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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너무 밝은 곳의 그대
작가 : 드리민
작품등록일 : 2019.5.17
너무 밝은 곳의 그대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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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의 인연을 끝으로, 사제가 된 남자.
5년 전의 사고를 끝으로, 흡혈귀가 된 남자.

너무 밝은 곳의 그대를 향한 이야기.

 
#38 정해진 운명대로 (1)
작성일 : 20-03-05 23:09     조회 : 278     추천 : 0     분량 : 4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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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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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름이 다가왔다. 그동안 몰아쳤던 폭풍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구름은 잔뜩 끼어 있었다. 오직 보름달만을 남기고, 하늘은 온통 흐렸다. 사제들은 숨을 죽였다. 체칠리아가 제단 앞에서 문 위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달빛을 바라보았다. 달빛은 천천히 차올라 사제들이 그린 아홉 뿔의 별과 원을 가리켰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체칠리아가 향로를 들었다. 잠잠했던 향로에서 희뿌연 연기가 흘러나왔다.

 

  “원초의 빛이여, 내게 허락된 그 파편이여. 제게 힘을 주소서, 이 번제를 허락해주소서.”

 

  촛불이 일제히 심장의 움직임처럼 꺼질 듯 줄어들었다가 다시 타오르기를 반복했다. 체칠리아는 향로를 쥔 채로 원을 따라 한 바퀴 돌았다. 연기는 원을 가득 채우며, 그 안으로 애꿎은 영원한 빛이 들어오지 않도록 경계를 세웠다.

 

  “내가 호명하는 자여, 심판받을지어다. 내가 호명하는 자여, 이 자리에 임할지어다. 이는 원초의 빛께서 내게 주신, 신성한 권한이다. 그 누구도 내가 호명하면 거스를 수 없음이라. 일찍이 이 땅을 찾아왔던 형리 카말의 외아들 조지. 영원한 빛이 되었으나 그 존재가 세상을 어지럽히게 되었으니, 나의 부름에 응하여 심판대에 오를지어다.”

 

  체칠리아의 주문이 끝나자 원 안에서 조지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지의 얼굴은 어둡고, 또 결연한 표정이었다. 그는 그렉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향로를 든 심판자뿐이었다. 체칠리아는 제단 위에 향로를 내려놓았다. 향로의 연기가 옅어졌다.

 

  “도망치지 않은 건 의외네.”

  “그럴 생각은 없었어.”

  “좋아. 그렇다면 내가 지금 너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우를 갖출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겠지만.”

 

  체칠리아는 그렉을 불렀다. 그렉은 체칠리아의 옆으로 다가왔다.

 

  “서로 못다한 말이 있으면, 지금 해.”

 

  그렉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조지의 앞에 다가갔다. 연기가 그리는 원을 넘어 그렉이 조지의 뺨에 손을 올렸다. 환하고 따뜻한, 그러나 창백하고 차가운 얼굴이었다. 이게 마지막 대화가 될지도 모른다. 그렉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 그렉을 보고는 조지는 눈을 감으며 그렉의 손등에 제 손바닥을 겹쳤다.

 

  “난 괜찮아.”

  “지금이라도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우리,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그렉 형.”

 

  그렉의 울먹거리는 만류를 조지는 가만히 멈춰 세웠다. 그는 두 팔을 뻗어 그렉을 끌어당겼다. 원의 경계가 망가지지 않는 아슬아슬한 간격을 두고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았다. 조지는 속삭였다.

 

  “만약 다음이 있다면, 우리는 또 만날 수 있을 거야.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떨어져 있던 그동안, 내가 지나쳐온 수많은 생을 지켜보았어. 그 어떤 생에도 우리가 서로 모르는 사람이었던 적은 없었지.”

 

  인연은 참으로 질긴 것이라, 삶과 죽음의 날카로운 경계도 이를 끊어놓지 못한다. 수많은 삶 속에서 같은 인연이 다른 모습으로 계속 변주된다. 가족으로, 친구로, 연인으로, 때로는 숙적으로까지. 두 사람은 그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아주 오랫동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에 형이 그랬지. 형은 형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나를 사랑했던 것 같다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어. 그 무수한 삶을 들여다본 다음에야, 내가 왜 다른 누구도 아닌 그렉 형을 사랑했는지 깨달았어. 나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그리고 훨씬 강렬하게 형을 사랑하고 있었어.”

  “조지, 그렇다면 나를 슬프게 해서는 안 되잖아. 그런 게 사랑 아니야?”

  “그건 아니야, 그렉 형.”

 

  때로는 이별의 슬픔을 겪더라도 상대를 위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일 때도 있는 법이다. 조지는 이다음에 펼쳐질, 자신이 없어진 이후의 그렉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여기서 도망친다면 그 미래는 망가질지도 모른다. 그러니 여기에서 끝을 내야 했다. 있을지도 모르는 다음을 기약하며.

 

  “나는 괜찮아. 이번 생은 짧았지만, 나는 지난 생 못지않게 충분히 형에게 사랑받았고 형을 사랑할 수 있었으니까.”

  “조지.”

  “그러니 나는 도망치지 않아.”

 

  조지는 그렉을 껴안고 있던 두 팔을 풀었다. 그만 자리로 돌아가렴. 체칠리아의 목소리를 듣고 그렉은 우두커니 서있던 자리에서 뒤로 물러났다. 그렉은 눈물이 차오르려는 눈가를 훔쳤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조지와 체칠리아를 모두 구하기 위해서 아르티제의 사제들이 준비한 게 있었으니까. 지금은 조용히 기다릴 때.

 

  체칠리아가 다시 향로를 높이 들자 연기는 다시 짙어졌다. 심판을 재개한 체칠리아의 눈동자가 샛노랗게 빛났다. 원초의 파편이 실린 체칠리아의 목소리는 조지를 향했다.

 

  “영원한 빛 조지, 그대는 영원한 빛의 책무를 저버린 이단이다. 이를 인정하는가?”

  “인정하지 않는다. 영원한 빛으로서 내가 지닌 유일한 책무는 나의 사랑을 돌보는 것이다. 나는 나의 책무를 충실히 이행했다.”

  “영원한 빛의 책무는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영원한 빛의 책무는 모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내게 있어 그 한 사람이 모든 것이다. 내가 거쳐 온 모든 삶에서 오직 내가 사랑한 사람만이 변하지 않은 유일한 것이다.”

  “유일한 것은 오직 원초의 빛뿐이시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는 원초의 빛이 아닌 영원한 빛을 섬기는가? 그리고 영원한 빛도 모두를 위하는 책무에 묶여있어야만 하는가?”

 

  체칠리아는 조지의 입에서 그런 질문이 나올 거라 상상하지 못했다. 형리의 아들로 태어나 받아온 차별이 교단을 향한 미움과 불신을 낳았음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라고 생각했지, 교단의 사제들이 가장 마지막에 배우는 교리를 직접 물어볼 줄은 몰랐다. 체칠리아는 안토니오를 바라보았다. 안토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대로 말해주세요.

 

  “원초의 빛께서는 최후의 심판에 깨어나신다. 우리가 그 이름을 열렬히 부르며 섬기면, 그날이 앞당겨진다. 그러면 저주 속에서 구원을 바라는 이들을 구할 수 없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그분의 대리자이신 영원한 빛을 섬긴다. 또한 유일한 것은 오직 원초의 빛이어야 하기에, 영원한 빛은 모든 것을 위한 모든 것이어야 한다. 하나를 위한 모든 것, 모든 것을 위한 하나, 하나를 위한 하나여서는 안 된다.”

 

  조지는 그 대답을 듣고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원한 빛이 서로 힘을 합치면서도, 또 서로 견제하여 산란을 일으키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원초의 빛이 잠든 이 시대를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 다른 유일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실소가 흘렀다. 체칠리아는 잠시 향로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그렉만이 내게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그랬다면 최소한 그렉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서 그렉을 포함한 모든 이들을 돌봤어야지.”

  “그녀처럼?”

  “그래, 그녀처럼.”

 

  조지가 성소로 소환되기 직전에 에어드부르가는 조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설령 마음 깊은 곳에서는 용서하지 않았더라도, 이 마을의 사람들을 품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나를 구해주지 않았던 그 시절의 사람들을 내가 아직 용서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나고 자랐던 이 숲과 이 마을을 지키듯이.”

 

  하지만 조지는 알고 있었다. 그는 에어드부르가처럼 될 수는 없었다는 것을. 그건 오랜 인내 속에서 자신이 구원받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기적이니까.

 

  “나는 그럴 수 없어. 그런 건 불가능해. 그 믿음을 나는 가질 수 없어.”

  “그렇다면 너는 이단의 빛이야.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어.”

 

  조지는 두 팔을 벌렸다. 그리고 씁쓸한 미소로 체칠리아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해.”

 

  조지의 선언에 체칠리아는 마냥 즐겁지 않았다. 그 마음이 조금만 더 풀어졌더라면, 우리의 만남이 조금이라도 달랐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미련이 그림자처럼 드리웠다. 하지만 돌아갈 수도, 없던 일로 할 수도 없는 법이었다. 그의 존재를 용인한다면, 그와 비슷한 존재들이 나타날 것이다. 세상의 환란을 막을 수 있다면 그와 자신의 영혼은 싼 대가였다.

 

  체칠리아는 향로를 들었다. 그녀는 사그라지는 일 없이 불타는 원초의 파편을 담아 외쳤다.

 

  “보라! 세상에 빛으로 내려온 것은 오직 나 하나뿐이니. 나로부터 난 것은 모두 내가 거두리라. 나는 원초이니, 곧 유일하고 영원한 것이라. 모든 영원은 나에게로 돌아오라. 그것이 내가 내리는 심판이며, 또한 마지막 자비일지어다.”

 

  원을 그리는 하얀 연기에서 파직거리는 소리와 번쩍거리는 섬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조지는 자신의 존재가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소멸은 시작되었다. 체칠리아는 뒤이어 아홉 선지자의 힘을 불렀다.

 

  “아홉 선지자여, 원초의 빛을 잠재우신 기적을 제가 일으킬 수 있도록 허락해주소서. 원초의 빛과 하나 되는 심판을 받을 이 빛을 잠재워 고통을 잊고 영면에 들 수 있게 해주소서.”

 

  원을 그리는 아홉 뿔의 별을 새긴 양초가 빛을 발했다. 조지는 눈꺼풀이 점차 무거워졌다. 아득해지는 시야가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렉을 바라보고 싶어 고개를 돌렸다.

 

  “아홉 선지자여.”

 

  캐서린의 목소리가 의식의 흐름을 끊었다. 조지의 시야가 다시 선명해졌다. 아홉 뿔의 별이 원을 벗어나 더 크게 새겨지기 시작했다.

 

  “원초의 빛을 잠재우신 기적을 제가 일으킬 수 있도록 허락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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