살 좋게 웃었다.

 

  "역시 너희는 놀리는 재미가 쏠쏠하다니까. 자, 이것이 너희의 새로운 동기가 되어 줄 녀석이다."

 

  테티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멜포메네가 가리킨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곳엔 당연하게도 순백꽃나무가 당당히 빛을 내뿜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백광화를 에워싼 구백삼이 여섯 그루밖에 없었다.

 

  "세 그루는 베어 다른 곳에 사용했다. 이 구백삼은 아주 요긴하게 쓰이는 곳이 있거든. 한번 만져 보겠느냐?"

 

  테미스가 뜻밖의 제안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거절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그 제안이 반가웠다.

 

  두 제자는 천천히 구백삼에 다가가 팔을 뻗었다.

  언젠가 아주 작은 벌새의 새끼를 만났을 때만큼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렇게 천천히 구백삼의 수피에 손을 댄 순간, 황급히 다시 손을 거뒀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진실을 마주한 양, 눈을 크게 뜨고 동시에 멜포메네를 올려다봤다.

 

  예상대로의 반응에 멜포메네가 고개를 젖히며 크게 웃어댔다.

 

  "왜 그러느냐? 그리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구백삼을 만졌던 손을 꼭 부여잡은 테티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이, 이게···."

  "너무 부드럽지?"

  "원래 이런 건가요? 케피 배 만지는 느낌인데···."

 

  테미스의 솔직한 감상에 긴장했던 테티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케피? 그게 무어냐?"

  "숲에 사는 사슴인데, 배가 볼록해서 엄청 말랑말랑한 친구예요. 맞아. 완전 케피 배였어···."

 

  멜포메네도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케피의 배처럼 말랑말랑한 그게 구백삼의 감촉이다."

 

  멜포메네가 거침없이 손을 뻗어 구백삼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러자 구백삼의 수피가 조금의 저항도 없이 멜포메네의 손길대로 형태가 바뀌었다.

  두 제자는 놀라 다시 숨을 삼켰다.

 

  보기 흉하게 모습이 바뀐 구백삼은 곧 천천히 원래의 곧은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구백삼은 나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르지. 보는 것처럼 힘을 전혀 들이지 않고도 쉬이 주무를 수 있을 만큼."

 

  거기까지 말한 멜포메네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서서 바닥에 작은 마법진을 그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리 형태를 바꾸더라도 조금 전처럼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긴 하지만, 그것은 뿌리와 이어져 있는 동안만 그렇단다. 베어내도 열흘 정도는 여전히 무르고 아주 말랑말랑하지만, 원래의 형태로 되돌아가는 성질은 잃어버리지."

 

  완성된 마법진이 옅은 푸른빛을 내뿜자 어디선가 바위 하나가 날아들어 멜포메네의 앞에 깊이 박혔다.

 

  "그리고 그 열흘이 지나면 무른 성질마저 잃고, 그 순간의 형태로 완전히 굳어진다. 그리하면 이런 게 만들어지지."

 

  멜포메네가 두 제자에게 자신의 지팡이를 내밀어 보였다.

 

  "스승님 지팡이가 구백삼으로 만든 거였어요?"

  "왜 여태 몰랐지? 아니, 아니. 하나도 안 하얗잖아요. 완전 흙색이구만."

 

  멜포메네가 내민 지팡이를 이리저리 관찰하며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었다.

 

  "색이야 내 마음이니 염색을 한 것이지. 아무튼, 이 '인도자의 등불'도 바로 구백삼으로 만든 것이다. 보다시피 아주 단단하단다. 저렇게나 말랑했던 것이 말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로 단단하냐면···.“

 

  멜포메네가 인도자의 등불을 고쳐 잡은 뒤, 앞에 박힌 바위를 세게 내리쳤다.

  그러자 굉음을 내며 바위가 반으로 갈라졌다.

  하지만 지팡이에는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았다.

 

  "이런 바위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지. 덧붙여, 오랜 시간 사용하게 되면 소유자의 마나를 증폭시켜주는 힘도 지니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구백삼이다."

 

  멜포메네가 인도자의 등불을 다시 거뒀고 두 제자는 조각난 바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때, 흥미로운 이야기였느냐?"

 

  테미스와 테티스는 왜인지 잔뜩 긴장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구나. 그럼 지금부터 하는 말은 더 흥미로울 거다. 너희의 새 목표에 관한 말이기도 하니까."

 

  멜포메네가 다시 구백삼을 부드럽게 만지며 말을 이었다.

 

  "지금 이 구백삼 한 그루를 벨 것이다."

  "왜요!?"

 

  테미스가 반사적으로 소리치자 테티스가 단짝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쓸 일이 생기셨겠지. 왜는 무슨 왜야?"

  "그래. 생겼다. 아니, 오늘 밤 생길 예정이다."

 

  그렇게 말한 멜포메네는 웃음기가 싹 가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두 제자를 내려다봤다.

 

  "오늘 현자의 시험에서 반드시 한 명의 통과자가 나올 것이다. 반드시. 단 한 명의 통과자가. 그리고 그자가 이 구백삼의 주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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