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12.31. 강남 경찰서 취조실
황색광을 비추는 나트륨 전등으로 뿌연 담배가 오르고 있었다. 가는 손가
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가 도톰한 입술로 들어갔다. 다시 뿌연 연기를 내
뿜고 서야 담배는 유리 재떨이에 꾹 눌려 타들어감을 멈췄다. 블루렌즈
를 낀 눈동자가 한쪽 벽면을 덮고 있는 거울을 빤히 보았다. 긴 속눈썹
만 떨어졌다 올라갔다 할 뿐 흐트러짐 없었다.
오똑한 콧날과 딸기를 문듯한 입술, 새뽀얀 피부... 어깨까지 내려오는
까만 생머리. 여자는 단아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은미령. 곧 있으면 밀
레니엄 축제와 함께 스물 다섯이 되었다. 거울 너머로 두 명의 형사가 그
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사람을 죽였을까요?"
어린 형사가 말 문을 열었다.
구릿빛 피부를 가진 형사도 굳게 다문 입을 열었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어..."
"그래도... 뭐가 부족해서 남편을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낸들 알아..."
"혹시..."
"그만 수다 떨고 들어가봐.."
"선배님, 저 혼자요?"
"왜, 처음이라 자신 없는 거야?"
"아뇨..."
"사심없이 밀어붙여."
"선배님두 참.. 내가 언제 딴 맘 먹었다구..."
"저런 여자라면 남자 하나쯤 홀린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거야.."
어린 형사는 머리를 긁적이고 나갔다.
통유리 밖으로 어린 형사가 취조실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쭈삣 거리
고 있는 행동이 맘에 안 들었는지 형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린 형사가 테이블 맞은 편에 앉아 서류 파일을 열었다. 그리곤 자신 없
는 눈으로 미령을 쳐다봤다. 마른 침을 삼키고 다시 서류로 시선을 떨구
었다.
"왜 그랬어요?"
미령이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짓고, 눈썹을 올렸다 내렸다.
"이봐요! 은미령씨. 남편을 살해한 동기가 뭐에요?"
미령은 담배 갑에서 가치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칙칙.. 라이터를 켜
불을 붙이고 한번 빨아들인다음 담배를 빼 어린 형사에게 내밀었다.
"난 흥분한 사람과 얘기 안 해요.."
차분하면서도 물방울이 또르르 떨어지듯한 맑은 목소리였다.
어린 형사가 어이없어 담배를 거칠게 꺼버렸다. 그러자 미령 이마에 주름
이 생겼다 사라졌다. 딸기를 문듯한 입술 꼬리가 올라갔다.
"웃겨요? 뭐가 그렇게 웃겨요?"
미령은 시선을 어린 형사 등 뒤로 바꿨다.
"그쪽보단 저기에 있을 사람과 얘기하고 싶어요."
어린 형사가 당황해서 고개를 돌렸다.
통유리 안에 있던 형사는 미동없이 그녈 바라봤다.
"선배님 어떻게 하죠?"
잠시 후 형사는 취조실로 들어왔다. 어린 형사는 쑥스러워하며 밖으로 나
갔다. 미령 앞에는 서른 살에 형사가 앉았다. 카키색 면티로 단련된 근육
이 드러났다.
"나한테는 다 털어놓겠습니까?"
"그런 말 하지말아요.. 너무 자신 없어보이니까.."
"좋아요. 우선 얘기나 들어보죠.."
"그 전에 부탁이 있어요..."
"부탁?"
"라디오 좀 갖다줄래요?"
"라디오는 왜..."
"태어나 나도 처음 갖는 밀레니엄인데 듣는 거라 하고 싶어요.."
형사는 미령의 부탁을 한번에 거절도 없이 들어주었다. 미령이 라디오 불
륨을 높였다. 라디오 앵커는 카운트 다운을 외치고 있었다.
5. 4. 3. 2. 1......
보신각 종소리와 사람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미령도 기쁜 듯 웃었다.
형사가 라디오를 껐다. 얼굴이 굳어진 미령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이제 말하시죠.."
"파티를 하려고 했는데...."
"누구랑요?"
"당연히 남편이죠. 그렇게 죽어갈 줄은 몰랐어요.."
미령은 입에서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