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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낯선 거리
작가 : 봄동
작품등록일 : 2019.12.10

거리는 한 권의 책이다. 낯선 거리의 이방인 백남진, 어느날 마주한 통신사 대리점에서 점장 장하민을 만났다. 커다란 몬스테라 화분의 대리점부터 하나씩 읽어가는 거리의 구석구석과 사람들.

 
10. 캔버스가 불타오르는 폐창고
작성일 : 20-01-06 21:05     조회 : 184     추천 : 0     분량 : 7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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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구태여 사과를 해야 하는 사이가 있다.

 

 코르크색 종이봉투 안에는 모카맛 롤케이크, 퇴근길에 사온 것이었다. 몬스테라 대리점의 흰 벽돌벽 앞에서 빵봉투를 든 남진은 한숨을 쉬었다. 어쨌거나 사과는 해야겠지. 남진은 전날의 일을 떠올렸다. 열등감에 젖어 뱉은 말들.

 

 '좋은 말 한다고 좋은 사람 되는 거 아니에요. 역겹다고요.'

 

 위선이든 동정이든, 그에 상응하는 댓가가 막말일 수는 없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대강 넘길 정도로 막역하지도 않은 사이. 엎질러진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으니 새 것이라도 부어야 할 터였다. 이를테면 전에 미처 먹지 못했던 롤케이크라던가.

 

 "뭐해?"

 

 거친 음색이 귓가를 후볐다. 식겁한 남진이 귀를 감싸며 후닥닥 돌아보니 큰 품의 아가일 니트를 걸친 윤호였다. 그새 키가 컸나? 눈높이가 한층 위쪽이었다. 헐거운 라운드넥으로 다부진 목줄기와 쇄골이 드러났다. 허공에 킁킁대던 윤호는 남진이 든 빵봉투에 대뜸 코를 묻었다.

 

 "맛있는 냄새 나."

 "네 거 아냐. 뭐 같이 먹겠지만."

 "쟤 주려고?"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아담히 뚫린 창문 안으로 낯익은 거구가 눈에 들어왔다. 올리브 색 셔츠를 입은 하민 앞으로 단발의 뒷통수. 다예와 대화중인 모양이었다.

 

 "들어가지 마."

 "왜?"

 "기분 안 좋을걸. 그러니까 이건 나 줘."

 

 이마를 짚는 하민을 눈짓해보인 윤호는 빵봉투를 덥석 집었다. 기가 막혀 뺏어들자 끈질기게 달라붙는 것이었다. 대체 왜 이래? 치열한 공격과 수비가 오가는 와중에 딸랑, 차임벨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남진이? 여기서 뭐해?"

 

 문을 열고 나온 다예가 다가왔다. 빵봉투를 탐내던 윤호는 다예를 보자마자 이빨을 드러냈다. 적개심 가득한 표정이었다. 다예는 웃으며 윤호에게 손을 흔들었다.

 

 "윤호도 안녕."

 "가. 빨리."

 "남진 씨랑은 사이좋아 보이네? 나만 보면 맨날 숨으면서."

 "너도 가. 이건 나 주고."

 

 남진을 돌아보며 하는 말이었다. 내민 손을 보며 고민하던 찰나, 다예가 물었다.

 

 "윤호가 귀찮게 해?"

 "네. 왜 이러는 거야, 진짜."

 "도와줄까?"

 

 어떻게요? 물으려는데 다예가 소매 아래로 팔찌를 풀었다. 찰랑, 여러 겹의 금속 사슬들이 부닥치며 맑은 쇳소리를 냈다. 윤호의 눈이 커졌다. 다예는 풀어낸 팔찌를 좌우로 흔들며 천천히 들어올렸다. 찰랑, 찰랑. 호박색 눈동자가 다예의 손을 따라 점점 올라갔다.

 

 머리 위로 팔찌를 들어올린 다예는 또다시 팔찌를 찰랑, 흔들어보이고는 가게 반대편으로 힘껏 던졌다. 그 순간 남진의 눈앞으로 아가일 니트가 펄럭였다. 남진은 입을 떡 벌렸다. 윤호가 팔찌를 향해 몸을 날린 것이다. 마치 스타트 선상을 끊은 단거리 선수같은 모습에 말을 잃자, 다예가 어깨를 툭 쳤다.

 

 "들어가 봐."

 "예?"

 "빨리. 쟤 또 방해한다?"

 

 남진은 저도 모르게 빵봉투를 끌어안고 문으로 뛰었다. 팔찌를 허공에서 잡아챈 윤호가 뒤늦게 돌아보았지만, 이미 결 고운 나무 문은 닫힌 후였다.

 

 

 

 -

 

 

 언제나처럼 스피커에서는 일렉트로닉 팝, 시원하게 갈라진 몬스테라 잎새가 흔들거렸다. 그러나 하민이 보이지 않았다. 남진은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카운터 뒤쪽의 창고 문이 열린 것을 발견했다. 테이블 위에 롤케이크가 담긴 봉투를 내려놓은 남진은 창고로 발을 들였다.

 

 "저기요?"

 

 콘크리트 바닥이 발소리를 울렸다. 흰 줄눈이 그어진 남색 타일벽을 타고 찬 공기가 불었다. 푸른 형광등 불빛이 이따금씩 지지직- 타닥 소리를 내며 깜빡였다. 포근하고 따뜻한 가게와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무질서하게 쌓인 잡동사니들을 둘러보는데, 낯익은 것이 눈에 띄었다. 노란색을 거칠게 발라놓은 캔버스. 호프집에 걸려있던 다예의 자화상이었다.

 

 "저한테 주겠다네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하민이었다. 반대편에서 다가온 하민은 남진을 지나쳐 자화상 앞에 무릎을 굽혔다. 큼직한 손이 캔버스를 느리게 훑었다.

 

 "왜요?"

 "이젠 필요 없대요."

 

 피로한 목소리였다. '난 이제 관두려고.' 다예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가장 구석진 곳에 초라하게 걸려진 그림은 결국 버려진 것이었다. 잠시 흐른 침묵, 하민이 몸을 일으켰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요."

 "왜 그쪽이 잘못했다고 생각해요?"

 "그러게요.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하민은 목을 한 바퀴 돌려 꺾었다. 거대한 그림자가 남진에게로 가까이 다가서더니, 어깨를 왈칵 움켜쥐었다. 힘이 실린 손길, 어깨가 부서질 듯 아파왔다.

 

 왜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다 화풀이야? 남진은 앓는 소리를 내며 짜증스럽게 하민을 올려다보았다. 창백한 불빛을 등진 얼굴이 어둡게 웃었다. 서늘한 얼굴을 마주하자 어쩐지 불안감이 차올랐다.

 

 "같잖고 우스워요? 나도 알아요."

 "왜 이래요?"

 "물론 다른 방식도 있어요. 착한 건 싫은 거죠?"

 

 하민은 상체를 숙여 남진과 눈높이를 맞췄다. 순간 머릿속에서 경보가 울렸다. 대상도 이유도 불확실하지만 분명 뭔가 위험했다. 그러나 몸은 얼어붙고 잇새로 가느다란 숨만 새어나왔다. 하민은 나직이 웃으며,

 

 "그럼 무서운 건 어때요?"

 

 불쑥 목을 움켜쥐었다. 숨이 턱 막히고 눈앞이 순식간에 흐려졌다. 목을 쥔 손에 힘줄이 불거졌다. 반항은 고사하고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이 하얘졌다. 뿌연 시야로 하민의 얼굴이 가득 차올랐다.

 

 "이건 어때요? 그냥 남진 씨, 여기서 이렇게 죽어버려요. 실종 신고 넣어줄까요? 아, 내 마음이지. 곧 죽을텐데 무슨 상관이야. 그쵸?"

 "...끅..."

 "컴퓨터에 꽁꽁 숨겨놓은 비밀 폴더들이라던가, 냄새나는 빨래들이 걱정되지 않아요? 일기라도 썼으면 어떡해. 누가 보면? 들쑤시기엔 죽은 사람이 훨씬 편하잖아."

 

 부들거리는 손가락이 목으로 파고들 것만 같았다. 남진의 눈이 서서히 뒤집혔다. 의미 없는 음성이 졸린 목을 간지럽혔다. 차분한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다.

 

 "어때요. 무섭죠?"

 "..."

 "살고 싶어요? 그럼 눈 감아요. 놔줄게요."

 

 몸이 뻣뻣해졌다. 관자놀이를 타고 뜻 모를 눈물이 흘렀다. 열, 아홉, 여덟. 숫자를 세는 소리가 들렸다. 남진은 천장에 얼룩진 물자국을 바라보았다. 여섯, 다섯, 넷. 눈앞이 아득히 멀어졌다. 파랗게 치직대는 형광등. 셋, 둘...

 

 "왜..."

 

 목이 일순간 시원해졌다. 그제야 트인 숨통으로 공기가 밀려들었다. 남진은 바닥에 쓰러져 미친 듯이 쿨럭댔다. 허파로 공기가 들락거릴 때마다 가슴과 목줄기가 따끔거렸다. 한참을 헐떡이던 남진은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다들 왜 그렇게..."

 

 젖은 목소리. 방금까지 제 목으로 파고들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지지직- 타닥. 형광등 깜빡이는 소리에 흐느끼는 울음이 섞여들었다.

 

 

 

 -

 

 

 "금방 나왔네? 근데 목은 왜 그래?"

 

 대리점 문을 열고 나오자, 기다리던 다예가 남진을 보며 하는 소리였다. 남진은 제 목을 만져보려다 신음하며 손을 뗐다. 건드리기만 했을 뿐인데 속에서부터 욱신거렸다. 그 우악스러운 손에 쥐였으니, 깊이까지 멍이 든 것이 분명했다.

 

 "별거 아니에요."

 

 후드를 세워 목을 가리니 다예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아까까지 문 앞에 있던 윤호가 보이지 않았다. 집에 갔나? 주변을 훑는데 다예가 팔을 잡아끌었다.

 

 "퇴근한 거지? 그럼 지금 잠깐 시간 돼?"

 "피곤한데... 왜요?"

 

 온 몸에 힘이 없었다. 기진맥진한 얼굴을 보며 다예는 미안하다는 듯 손을 모으고, 생끗 웃었다.

 

 "너 혹시 불장난 좋아해?"

 

 

 

 -

 

 

 "이런 데가 남아있네요."

 "여기 공무원들은 일 안 해. 이십 년 전에 살인난 폐교도 최근에야 철거했잖아."

 

 백남초등학교를 떠올린 남진은 입을 닫았다. 공터와 도로가 가득한 지역, 야트막한 굴다리 옆에 버려진 폐공장은 어두웠다. 건물 내부에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지만 벽과 지붕에 창들이 큼직하게 뚫려있었다. 어지럽게 널브러진 드럼통과 목재들 위로 파리한 달빛이 쏟아졌다.

 

 "벌레 나올 것 같아요."

 "한겨울인데 뭐. 나도 여름엔 안 와."

 

 빈 드럼통에 버려진 목재들을 쓸어담던 다예는 그 안에 기름통을 부었다. 눅눅한 기름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칙, 불붙은 성냥을 안에 던지자 안에서 잠깐 타닥거리다가, 순식간에 불이 훅 붙었다.

 

 "진짜 하시게요?"

 "응."

 

 다예는 드럼통 옆에 쌓아놓은 캔버스 하나를 집어들었다. 주머니칼을 꺼낸 다예는 망설임 없이 캔버스에 칼을 꽂았다. 북, 북, 천이 찢겨나갔다. 다예는 넝마가 된 천조각을 드럼통 안에 던져놓고, 목재 화틀을 남진에게 내밀었다. 남진은 콘크리트 바닥에 화틀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와작!

 

 "아까운데. 차라리 팔지 그래요?"

 "내놓는다고 팔리는 거면 내가 이모 가게에서 알바를 왜 하겠어?"

 "아."

 

 부서진 나무토막을 주워 드럼통 안에 던진 다예는 같은 작업을 서너 차례 반복하고는 간이 의자에 앉았다. 드럼통이 꽉 찬 것이다. 남진은 타들어가는 고흐의 모작을 바라보았다. 멋들어지게 그려놓은 남의 그림. 불길에 닿은 천조각들이 거멓게 오그라들었다.

 

 야밤에 갑작스레 그림을 태우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단 하나의 제 그림인 자화상을 하민에게 넘긴 것을 보면 알 것도 같았지만. 남진은 드럼통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붓과 물감 따위의 재료들을 가리켰다.

 

 "저것들도 다 태우게요?"

 "응."

 "이젠 그림 안 그릴 거예요?"

 

 다예는 대답 없이 웃으며 안경을 벗었다. 의자에서 일어난 다예는 캔버스 무더기 위에 코트를 벗어던지고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보던 남진의 눈이 커졌다. 다예가 격자무늬 남방의 단추를 풀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뭐 하세요?"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서."

 "말로 하셔도 돼요."

 "아냐. 너한테는 괜찮을 것 같아."

 "제가 안 괜찮...!"

 

 드러난 몸. 내의까지 벗어낸 다예는 남진을 향해 몸을 돌렸다. 드럼통 안에서 피어오른 주홍빛이 흰 몸뚱이를 물들였다. 도담한 가슴과 가냘픈 허리, 미끈한 피부 위로...

 

 남진은 입을 틀어막았다. 손을 떼면 구역질이나 비명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작은 몸뚱이는 흉터로 가득했다. 칼로 그은 듯 수직인 것, 불로 지진 듯 뭉개지고 녹아내린 것, 원인조차 모를 것들. 해묵어 희게 변한 것부터 어제 난 듯 딱지가 앉은 것까지 상처들은 수도 없었다.

 

 "누가... 이랬어요?"

 "역시. 네 상처는 남이 낸 거구나?"

 "예?"

 "난 아냐."

 

 다예는 캔버스 천을 찢던 주머니칼을 꺼내들었다. 매끄러운 호선이 한 바퀴 휘리릭, 돌다가 가슴팍으로 향했다. 긋는 시늉을 해보이자 남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비극적인 과거사 같은 거 말이야."

 "대체 왜..."

 "난 그런 거 없어. 그래서 미워할 사람도 나밖에 없어. 이렇게 태어난 나, 이렇게까지 망가진 나."

 

 한 발짝, 한 발짝. 천천히 다예가 가까워졌다. 드럼통의 불꽃이 넘실대며 흉터 가득한 몸을 비췄다. 불타오르는 고흐의 모작, 메마른 눈빛.

 

 "넌 어떤 사람으로 태어났니?"

 '어쩌다 저렇게 태어났을까.'

 

 "너를 감당하기 힘들지 않아?"

 '난 감당 못해. 당신 새끼니까 당신이 알아서 해.'

 

 "나는 더 못하겠어. 그러니까..."

 

 걸음이 멈췄다. 코앞까지 다가온 다예는 조심스레 남진의 목을 쓰다듬었다. 피멍 든 자국이 속에서부터 아렸다. 고개를 돌리자 높이 타오르는 불과, 드럼통 옆의 기름통이 눈에 들어왔다. 반쯤 남은 인화성 물질.

 

 사람을 적시기엔 충분한 양이었다.

 

 다예가 남진의 가슴팍에 맨몸을 기댔다. 한 팔로 다예를 감싼 남진은 손을 뻗었다. 차갑고 단단한 플라스틱의 감촉. 기름통에 손이 닿는 순간,

 

 - 그 그림을 받으면 안 되는 거였나봐요.

 

 익숙한 미성. 순식간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놀란 남진이 눈을 비비자, 을씨년스러운 폐창고로 한 줄기 달빛이 비쳤다. 두리번거리던 남진은 앞으로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퉁, 발에 빈 기름통이 채였다.

 

 맨몸의 다예도, 켜켜이 쌓인 캔버스도, 공장을 주홍빛으로 물들이던 불꽃도 없었다. 드럼통 속에는 한 줌의 잿더미와 화틀의 잔해뿐이었다.

 

 

 

 -

 

 

 "누나! 다예 누나!"

 

 큰 소리로 외치며 호프집을 들어서자, 다미가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다. 주방 안쪽에서 다예가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남진은 벽에 걸린 메쉬망으로 다가갔다. 고흐의 모작과 다예의 자화상은 어디에도 없었다. 격자무늬 남방 위에 앞치마를 걸친 다예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남진아, 어쩐 일이야?"

 "나 기절한 거예요? 아까."

 "아까라니?"

 

 다예는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가슴 한 쪽이 참을 수 없이 답답해졌다.

 

 "아까 그림 태울 때 말이예요."

 "그걸 네가 어떻게..."

 "나랑 같이 했잖아요, 굴다리 옆에 있는 폐창고에서!"

 

 안경 속의 눈이 커졌다. 큰 눈망울이 잘게 떨렸다. 불안과 의혹이 가득 담긴 얼굴로, 다예는 말했다.

 

 "무슨 소리야? 너 나랑 하민 오빠네 가게 앞에서 바로 헤어졌잖아."

 "네?"

 "말없이 가서 미안. 그때 내 자화상 들고 있어서, 인사하기 좀 부끄러웠거든."

 

 그제야 남진은 제 손에 무언가 들린 것을 깨달았다. 모카 롤케이크가 담긴 빵봉투. 다예가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나한테서 탄내 나나보다. 근데 그 폐창고는 어떻게 알았어?"

 "..."

 "남진아?"

 

 남진은 대답 없이 호프집을 뛰쳐나갔다.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

 

 

 딸랑!

 

 "아, 남진 씨 왔어요?"

 

 문을 세차게 열자 몬스테라의 갈라진 이파리가 외풍에 흔들렸다. 테이블에 뺨을 대고 엎드린 윤호가 무심한 시선을 던졌다.

 

 "안 그래도 카톡하려고 했는데. 어제 그렇게 보내고 걱정했어요."

 "..."

 "오늘은 기분 좀 괜찮아요? 저녁은 먹었고?"

 

 하민이 카운터를 돌아 남진에게 다가왔다. 창고의 문은 활짝 열려있었고, 어지러이 쌓인 잡동사니가 눈에 들어왔다. 다예의 자화상은 온데간데 없었다. 남진은 무력한 눈으로 하민을 올려다보았다. 웃는 얼굴이 여느 때와 같이 곱고 상냥했다.

 

 "윤호도 배고프대요. 우리 같이 사장님네 카레 먹으러 갈까요?"

 

 평온하고 따스한 대리점, 사분거리는 목소리. 지독한 꿈을 꾼 기분이었다. 깨고 나면 흔적도 없이 잊히는 악몽. 빵봉투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리자, 하민이 황급히 남진을 부축했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남진은 손을 뻗었다.

 

 "괜찮... 남진 씨?"

 "뭐 하자는 개수작이야."

 

 하민의 멱살을 잡은 남진은 어금니를 물었다. 올리브색 셔츠의 옷깃. 그리고 윤호의 아가일 패턴 니트, 다예가 입고 벗던 격자무늬 셔츠까지. 꿈일 리 없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야. 나한테 무슨 짓 했어?"

 "무슨 말이예요, 대체?"

 "나 오늘 분명히 여기 왔어. 당신 내 목도 졸랐잖아. 아직도 목이 얼얼한데!"

 

 쿡, 하민의 손가락이 남진의 목을 찔렀다. 버럭 화를 내려던 남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남진은 멱살을 놓고 화닥닥 제 목을 더듬었다. 손만 대도 욱신거리던 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민은 옅게 웃었다.

 

 "확신해요? 남진 씨가 본 것들이 진짜라고?"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하민은 구겨진 셔츠를 탁탁 정리하고, 바닥에 떨어진 빵봉투를 집어들었다.

 

 "뇌가 그렇대요. 인지부조화를 느끼면 정보를 거부하고 왜곡한다고."

 "내가..."

 "와, 롤케이크 맛있겠다. 이거 지금 같이 먹을까요? 윤호야!"

 

 부르는 소리에 돌아본 윤호는 흥미 없다는 듯 도로 엎드렸다. 부슬부슬히 웃어보인 하민은 카운터로 걸어가 커피를 데우고, 쟁반과 접시를 꺼냈다.

 

 "악몽이라도 꿨나봐요. 맛있는 거 먹고 푹 자면 다 잊혀질거예요."

 "..."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잘래요? 윤호도 좋아할 텐데."

 

 부글부글, 커피 끓는 소리에 산드러진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달래듯 조곤조곤한 말투였다. 달착지근하고 고소한 커피 향이 코 끝을 건드렸다. 평온한 공기, 잔뜩 긴장한 몸이 점차 노곤해졌다.

 

 남진은 패딩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고, 윤호의 맞은편에 앉았다. 테이블에 뺨이 눌린 윤호가 남진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옅은 호박색 눈동자를 보며 남진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현실과 비현실, 혹은 꿈의 경계.

 

 "와, 모카맛이네요? 맛있겠다!"

 

 쟁반을 들고 온 하민이 테이블에 롤케이크가 담긴 접시와 커피잔을 차례로 내려놓았다. 관심 없는 투로 굴던 윤호는 냉큼 포크를 집어들었다. 하민이 흰 빵칼로 롤케이크를 썰었다. 흰 크림을 동그랗게 품은 단면이 다예의 몸과 겹쳐보였다. 베이고 찢기고 뭉개진 살가죽.

 

 "진짜 맛있다. 남진 씨, 얼른 먹어봐요. 윤호야, 잘라 먹어. 볼 터지겠다."

 "스르."

 

 윤호가 빵빵한 볼로 우물대자 하민이 웃음을 터트렸다. 남진은 얇고 폭신한 빵덩이를 포크로 잘라 입에 넣었다. 부드러운 크림이 입안에 녹아들고, 달착지근한 모카향이 비강으로 퍼졌다. 사고가 멈췄다. 어떤 생각이든 잇기 힘들었다.

 

 문밖으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가 빠르게 멀어졌다. 작은 입을 오물거리던 윤호는 입에 든 것을 꿀떡 삼켰다. 무정물처럼 빵조각을 씹는 남진을 보며 윤호는 중얼거렸다.

 

 "그러게 그냥 가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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