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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낯선 거리
작가 : 봄동
작품등록일 : 2019.12.10

거리는 한 권의 책이다. 낯선 거리의 이방인 백남진, 어느날 마주한 통신사 대리점에서 점장 장하민을 만났다. 커다란 몬스테라 화분의 대리점부터 하나씩 읽어가는 거리의 구석구석과 사람들.

 
6. 빨간 냄비가 걸린 광장
작성일 : 19-12-18 22:24     조회 : 185     추천 : 0     분량 : 7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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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남진은 이것이 꿈이라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있을 리 없다.

 

 "바울 가라사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풍성한 은혜와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풍채 좋은 중년 부부와 젊은 청년들, 노부부, 대여섯 살 먹은 어린애, 교복을 입은 학생들... 여러 사람들이 긴 식탁 위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남진은 희고 하얀 빵덩이와 포도주 잔을 바라보았다. 희끗한 머리에 혈색 좋은 중년 남자가 잔을 들어올렸다.

 

 "또한 예수께서 이르시길,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남진은 붉은 것이 찰랑이는 잔을 들어올렸다. 그런데 잔을 입에 대려 하자, 모두의 이목이 그에게로 쏠렸다. 사방에서 손이 다가와 잔을 우악스럽게 뺏으려 들었다. 남진은 어떻게든 잔을 지키려고 몸을 움츠렸다. 억센 손길과 실랑이 속에 잔 속의 포도주가 튀고 흐르고 넘쳤다. 남진은 애끓는 눈으로 넘치는 것을 바라보았다.

 

 

 

 -

 

 

 익숙해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가령 퇴근 후 어딘가로 향하게 되는 발걸음이라던가. 남진의 경우에는 한 2주쯤 걸렸다.

 

 어김없이 싱그러운 몬스테라. 남진은 미색 타일벽에 걸린 액자를 바라보았다. 분홍색 배경에 몬스테라 잎새가 그려진 나무 액자. 암만 희한한 가게라도 남의 영업장에 일없이 드나들던 것이 미안해서 사온 선물이었다. 하민은 뛸 듯이 기뻐하며 액자를 벽에 걸어두었고, 굳이 이런 것 사오지 않아도 당신은 언제나 환영이라는 말로 남진을 쑥스럽게 만들었으며, 다음에는 맛있는 걸로 부탁한다는 사족을 붙였다.

 

 "수리는 무사히 끝났구요, 서비스로 필름 교체해드렸어요."

 "앗, 감사해요."

 "감사하긴요. 찾아주셔서 제가 다 감사하죠."

 

 젊은 여성 고객과 대화하던 하민이 방긋 웃었다. 여기가 통신사 대리점이 맞긴 한가 보네. 남진은 무릎에 자리 잡은 윤호의 땃땃한 털을 쓸며 하민을 바라보았다. 고객 신분으로 이 가게에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그가 고객을 응대하는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더이상 그들의 관계는 고객과 점장의 사이가 아닌 모양이었다. 별다른 용건 없이 남의 가게에서 남의 고양이를 주무르는 남진의 모습부터 그러했다.

 

 그 사실을 상기하자 남진의 마음 한구석에서 어떤 투덜이가 퉁명하게 물었다. '안 읽는다며?' 남진은 대체로 그 말에 동의했고,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스무 살의 생일, 스무 해를 살아온 동네를 떠나던 그 날부터 3년간 남진에게는 누군가와 긴 대화를 나눠본 기억조차 전무했다. 그는 민들레 홀씨마냥 여러 곳을 떠돌았고, 어디에도 뿌리박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는 왜?'

 

 고양이 때문이다. 남진은 생각했다. 이 기막히게 따뜻하고 멍청한 동화같은 가게엔 털이 검고 눈이 노란 고양이가 있다. 살찐 집고양이처럼 미련하지도 않고, 사나운 길고양이처럼 난폭하지도 않은, 사람의 이름과 눈빛을 가진 고양이. 심지어 그 고양이는 매번 무릎에 올라 머리를 부벼댈 정도로 사람 손을 타는 짐승이다! 세상 어느 곳에 이런 사랑스러운 생물이 존재할 수가 있을까. 그러니 제아무리 남진이라도 잠시 머물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것이다. 석연찮은 자기합리화를 질겅거리며 남진은 윤호의 노란 눈 앞에다가 검지를 살살 흔들었다. 손가락을 따라 데루룩 굴러가는 노란 눈이 호박같았다.

 

 너 아니면 여기 올 일 없어. 알아? 윤호에게 속삭이며 앞발을 건드리자 솜방망이로 코를 후려쳤다. "이게 예쁘다 예쁘다 해줬더니!" 노란 눈과 눈싸움을 하던 중에, 하민과 고객의 대화가 들려왔다.

 

 "점장님은 요 근처에 사세요?"

 "네! 조오기 한 블럭만 넘어가면 윤호와 저의 러브하우스가 있답니다. 아, 윤호는 저기 까만 고양이예요."

 "그럼 퇴근하고 고양이랑만 노시나? 혹시 여자친구 있으세요?"

 "아, 여자친구는 없어요."

 "이상하다. 되게 잘생기셨는데, 왜 없으실까."

 

 대화의 가락이 문득 심상찮게 흘러갔다. 이것 봐라? 흥미롭게 돌아보자 미묘한 기류. 윤호의 꼬리가 살랑이고, 말없이 미소 짓던 하민의 입술이 열렸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세요?"

 

 

 

 -

 

 

 "왜 그랬어요?"

 "뭐가요?"

 "아까 그 여자 손님."

 

 남진은 나무 블록을 조심스레 뽑으며 말했다. 높이 쌓인 블록의 사면을 요리조리 살피던 하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야, 남진 씨가 나에 대해 궁금해하는 날이 다 오네요."

 "되게 괜찮던데."

 "그랬죠. 아, 우리 이걸로 야식 내기할래요?"

 "누가 먹는대요?"

 

 남진은 방금 전의 현란한 말 돌리기를 떠올렸다. 고객의 호감을 완곡히 거절한 하민은 그녀가 떠나자마자 대뜸 게임을 하자며 젠가를 들고 왔고, 또다시 구렁이 담 넘듯 화제를 돌리는 것이다. 이쯤 할까? 고민하던 남진은 하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일이다. 깨끗한 피부에 청아한 이목구비, 길고 늘씬한 목 아래로 (지나치게) 건장한 몸. 흰 폴라티에 베이지색 니트를 걸친 그는 모로 보나 매력적이었고, 거기에 몇 가지 눈에 띄는 개성까지 갖추고 있었다. 거기에 어엿한 통신사 대리점 점장. 지방 역전의 폰팔이라며 무시할 사람이 혹여 있을지도 모르지만, 매장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꽤 안정되어 보였다.

 

 "여자친구가 왜 없을까."

 

 혼잣말을 하니 블록을 살살 건드리던 하민이 째릿 노려봤다.

 

 "지금 나 솔로라고 놀리는 거예요?"

 "누가 누굴 놀려. 그냥 이상해서요. 잘생기고 몸 좋고 여유도 있는 사람이, 왜 여친이 없어요?"

 "저는 공공재거든요. 원래 꽃은 꺾지 않고 놔두는 거랬어요."

 "미친 거 아냐."

 

 대화할 의지가 사라졌다. 남진은 입을 닫고 위태롭게 흔들리는 블록 더미에 신경을 쏟았다. 하민이 아슬아슬하게 블록을 뽑아내자 작은 탄식이 터졌다. 침묵과 몰두. 부실공사의 시각화같은 모습을 한 젠가 블록 중 어떤 것을 뽑을지 골똘히 궁리하던 남진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하민은 멋쩍게 웃었다.

 

 "그냥 제 문제예요."

 "뭐가요?"

 "아까요. 그러니까 저는 누군가를 만날…"

 

 와르르! 90년대 서울의 비극이 테이블 위에서 재현되었다. 부실하기 짝이 없던 블록 더미가 무너진 것이다. 요인은 게임 내부가 아닌 외부에 있었다. 놀란 남진과 하민의 시선이 테이블 위의 난입자에게로 향했다. 느닷없이 테이블로 뛰어오른 윤호는 위풍당당히 꼬리로 테이블을 탁탁 치고는, 제 소임을 끝냈다는 듯 날렵하게 바닥으로 착지했다. 검은 몸뚱이가 우아한 포물선을 그렸다. 최악의 방향치 하민을 뜯어먹을 절호의 기회였는데! 남진이 널브러진 블록들을 아쉽게 바라보자 하민이 한숨을 쉬었다.

 

 "얘는 왜 또 심술이야."

 "한 판 더?"

 "아뇨. 젠가는 윤호가 또 건드릴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하며 카운터로 다가간 하민은 무언가를 손에 쥐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큼직한 손안에서 무언가가 잘그락거렸다. 묻는 눈으로 하민을 보자, 씩 웃으며 쥔 것을 테이블 중앙에 내려놓았다. 플라스틱 곽에 담긴 것은 붉은…… 화투패?

 

 "맞고 한 판 어때요?"

 "…점당 100원."

 "콜."

 

 

 

 -

 

 

 "말도 안 돼."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세요. 저는 치킨이 좀 땡기는데- 아니다, 오돌뼈에 주먹밥이 나으려나? 고기도 좋구."

 

 남진은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역전의 광장을 걸었다. 진작에 의심했어야 하는 부분이다. 물 찬 제비마냥 패를 섞던 하민은 고도리를 시작으로 홍단에 초단, 오광을 내고 열끗을 7장이나 모았다. 넋이 나간 사이에 가멸차게 외쳐진 5고. 점당 100원 내기로 야식값을 딴 하민은 배부른 고양이같은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말해요. 전에 무슨 일했어요?"

 "당연히 타짜꾼은 아니었죠. 먼저 돈내기 제안한 쪽은 남진 씨거든요?"

 

 투닥거리던 말소리에 광장의 소음이 섞여들었다. 3층 높이의 지상철 역전 앞의 광장은 널찍했다. 공용 자전거 대여장과 벤치, 몇 그루의 가로수가 줄지은 광장은 사차선 교차로의 중심이자 시발점이었고, 저녁 늦은 시간대에도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광장을 밝히는 것은 천체물이 아닌 어슴푸레한 가로등과 번쩍대는 거리의 간판이었다. 남진은 하민의 옷차림을 흘금거렸다. 하민이 걸친 니트는 따뜻하고 포근해보였지만 외투의 역할을 할 수 있을만한 옷은 아니었다.

 

 "안 추워요?"

 "오늘은 날이 따뜻하잖아요."

 

 확실히 겨울밤답지 않게 푹한 날씨였다. 남진은 비가 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12월의 한밤 치고는 따뜻하고 습했다. 광장 한 켠에서 구세군 자선냄비의 종소리가 울렸다. 딸랑, 딸랑. 평소라면 인상을 찌푸렸을 소리에도 남진은 태연히 사방의 간판들을 둘러보며 야식거리를 고민했다. 선물처럼 찾아온 따스한 겨울밤의 즐거움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 이어진 소리에는 동요했다.

 

 "날마다 주를 섬기며- 언제나 주를 기리고-"

 

 자선냄비 옆쪽의 천막에서 한 무리의 성가대가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남진의 걸음이 멈췄다. 간밤의 꿈, 꾸역꾸역 밀어두었던 것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자선냄비를 발견한 하민은 이미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잠깐 사이에 이만치나 멀어진 그를 황급히 쫓아가니 어느새 천막이었다. 빨간 자선냄비 앞에서 지갑을 여는 하민을 발견한 남진은 인상을 쓰며 시선을 돌렸다.

 

 "할렐루야! 주님의 축복이 함께하길."

 

 선량한 얼굴의 봉사자가 종을 흔들며 인삿말을 건넸다. 남진은 하민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하민이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려는데, 그 옆에서 온수기를 지키던 봉사자가 손짓했다.

 

 "잘생긴 총각들! 이리 와서 커피 한 잔씩 하고 가."

 "아,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희는 이제 밥 먹으러 갈 거라서요."

 "그럼 이거라도 받아. 혹시 교회들 다니나?"

 

 봉사자는 교회 로고가 박힌 물티슈와 사탕 봉지를 내밀었다. 앗, 감사합니다- 하민이 웃으며 받아들자, 남진은 짜증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안 다닙니다."

 "어머, 그럼 지옥 가! 거기가 어떤 데냐면-"

 "꺼지지 않는 불. 마태와 마가의 언급에 따르면요."

 

 봉사자의 눈이 커졌다. 하민 역시 돌아보는 얼굴이 놀란 눈치였다. 남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하민의 팔을 잡아끌었고, 하민은 순순히 따라오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

 

 

 "교회도 다녔나 봐요? 의외네."

 

 남진은 대답 대신 소주를 따랐다. 고기를 굽던 하민 앞에 잔을 내려놓으니, 하민이 집게를 잠시 놓았다. 챙, 잔이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한 입에 털어 넣으니 뱃속이 뜨끈해졌다. 한 잔 어치의 불덩이를 마신 것 같았다.

 

 "옛날에 좀 오래 다녔어요."

 "언제부터?"

 "태어났을 때부터."

 

 도로 집게를 든 하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남진은 짜증스럽게 빈 잔들을 채웠다.

 

 "안 그래 보이는 거 알아요. 어디 가서 모태신앙이라고 말하면 아무도 안 믿는다고."

 "그런 건 아니고. 지금은 왜 안 다녀요?"

 "안 가는 게 아니라…."

 

 말을 멈춘 남진은 잠시 침묵하다가, 건배도 없이 잔을 비웠다.

 

 사람으로 꽉꽉 들어찬 원형 테이블과 주류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은 벽. 기름기 먹은 공기가 눅진한 고깃집은 소리로 가득했다. 남진은 소음에 귀를 기울이다가, 귀에 익은 목소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안심했다. 여전히 이곳은 낯선 거리, 그는 완벽한 타인이고 이방인이었다.

 

 말없이 잔만 채우고 비우기를 여러 번, 빈속에 연거푸 몇 잔을 들이켜니 이른 취기가 올랐다. 천천히 마시라던 하민은 결국 입을 닫고 고기를 뒤집기 시작했다. 노릇하게 익은 살코기와 비계가 배를 내보였다. 남진은 불판 위에서 지글대는 삼겹살을 바라보다가, 대뜸 질문했다.

 

 "십자가가 뭔지 알아요?"

 "예수님이 못 박혀서 돌아가신 사형대잖아요."

 "맞아요. 그건 사형대예요. 그것도 모두가 보라고 공공연하게 전시한."

 

 킬킬대며 제 잔을 또다시 채운 남진은, 만류하는 하민의 손을 밀어내며 잔을 들어 보였다. 찰랑이는 투명한 것이 꿈속의 포도주와 겹쳐 보였다.

 

 "고대 유대인들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면서 짐승을 태웠어요. 가장 어리고 순하고 죄 없는 것으로."

 "태워서 먹기라도 해요?"

 "그쪽이 지금 굽고 있는 삼겹살 같은 게 아니라, 죄를 대신 받고 죽어줄 존재인 거예요. 죄의 삯은 사망이거든요. 그리고 예수는 번제물을 자청했어요."

 

 하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위를 집어 들었다. 잘 익은 육질이 덩이에서 낱개로 잘려 불판으로 툭, 툭, 떨어졌다. 남진은 잔을 쭉 비우곤 인상을 썼다. 고기는 익지도 않았는데 소주 한 병이 금세 동난 것이다.

 

 "더 이상 희생 번제는 필요 없어요. 예수가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죽었으니까. 그냥 그 사실을 인정하고 믿으면 돼요."

 "그렇구나."

 "그런데 하늘도 눈감아주는 죄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나 봐요."

 

 가위질이 멈췄다. 하민은 잠시 남진을 보다가, 마저 고기를 잘랐다. 톡톡한 두께의 살점들이 가지런히 지글댔다. 고깃집은 여전히 소란스러웠고, 각자의 소음은 그들에게서 동떨어져 있었다. 남진은 그 무관심이 너무나 감사했다.

 

 "사람이라도 죽였어요?"

 "아뇨."

 "그럼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데요?"

 

 고기를 불판 한 쪽으로 밀고 김치와 마늘을 올린 하민은 집게와 가위를 내려놓았다. 하민은 물티슈로 손에 튄 기름기를 닦고, 남진의 손을 잡았다. 남진은 잡힌 손을 빼려다가, 입매를 찌푸리다가, 결국 흐느끼는 숨을 뱉었다. 눈앞이 순식간에 흐려졌다.

 

 "아무것도요. 난 아무 잘못도 안 했어요."

 

 

 

 -

 

 

 "이제 그만… 욱!"

 

 왈칵 속의 것이 역류했다. 등을 두들기던 손의 위치가 너무 정확한 탓이었다. 남진은 광장 가로수 아래에 토사물을 게워냈다. 두 번이나 우는 꼴을 보인 것이 민망하고 어색해 마구 마셔댄 것이 문제였다. 하민은 비틀대는 남진의 허리춤을 잡아 지탱하며 더 할 거예요? 하고 물었다가, 남진이 고개를 젓자 그를 부축했다.

 

 밤이 푹 익었다. 아까와는 두어 시간쯤 차이날 뿐인데, 아까까지만 해도 분주하던 광장이 이따금의 행인을 제외하고는 텅 비어버린 것이다. 남진은 나무 벤치에 몸을 기대어 하민이 건넨 생수병을 받아들었다. 입을 헹구자 목구멍이 깔깔하고 시큼했다.

 

 "술 진짜 못하네요."

 "쉬이끄러워요."

 

 꼬인 혀로 대꾸하자 하민이 픽 웃었다. 그 와중에도 말대답이예요? 고개를 뒤로 젖히니 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이 시야에 꽉 찼다. 그것은 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하게 멀어졌다가, 금방이라도 코 끝에 부딪힐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가, 빙빙 돌기 시작했다. 느리게, 느리게, 빙글빙글. 풀린 눈으로 그것을 보던 남진은 히죽거렸다.

 

 "그으거 알아요?"

 "그게 뭔데요?"

 "지구느은 돌아요. 태양 주변을 빙글빙그을 돌아, 돈다구요."

 "그…랬구나."

 

 하민은 웃음을 꾹 참는 표정으로 답하며 물티슈를 꺼냈다. 입가를 닦아내는 손을 가만 놔둔 채 남진은 눈을 감았다.

 

 "다응년한 소리예요. 그져."

 "네, 당연하죠."

 "중세 쉬대엔 아녔어요. 그딴 말 했다가느은, 당장에 화형이야, 응? 갈릴레오 아즈씨가 그래서 깜빵 간거야…."

 

 푸흡!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하민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교회 로고가 박힌 물티슈를 든 채 끅끅대는 하민을 향해 몇 마디의 술주정을 더 늘어놓아 하민을 호흡곤란 상태에 빠트려놓은 남진은, 따라 웃기 시작했다. 실없는 웃음소리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광장 둘레와 역전 사거리로 늘어진 상가들은 고요했다. 막차도 끊긴 시간, 운행을 멈춘 지하철역과 텅 빈 광장의 군데군데로 어둠을 닮은 정적이 흘렀다. 남진은 문득 뒷통수가 서늘하다고 느꼈다. 뒤쪽에는 아까의 붉은 자선냄비와 성가대의 천막이 있던 자리였다. 돌아보자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이 오래 지난 까닭이었다.

 

 "지금은 아니자나요. 다들 알자나, 지구가 도는 거는 진짜, 무지무지 당연하다는걸."

 "언젠가는 다들 깨닫게 되겠죠."

 "언젠가?"

 

 남진은 하민의 손에서 물티슈를 뺏어들었다. 벤치 옆 휴지통을 향해 던지니, 들어가기는 커녕 옆면에 부딪쳐 튕겨졌다. 하민은 입을 닫았고, 남진은 바닥에 구르는 물티슈를 보며 미소 지었다. 조소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나 뒤지고 나면? 우리 나라가 통일한 후에? 세계 평화가 도래하고 핵무기가 사라질 때쯤에?"

 "남진씨."

 "괜차나요, 아니, 됐어요. 나는 그냥……."

 

 눈앞이 점점 어두워지다가, 까마득히 멀어졌다. 크게 휘청이던 남진의 고개가 어딘가로 톡 떨어졌다. 폭신한 니트와 크고 단단한 근육의 결. 남진은 그것이 포근하다고 느꼈다. 그것은 꽃 냄새 분분한 봄날에 말린 빨랫감처럼 향긋하고 안온했다. 그러나 코끝에 섬유유연제 향이 닿는 순간에, 갈비뼈 아래가 이유없이 욱신거렸다.

 

 "그냥 편해지고 싶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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