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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에오렐라 연대기
작가 : 이동글
작품등록일 : 2020.8.3

최후의 10년···.
누군가는 그 시간을 황혼의 시대라 불렀다.

 
하얀 꽃나무의 이름 - 숲과 나무 (01)
작성일 : 20-08-03 21:43     조회 : 230     추천 : 0     분량 : 11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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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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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산들바람은 언제나 향기로운 자취를 남겼다.

  느릅나무 껍질의 포근함, 이름 모를 야생화와 풀 내음이 조화로이 뒤섞인 싱그러움.

  떨어진 나무 열매의 갈라진 틈에서 번지는 달콤한 냄새, 돌이끼와 촉촉한 흙내음.

 

  바람이 실은 숲의 향기는 새들이 특히 좋아하는 냄새였고, 고마움을 전하듯 저마다의 노랫소리를 바람에 실어주었다.

  새들의 노래와 숲의 향을 잔뜩 머금은 바람은 자유롭게 숲을 떠돌았다.

  나뭇가지 사이를 지나가면 가지가 서로 부대끼며 잎을 연주했고, 바위틈을 스쳐 가면 돌들이 휘파람을 불었다.

  자연이 벌이는 작은 축제였다.

  그리고 이것이 숲이 생긴 이래로 지금껏 변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여신의 축복이 가득한 로클로르 숲에는 하나의 모습이 더 존재했다.

 

  "그리고 나의 과실이 그 거룩한 걸음의 시작을 인도할 것이다."

 

  조용한 축제의 틈으로, 호수처럼 잔잔하고 차분한 음성이 숲 곳곳에 스며들었다.

  느긋하게 숲을 맴돌던 바람이 낯선 목소리를 반기듯 강하게 휘몰아치자, 나무가 춤을 추듯 가지를 흔들었다.

  우거진 녹음의 춤사위 사이로 햇살이 듬성듬성 내리쬐어, 녹빛이 가득했던 숲 곳곳에 금빛의 빛기둥이 내려앉았다.

  그중 가장 넓은 광망 아래에, 작은 메아리로 흩어져가는 음성의 주인이 고즈넉이 앉아 있었다.

 

  예언의 나무라고 불리는 작은 고목 앞에 무릎을 꿇은 채, 햇살을 한가득 받고 있는 존재.

  그 존재에 대해 외부인, 즉, 먼 미래에 이 땅에 나타날 다른 존재들은 단순히 나무 한 그루라고 치부할지도 모른다.

 

 그들의 몸은 털과 피부 대신 나무껍질로 뒤덮여 있으며, 몸 곳곳에는 풀과 이끼가 돋아 있었다.

  몸 어딘가에 반드시 피어나는 꽃은 그들 사이에서 고유꽃이라 불렸으며, 결코 같은 종의 꽃이 피는 일은 없었다.

  그들의 창조주인 여신 로클라는 자신의 모습을 본 따 그들에게 팔과 다리를 한 쌍씩 주었지만, 손과 발에는 손가락과 발가락 대신 여러 가닥의 나무 뿌리가 돋아 있었다.

  이들은 창조주의 뜻에 따라 스스로 발터라 불렀지만, 어느 모로 보아도 타인에겐 대지에 즐비한 나무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산들바람의 향기에 이끌려 날갯짓하던 작은 파랑새 한 마리에게도.

 

  예언의 나무 앞에서 한참을 기도하던 이 발터는 그들 사이에서 테미스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테미스는 왼쪽 어깨에 작은 세 송이의 꽃봉오리를 가진 발터였다.

  언젠가 필 자신만의 고유한 꽃이 어떤 아름다운 잎과 색을 가질지 늘 궁금해하던 테미스였지만, 지금 막 새로 내려앉은 푸른색의 네 번째 꽃봉오리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한참 동안 눈을 감고 기도를 올리던 테미스는 늘 숲에서 들려오던 익숙한 소리가 자신의 바로 귓가에서 울리자 깜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날개를 쉬며 목을 가다듬으려던 파랑새도 그제야 자신이 내려앉은 나뭇가지의 정체를 깨닫고는 부리나케 날아올랐다.

 

  "아! 미안해!"

 

  주변의 공기마저 경건하게 만들던 고요하고 진중한 음성은 온데간데없이, 경박하고 갈라지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테미스는 숲속으로 멀어지는 파랑새의 모습을 보며 놀람과 미안함이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곧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마음을 달래듯 한숨을 안고 사라졌다.

 

  테미스는 그 후로도 한참을 그곳에 앉아 예언의 나무를 올려다봤다.

  여신 로클라가 남긴 예언을 새긴 글귀를 보고 있으면, 마치 그분의 고귀한 뒷모습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기분이 들 때면,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렇게 잊어버리는 것 중에는 결코 잊어선 안 될 중요한 일들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잠시 후, 뒤쪽에서 익숙한 걸음 소리가 들려왔지만, 테미스는 듣지 못한 듯 멍하니 나무만 올려다보았다.

  걸음 소리가 자신의 바로 뒤에서 멈출 때까지.

 

  "야!"

  "왁!"

 

  테미스는 갑작스러운 고함에 놀라 앞으로 고꾸라졌다.

  진한 흙내음을 잔뜩 맡으며, 놀란 가슴을 달랜 테미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볼멘소리를 냈다.

 

  "아, 정말. 놀랐잖아, 테티스! 무슨 일인데 이 소란이야?"

 

  테티스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자신의 친구를 내려다봤다.

  두 발터는 놀라울 정도로 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직 고유꽃으로 성장하지 못한 세 송이의 꽃봉오리가 서로 반대쪽 어깨에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맨눈으로 구분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심지어 이름까지도.

 

  "무슨 일? 무슨 이일!?"

 

  테티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한층 더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럼에도 테미스는 여전히 느긋한 표정으로 얼굴에 묻은 흙을 핥았다.

  테티스는 그 표정에 더 열불이 나 무어라 소리치려다 문득 밀려온 기시감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분명 작년도 재작년도 같은 이유로 화를 냈었다.

 

  "그래, 좋은 날 괜히 내 기분만 망치지."

 

  테티스는 테미스 역시 자신과 같은 기시감을 느꼈길 바라며 다시 팔짱을 끼고 묵묵히 기다렸다.

 

  "좋은 날? 무슨··· 아!"

 

  테미스는 입을 쩍 벌린 채 벌떡 일어나 테티스의 어깨를 잡고 거칠게 흔들었다.

 

  "전지식! 왜 이제 말했어!"

  "아침에 말했잖아! 넌 대체 무슨 정신으로 다니니!?"

 

  화를 내지 않겠다던 다짐은 오래가지 못했다.

  테티스는 어깨에 올려진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뒤돌아 성큼성큼 걸었다.

 

  "진짜 이번이 끝이야! 내년에도 이런 식이면 그땐 진짜 너 버리고 혼자 다닐 거니까 알아서 해."

 

  테미스는 빙긋 웃으며 잰걸음으로 테티스의 뒤를 따랐다.

 

  "그래라~ 근데 과연 내년에도 내가 여기 있을까?"

  "무슨 소리야? 넌 500년 뒤에도 여기 있지."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난 오늘 시험 통과하고 순례길을 나설 텐데, 내년까지 여기 있겠냐는 말이지."

  "아니, 아니. 그러니까, 넌 500년 뒤에도 통과 못 하고 여기 눌러앉아 있을 거라는 말이지."

 

  뒤에서 다가오는 걸음 소리가 빨라진 것을 느낀 테티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승자의 미소였다.

 

  금세 바로 옆까지 따라붙은 테미스가 불만을 토로했다.

 

  "야! 무슨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하냐? 뭐? 500년!? 그냥 순례자 되지 말란 거야?"

 

  테티스는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억누르며 맞받아쳤다.

 

  "말을 심하게 하는 건 너지. 너 방금 그 말, 도미오카한테 실례야."

 

  무어라 되받아치려던 테미스가 멈칫하더니 우뚝 서서 걷던 방향을 향해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그렇네. 도미오카, 미안합니다."

 

  테티스가 끝내 웃음을 터뜨리자 테미스도 피식 실소를 머금더니 이내 고개를 젖히며 깔깔댔다.

  도미오카는 올해로 현자의 시험에 427번째 도전하는 발터의 이름이었다.

 

 

 

  오늘은 새해 첫날로, 발터에게 있어서 가장 큰 축제인 전지식이 있는 날이다.

  전지식의 백미는 누가 뭐라고 해도 현자의 시험이었다.

  이름 그대로 숲의 현자들이 준비한 시험을 치르는 행사인데, 시험의 내용은 매년 달라지지만 언제나 괴이한 난이도를 자랑했다.

  해마다 수천 명의 발터가 참가하지만, 통과자의 수는 극소수. 한 명도 통과하지 못하는 해가 부지기수이며, 10명이 넘는 통과자가 나온 것은 단 한 번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해엔 무려 74명의 통과자가 나왔는데, 현자의 시험이 등장한 첫해였다.

  그 이후로 수백 년이 흐르는 동안 평균 3명 정도만이 시험에 통과하는 수준이니, 시험의 난이도가 그야말로 극악이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힘들게 치른 시험을 통과한다고 해서 엄청난 혜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절대다수는 단순히 재미를 위해 참가했으며, 그 외에는 친구와의 경쟁, 자기만족, 기록달성 등 개인적인 목표를 위해 참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단지 시험의 보상을 위해서만 참가하는 발터는 극히 드물었다.

 

  통과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단 하나.

  로클로르 숲을 떠나 세상을 직접 경험해볼 수 있는 발터, 즉, 순례자가 될 수 있는 자격.

  외부인의 시선에서는 숲에 억압된 이들에게 자유를 선사하는 달콤한 유혹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발터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대자연의 어머니라 불리는 여신 로클라가 직접 만든 피조물이며, 로클라가 그들을 창조한 이유는 자신을 도와 드넓은 숲을 가꿀 하수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 사정인데, 로클로르 숲은 이미 천 년도 훨씬 전에 제 모습을 갖춘 데다가 여신의 축복이 숲에 가득한 상황이다.

  태생적으로 숲에 관한 일 외에는 관심도 없는 이들에겐 숲을 떠나 외부를 경험할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순례자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넘어서 선망을 느끼는 소수의 발터만이 순례자가 될 뿐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수백 년 이상 순례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온 고목이라는 점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순례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뒤에야 현자의 시험에 참가하는 것이 아니었다.

  수백 년이 넘는 세월을 겪으며, 언젠가 이미 순례자의 자격을 얻은 후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이제 고작 20년밖에 살지 않은 테미스가 순례자를 꿈꾸며 매년 시험에 참가하는 모습은 이례적이었다.

  심지어 테미스가 처음 순례자를 꿈꾼 것은 8살이 되던 해였고, 그 이듬해부터 시험에 참가했다.

  테미스는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바로 그다음 날부터 이듬해까지 오로지 현자의 시험에 관한 생각밖에 하지 않을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로클로르 숲을 떠나지 않는 한 영생이 보장되는 발터는 언제나 느긋하고 여유로운 삶을 살았다.

  그러니 주변의 시선은 테미스의 이런 모습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초리를 보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매서운 눈으로 흘겨보는 것은 테미스의 단짝인 테티스였다.

 

  "누구보다 로클라님을 추앙하는 애가 대체 왜 그렇게 숲을 못 떠나서 안달인 거야?"

  "난들 떠나고 싶어서 떠나려는 줄 알아?"

  "또 여신님의 뜻이라고?“

  "잘 아는군.“

 

  지금껏 몇 번이나 반복했던 대화였다.

  그때마다 혹시 다른 대답이 있을까 조금은 기대하는 테티스였지만 늘 부질없는 바람이었다.

 

  "아니, 로클라님을 본 적도 없고, 당연히 대화도 나눠본 적 없는 애가 그 뜻은 어디서 받은 거야 대체."

  "몇 번을 말해. 그러니까···."

 

  테티스가 테미스의 말을 신경질적으로 끊었다.

 

  "예언의 나무에 다 쓰여 있다며! 질문한 거 아니고 혼잣말이니까 대답하지 마!"

 

  테미스는 말없이 미소를 띠었다.

 

  "그래, 말이 나와서 말인데. 정확히 어디의 어떤 부분이 너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면서?"

  "그건··· 그렇지만. 그냥 알 수 있어. 본능적으로···?"

 

  테티스가 잠시 멈춰서더니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테미스를 한 번 쏘아본 뒤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내가 진짜 어처구니가 없어서···."

  "아니, 뭐랄까··· 그래. 우리가 다리를 어떻게 움직이는지 넌 설명할 수 있어?"

 

  테미스는 적당한 예시가 떠오르자 의기양양해져서 목소리가 커졌다.

  반대로 테티스는 자신의 두 다리를 내려다보며 걸음이 느려졌다.

 

  "봐. 너도 설명 못 하잖아. 근데 잘만 걷지? 그것도 우리가 본능적으로 걷는 방법을 아니까 걸을 수 있는 거라고. 이것도 마찬가지란 말야,"

 

  테미스가 답지않게 묘한 설득력을 갖추자 테티스는 그마저 못마땅했다.

 

  "이거랑··· 그거랑은 다르지!"

  "뭐가 다른데?"

  "이건 우리 몸이고, 니가 느끼는 그건···."

  "그건?"

  "아! 아무튼 이거랑 그건 달라. 야, 그리고 지금 그게 중요해? 너 때문에 한참 늦었는데!"

 

  테티스가 급하게 화제를 돌리자 테미스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띠었다.

  승자의 미소였다.

  그리고 곧 뒷말을 되물었다.

 

  "어디에 한참 늦어?"

  "넌 진짜 전부 다 잊은 거냐? '태양이 기디움의 가장 아랫가지 위로 떠 오르거든 뜰로 오거라.'"

 

  테미스는 '아랫가지' 부분에서 이미 입을 쩍 벌리고 소리를 질러댔다.

 

  "아! 스승님! 넌 그걸 왜 이제야 얘기해!"

  "그러니까 아침에 말했었잖아! 어휴, 속 터져 진짜!"

  "망했다, 뛰자!"

 

  테미스가 이미 저만치 달려가면서 소리쳤다.

  테티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위를 올려다보자 거목 기디움의 웅장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신 로클라가 직접 심었다고 전해지는 거목 기디움은 고개를 완전히 뒤로 젖혀야 간신히 눈에 담길 만큼 거대한 나무였다.

  그마저도 하늘과 맞닿은 꼭대기를 보려면 아주 먼 곳까지 가야만 했다.

 

  순례자들의 말에 따르면 로클로르 숲 전체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로클로르 숲 인근에 있는 거대한 4개의 섬 사계에서도 보이며, 더 나아가 아락테아 군도 어디에서도 기디움의 그림자가 보일 정도라고 한다.

  테티스는 다시 한번 기디움의 신비로움에 감탄하며 테미스의 뒤를 따랐다.

  태양은 어느새 기디움의 가장 아랫가지와 그 윗가지의 사이에 걸려있었다.

 

 

 

  숲의 광장 근처에 다다르니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주위를 둘러보자 두 사람이 잘 아는 반가운 얼굴들도 하나둘 광장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테미스는 그제야 전지식이 다시 찾아왔다는 생각에 설레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은 전지식을 즐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테티스는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없이 잰걸음으로 앞서 걸었다.

  두 사람은 모두 스승님의 온화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온화한 미소 뒤에 이어질 상황을 상상하자, 서늘한 한기가 온몸을 타고 흐르는 듯했다.

 

  스승인 대현자 멜포메네는 매사에 느긋하고 낙천적인 성격이었기에 화를 내는 일이 드물었다.

  두 제자가 잘못을 저지르거나 약속을 어길 때에도 언제나 특유의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럼에도 결코 자비를 베푸는 법은 없었다.

  대신 저지른 잘못의 경중을 논하거나 잘잘못을 따지는 일 없이 공평하게 벌을 주곤 했다.

  예컨대, 지각의 경우 반나절을 늦든 보름을 늦든 지각은 그저 지각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벌을 주는 방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멜포메네는 두 제자가 어떤 잘못을 어느 정도로 해도 똑같이 하나의 벌만을 내렸다.

 

  환영을 보여주는 것.

 

  멜포메네는 환영 마법에 있어서는 숲의 그 어떤 마법사보다도 압도적인 실력을 자랑했다.

  다만 딱히 쓸 일도 없거니와, 숲의 갖가지 관리를 죄다 도맡은 멜포메네가 왜 그렇게 없는 시간을 쥐어 짜내면서까지 환영 마법에 몰두하는가는 늘 아이러니였다.

 

  하지만 두 제자, 테미스와 테티스만은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자신들에게 보다 더 끔찍한 벌을 내리기 위해.

 

  멜포메네는 늘 "너희가 보는 환영은 내가 아니라 너희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거란다. 끔찍하고 무서운 환영을 본다는 건, 너희의 상상력이 그런 광경을 떠올렸기 때문이지. 그게 싫다면 행복하고 즐거운 생각만 잔뜩 하면 되지 않겠느냐?"라며 웃곤 했지만, 두 제자는 그 말을 결코 믿지 않았다.

  둘은 언제나 스승님이 '어떻게 하면 더 끔찍하고 무서운 환영을 만들어 저 둘을 놀려 먹을까' 하는 고민만 한다고 여겼다.

  사실이 어떻든, 확실한 것은 오늘도 그 무시무시한 환영을 마주하게 된다는 점이었다.

 

  스승님의 괴기스러운 미소를 떠올리며 몸서리치던 테미스는 무언가 터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소리가 난 위쪽을 올려다보니 형형색색의 꽃잎들이 흩날리며 광장으로 들어서는 이들을 반겨주고 있었다.

  테미스는 갖가지 꽃잎을 가득 머금은 풍선 열매를 터뜨려 입장객을 반겨준 이들에게 밝은 미소로 화답하며 광장에 발을 들였다.

 

  형형색색의 화려한 장식, 각종 먹거리들이 풍기는 향긋한 냄새, 오랜만에 만난 이들이 수다 떠는 소리와 신나는 노랫소리.

  테미스는 눈을 감고 기분 좋은 소음을 만끽하며 코로 전해지는 향기를 즐겼다.

  여기저기에서 반갑게 테미스와 테티스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테티스는 오로지 반대쪽 출구를 향해 잰걸음으로 걷는 데만 집중했기 때문에, 테티스를 향한 인사도 모두 테미스가 대신 받아주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테미스가 꿀방울이나 사탕 열매 같은 것을 받아들 때면 "지금 그런 거 먹을 때가 아니잖아!"라며 여지없이 쳐내곤 했다.

 

  테미스가 42번째 인사를 건네고, 테티스가 18번째 음식을 내치고 나서야 간신히 광장의 반대쪽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문제는 지금까지 온 만큼 더 걸어야 멜포메네가 있는 생명의 뜰에 도착한다는 사실이었다.

 축제의 소음이 메아리로 간신히 들려올 즈음이 되자 테티스가 고개를 들어 태양의 높이를 확인했다.

  그리고 뒤를 돌아 기디움의 모습을 번갈아 보며 눈대중으로 높이를 견주었다.

 

  "두 칸 반··· 너무 늦었어."

  "어차피 늦은 거 천천히 가자."

  "얘가 또 뭐라는 거··· 뭐야, 너 그건 또 언제 받아왔어!"

 

  테미스는 어느새 각종 사탕 열매가 잔뜩 꽂힌 꼬치를 핥고 있었다.

 

  "음? 아, 나오기 직전에. 크뤼트네가 주던데."

  "지금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하··· 됐다. 계속 걸어. 지각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꼭 필요한 상황이면 어쩌려고?"

 

  마음이 급한 테티스에 비해 테미스는 더없이 느긋한 모습으로 늦장을 부렸다.

 

  "에이. 뭐 가방이나 지팡이 같은 것 좀 들어다 달라고 하시겠지."

  "시끄럽고, 빨리 걸으라고!"

 

  테티스가 결국 폭발해 테미스를 보고 소리를 빽 내질렀다.

 

  "걷고 있잖아. 그리고 너가 훨씬 더 시끄럽··· 야! 뒤! 뒤!"

 

  테미스가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이미 테티스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대신 무언가 묵직한 것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크게 진동했다.

  테미스가 맛있게 핥던 사탕 열매 꼬치까지 내던지고 구덩이를 향해 달려갔다.

 

  멜포메네가 예전부터 주의하라고 항상 일러주었던 구덩이였다.

  어느새 주변의 풀들이 많이 자라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구덩이를 가리고 있었다.

  물론 평소처럼 앞을 보고 걸었다면 능숙하게 피해갔을 테지만.

 

  테미스가 구덩이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구덩이의 내부가 곡선 형태로 굽어있는 데다 어디든 키가 큰 풀들이 잔뜩 돋아 있어 테티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테티스! 괜찮아?"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려던 순간, 테미스는 누군가가 자신의 다리를 들어 올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머리를 채 빼기도 전에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려 구덩이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소리를 지를 틈도 없이 숨을 삼키고는 눈을 감았다.

 

  몇 초 후, 분명 어딘가에 보기 흉한 모습으로 처박힌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던 테미스는 좀처럼 충격이 오지 않자 슬그머니 눈을 떴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는 테티스의 모습, 그리고 공중에 붕 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어··· 혹시 이거 네가 한 거니?"

 

  테미스는 혹여나 떨어질까 아주 조심스럽고 느릿한 동작으로 공중에 떠 있는 두 다리를 가리켰다.

  테티스가 슬쩍 돌아본 뒤, 관심 없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아니. 네가 바보처럼 나 따라서 떨어질 줄 어떻게 알고? 뭐, 알아도 그렇게 빨리는 못 하지."

  "그렇지? 그럼 누가··· 아, 참! 방금 누가 내 다리를··· 아악!"

 

  구덩이 위를 올려다보려고 몸부림치던 테미스가 바닥에 거꾸로 고꾸라졌다.

  이내 재빠르게 기어가 위를 올려다봤지만, 역시 무성히 자란 풀 때문에 구덩이 바깥을 볼 수는 없었다.

 

  테미스는 자신의 꽃봉오리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후, 이곳저곳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투덜거렸다.

 

  "방금, 누가 내 다리를 들었다니까. 그래서 떨어진 거야. 누구야 대체? 아니, 그보다 넌 거기서 뭐 해?"

 

  테티스는 여전히 말없이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밝은 빛을 내뿜으며 구덩이 안을 훤히 밝히고 있었다.

 

  "뭔데 그래?"

 

  테티스의 옆에 선 순간, 대답이 필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잎부터 줄기, 꽃잎에 이르기까지 순백색을 띠며 그 전체에서 스스로 빛을 내뿜는 꽃.

  그래서 백광화라고 불리는 신성한 꽃이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 백광화를 지키듯 주변을 둥글게 에워싼 아홉 그루의 순백색 나무, 구백삼.

  반드시 함께 자라는 이 백광화와 구백삼은 순백꽃나무라고도 불렸다.

 

  "와아···."

 

  멜포메네가 가르침을 위해 환영 속에서 몇 번 보여줬던 기억이 있었지만, 실물을 보는 건 두 사람 모두 처음이었다.

  환영도 현실과 다를 것이 없었지만, 진짜 실물은 차원이 다른 기운을 내뿜었다.

 

  두 사람은 멜포메네에게 순백꽃나무에 대해 배웠던 기억을 떠올렸다.

  백광화는 자라면서 근처의 양분을 모두 빨아들이기 때문에 주변에서는 어떤 식물도 자라지 못한다.

  그렇게 충분히 자라면 빨아들인 양분을 다시 내뱉는데, 그렇게 나눠준 양분은 모두 아홉 그루의 나무가 골고루 받기 때문에 여전히 주변에는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고 동그랗게 흙바닥의 흔적만 남는다.

  한 송이의 하얀 꽃과 아홉 그루의 하얀 나무, 그리고 둥근 흙바닥.

 

  그 신비롭고도 이질적인 모습을 신성한 고리라고 불렀다.

 

  "신성한 고리···."

 

  테티스가 저도 모르게 나지막이 읊조렸다.

 

  "와아··· 예쁘다··· 누군가 회귀했다는 뜻이겠지?"

  "아마."

 

  발터가 다시 대지의 품으로 되돌아가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었다.

  다른 생명체들은 이를 죽음이라고 불렀지만, 발터에게 죽음은 기존에 없었던 개념이었다.

  최초의 순례자였던 파에톤에 의해 알려진 다른 생명체들의 죽음은 영생을 누리는 발터에겐 충격적인 발견이었다.

  그리고 그 파에톤이 자신의 고유꽃을 남긴 채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파에톤의 '죽음'은 발터 사회에 거대한 혼란을 불러왔고, 쉽사리 잦아들지 않았다.

  숲의 현자 한 명이 백광화 한 송이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대현자 세레스는 파에톤이 죽지 않고, 우리를 만든 여신 로클라의 곁으로 되돌아간 것.

 

  즉, 회귀한 것이라 말했다.

 

  그리고 새하얀 빛을 내뿜는 이 신비로운 꽃과 나무가 파에톤이 무사히 회귀했음을 알리는 신호라고 말했다.

  그렇게 혼란은 진정되었고, 모두가 파에톤을 축복하고 부러워했다.

  그 이후부터 발터에게 있어서 회귀는 신성하고 거룩한 여정으로 받아들여졌으며, 그 위대한 순례를 시작할 수 있는 자격이 현자의 시험을 통해 주어졌다.

 

  "좋겠다. 지금쯤 로클라님 곁에서 엄청 행복하겠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근데 이게 왜 여기 있지?"

 

  테미스의 질문에 테티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백광화는 로클로르 숲 어딘가에서 기약 없이 자라지만, 왜인지는 몰라도 기디움의 근처에서 발견되는 일은 없었다.'라고 하셨는데."

 

  테미스가 어설프게 멜포메네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

  테티스가 요란하게 웃음을 터뜨리곤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혀 안 비슷해. 암튼, 이상하네. 기디움 주변···을 넘어서 여긴 완전히 코앞인데."

  "그래, 이상한 일이구나. 연구가 필요하겠어. 좋은 발견이구나. 잘했다."

 

  좀 전과는 달리 아주 그럴듯한 목소리에 테티스가 웃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오오! 이번엔 완전히 똑같아! 엄청난데?"

  "어··· 음··· 그럴 수밖에···.“

 

  테티스는 어쩐지 목소리가 조금 뒤에서 들리는 듯해 고개를 돌렸다.

  친구의 얼굴이 있어야 할 곳에서 아주 낯익은 붉은 꽃 두 송이를 발견했다.

  가만히 꽃을 들여다보던 테티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양귀비? 어디서 많이 봤는데."

 

  그리고 불안한 기색을 여실히 내비치며 시선을 천천히 위로 향했다.

  붉은 양귀비가 멜포메네의 고유꽃이라는 깨달음이 듦과 동시에, 자신을 내려다보며 씨익 웃고 있는 스승님의 얼굴을 만났다.

 

  "그 정도로 똑같았니? 고맙구나."

  "우와악! 안녕하세요! 아니, 별말씀을요! 아니, 아니. 늦어서 죄송합니다!"

 

  테미스와 멜포메네는 놀라서 허둥지둥 대는 테티스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멜포메네는 괜찮다는 듯 테티스의 등을 살포시 토닥이며 순백꽃나무로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정말 전에 없던 발견이야. 백광화가 기디움과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피어나다니··· 설마···."

 

  테티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멜포메네의 표정을 확인했다.

  호기심과 학구열에 가득 찬 아이 같은 표정을 기대했던 테티스는 움찔하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멜포메네의 얼굴은 의혹과 공포로 가득 차 일그러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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