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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추리/스릴러
입을 다문 아이들
작가 : 흰다람쥐
작품등록일 : 2020.7.31

경찰대를 졸업한 서희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각오로 강력계에 지원했다. 부모님은 형사가 되려는 그녀를 만류했지만, 그녀는 끝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서희는 강력계로 전입을 오자마자 터진 살인사건을 맡게 되지만, 피해자는 얼굴이 난도질당한 채 죽어있고 동거녀의 속옷은 몽땅 사라져있다. 한편 피해자와 함께 살던 쌍둥이들은 현장에서 누군가를 보았다고 증언하는데…

 
5. 비열한 포석
작성일 : 20-08-04 11:56     조회 : 240     추천 : 0     분량 : 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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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비열한 포석

 

 

  눈을 떴을 때는 따사로운 햇살이 다리를 어루만지고 있을 때였다. 창밖에 떠오른 태양은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고, 서희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피로를 완전히 떨쳐내지 못해 온몸이 찌뿌둥했다. 침대 위에 누운 채로 팔을 뻗어 핸드폰을 찾았다. 시간을 확인하니 오전 7시 13분이었다. 알람을 맞춰놓은 것보다 무려 7분이나 일찍 일어났다. 괜히 막심한 손해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김 경사와는 8시 30분에 만나기로 했다. 마침 혜신이 머물고 있는 모텔에 가기 위한 경로에 김 경사의 집이 있었기 때문에, 서희는 은색 소나타에 그를 태우고서 혜신에게로 향할 예정이었다.

  서희는 하품을 길게 내뱉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곧장 주방으로 건너가 냉장고의 문을 열고는 1.5L짜리 물병을 꺼내 그대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냉장고에는 어제 먹다 남은 샌드위치 한 조각이 접시에 담겨 있었다. 서희는 샌드위치를 꺼내 전자레인지에 넣은 후 커피포트에 물을 담았다. 물이 끓는 동안 서희는 욕실에 들어가 찬물로 세수를 했다. 대학교 1학년 때만 하더라도 외모에 나름대로 신경을 써 클렌징이니 각질제거니 따위를 신경 쓰며 세면대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곤 했지만 요즘은 아니었다. 머리를 감는 것까지 포함해도 십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머리를 말린 후 가볍게 로션을 바르고는 싸구려 인스턴트커피를 내렸다. 그런 다음 샌드위치와 함께 인스턴트커피로 끼니를 대충 때운 그녀는 어젯밤에 입었던 청바지를 고스란히 꺼내 입은 뒤 옷장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티셔츠를 뒤집어쓰고는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정확히 8시 25분이 되자 김 경사가 약속장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청바지에 검은색 코트를 걸친 차림이었다. 머리를 말리다말고 나왔는지 머리카락 끝자락에는 물기가 맺혀있었고, 한쪽 손에는 하얀색 종이가방이 들려있었다. 김 경사를 조수석에 태운 서희는 그와 짧게 인사를 나눈 뒤 곧바로 액셀을 밟았다. 은색 소나타가 도로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건 뭐예요?”

  서희가 운전을 하다말고 턱짓으로 종이가방을 가리켰다.

  “이거요? 도시락입니다. 배고플 때 챙겨 먹으라고 아내가 싸줬어요.”

  김 경사가 수줍은 미소를 입가에 띠며 말했다. 서희가 그를 알게 된 이후로 그에게서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서희는 네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핸들을 오른쪽으로 돌린 후 다시 그에게 물었다.

  “결혼하신지 얼마나 되었다고 하셨죠?”

  “8년차입니다. 역시나 재수 없게도 십 일 뒤가 결혼기념일이에요.”

  서희가 그를 힐긋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시선을 의식한 김 경사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결혼한 첫 해를 제외하고는 지금껏 한 번도 결혼기념일을 같이 보낸 적이 없어요. 항상 이맘때쯤이면 사건이 터져서 늘 야근을 해야 했거든요.”

  “저런. 부인께서 많이 서운해 하셨겠어요.”

  “처음 몇 번은 그랬는데,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말아요. 실은 아내도 강력계 형사였거든요.”

  “형사요?”

  “네. 그것도 경위님처럼 경찰대 출신의 형사였죠.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지금쯤 형사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었겠네요.”

  “혹시 어쩌다가 그만두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서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자의 몸으로 형사가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지 서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남녀평등을 외치고 그것을 위해 애를 쓴다고 한들, 실질적으로 여자와 남자가 똑같아진다는 건 생물학적으로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애초부터 성차별의 문제가 아니었다. 생리를 하든 안 하든 범죄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었다. 육체적으로 약점이 있다면 악은 그 틈새를 집요하게 노릴 뿐이었다. 그러므로 형사가 되기 위해서는 여자로써의 모든 것들을 버릴 각오가 있어야 했다. 몸이 안 좋다고 해서 사건해결을 뒤로 늦춘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법적으로 생리휴가니 따위의 여자를 위한 복지가 있든 없든 악은 그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악은 도망자이고, 형사는 추격자일 뿐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여자 형사들은 저마다의 각오와 결의를 마음속에 품고 살았다. 그 정도의 노력과 각오를 다졌음에도 이 일을 그만두었다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이지 않을까 싶었다. 서희는 자신이 실례가 될 만한 질문을 던진 게 아닐까 문득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김 경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아이를 가졌으니까요. 처음부터 일을 그만두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요. 처음에는 휴직계를 냈었죠. 일이 년만 쉬다가 다시 복직할 생각이었거든요. 그랬는데 막상 아이를 낳고 보니까 돌봐줄 사람이 마땅치가 않더라고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유치원에 들어갈 때까지만 일을 쉬기로 했었죠. 그러다가 또다시 둘째를 임신한 거예요. 그래서 결국 아내도 사표를 낼 수밖에 없었어요.”

  침묵이 둘 사이를 채웠다. 서희는 김 경사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담담한 목소리에선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 깃들어 있었지만, 그 미안함은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세상에는 위로와 격려를 필요로 하지 않는 감정이 있고, 김 경사의 감정이 딱 그러한 것임을 서희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어느덧 형사들을 태운 은색 소나타는 도로를 벗어나 모텔들이 줄지어 늘어선 골목으로 들어섰다. 때마침 젊은 커플들이 모델 입구를 빠져나오고 있는 게 보였다. 중년의 남자나 혹은 여자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혼자서 모텔을 빠져나오는 남자들은 대부분이 정장 차림이었다. 한쪽 손에 서류가방을 들고 있는 그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곧장 택시를 잡고서는 서둘러 골목을 벗어나기 바빴다.

  서희는 천천히 차를 몰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오는 길에 공영주차장을 보긴 했지만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보도에 바퀴를 살짝 걸치도록 차를 세웠다. 어차피 그런 식으로 주차되어 있는 차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모텔 로비로 들어섰다. 안내데스크 뒤에는 하얀색 찹쌀가루가 수북이 내려앉은 것처럼 정수리 부분만 새하얀 노인이 동그란 금테 안경을 쓰고서 무언가를 열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노인의 옆에는 작은 텔레비전 한 대가 침묵을 유지한 채 드라마의 한 장면을 송출하는 중이었다. 노인을 방해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형사들은 로비를 가로질러 곧장 엘리베이터 앞으로 다가갔다. 삼 층에서 내렸고, 곧이어 복도 끝자락에 위치한 304호의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가느다란 여자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여자는 서희보다 많아야 두세 살 정도밖에 차이가 안 나는 얼굴이었다. 도저히 중학교 1학년 쌍둥이를 자녀로 둔 엄마라고는 믿기 힘든 외모였다.

  서희는 고개를 들어 방의 호수를 다시금 확인한 뒤 여자를 바라보았다.

  “김혜신 씨?”

  “네, 제가 김혜신인데요. 실례지만 누구시죠?”

  “구서희 형사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파트너인 김성태 형사이고요.”

  혜신은 서희가 내민 신분증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화장기가 없어 창백한 얼굴이었다. 한쪽 뺨은 살짝 부어있었고, 눈가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듯 눈동자 주위에는 붉게 충혈된 모세혈관들이 보였다.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은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럼. 잠시 실례해도 될까요?”

  “그럼요. 물론이죠.”

  혜신은 형사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잠자코 뒤로 물러났다. 304호는 그리 넓지 않은 방이었다. 더블사이즈 침대 하나와 화장품을 얹을 수 있는 선반 하나, 그 위에 벽걸이용TV와 선반 아래쪽에 놓인 간이냉장고만으로도 방 안이 가득차보였다. 벽지는 온통 짙은 갈색이었다. 닥나무 껍질로 만든 것인지 오래돼 보이는 것에 비해 색이 바란 흔적은 없었다.

  서희는 화장실 쪽을 돌아보았다. 반투명한 유리로 된 화장실 문에는 하얀 수증기가 서려 있었다. 안에서는 따뜻한 공기가 흘러나오고, 아크릴판으로 된 바닥에는 물기가 고여 있었다. 그녀는 혜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려다가 벽면 구석에 놓여있는 쇼핑백에 눈길이 고정됐다. 검은색 종이가방으로 면세점에서나 흔히 볼 법한 가방이었다.

  “저기엔 뭐가 들어있는 겁니까?”

  서희가 무심코 물었다.

  “옷이에요. 출근할 때 입었던 건데, 뒷정리를 하다가 실수로 넘어지는 바람에 더러워졌거든요.”

  서희는 혜신이 입고 있는 옷을 잠시 바라보았다. 갈색 바탕에 검갈색 칼라가 목 라인에 붙어있는 피케셔츠였다. 하의는 검정색 면바지였다. 그녀는 지금 가게 유니폼을 입고 있는 것이었다. 서희는 쇼핑백 끝자락을 집어 그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하얀 실크 재질의 옷 한 벌이 가지런히 개어져있었다. 아마도 원피스이지 않을까 싶었다. 서희는 쇼핑백을 제자리에 내려놓은 뒤 벽에 등을 기댔다.

  “상황은 대충 전해 들어서 아시겠지만, 박승현 씨가 어젯밤 댁에서 사망하셨습니다.”

  “네. 전해 들었어요.”

  “그러면 저희가 왜 찾아왔는지도 아시겠네요.”

  “몇 가지 물어보실 게 있다고 들었어요.”

  혜신의 동공이 조금이나마 흔들리는 게 보였다. 저건 단순히 긴장해서일까, 아니면 불안해서일까. 서희는 어느 쪽에도 마음을 두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김 경사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는 혜신의 오른쪽 뒤편에서 벽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형사들은 언제든지 서로를 바라볼 수 있지만, 가운데에 위치한 혜신은 둘을 동시에 쳐다볼 수 없는 구조였다. 김 경사는 역시나 수첩을 꺼내 메모할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듣기로는 김혜신 씨랑 피해자인 박승현 씨랑은 삼 년 전부터 동거를 시작했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서희가 물었다.

  “네, 맞아요. 일을 하다가 알게 됐어요.”

  “일이라면 어떤.”

  “삼 년 전까지 술집에서 일을 했어요. 호스티스였었죠. 그러다가 알게 된 거예요. 그 집 단골이었거든요, 그 사람.”

  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스티스와 단골손님이 서로 눈이 맞아 동거를 하게 되는 건 흔해 빠진 이야기 중 하나였다. 피해자와 혜신의 관계 또한 그러한 이야기들 중 하나인 게 분명했다.

  “최근에 박승현 씨하고 다툰 적이 있습니까?”

  서희가 다시 물었다.

  “네?”

  “두 분이서 서로 다투신 적이 있냐고요.”

  “아, 네.......” 혜신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대답했다. “있어요, 다툰 적. 사실 거의 매일 싸우는 걸요. 차라리 잘 지낸 날이 언제냐고 물어보시는 게 나을 거예요.”

  “그 말씀은 어제도 마찬가지였다는 뜻인가요?”

  “글쎄요. 그건 대답하기가 조금 애매한데요.”

  “그게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에요. 다퉜다고 말해야할 것 같기는 한데, 막상 평소랑 똑같았냐고 물어보면 그건 아니거든요.”

  서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혜신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 인간, 허구한 날 소리를 질러요. 아무 이유도 없이 물건을 집어던지기도 하고, 욕도 하고 그러죠.”

  “아무 이유도 없이요.”

  “예. 물론 자기 딴에야 있었을지도 모르죠, 그게 뭔지를 도통 알 수가 없으니 문제인거지. 아무튼 어제도 그랬어요. 술안주로 부침개가 먹고 싶다고 해서 만들어주고 있었는데 갑자기 식탁을 엎잖아요. 접시는 접시대로 깨지고, 그래서 결국 화가 나서 저도 소리를 질렀죠.”

  “그 뒤에는 어떻게 됐습니까?”

  “씩씩거리더니 방으로 들어갔어요. 저도 화가 나서 그대로 나왔고요. 깨진 접시는 치웠어야 했는데, 그땐 저도 흥분했던 터라 그러지를 못했죠. 나중에 생각해보니깐 애들 걱정이 되더라고요. 혹시라도 부엌에 들어갔다가 다치면 어쩌나 하고 말이에요.”

  사건현장에 들렀을 때 주방 바닥에는 깨진 접시조각들이 온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식탁 위에는 소주병 하나가 옆으로 쓰러져있었다.

  “그러셨군요. 혹시 그때 피해자가 어느 방으로 들어갔는지 기억하시나요?”

  “물론이죠. 안방이었어요.”

  “안방이라면 정확히 어느 방을.......”

  “저희 방이에요. 애들 방 말고요.”

  혜신이 서희의 말을 중간에 자르며 대답했다.

  서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혜신을 잠시 관찰했다. 그녀의 부어오른 한쪽 뺨이 신경쓰였다.

  “뺨도 그래서 다친 겁니까?”

  혜신이 손을 들어 부어오른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네, 맞아요. 자꾸만 말대꾸를 하니까 그게 시건방지다고 생각했는지 기어코 한 대를 갈기더라고요.”

  어쩌면 살해동기가 될 수도 있겠다고 서희는 문득 생각했다. 연인 간의 다툼이 살인사건으로 번지는 건 그리 드문 경우가 아니었다.

  “댁에서는 몇 시에 나가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5시가 조금 안돼서 나갔어요. 곧장 버스를 타러 갔죠. 집에서 나오자마자 마주보이는 내리막길을 쭉 내려가기만 하면 사거리가 나와요. 보통은 그 앞에서 타요.”

  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지 알 것 같았다.

  “평소에 박승현 씨와 원한관계가 있을만한 사람은 있을까요?”

  “잘 모르겠어요.”

  “그럼 혹시 사장님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지혜 말로는 박승현 씨가 이번 주에 사장님이라는 사람을 만나기로 했다던데요.”

  “지혜가요?” 혜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사장님이라면 회사 사장님이 아닐까요? 택배회사에 다니고 있거든요.”

  “아닐 수도 있어서 여쭤보는 겁니다.”

  “음....... 그러면 모르겠어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죄송할 건 없지요. 혹시 택배회사 말고 다른 일도 하고 있지 않았나요? 아이들 말로는 박승현 씨가 주말마다 나간다고 하던데.”

  “그렇긴 한데. 죄송해요,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사실은, 그 인간이 뭘 하고 다니는지 관심이 없었거든요.”

  “삼 년간 같이 살면서 말이죠.”

  서희가 무심코 말했다.

  그러자 혜신이 그녀의 말을 똑같이 되풀이하며 대답했다.

  “삼 년간 같이 살면서 말이죠. 그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요.”

  물론 잘못된 건 아니었다. 서희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녀는 이윽고 화제를 전환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식당에서 일하신다고요.”

  “네. 이촌동에 있는 초밥집이에요.”

  “가게에는 몇 시에 도착하셨습니까?”

  “여섯 시가 조금 안되었을 거예요. 지각은 하지 않았으니까요.”

  “출근하는 길에 어디를 따로 들르거나 하진 않았나요?”

  그 순간 혜신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아무래도 그녀의 질문이 노골적으로 들린 듯했다. 그와 함께 숨을 삼키는 듯한 소리도 미세하게나마 귓가에 들렸다.

  서희는 본청에서 근무하고 있었을 때 형사과 출신의 선배가 해줬던 얘기를 문득 떠올렸다. 결백한 사람일수록 더욱 긴장하는 법이랬다. 무언가를 숨기려는 사람일수록 더욱 긴장하지 않으려 애를 쓰는 법이랬다. 눈앞에 보이는 이 젊은 엄마는 과연 어느 부류에 속하는 사람일까.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지만, 분명한 건 그녀가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에 드디어 혜신의 입술이 움직였다.

  “커피숍에 갔었어요.”

  “예?”

  “가게 근처에 있는 카페엘 들렸다고요.”

  서희는 혜신이 말한 커피숍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그녀의 눈치를 살펴보았다. 조금만 더 파고들어도 될 것 같다고 판단을 내린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거긴 왜 들르신 겁니까?”

  “화가 났었으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서비스직인데 화가 난 얼굴로 손님을 맞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흥분을 좀 가라앉히려고 갔었죠.”

  “그러면 댁에는 몇 시에 돌아오셨습니까?”

  “새벽 2시를 조금 넘겼나 그럴 거예요.”

  “댁으로 오시는 길에 따로 들르신 곳이 있나요?”

  “아니요, 없어요. 막차가 끊겨서 걸어왔거든요. 한강 산책로를 통해서요.”

  혜신이 팔꿈치 뒤쪽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서희는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필요한 진술은 확보했고, 남은 일은 그 진술이 모두 사실인지 확인하는 작업뿐이었다. 서희는 혹시라도 자신이 빼먹은 게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알리바이에 관한 진술과 피해자와의 관계를 제외하곤 딱히 혜신에게서 건진 건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건질만한 것이 있다면 피해자가 사망 직전 아이들의 방이 아닌 안방에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는 안방이 아니라 아이들의 방에서 피살당한 것일까? 서희가 사건현장을 처음 보았을 때 받았던 느낌은 흡사 강도가 든 것과 다름없는 모습이라는 점이었다. 불현듯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대체 어디가 문제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서희는 고개를 돌려 김 경사를 바라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쳤고, 그러자 서희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김 경사가 외투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투명한 합성수지에 싸여있는 여러 장의 사진을 꺼내들고는 혜신에게 다가갔다.

  “김혜신 씨. 이 사진들이 뭘 찍은 건지 알아보시겠습니까?”

  안방 내부를 촬영한 총 다섯 장의 사진이었다. 증거품들을 찍은 사진이 아니라 열린 수납장이나 창문 등 강도가 든 흔적을 위주로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을 잠시 살펴보던 혜신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긴가민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쎄요. 저희 집 같기는 한데...”

  “맞습니다. 말씀하셨던 안방 내부를 찍은 사진입니다. 혹시 출근하시기 전과 달라진 점이 있나요?”

  “네. 있어요.”

  혜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겠어요? 다시 한 번 천천히 살펴보셔도 됩니다.”

  혜신은 고개를 비스듬하게 돌리고는 김 경사가 들고 있는 사진들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이쪽 창문이 열려있는 거랑 수납장들이랑, 그리고 협탁이요. 이게 원래는 이렇게 되어 있어야 하거든요.”

  그녀가 양손을 들어 마치 협탁을 움켜쥐고 있듯 양손을 허공에서 좌우로 움직였다.

  “위에 수면등도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없고요.”

  “그렇군요.”

  김 경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창문에는 방범창이 따로 설치되어 있지 않은 것 같던데. 혹시 원래 그런 건가요?”

  “네. 원래부터 없었어요. 그렇잖아도 그것 때문에 불안해서 방범창을 설치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여러 번 얘기했었는데, 별로 생각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정 불안하면 부인께서 직접 설치해도 됐을 텐데요.”

  “싫다는데 제가 뭘 어쩌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얹혀 사는 입장인데.”

  김 경사는 들고 있던 사진들을 집어넣은 뒤 한 장의 사진만을 남겨두었다. 열려있는 수납장을 바깥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수납장 내부의 상태는 보이지 않았다.

  “이 수납장들에는 뭐가 들어있습니까?”

  “제 옷이 들어있어요. 그 사람이랑 저랑 수납장을 절반으로 나눠서 사용했거든요. 맨 위의 세 칸은 전부 제가 사용하는 거예요.”

  “실례가 안 된다면 주로 어떤 옷들을 보관해두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혜신은 대답 대신 눈을 들어 김 경사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곤란해 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서희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꼭 말씀드려야 하는 건가요?”

  서희는 그 질문이 김 경사가 아닌 자신에게 하는 질문임을 문득 깨달았다. 그녀는 혜신이 무엇 때문에 곤란해 하는 것인지 순간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김 경사는 그 이유에 대해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강력계 형사로 18년째 근무 중인 유능한 형사였지만, 적어도 이런 일에 대해서는 그녀가 더 뛰어난 듯했다.

  서희는 하는 수 없이 둘의 대화에 개입하기로 결심했다.

  “전부다 말씀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싶은 건 딱 한 군데거든요.”

  그녀의 예상치 못한 개입에 김 경사가 고개를 돌렸다. 무표정한 얼굴 위로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덕분에 그녀의 개입으로 마음이 상한 건지, 아니면 그럴 수 있다고 받아들인 것인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한 군데요?”

  혜신이 물었다.

  “세 번째 칸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저희는 거기에 뭐가 들어있었는지가 알고 싶은 거거든요.”

  빌어먹을. 서희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자신이 또 한 번 실수를 저질렀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김 경사는 그녀의 개입으로 마음이 상한 것도, 그럴 수 있다고 받아들인 것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그녀가 실수를 저질렀음을 지적한 것이다. 혜신은 아직까지 용의선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었고, 오히려 아마도 피해자와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던 인물로써 이 사건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 용의자에게 서희는 너무나도 쉽게 가지고 있던 패를 노출시킨 셈이었다. 서희는 수치스러움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혜신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마 전부 다 사라진 건가요?”

  “네. 저희가 살펴보았을 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김 경사는 고개를 돌려 다시 혜신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렇게 된 이상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계획을 폐기하고 새롭게 전략을 수정하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그는 숨기고 있던 모든 패를 드러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김혜신 씨. 저희한테 숨기고 있는 게 있어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알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김혜신 씨도 이 사건의 용의자 중 한 사람이에요.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계속 의심받을 수밖에 없어요.”

  “저는 아무것도 숨긴 적 없어요!”

  혜신은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러니까 뭐가 들어있었는지 말씀해달라는 겁니다. 저도 혜신 씨가 용의선상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그래야 자녀분들도 다시 만나죠.”

  “...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혜신이 입도 다물지 못한 채 김 경사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움과 분노가 동시에 일고 있었다.

  “이런 말씀을 드려서 대단히 유감입니다만, 위험인물을 아이들 곁에 둘 수는 없습니다.”

  “그 아이들은 제 딸이에요! 제가 그 애들의 엄마라고요!”

  “그리고 살인사건의 용의자이기도 하죠.”

  김 경사는 그 어떠한 표정변화도 없이 말했다. 서희는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문득 궁금했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아무런 표정변화도, 더 나아가 미세한 감정의 떨림도 없이 무덤덤하게 말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인지. 서희는 살인사건과 같은 강력범죄를 다루는 형사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었다. 분노로 감정이 점점 격양되는 부류와 반대로 모든 일에 점점 무감각해지는 부류였다. 끔찍한 사건이 발생할수록 그들은 더욱더 뚜렷하게 구분되었다. 전자는 분노를 양분삼아 점점 더 헌신적으로 범인을 쫓고, 후자는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않은 채 냉정하게 범인을 추적해나간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김 경사는 아마도 후자 쪽이지 싶었다. 그는 지나치게 냉정했고, 덕분에 상대가 누구든 오직 자신이 세운 수사의 방향에 맞게 냉정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아이들의 엄마를 상대로 자녀들을 인질로 내세우는 다소 비열한 술수도 그에게는 승리를 위한 하나의 포석에 불과했다.

  혜신은 분노로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면서도 자신에게 달리 방법이 없음을 깨달은 기색이었다. 결국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조용히 속삭였다.

  “...있었어요.”

  “네? 잘 안 들려서 그런데 다시 말씀해주시겠어요?”

  김 경사가 허리를 숙여 혜신에게로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혜신이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속옷이요. 그 안에는 제 속옷이 들어있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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