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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낯선 거리
작가 : 봄동
작품등록일 : 2019.12.10

거리는 한 권의 책이다. 낯선 거리의 이방인 백남진, 어느날 마주한 통신사 대리점에서 점장 장하민을 만났다. 커다란 몬스테라 화분의 대리점부터 하나씩 읽어가는 거리의 구석구석과 사람들.

 
7. 한성빌라 401호
작성일 : 19-12-22 12:52     조회 : 185     추천 : 0     분량 : 7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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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속 좀 괜찮아?

 

 카톡 알림 소리에 눈을 뜬 것은 오후 무렵이었다. 반만 난 베란다 창문으로 비스듬한 채광이 기울어졌다. 침대에 엎어진 채 눈을 뜬 남진은 핸드폰을 확인했다. 발신자는 홍승연.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 누구세요?

 - 카레집 사장. 해장은 했어?

 - 아뇨. 방금 깼는데. 제 번호 어떻게 아셨어요?

 - 장하민이 알려줬어.

 

 하다 하다 이젠 카레집 사장님 성함까지 알게 되네. 남진은 침대 옆의 생수통을 집어 들었다. 입안이 깔깔하고, 왜인지 다리 전체가 욱신거렸다. 병째로 들이키는데 물이 조금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이대로 잘 것인지, 씻고 잘 것인지를 고민하던 찰나 카톡이 한 통 더 왔다.

 

 - 어제 하민이랑 술 마셨지. 얼마나 마셨어?

 

 하민, 마시다. 두 단어를 보자 불현듯 여러 장면들이 스쳤다. 시끌벅적하던 고깃집과 소주잔, 어두운 광장과 하민. 그리고 가로수 아래에서의... 구토?

 

 남진은 아연실색하며 물통을 떨어트렸다. 빈 물병이 장판 위를 데구르르 굴렀다. 단편적인 개인사를 나불대던 주둥이, 토사물을 게워대던 기억이 생생했다. 그 이후에는? 집에 어떻게 들어왔더라? 머리를 감싸쥐고 필사적으로 기억을 떠올리는데, 핸드폰이 또 울렸다.

 

 - 장하민 아프댄다. 너네 어제 몸싸움이라도 했냐?

 

 

 

 -

 

 

 [지나친 음주는 몸과 마음에 해롭습니다]

 

 남진은 지나가는 버스의 공익 광고 문구를 우울하게 바라보았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며, 모두가 무시하는 사실이다. 술은 인류가 수렵 채취하던 시절부터 함께 해온 오랜 친구이자 온갖 문제를 일으키는 말썽꾼인 것이다.

 

 감정의 격화, 판단력 둔화와 만용 등 술이 사람에게 끼치는 해악은 무수하지만, 개중 최악은 망각이다. 공포는 무지에서 시작하는데, 하물며 '만취 상태의 나'를 모르는 경우에야. 본인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기억이 나질 않으니 겁부터 집어먹는 것이다. 남진이 급히 씻고 거리로 뛰쳐나온 이유도 그것이었다. 덜 마른 앞머리가 얼어붙어 부시럭댔다.

 

 예상 혹은 기대와는 다르게, 몬스테라 대리점의 간판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따뜻한 색감으로 빛나는 알전구를 바라보던 남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나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언제나처럼 후덥지근한 실내, 차임벨이 맑게 울렸다. 그런데 연이어 들려와야 할 하민의 인삿말이 없었다. 가게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어디선가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점장 없어."

 

 익숙한 반말. 큼직한 품의 남색 아가일 니트를 입은 직원이 카운터 안쪽에서 몸을 일으켰다. 양 팔로 기지개를 쭉 켠 직원은 남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엷은 호박색 눈. 남진은 저도 모르게 답했다.

 

 "왜요?"

 "아프대. 그래서 안 나왔어."

 "근데 저번부터 왜 자꾸 반말이세요? 여기 직원 아니예요?"

 

 짙은 다크서클에 동그란 볼. 직원은 갓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을 만치 앳되어 보였다. 반면 호리호리하고 균형잡힌 체구. 그의 얼굴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던 남진의 시선이 명찰에서 멈췄다. 직원 윤호.

 

 "윤호?"

 

 남진은 동명의 고양이를 떠올렸다. 검은 털에 노란 눈을 가진 고양이, 마치 사람 같은 눈빛. 명찰과 직원을 번갈아 보자, 직원은 히죽 웃었다.

 

 "한성빌라 401호. 비밀번호 1231."

 "뭐?"

 "궁금해할까 봐."

 

 말을 마친 직원은 용건이 끝났다는 듯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딸랑, 차임벨이 울리고 중년 여성 둘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직원은 웃는 낯으로 인사하고, 능숙하게 손님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어쩐 일로 오셨어요? 그것을 지켜보던 남진은 얼굴을 구기며 가게를 나섰다.

 

 존댓말 쓸 줄 아네. 한국말이 서툴다던 하민의 말을 떠올리자 기분이 확 상했다. 남진은 인상을 쓴 채 사방을 둘러보았다. 전에 하민이 집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 기억났다. '저쪽 골목으로 쭉 들어가면 있는 한성빌라...'

 

 그가 가리키던 방향을 보며 경로를 훑던 남진은, 됐다 싶은 심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가서 병수발 들 것도 아니잖은가. 나온 김에 해장이나 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발을 잡았다.

 

 "남진 씨!"

 

 뒤를 돌아보니 카레점 사장이었다. 사장은 열린 주방창으로 손을 흔들며 남진을 불러세우고,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죽. 지금 하민이네 가는 거지?"

 

 종이봉투 안쪽을 들여다보니 큼직한 락앤락 통 두 개가 들어있었다. 사장은 흘러내린 귀밑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내가 직접 가져다주기에는 영 시간이 안 나서. 마침 부르려고 했는데 어째 딱 맞춰 왔네."

 "안 갈 건데요."

 "여기 남진 씨 것도 있는데? 이거, 위에 거."

 

 시퉁하게 답하자 사장은 손을 뻗어 위쪽의 락앤락 통을 톡톡 쳐 보였다. 시래기랑 된장이랑 콩나물 넣고 끓인 건데, 건새우 넣어서 고소할 거고- 사장이 한 마디씩 할 때마다 남진의 표정이 조금씩 풀렸다. 굶주린 강아지처럼 눈을 빛내는 남진을 보며 사장은 씩 웃었다.

 

 "아직 해장 안 했지? 배고프겠네?"

 

 

 

 -

 

 

 어째 항상 먹을 것에 넘어가는 기분인데. 남진은 묵직한 종이봉투를 든 채 빌라를 올려다보았다. 한성빌라, 붉은 벽돌의 빌라는 낡고 오래되어 보였다. 부잣집 도련님처럼 생겨가지고 이런 데에 사네. 현관 비밀번호조차 걸려있지 않은 빌라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니, 건물 내부는 생각보다 깨끗했다. 연식에 비해 관리가 잘 된 것처럼 보였다.

 

 다만 엘리베이터가 없어 4층까지 걸어 올라가야 했다. 주야장천 누워만 있던 저질 체력이라. 더군다나 무거운 것까지 든 채로 계단을 오른 남진은 숨을 헐떡대며 401호의 회색 현관문 앞에 멈춰섰다. 띵동, 여러 번 벨을 눌렀는데도 잠잠했다. 결국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섰다.

 

 "계세요?"

 

 쓰리 룸 빌라는 예상보다 넓었다. 거실과 이어진 주방은 널찍했고, 들어서자마자 어디선가 알 수 없는 향이 풍겼다. 짙은 색의 나무 장판과 흰 벽, 곳곳의 화분이 가게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말도 안 튼 사이에 깜짝 방문이라니. 서먹한 기분으로 집을 둘러보는데, 한 가지 문제에 봉착했다. 닫힌 문이 무려 네 개였던 것이다.

 

 하나는 욕실일 테고, 하민이 있을 침실이 도저히 짐작 가지 않았다. 남진은 주방 카운터에 죽이 담긴 봉투를 내려놓고 패딩을 벗었다. 초인종 벨소리도 못 듣던 사람이 부른다고 일어날 리도 없고(그러고 보니 뭐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열어서 확인하려고 한 방문의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 야, 저기 있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목소리. 남진은 저도 모르게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좁고 어두운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이, 사면의 벽에 큰 거울만 붙어있었다. 남진은 집 안에 들어섰을 때부터 풍겼던 향이 이 방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사방의 거울이 남진을 비췄다. 교복을 입은 채였다. 옆면의 거울을 돌아보자, 한 무리의 교복들이 저를 보며 웃고 있었다.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남진은 그중에서 얼굴이 흰 남자애를 발견했다.

 

 그는 주변의 친구에게 무어라 속닥거리고, 남진을 가리키며 폭소를 터트렸다. 그 주변으로 점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중년 부부, 학생들, 노부부, 젊은 청년들. 웃음을 터트리거나, 경멸 혹은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분노하는 그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남진을 '잘 아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숨이 점점 가빠졌다. 남진은 모이를 쪼는 닭처럼 목을 홱홱 돌려 사방의 거울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거리를 배경으로 아는 얼굴들, 수많은 눈들이 남진을 보고 있었다. 더운 숨을 헐떡이는 찰나, 누군가가 어깨를 턱 붙잡았다.

 

 "윤호야, 내가 여긴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

 

 신경질적인 목소리. 돌아보니 초췌한 얼굴의 하민이었다. 반라 상태의 하민은 남진의 얼굴을 보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남진 씨? 여긴 어떻게..."

 "당신 뭐야? 뭐하는 사람이야?"

 "네?"

 "이 거울들...!"

 

 앞쪽 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돌아보니, 거울 속에는 남진과 하민뿐이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하민은 방의 불을 켜고 한쪽 벽의 거울을 밀었다. 드러난 것은 다름 아닌 붙박이장. 검은 트레이닝복 바지만 걸친 하민은 서랍장을 뒤적였다.

 

 "여긴 사면이 다 붙박이장인데, 미닫이문에다 거울을 붙여놨거든요."

 "..."

 "어두운 데서 봤으면 좀 놀랐겠다. 괜찮아요?"

 "그게 다예요?"

 

 서랍에서 흰 티셔츠 한 장을 꺼내어 입은 하민은 해쓱한 얼굴로 남진을 마주했다. 남진의 얼굴에 두던 시선이 부들거리는 주먹으로 향했다. 남진은 주먹을 꽉 쥔 채 하민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한 대 치겠어요."

 "그게 다냐고!"

 "백남진 씨."

 

 하민은 남진에게 다가갔다. 몸에 딱 붙는 티셔츠 아래로 문신이 비쳤다. 막연히 이레즈미나 한냐 따위라고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글자와 기하학적인 도형이 엉키고 설킨 것이었다.

 

 바로 코앞에서 멈춰 선 하민이 고개를 기울이고 남진을 내려다보았다. 평소보다 창백한 얼굴, 어두운 눈가. 분노와 긴장으로 가득한 남진을 응시하며, 하민은 입을 떼었다.

 

 "배고프지 않아요?"

 

 

 

 -

 

 

 "다들 내가 돼진 줄 알아."

 "너무 말라서 그래요. 딱 봐도 혼자선 잘 안 챙겨 먹을 것 같거든요."

 

 반박할 말이 없다. 남진은 카레집 사장이 만든 죽을 양껏 입에 떠넣었다. 고소한 장맛과 들기름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하민은 입맛이 없는지 수저로 죽을 휘휘 저었다. 파리한 안색에 실핏줄이 터진 눈, 아픈 기색이 역력한 몰골이었다.

 

 "어디가 안 좋은 거예요?"

 "몸살인 것 같아요. 어제 추운 데서 운동 비슷한 걸 오래 했더니."

 

 훌쩍, 코 먹은 목소리.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남진은 수저를 내려놓았다. 혹시? 하는 눈으로 묻자, 하민은 피로하게 웃어 보였다.

 

 "아, 혹시 기억나요? 안 나려나."

 "...아뇨, 필름 끊겨서."

 "하긴 너무 취했으니까. 그러니까 어제 말이예요-"

 

 하민의 말에 의하면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어젯밤 하민이 만취한 남진을 집 앞까지 데려갔고, 남진은 현관에서 주저앉았다. 몇 호인지, 비밀번호가 뭔지 묻는 말에 대답 않던 남진이 대뜸 달리기 시작했다. 그걸 잡아다 놓으면 순순히 따라가는가 싶더니 또 도망치고, 또 달리고. 그걸 몇 번이고 반복하다가 결국 남진은 뻗었고, 그제야 비밀번호를 실토한 것이었다.

 

 간략하게 이야기를 마친 하민은 눈가를 꾹꾹 문질렀고, 남진은 쥐구멍이 어디 없나 찾기 시작했다. 어쩐지 다리가 아프더라.

 

 "그런데 남진 씨는 멀쩡하네요. 난 감기몸살 걸렸는데, 체력도 좋아."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나름 재미있었어요. 남진 씨 아니었음 이 나이에 언제 또 술래잡기를 해보겠어, 그쵸?"

 

 그렇게 말하며 하민은 계속 먹으라는 듯 손짓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더군다나 환자 앞에서) 더 처먹으면 염치없는 놈이지. 라고 생각했으나, 속은 쓰렸고 죽은 너무 맛있었다. 잠자코 배를 채우는데, 하민이 식탁에 턱을 괸 채 물었다.

 

 "근데 아깐 왜 그랬어요?"

 "예?"

 "그 방에서. 뭐 귀신이라도 봤어요?"

 

 남진은 숟가락질을 멈추고 가만히 죽을 내려다보았다. 교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과 몇 해나 지난 기억들. 거울에 비친 단편들은 과장되고 왜곡되었지만 구체적이었다.

 

 "피곤해서 헛 걸 봤나 봐요. 아니면 술이 덜 깼던가."

 

 거울 속의 희고 말간 얼굴이 떠올랐다. 시간의 더께가 쌓이며 부예진 것들이 먼지를 닦아낸 듯 선명해졌다. 한 데 뭉친 기억과 감정들이 갈비뼈 속에서 일렁였다.

 

 "뭘 봤는데요?"

 "옛날에... 그냥, 기억들이요."

 "뭐가 그렇게 무서웠어요?"

 "나를 아는 거요. 그러니까 나는..."

 

 띄엄띄엄 이어지던 말이 멈췄다. 고개를 들자 하민이 평온한 얼굴로 남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진은 문득 그가 익숙하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짙은 눈썹과 다정한 눈, 웃는 입매 따위가 전혀 낯설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남진은 또다시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민은 마른 기침을 하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남진 씨에 대해 뭔가를 아는 게 무섭나봐요?"

 "...아까 그 방은 뭐였는데요?"

 "말 안 해줄 건가 보다."

 "그쪽도 그러면서."

 "궁금해요? 말해줄까요?"

 

 하민은 수저통에서 티스푼 하나를 꺼내어 식탁 정중앙에 내려놓고, 핑그르르 돌렸다. 빙글빙글 도는 쇳덩이가 빛을 조각조각 반사했다. 하민이 입을 열자, 얇고 고운 목소리가 마치 노래를 부르는 듯 했다.

 

 "물어봐요, 나한테 궁금한 게 많잖아요. 오늘은 다 대답해줄게요."

 "나는..."

 

 현실이 붕 떴다. 깨끗한 실내에 난데없이 먼지가 부옇게 일었다. 미세한 입자들이 주홍빛으로 반짝였다. 테이블 위의 티스푼은 계속해서 회전했다. 동그란 빛의 호선이 끊기지도, 느려지지도 않았다. 허파를 들락거리는 공기가 감각을 자극했다. 노을이 비스듬히 들어오는 쓰리룸 빌라는 철근과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무정물이 아닌, 흐름과 교차 틈바구니의 비밀 공간 같았다.

 

 상체에 기이한 문신을 한 남자와 멈추지 않는 티스푼. 상식의 범주를 넘어서는 질문들이 머릿속 한가득 차올랐다. 남진은 개중 그나마 정상적인 것을 물으려다가, 입을 닫았다. 대답을 듣는 것조차 두려웠다.

 

 "궁금한 거 없어요."

 "정말? 단 한 번도 의심스러웠던 적 없어요?"

 "안 물어볼 거예요."

 

 티스푼이 멈췄다. 누군가 붙들기라도 한 듯 그 자리에 굳은 티스푼은 아까의 존재감이 무색하도록 볼품없이 놓여 있었다. 부옇게 반짝이던 먼지바람은 온데간데 없고 시야가 선명했다. 틱, 틱, 시곗바늘 소리가 침묵을 돋궜다. 하민이 소리 없이 웃었다.

 

 "좋아요. 나중에 후회해도 몰라."

 

 하민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노을이 비치던 집안은 어느새 어둑해져 있었다. 주방과 거실의 조명을 켠 하민은 도로 앉아 죽을 떠먹기 시작했다. 멍하니 그릇과 식기의 마찰음에 귀를 기울이던 남진은 도어락 소리에 현관을 돌아봤다. 띠띠띠띠, 띠로리.

 

 "나 왔어. 아직 살아있냐?"

 

 돌아보자 아까 대리점에서 봤던 직원, 윤호였다. 하민에게 검은 봉투를 내민 윤호는 남진을 향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아직 안 갔네?"

 

 

 

 -

 

 

 "윤호야, 내가 고객들한테는 꼭 존댓말 쓰라고 말했잖아."

 "썼는데."

 "남진 씨한테는?"

 

 들은 체도 안 한다. 윤호는 남진의 무릎에 턱을 얹고 TV에 시선을 고정했다. 남진은 제 허벅지에 올려진 머리통과 하민을 번갈아 바라봤다. 하민은 무안히 웃으며 윤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애가 표현이 좀 프리하거든요. 혹시 불편해요? 치워줄까요?"

 "아뇨, 뭐. 외국에서 오래 살았나 봐요."

 "네. 그래서 말도 좀 서툴러요."

 "말은 잘 하는 것 같은데. 근데 윤호는 어디 갔어요?"

 

 하민과 윤호가 동시에 남진을 바라보았다. 사람 말고 고양이요, 부연하며 소파 옆쪽의 캣타워를 가리키자 하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처 동물 병원에 입원해있어요. 전에 아프던 게 완전히 나은 건 아니거든요."

 "고양이 윤호는 이 친구 이름을 땄나 봐요. 가족이예요?"

 "그런 셈이죠."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지, 그런 셈은 또 뭐야. 거실 소파에 몸을 기댄 채 48인치 TV 속 예능 프로그램에 눈을 두었다. 죽만 먹이고 바로 일어날 생각이었는데, 어쩌다가 발목을 잡혀 이 집 거실에서 함께 예능 프로를 보게 된 것이다.

 

 게다가 무릎 위에는 조막만 한 짐덩이까지. 다리를 슬쩍 들자 성질을 냈다. 움직이지 마, 내 다린데 왜. 윤호와 반말로 주고받다가 하민을 보니 안절부절 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편한 태도인 윤호가 불안한 모양이었다. 또는 남진이 화를 낼까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간 너무 까칠하게 굴었나, 하민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퍽 무례한 행태임에도 어쩐지 화가 나지 않았다. 앳된 얼굴 탓인지 어린애처럼 느껴지기도, 묘하게 익숙한 기분이기도 했다. 남진은 괜찮다는 제스처로 윤호의 머리에 손을 올려놓으며 하민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쪽은 왜 나한테 말 안 놔요? 이 어린 친구도 반말하는데."

 "네?"

 "나보다 나이 많은 건 확실한데. 정확히 몇 살이에요?"

 

 나이를 묻자 하민이 눈을 깜빡이다가 픽 웃었다.

 

 "나이 알려주면 나한테 형이라고 부를 수 있어요?"

 "...아저씨? 삼촌?"

 "와, 내가 더 어리면 어쩌려고요?"

 "민증 까보시던가."

 "액면가로 충분하지 않아요?"

 

 또 그놈의 꽃받침. 잔망스럽게 눈을 깜빡여대는 낯짝으로 쿠션을 휘두르자 윤호가 짜증을 부렸다. 툴툴대는 볼따구니를 누르니 손을 물려고 들었다. 하민이 그것을 보며 박장대소했다. 때마침 TV 속 예능에서도 방청객의 웃음소리가 터졌다.

 

 어둑한 저녁, 타인의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 스크린 너머의 웃음소리가 평소처럼 외롭게 들리지 않았다. 무릎에 희한한 사람의 머리를 얹어두고, 더 희한한 사람과 웃고 떠들며 남진은 깨달았다. 결국 꽤 깊이까지 발을 들이고야 말았음을.

 

 그러니 언젠가는 서로의 껍데기를 깰 수밖에 없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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