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4  5  6  >>
 1  2  3  4  5  6  >>
 
자유연재 > 추리/스릴러
입을 다문 아이들
작가 : 흰다람쥐
작품등록일 : 2020.7.31

경찰대를 졸업한 서희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각오로 강력계에 지원했다. 부모님은 형사가 되려는 그녀를 만류했지만, 그녀는 끝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서희는 강력계로 전입을 오자마자 터진 살인사건을 맡게 되지만, 피해자는 얼굴이 난도질당한 채 죽어있고 동거녀의 속옷은 몽땅 사라져있다. 한편 피해자와 함께 살던 쌍둥이들은 현장에서 누군가를 보았다고 증언하는데…

 
6. 어두운 터널 속의 범죄자
작성일 : 20-08-06 15:13     조회 : 215     추천 : 0     분량 : 10532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6. 어두운 터널 속의 범죄자

 

 

  정현석 경감이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연신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회의가 시작된 지 한참이나 지났지만 그는 아직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서희는 브리핑을 모두 끝마치고는 자리에 앉았다. 회의실 내부에는 원형테이블을 중심으로 그녀와 김 경사를 비롯해 정현석 경감, 박주영 경정, 홍보팀에서 나온 강연지 경위, 그리고 과학수사반에서 나온 머리가 희끗한 사내가 둘러앉아 있었다. 서희는 경찰서 내부를 오고가며 머리가 희끗한 사내를 몇 번인가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내용만 종합해보았을 때, 범인은 고작 여자의 속옷을 훔치기 위해 피해자를 죽였다는 거로군. 그렇지?”

  박주영 경정이 황당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는 현석보다 열 살이 넘게 차이가 나는 어린 후배였다. 직접적인 후배는 아니었고, 다른 지역에서 근무하다가 용산경찰서의 형사과장으로 발령을 받은 경찰대 출신으로 어찌 보면 서희의 직속 선배라고 말할 수 있었다. 왜소한 체격과 창백한 피부는 그가 현장보다는 사무직에 특화된 인물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실제로도 그의 경력은 홍보팀과 정보과 등을 거치며 주로 사무실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업무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감식반의 보고서에 따르면 피해자의 핸드폰도 사라졌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현석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또한 김 경사와 마찬가지로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핸드폰이? 기종이 뭔데?”

  “통신사에서 알려준 거로는 아이폰이었다고 합니다. 최신형이고요.”

  “고가의 핸드폰과 속옷이라. 도둑놈 취향이 참 독특하네. 언론에서 알아차리면 난리도 아니겠어.”

  박주영 경정이 비꼬듯 말했다. 그가 형사과장으로 발령을 받은 이후 처음으로 관할지역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유독 이 사건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그렇잖아도 어떤 사건인지 알려달라고 기자들한테서 자꾸만 요청이 들어와요. 적어도 네 시간 뒤에는 기자들을 대상으로 브리핑을 시작해야 해요.”

  출입구와 가까운 자리에 앉아있던 강연지 경위가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고는 말했다. 홍보팀에서 나온 그녀는 사건 자체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언론에 어떤 식으로 발표를 하면 좋을지에 더욱 관심이 쏠려 있었다.

  “조사 중이라고만 발표하면 안 돼요?”ㄱ

  서희가 물었다.

  “그렇게 되면 추측성 보도가 난무하기 시작할 거예요. 그리고 어떻게 알아냈는지 이미 시신이 심하게 훼손된 상태라는 걸 알고 있는 기자들도 있어요. 제 생각에는 반찬거리라도 던져주어야 할 것 같아요.”

  “기자들이 정확히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겁니까?”

  “그건 저도 몰라요.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에 따라 다르겠죠.”

  강연지 경위가 어깨를 으쓱였다.

  형사들이 제출한 보고서를 말없이 훑어보던 현석이 시선을 들어 원탁의 정중앙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는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몸을 앞으로 기울이더니 양손에 깍지를 낀 채로 턱 밑에 받쳤다.

  “홍보팀장님. 이제까지 언론에서 보도된 내용들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현석의 물음에 강연지 경위가 수첩을 앞뒤로 넘기며 대답했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건 몇 개 없어요. 한남동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점, 하필이면 거기가 십오 년째 거론되고 있는 재개발단지라는 점, 피해자가 중년의 남성이라는 점이 전부예요.”

  “비공식적인 것도 있어요?”

  “네. 확산되지는 않았지만 인터넷기사에 달린 댓글이나 개인SNS를 통해서 퍼지고 있는 것도 저희 팀원 중 한 명이 오늘 아침에 발견했어요. 사이버수사팀에 연락해서 해당 게시물들을 내리게는 만들었지만, 어디에 또 그런 글들이 올라올지는 저희도 몰라요.”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확인하셨나요?”

  “물론이죠. 죄다 말도 안 되는 허황된 내용뿐이긴 했지만 혹시 몰라서 기록은 해뒀어요.”

  “주로 어떤 내용들인가요? 핵심만 간단하게 짚어주세요.”

  “잠시만요.”

  강연지 경위는 수첩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더니 빠르게 종이를 넘기기 시작했다. 어디에 기록을 해뒀는지 기억하고 있는 듯 종이를 빠른 속도로 넘기면서도 내용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여깄네요. 음, 하나는 피해자가 재개발 추진을 반대하는 사람이었대요. 건설사 선정 과정에서의 비리를 발견했고 그래서 죽임을 당했다고요. 전형적인 음모론이죠. 그리고 두 번째는 정반대인데, 반대로 피해자가 재개발조합원이었다고 하네요. 건설사 선정 과정에서의 비리를 미끼로 조합원들이랑 건설사를 협박하다가 살해당했다고 해요. 그밖에 다른 것들도 있지만 어쨌든 결론은 대부분이 다 이런 식으로 끝나요. 아무래도 꽤나 오랫동안 거론되고 있는 재개발지역이기도 하고, 실제로 최근 뉴스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되다보니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강연지 경위의 말대로 사건이 발생한 한남 3구역 재개발단지는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대형건설사들이 앞 다투어 시공권을 얻기 위해 경쟁하는 지역이었다. 예상 사업비만 7조 원을 넘기는데다가 공사비만 2조 원에 육박할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은 대한민국의 부의 상징과도 같은 지역이었다. 하지만 그런 위상에 걸맞은 땅값과는 달리, 실제 한남 3구역의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언제 시작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재개발 사업 덕분에 집주인들은 단 한 푼도 자신들의 건물에 투자하지 않았고, 그 결과 시설이 점차 낙후되어 이제는 빈민촌이나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제 한남 3구역에 집주인들이 직접 살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재개발 보상금이라도 받고 나가기 위해 눌러앉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최악의 상황이군.”

  현석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ㅇ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강연지 경위가 고개를 들었다.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보아 하니 스토리를 어느 정도 만들어줘야겠네요. 과장님 생각은 어떠세요?”

  갑작스런 질문에 박주영 경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래도 대화의 흐름을 중간에 놓친 듯한 얼굴이었다.

  “보도자료를 어떤 식으로 배포해야 좋을지 여쭤본 겁니다.”

  현석이 주영의 정신을 제자리로 돌려주었다. 주영은 고민에 잠긴 척 미간을 잠시 찡그리더니 이윽고 말했다.

  “어떤 식이건 재개발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도가 되어야 해. 실제로도 아무 관련이 없겠지만, 그런 추측조차 나돌게 해서는 안 돼.”

  서희는 멀뚱멀뚱 그를 쳐다보았다. 박주영 경정이 왜 이렇게까지 재개발과 연관지어지는 걸 염려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현석이 헛기침을 두어 번하며 형사들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모았다. 어느새 깍지를 끼고 있던 손을 풀.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채였다.

  “서장님 지시야. 이번 사건이 재개발 사업에 어떤 식으로든 브레이크를 걸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는 나한테 묻지 마. 솔직히 나도 이유는 잘 모르겠으니까.”

  “추측성 기사 자체를 막을 생각이라면 반찬거리 정도가 아니라 코스요리는 내주어야 할 텐데요.”

  강연지 경위가 볼펜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현석은 생각에 잠긴 듯 입을 굳게 다문 채 또다시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고민이 생길 때마다 나오는 일종의 버릇인 것 같았다.

  “단순강도사건으로 만들 수 있겠어요?”

  “그것 자체는 어렵지 않은데, 문제는 강도가 왜 시신을 훼손시켰냐고 물어보면 대답할 거리가 없어요.”

  “어차피 부검도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시신의 상태는 밝힐 수 없다고 대충 둘러대면요?”

  강연지 경위가 들고 있던 볼펜을 입술 위에 갖다대고는 잠시 침묵했다.

  “뭘 훔쳐갔는지 물어보면 사실대로 대답해도 될까요?”

  “조사하는 중이라고 해야죠. 안방의 상태만 대략적으로 공개해주세요. 창문이 열려있었고, 수납장은 비어있던 걸로요. 범인은 살인을 저지르고 안방에서 물건을 훔치다가 때마침 아이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놀라서 그대로 도망친 겁니다. 우리는 범인이 뭘 훔쳐갔는지 조사하는 중이고요. 참고로 시신이 어디서 발견되었는지는 밝혀선 안 됩니다.”

  “용의자는요?”

  “조사하는 중이죠.”

  “흉기는 어떻게 하죠?”

  “수사 중인 사항이라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기자들의 원성은 전부 제 몫이겠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회의실에 안 들어오는 건데.”

  강연지 경위가 수첩에 메모를 마치고는 혀를 찼다. 그녀는 볼멘소리를 내뱉으면서도 보도자료에 공개될 내용들을 하나하나 읊어가며 마지막으로 최종검토를 끝마쳤다. 그녀가 수첩을 덮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혹시라도 추가로 공개해도 될 자료가 생기면 꼭 연락주세요.”

  “물론이죠. 꼭 그렇게 할게요.”

  강연지 경위가 회의실 문을 열고는 밖으로 나갔다.

  문이 완전히 닫히는 걸 확인한 현석은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에서 안쪽을 들여다볼 수 없도록 회의실 창문의 블라인드를 끝까지 내렸다. 그러고는 자기 자리로 다시 돌아와 의자에 앉자마자 보고서 하나를 펼쳤다. 감식반에서 제출한 현장감식보고서였다. 서희는 자신의 앞에 쌓인 파일들을 뒤적여 그와 같은 보고서를 찾아냈다.

  감식반에서 제출한 보고서에는 현장 내부의 사진과 함께 곳곳에서 발견된 온갖 지문들과 흔적, 그리고 크고 작은 특이사항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스무 장 가까이에 걸쳐 작성된 보고서에는 형사들이 현장에 다시 들르지 않더라도 언제든지 당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게끔 꼼꼼하게 작성되어야만 했고, 서희가 들고 있는 보고서는 그러한 의무를 성실히 이행한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완벽해보였다.

  보고서의 맨 앞장에는 발견 당시 피해자의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찍은 사진들과 함께 그에게서 뽑아낼 수 있는 정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피해자의 신원이 가장 먼저 소개되어 있었고, 그가 입고 있었던 옷의 재질과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 등이 적혀있었다. 피해자는 사망 당시 남색 정장바지에 체크무늬셔츠를 입고 있었다. 시계는 백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시계였다. 현관 앞에 놓여있던 구두도 그렇고 택배기사라는 직업과는 거리가 먼 복장이었다. 아이들은 그가 주말마다 어딘가로 나간다고 증언을 했었다. 서희는 피해자가 늘 이러한 복장을 입고 다녔는지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보고서의 맨 아래쪽에는 발견 당시 박승현이 지니고 있었던 물품의 목록이 기재되어 있었다. 박승현은 발견 당시 세 가지 물건을 바지주머니 속에 지니고 있었다. 구겨진 영수증, 신용카드, 그리고 차 열쇠였다. 승현의 차는 사건현장에서 도보로 십 분이 걸리는 거리에 위치한 공영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다. 역시나 고급외제차였다.

  “DNA 감식 결과는 언제쯤 나옵니까, 최준철 반장님?”

  현석이 머리가 희끗한 사내를 바라보며 물었다.

  서희는 여러 장을 넘겨 현석이 언급하고 있는 내용이 적힌 페이지를 찾았다. 주방에서 발견된 물기가 마르지 않은 식칼에 관해 그는 물어보는 중이었다. 욕실 세면대의 배수관 파이프에서 피해자의 혈흔이 검출되었고, 따라서 범인은 피해자를 살해한 직후 흉기를 물로 씻어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물기가 마르지 않은 식칼은 범행도구로써 가장 유력한 흉기 중 하나였다. 식칼 손잡이에서는 이미 털실 한 가닥이 발견된 상태였고, 따라서 칼날에서 피해자의 DNA가 검출되기만 한다면 범행도구로 확정지을 수 있을 터였다.

  “글쎄, 주말이 껴 있으니까 앞으로 사나흘은 되어야 받아볼 수 있을 걸세.”

  과학수사반의 최준철 반장이 대답했다. 그는 오십을 갓 넘긴 사내였다. 하지만 이마에는 벌써 환갑을 넘긴 듯 주름이 자글자글했고, 눈가에도 역시나 잔주름이 가득했다. 그는 실내에서만 주로 근무하는 경찰관들과는 다르게 다부진 체격의 건강한 몸매였지만, 이상하게도 얼굴만큼은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받은 듯 지나치게 노안이었다. 어쩌면 코끝에 걸친 둥근 안경 때문에 더욱 그래 보이는지도 몰랐다.

  “그런 그렇고. 이 내용은 어떻게 된 겁니까, 반장님? 이건 저희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거죠?”

  현석이 물었다. 그는 어느덧 열려있던 미닫이창문에 대한 감식반의 소견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거야 자네들 마음이지.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이미 그 보고서에 전부 기록해두었네.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아니라 자네들의 몫이야.”

  서희는 현석이 가리키고 있는 소견서를 찾아내 그 내용을 살펴보았다. 감식반의 소견서에 따르면 강제침입의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열린 미닫이창문 또한 마찬가지였다. 외부에서 강제로 창문을 열었다는 흔적은 전혀 없었다. 소견서대로라면 미닫이창문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열렸다는 뜻이었다.

  “이 내용은 정말로 확실한 겁니까?”

  서희가 보고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실제로 창문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잠겨있는 걸 외부에서 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네. 영화 같은 데서나 얇은 철사 같은 걸로 창문 틈새에 밀어 넣어서 쉽게 잠금장치를 풀 수 있는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창틀에 수많은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지. 심지어는 그렇게 하고서도 풀 수 있는 확률은 거의 희박하다고 볼 수 있고. 그럴 바에야 차라리 창문을 깨고 들어가는 편이 훨씬 수월할 걸세. 강제로 열고 들어갔다면 반드시 티가 날 수밖에 없다는 뜻이지.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이네만, 살인을 저지를 만한 담력을 가진 인간이 고작 창문 하나를 열겠다고 그렇게 애를 쓸 것 같지도 않고 말이야.”

  “어쩌면 처음부터 열려있었을 수도 있겠네요.”

  “그랬을지도 모르지.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그걸 어떻게 해석할지는 자네들 마음이야.”

  침묵이 회의실 내부를 채웠다. 서희는 문득 어두운 터널 속을 거닐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마치 망망대해가 눈앞에 펼쳐져있는 듯 어디로 키를 잡아야할지 막막했다. 서희는 좀처럼 범인에 대한 그 어떠한 윤곽도 머릿속에 그려지지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이 사건의 범인은 너무나도 이질적인 존재였다.

  범인은 김혜신의 속옷을 모조리 훔쳤고, 동시에 피해자의 핸드폰을 가져갔다. 시신에는 온갖 난도질을 가했으며 그러면서도 단서가 될 만한 족적이나 지문은 일체 남기지 않았다. 모든 범죄에는 범행의 동기와 그로 인한 목적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사건은 그것이 명확하게 보이지를 않았다. 피해자를 난도질했다는 것만 보면 증오나 복수심에 불타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럴 경우 범인은 피해자와 안면이 있는 사이일 가능성이 높았고, 핸드폰에 자신의 신원을 드러낼만한 단서가 들어있었기 때문에 핸드폰을 훔쳐갔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될 경우 김혜신의 속옷이 사라진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물론 김혜신이 거짓말을 했다는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속옷을 도둑맞았다는 거짓말을 할 이유 또한 없어보였다. 아마도 속옷이 사라졌다는 그녀의 주장은 진실일 터였다.

  침묵이 불편했는지 박주영 경정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덕분에 회의실 내부의 모든 시선이 전부 그에게로 향했다.

  “그, 피해자의 부검은 언제쯤 진행될 예정이지?”

  박주영 경정이 어색함을 삼키며 물었다.

  “월요일 오전 9시에 진행될 예정입니다. 저랑 구서희 경위가 참관할 거고요.”

  그와 눈이 마주친 김 경사가 대답했다.

  “그럼 앞으로의 수사계획은 어떻게 되나, 경감?”

  현석은 입을 다문 채 박주영 경정을 잠시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시선을 돌려 서희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서희는 자신에게로 대답이 넘어왔음을 깨닫고는 앉은 자리에서 허리를 곧게 폈다.

  “우선 회의가 끝나는 대로 교통과로 넘어가 사건현장 인근 CCTV 분석을 요청할 생각입니다. 협조를 해줄지 안 해줄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랑 김 경사 둘이서만 살펴보기에는 양이 너무 많아서요. 그런 뒤에 곧장 김혜신의 알리바이부터 확인하러 갈 생각입니다.”

  “교통과에는 내가 직접 협조요청을 해둘게. 또 내가 뭘 도와줄 수 있는 게 있겠나?”

  “그것 말고는 아직 없습니다, 과장님.”

  박주영 경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서장님은 이 사건이 되도록 조용하고 신속하게 마무리되기를 바라셔. 비록 수사인력을 더 충원해줄 수는 없지만, 그만큼 도움이 필요한 게 있다면 최대한 협조해줄 생각이야. 대신 수사팀에서 해주어야 할 일은 딱 두 가지야. 이 사건을 최대한 빨리 해결해. 그리고 괜히 언론에 트집잡힐 일을 만들지 마.”

  “트집잡힐 일이라니요?”

  박주영 경정이 눈을 부릅뜨며 대답했다.

  “말 그대로야. 언론이든 어디든 누구도 이 사건에 관심을 두게 만들지 말라고.”

 

  중앙계단을 타고 내려가 아래층으로 향했다. 교통과 사무실은 강력계 사무실과 마찬가지로 본관이 아닌 별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무실에 있기보다는 주로 나가있는 일이 많은 부서들은 대부분이 모두 별관에 위치해 있었다. 덕분에 교통과도 민원을 접수하는 관리계와 사고를 수사하는 조사계로 구분되어 각각 다른 건물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교통조사계에서 먼저 사건을 조사하던 중에 뺑소니사고나 의도적인 범죄의 냄새를 맡으면, 그 순간 사건은 같은 건물에 위치한 교통범죄수사팀으로 이양되어 수사가 진행되는 방식이었다.

  서희는 김 경사와 함께 복도를 가로질러 교통조사계 사무실로 들어섰다. 마주보이는 창문 너머로 눈송이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자리마다 파티션이 쳐져 있는 사무실 구석에서는 머리가 반쯤 벗겨진 사내가 홀로 앉아서 텔레비전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같이 있어야 할 파트너가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화장실에 갔거나 담배를 피우러 간 모양이었다.

  “이용균 경사네요. 저랑 같이 들어온 동기입니다.”

  김 경사가 귓속말을 하듯 속삭였다.

  “다행이네요. 솔직히 조금 걱정됐는데, 그래도 김 경사님이랑 동기라니까 덜 부담스럽겠어요.”

  “글쎄요. 사실 저랑 친한 사이는 아닙니다.”

  “혹시 김 경사님한테 원한이 있거나 하진 않겠죠?”

  “다행스럽게도 그렇진 않습니다.”

  이용균 경사는 미국 프로농구의 재방송 경기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화면 하단에는 CLE와 LAL이라는 팀명이 적혀있었고, 83대92이라는 스코어가 팀명 사이에 나란히 붙어있었다. 4쿼터 후반이었고, 경기종료까지는 3분 30초가량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용균은 형사들이 들어왔다는 사실도 모른 채 중계화면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얼마나 경기에 몰두했으면 양손에 주먹을 불끈 쥔 채 당장이라도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기세였다.

  서희는 인기척을 내기 위해 일부로 목청을 가다듬었다.

  “왔어?”

  용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그는 주먹을 쥐고 있던 왼손을 풀어 자신의 책상 위를 가리켰다.

  “라이터는 그 위에 올려놔.”

  “저기, 그게 아니라 형사과에서 나왔는데요.”

  “뭐?”

  “형사과에서 나왔다고요, 이용균 경사님.”

  용균이 고개를 돌려 형사들을 마주보았다. 그는 날카롭게 날이 선 콧날에 비해 얼굴은 호떡처럼 둥글었다. 턱수염은 귓불 아래에서부터 듬성듬성 나있고 관자놀이 주변에는 오래된 여드름 흉터가 가득했다. 어렸을 때 즐겨보았던 만화영화 <도라에몽>에 나오는 퉁퉁이가 성인이 된다면 딱 저런 모습일 것 같았다. 물론 코가 조금은 더 뭉개져야겠지만. 용균은 형사들을 바라보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형사과에서 여기는 무슨 일로.”

  “수사협조를 좀 부탁하려고 왔어요.”

  “그러려면 제가 아니라 반장님한테 먼저 이야기를 하셔야 해요. 오늘은 안 나오셨으니까 월요일에 다시 찾아오세요.”

  용균은 그렇게 말한 뒤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중계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미 얘기를 다 끝내고 왔어요, 경사님. 교통과에서 도와주기로 했다고요.”

  용균이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

  “누구랑 얘기를 끝냈다는 겁니까? 저는 아무것도 들은 게 없거든요.”

  “전해듣지 못한 이유까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우리쪽 과장님이랑 그쪽 반장님이랑 얘기를 끝냈다는 건 알아요.”

  그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확실합니까?”

  “네, 확실해요. 미심쩍으면 나중에 따로 물어보시든가요.”

  서희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왜 자신이 태연하게 거짓말을 내뱉은 것인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박주영 경정은 자신이 직접 협조를 요청해주겠다고 말했을 뿐 벌써 이야기를 끝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아마도 나중에 다시 교통과로 찾아와야한다는 사실이 귀찮아서 그런 것이겠지만, 거짓말을 내뱉은 순간만큼은 그런 이유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용균이 점수판을 슬쩍 쳐다보고는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뭘 도와주기를 바라는 겁니까?”

  “사건현장 인근에 설치된 CCTV를 좀 분석해주세요. 시간은 16시부터 19시까지예요. 자세한 건 거기에 다 적어놨어요.”

  서희가 미리 뜯어둔 공책 한 장을 용균의 책상 위에 올렸다.

  “이걸 전부 다 확인해달라는 겁니까? 우리도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어차피 일 분이면 다 끝나는 거잖아요.”

  서희가 중계화면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느덧 경기 스코어는 97대 109로 LAL이 클리블랜드를 12점차로 따돌리고 있었다. 그녀는 농구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이전에 사귀었던 남자친구가 클리블랜드의 팬이었던지라 CLE가 클리블랜드의 약자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녀를 따라 점수판을 본 용균의 얼굴이 확 구겨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 역시나 클리블랜드를 응원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클리블랜드를 응원하고 계셨나 보네요.”

  서희가 말했다.

  “네. 오랫동안 팬이었습니다.”

  “힘내요. 르브론 제임스가 뭔가를 해주겠죠.”

  용균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여기서 르브론에게 또 공이 가선 안 돼요.”

  “왜요? 그 사람이 클리블랜드에서 제일 잘 하는 선수잖아요.”

  “그랬었죠.”

  용균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해요. 제가 사실 농구에 대해선 잘 몰라요. 이젠 별론가 보죠?”

  “아니요, 여전히 잘 합니다.”

  “그런데 왜 공을 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적이니까요.” 용균이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르브론은 LA로 떠났습니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8 7. 범행목적 2020 / 8 / 11 219 0 10134   
7 6. 어두운 터널 속의 범죄자 2020 / 8 / 6 216 0 10532   
6 5. 비열한 포석 2020 / 8 / 4 241 0 11124   
5 4. 가족사진 2020 / 8 / 4 225 0 2769   
4 3. 수상한 이웃 2020 / 8 / 2 224 0 8118   
3 2. 아이들의 진술 2020 / 8 / 1 245 0 7976   
2 1. 당연한 권리 2020 / 7 / 31 247 0 7438   
1 0. 프롤로그 2020 / 7 / 31 386 0 991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등록된 다른 작품이 없습니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