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각- 또각-
구두굽 소리가 복도 내에 울렸다. 검은 오픈 숄더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어깨까지 오는 흑발을 찰랑이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뒤로 금발에 안대를 한 붉은 눈의 남자가 따랐다.
한참동안 걷던 여자는 어느 문 앞에 멈춰섰다.
"이곳이니?"
"네, 맞습니다."
흐음- 콧소리를 내며 문을 위아래로 훑어본 여자는 문에 손을 댔다. 그러자 문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여자는 다시 한 번 또각또각 문 너머의 공간으로 걸어갔다.
온통 붉은색으로 도배된 방에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붉은 머리 여자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고 그 밑엔 장미덤불로 둘러싼 검은 관이 하나 있었다.
여자는 관 끝에 앉았다. 그러고는 다리를 꼬며 장미 한 송이를 꺾어 얼굴로 가져갔다. 새하얀 피부와 붉디붉은 장미의 조화는 실로 아름다웠다.
"정말 오래 걸렸어. 안 그러니?"
"......죄송합니다."
"됐어. 어쨌든 이렇게 찾았으니까."
"........."
"그녀도 정말 어리석지. 결국 이렇게 될 것을 뭐하러 그리 애썼는지."
사르륵- 장미가 검은 연기와 함꼐 사라졌다. 여자는 몸을 굽히고 손으로 가시덤불을 들어올렸다. 가시 때문에 피가 손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핏방울은 관에 닿자마자 십자가 문양에 스며들었다. 잠깐이었지만 십자가 문양이 은빛으로 빛났다.
붉은 입술이 곡선을 그리며 요염한 느낌을 풍겼다.
"그럼 이제 시작해볼까."
콰직- 가시가 부서지면서 아까보다 많은 피가 터져나왔다.
* * *
이번이 대체 몇 번째일까.
불규칙적으로, 아니 거의 매일 이 꿈을 꾸는 것 같다.
꿈 속의 그곳은 온통 어두웠다. 선명하게 보이는 건 어디로 향하는 지 모르는, 쭉 뻗어있는 하얀 길과 한 장씩 떨어져있는 붉은 꽃잎뿐.
한 걸음씩 꽃잎을 스쳐 지나갈 때 바람에 실려가듯 꽃잎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게다가 이상한 향기에 심장이 힘차게 뛰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환희, 비애, 향수, 공포.
그리고.....지독한 욕망.
하나둘씩 떠오른 감정들이 마치 소용돌이처럼 섞이고 또 섞이기 시작했다. 이 감정을 뭐라고 정의할 수 있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마음 속 한 구석이 검게 물들어가는 것 같았다. 마치 화선지에 떨어진 먹물처럼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어나갔다.
그렇게 걸어가다보니 저 끝에 하얀 나무가 보였다. 사라진 줄 알았던 붉은 꽃잎들이 나무를 향해 날아갔다.
아니, 정확하게는 나무 아래에 있는 긴 머리의 하얀 인영을 향해. 꽃잎이 머리에 닿다 만개한 장미꽃으로 변했다.
또 한 번 바람이 불었다. 이번에는 감미로운 음이 심장을 울렸다.
가사는 알 수 없었지만 눈 앞의 풍경과 어우러져 꿈 속에서 또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노랫소리에 한동안 홀리다가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그 하얀 인영 앞이었다. 처음 이 꿈을 꾸었을 때는 경계했지만 이젠 하얀 인영이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하린은 더 다가갔다.
"당신은......누구시죠?"
답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마음 속 한 구석에서 알게모르게 피어나는 희망에 하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계속되는 침묵에 고개가 숙여질때쯤, 그것이 양팔을 벌리며 다가왔다. 머리카락 위로 망같은 뭔가가 살랑 떠올랐다.
무언가 말하려는 것 같은데. 하지만 들으려고 가까이 가자, 펑- 붉은 꽃잎이 터져 나오면서 뒤로 밀려났다.
손을 뻗었으나 더 힘주기 전에 눈이 먼저 감겼다.
완벽한 어둠이었다.
* * *
"........."
눈을 뜬 하린은 몸을 일으켰다. 이런 꿈을 꾼 날, 그녀가 처음으로 하는 일은 바로 거울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물감 묻은 것처럼 머리카락 끝이 살짝 붉었는데, 이젠 아예 머리칼의 절반이 붉은색이었다. 아무리 그 부분만 잘라내도 머리카락은 원래 길이로 돌아왔다. 눈동자도 처음엔 애매모호했는데 이젠 아예 그 색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분홍빛이었다.
심지어 왼쪽 뺨에는 이상한 붉은 자국이 있었다.
하린은 능숙하게 캡과 마스크를 꺼내어 착용했다. 잠바의 후드까지 쓰니 얼굴이 완벽하게 가려졌다.
'오늘은 아예 고개 들지도 말아야지.'
지금의 모습이 싫은 건 아니었다. 다만,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게 싫었을 뿐이다.
나가기 전에 문에 귀를 댔다. 다행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예전에는 뭣모르고 밖에 나갔다가 호되게 혼나서, 그 이후로 문에 귀를 대고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날 몸에 새겨진 지독한 흔적, 비웃는 얼굴, 그리고 싸늘한 목소리.
-죽은 듯이 살아. 눈에 띠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처음엔 사랑받고 싶어서 그들이 시킨대로 다 했다.
하지만 그들은 한 번도 칭찬같은 따뜻한 말을 건넨 적 없었다. 심지어 다가가려 하면 무시하거나 대놓고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니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이젠 지쳤다, 몸도 마음도.
아니, 애초에 이건 밑빠진 독에 물 붓는 짓이었다. 지금까지 왜 몰랐던 걸까.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문을 연 하린은 거실을 가로질러 신발장으로 향했다. 다 닳은 회색 운동화를 한참 보고선 한 짝씩 신었다.
쿵- 철문이 굳게 닫혔다.
* * *
강의 시간 내내 무슨 정신으로 앉아 있었는지, 옆에 있던 유나가 부르지 않았다면 다음 강의를 놓쳤을 것이다.
"혹시.....또 그거야?"
하린은 잠깐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거기에 가 있을래? 내가 점심 사가지고 갈게."
"어? 뭐.......알았어. 컵밥 맞지?"
"당근이지! 금방 다녀올게."
유나가 강의실을 떠나고 하린은 공책과 필기도구를 가방에 넣었다. 아니, 넣으려 했다.
'응?'
웬 흰 봉투가 가방 안에 있었다. 그 입구엔 붉은 장미 씰이 찍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