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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낯선 거리
작가 : 봄동
작품등록일 : 2019.12.10

거리는 한 권의 책이다. 낯선 거리의 이방인 백남진, 어느날 마주한 통신사 대리점에서 점장 장하민을 만났다. 커다란 몬스테라 화분의 대리점부터 하나씩 읽어가는 거리의 구석구석과 사람들.

 
2. 만국기를 단 카레 전문점
작성일 : 19-12-10 10:03     조회 : 192     추천 : 0     분량 : 8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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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은품 입고되었습니다 고객님♥︎​

 

 몬스테라 대리점 - 모 통신사의 대리점이지만 남진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 의 점장, 하민에게서 메세지가 온 것은 다음 날 오후였다. 진동과 알림음에 눈을 뜬 남진은 핸드폰을 집어 시간을 확인했다. 2시 50분.​

 

 아르바이트 첫 퇴근을 끝내고 그 이상한 곳에 발을 들인 것이 금요일 저녁이었다. 주말에 업무 문자를 보내네. 그것도 카톡 메세지로. 프로필의 몬스테라 잎을 멍하니 보는데, 알림이 계속 울렸다.​

 

 - 다음 주에 오시기로 했지만 오늘 오셔도 괜찮아요! 주말에도 영업하거든요.

 - 주말에 집에만 있으면 심심하잖아요.

 - 오실 거죠?

 

 역시 이 남자는 말이 너무 많다. 남진은 폰을 내던지고 이불을 몸에 돌돌 말았다. 주말 아침(그의 기준에서)부터 남에게 휘둘리는 꼴이라니.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데 알림 소리가 계속 울렸다. 베개에 얼굴을 부비며 무시하려 했지만 까톡! 소리가 선명하고 일정하게 귀를 때렸다.

 

 "이 미친 새끼가 진짜!"

 

 벌떡 몸을 일으키고 폰을 쥐어들었다. 욕이나 한바탕 시원하게 해주고 도로 자려고 카톡창을 열었는데, 점장이 사진을 한 장 보내왔다.

 털이 검고 눈이 노란 고양이.​

 

 - 저희 직원이 완쾌했거든요. 오늘부터 정상출근 할거랍니다!​

 

 남진은 사진 속의 고양이를 한참 들여다보며 눈을 꿈뻑이다가, 핸드폰을 도로 내려놓았다. '고양이….'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는데 까톡, 또 한번 울렸다. 대체 이 정신나간 남자는 왜이리 치대는 걸까, 짜증 가득한 눈으로 폰을 바라보니 발신자는 점장이 아니었다.​

 

 - 잘 지내고 있니?​

 

 "…."​

 

 남진은 반대편 벽의 격자 무늬와 전자식 벽시계, 선반의 전자레인지를 차례로 보았다. 칠 평 남짓한 원룸, 단단한 무채색의 성채.

 

 오늘은 위험한 날이었다.

 

 

 

 -

 

 ​

 결국은 오고야 말았다. 알전구가 걸린 하얀 벽돌, 쇼윈도 없는 통신사 대리점에.

 

 ​전날에는 저녁이라 미처 놓쳤던 것들이 눈에 띄었다. 여러 핸드폰과 통신사의 광고 포스터가 가득했는데, 벽에 붙인 것이 아니었다. 캔버스 재질의 종이에 인쇄한 포스터를 종이 노끈에 집게로 달아놓은 것이다. 조화 야자잎과 함께. 역시나 일반적인 매장이 아니다. 일반 매장에다 저런 짓을 했다가는 계약 해지와 동시에 위약금을 폭탄으로 물겠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신경쓰였다. 그들 중 누구도 남진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이런 이상한 매장 앞에 서있는 것 만으로도 남진은 고개를 들기 힘들었다. 잠시 고민하던 남진은 점장이 보낸 사진을 떠올렸다. 털빛 까만 고양이.​

 

 "그래가지구 내가… 앗, 어서 오세요!"​

 

 차임벨 소리와 함께 비슷한 음색의 목소리. 오후의 채광이 창을 통해 기울어지고, 잎새 큰 몬스테라가 살랑였다​.

 오늘은 옥스포드 셔츠. 거대한 체구에 선 고운 얼굴의 점장이 반가운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보통은 고개숙여 인사할텐데. 남진은 발매트에 신발을 문질렀다.​

 

 "사은품 받으러 오셨죠? 골라드릴게요."

 "아뇨, 그보단."​

 

 고양이는 어디에? 들어오자마자 후끈한 열기에 코트를 벗으며 남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제와 같은 체리색 원목 바닥과 테이블, 벽 한쪽에서 빛나는 쇼케이스와 회전식 진열대. 그런데 점장 맞은편에 웬 소녀가 앉아있었다. 귀 뒤로 넘긴 단발머리, 오며가며 보던 교복. 조끼 가슴팍의 명찰에 이름이 적혀있었다. 홍주희.​

 

 "뎌 아더띠는 누그야?"

 "응, 내 고객님."

 

 혀 짧고 유독 새는 발음이었다. 거대한 점장 곁에 있는 것을 감안해도 키가 아주 작아보였다. 중학생쯤 되었으려나. 여학생을 대해본 적이 없는 남진은 얼어붙어 점장과 학생-주희를 번갈아 보았다.​

 

 "오빠, 유노 다 나아떠?"

 "그럼! 내가 얼마나 열심히 보살폈는데."

 "오늘 우리 가게에 밥 먹으러 오꺼야?"

 "당연히 가야지. 우리 사장님 카레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구!"​

 "엄마항테 말해노으께, 이따바!"

 

 주희는 벌떡 일어나 옷가지와 책가방을 챙기고는 점장의 볼에 입을 맞췄다. 그 장면에 놀란 남진이 눈을 꿈뻑이자 남진에게도 잇몸이 보일 정도로 환히 웃어보이는 것이었다.

 

 "안녕히 계데여, 아뎌띠!"

 

 지나치게 작은 이빨과 크게 낼룽대는 혀. 남진이 뭐라 대답할 틈도 없이 타다다닥 뛰쳐나갔다. 딸랑, 벨이 울리고 문이 닫히자 그제야 어제같은 일렉트로닉 팝이 들려왔다. ​

 

 "이 쪽으로 오세요. 아, 옷걸이 하나 마련했어요. 저 쪽 화분 옆에- 고객님?"​

 

 남진은 여전히 한 손에 코트를 든 채 벙찐 얼굴로 점장을 바라보았다. 점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고객님?"

 "왜 그쪽은 오빠고 난 아저씨예요?"

 "네?"​

 

 ​

 

 -

 ​

 

 "세상에, 상처받은 거예요?"

 

 ​한참을 끅끅대던 점장은 눈물을 훔쳤다. 점장이 내온 커피잔을 울적하게 바라보던 남진은 어제는 손도 대지 않았던 커피과자를 집어들어 봉지를 뜯었다.

 

 "군대에서 많이 듣지 않았어요? 군인아저씨-"

 "공익이라서."

 "괜찮아요. 애들 눈엔 다 아저씨 아줌마죠."

 "그쪽은 오빠라고 부르던데."

 "제가 워낙 동안이라서요. 민증검사를 안 하는 날이 없다니까요?"

 

 그렇게 말하곤 제 얼굴에 꽃받침을 해보였다. 남진은 대화를 포기하고 과자를 씹으며 점장이 챙겨준 종이 봉투를 들여다보았다. 케이스 여러 개와 이어폰, 충전기 따위의 것들이 가지런히 쌓여있었다.

 

 "주희 초등학생 때부터 봐왔거든요. 아마 제가 편해서 그럴거예요."

 "어떻게?"

 "옆 가게 사장님 딸이라서요. 어제 말했던 그 엄청난 카레집이요. 아, 그러고보니 점심은 드셨어요? 거기 진짜 맛있는데 같이 가실래요?"

 

 또 이런 식이다.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가게를 두리번거리는데, 카운터 뒤에서 작고 검은 것이 빼꼼 고개를 디밀었다. '고양이!​'

 

 "이제 나오네요. 주희가 오면 항상 숨거든요, 조용한 걸 좋아해서."

 

 이리 와, 점장이 손짓하자 검은 것은 날쌔게 달려와 테이블 위로 올라섰다. 짧은 털이 조명을 받아 부드럽게 반들거렸다. 점장이 커다란 손으로 고양이의 턱을 만지고 이마를 훑자, 가르릉거리다가 남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노랗고 투명한 눈.​

 

 꽤 온순하다고 느긋하게 생각하던 남진은 긴장했다. 남진을 노려보는 고양이의 눈빛은, 외부세계와 타인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듯 했고, 그것은 마치 사람과 같았다. 함축적이고 동시에 구체적이며 정확한 시선은 어떤 의도를 띄고 있는 듯 했다. 그 시선에 마땅히 화답해야 할 것 같은 중압감 속에, 결국 남진은 입을 열었다.​

 

 "난 백남진… 인데 그쪽은 이름이?"​

 

 I'm on the right track baby, I was born this way… 배경처럼 자리하던 스피커의 팝 음악의 가사가 선명하게 귀를 때렸다. 꽤 요란한 적막이었다.

 잠깐의 침묵을 찢고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으허흐학! 고개도 들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떠는 점장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보던 남진은 다시 고양이와 눈을 마주쳤다. 고양이는 꽤 희한한 눈으로 남진을 보다가, 하품하듯 이빨을 드러냈다. ​

 

 모양새가 꼭 비웃는 것 같았다.

 ​

 ​

 

 -

 ​

 

 "어떻게… 어떻게 그런…."

 "적당히 해요."

 "고양이랑 통성명할 생각을, 으학!"

 

 몬스테라 대리점과 마찬가지로 식당은 작아보였다. 외벽은 나무 마감, 창 너머로 맛있는 냄새와 노란 불빛이 넘실댔다.​

 

 "내가 왜 여기서 밥을 먹어야합니까?"

 "주희가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윤호가 같이 가라고 했다니까요? 고객님이 마음에 들었나봐요."

 

 전자는 아저씨라는 모멸찬 호칭을 외친 중학생 여자애고 후자는 고양이다. 통성명하려다 개망신당한. 대체 왜 고양이한테 사람 이름을 붙여놓은거야. 남진은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넘기며 카레 전문점을 바라보았다.

 

 저녁놀이 질 때까지 점장은 계속 웃어댔고, 남진이 대리점을 뛰쳐나가지 않은 까닭은 고양이 윤호가 머리를 부벼대며 안겨왔기 때문이었다. 점장의 웃음소리와 시덥잖은 헛소리도 고양이가 무릎에 앉은 동안에는 버틸만 했다. 털 곱고 따끈한 것.​

 

 너네 주인은 지옥에 던져놔도 악마랑 친구 먹을 거다, 점장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윤호의 귓전에 소곤대자 고양이는 이빨을 드러냈다. 긍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장님! 주희야! 하민이 왔어요-"

 

 ​그러다 결국 여기까지 끌려오게 된 것이다. 테이블 세 개와 조리대 앞 스툴 네 개가 전부인 아늑한 식당, 중년 부부 한 쌍이 구석 테이블에서 식사중이었다. 나무로 마감한 벽과 가게를 노랗게 물들이는 조명이 평범한 음식점의 그것이었다. 딱히 특별한 것은 없어 보였는데, 다만 줄지어 걸어놓은 만국기가 눈에 띄었다.

 

 인도 카레집에 만국기?

 

 조잡한 종이로 인쇄된 것이지만 한장 한장 정성들여 코팅된 국기들. 각 나라의 표상이 선명하게 그려져있었다. 브라질, 한국, 독일, 태국…. 두다다, 발소리와 함께 주희가 뛰어나와 점장 - 하민에게 안겼다.​

 

 "엄마! 하밍 오빠 와떠!"

 "어, 왔냐. 그 옆엔?"​

 

 무심한 목소리. 조리대 안쪽에서 한 여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갸름한 얼굴에 사나운 눈매가 아무리 봐도 삼십대 중반 이상은 무리였다. 중학생 여자애의 엄마라고 하지 않았던가? 남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하민이 넉살좋게 웃으며 남진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내 고객님이예요!"

 "니 고객을 여기 왜 데려왔어?"

 "오늘 하루종일 날 웃겨주셨거든요. 감사해서 식사 대접해드리려구."​

 

 이 새끼가. 남진이 사나운 표정으로 쏘아보자 하민은 눈을 찡긋해보였다. 어깨의 팔을 뿌리치니 두 손을 들어보이며 웃었다. 그렇게 웃고도 웃음이 나오나보다.

 

 "치킨 티카 마살라에 시금치 크림 커리, 블랙 시푸드… 고객님, 해산물 드세요? 인디카는요?"

 "그쪽 가게도 아닌데 고객님 소리 때려쳐요. 인디카는 안 먹어요."

 "그거랑 버터 갈릭 난 두 개, 인디카도 한 그릇 주세요!"​

 

 창가의 4인 테이블에 자리를 잡으니 주희가 하민 옆에 앉았다. 하민이 주문하는 동안 사장은 무심한 눈으로 남진을 보더니, 주희의 볼을 한 번 잡아당기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푹신한 등받이에 등을 붙이자니 담배가 당겼다. 가게로 오기 전에 한 대 피우려 골목으로 들어갔는데, 우리가 가는 식당에는 학생이 있다며 (가지 않겠다는데도) 하민이 끌고 나온 탓이었다.

 

 "긍데 뎌 아뎌띠는 왜 데려와떠?"​

 

 주희가 남진을 검지로 가르키며 물었다. 또 아저씨다. 남진은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하민은 웃음을 참는 표정으로 주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주희야, 저 오빠는 나보다 어리다? 그러니까 아저씨라고 부르면 안돼."

 "딘따?"

 

 빤히 바라보는 눈. 남진은 짐짓 표정과 자세를 바로하고 주희를 마주보았다. 주희가 작은 눈으로 활짝 웃었다.​

 

 "하나두 안 그래 보이능데!"

 "푸흡!… 아, 미안해요."

 "아뇨. 제가 좀 겉늙긴 했죠."

 

 남진은 물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스물 넷 청년의 가슴이 미어지고 목이 탔다. 물을 들이키던 남진은 주희와 하민이 조잘대는 것을 가만히 보다가, 자신이 무엇을 놓쳤는지 깨달았다. 교복을 입은 단발머리의 소녀는 사랑스러울지언정 예쁘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는데, 머리와 눈은 지나치게 작고 얼굴은 옆으로 넓적했다. 주희가 잇몸을 보이며 웃을 때마다 드러나는 이빨과 혀의 비율은 퍽 불가해한 것이었다. 하민이 주희의 볼 언저리를 감싸며 말했다.

 

 "아, 주희는 다운증후군이예요. 일반 학교를 다니고 있지만요."​

 

 남진은 당황한 눈으로 하민과 주희를 번갈아 봤다. 시선을 눈치챈 듯, 하민은 남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쁜 말이 아니잖아요. 주희도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어요. 사장님도 저도, 주희가 다운증후군이라고 말하는 것을 삼가지 않아요."

 

 ​그게 주희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하민을 보던 남진은 어쩐지 심기가 불편해졌다. 어제 느꼈던 언짢음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는데, 교훈적이고 촌스러운 영상물을 보는 듯 했다.​

 

 "좋은 분이시네요. 아주 존경스러워요."​

 

 던지듯 말하며 빈 잔에 물을 따르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여느 때처럼 웃어보이는 눈빛이 아까와는 달랐다. 서글픔인지 서늘함인지 정확히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그 무게는 남진이 저도 모르게 입을 닫을 정도였다. 남진이 변명이나 방어가 될 수 있는 말을 고민하며 침묵하, 하민은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백남진씨, 조심하세요."

 "아… 그."

 "물 넘치잖아요. 바지 다 젖겠어요."

 "예?… 아이씨!"​

 

 잔에서 넘쳐흐른 물이 테이블과 남진의 바지로 후두둑 떨어졌다. 남진은 급히 물병을 세우고 하민이 건네는 휴지로 테이블과 바지를 닦아냈다. 주희가 방울처럼 꺄르륵 웃었다.​

 

 "아뎌띠 디게 뎨미따!"

 

 ​

 

 -

 

 

 ​"끝내주죠?"

 "…."

 "거봐요, 내가 맛있을거라고 했잖아요."

 

 남진은 믿을 수 없는 눈으로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테이블의 식기들은 설거지를 했대도 믿음직할 만큼이나 깨끗했고, 음식들은 완전히 '끝장나'있었다.

 최근 식사가 부실했던 탓일까. 입이 짧은 편임에도 그 많은 양의 카레와 난, 심지어 사모사까지 추가로 시켜서 깨끗이 비운 것이다.​

 

 "내가 대체 얼마나 먹은 거지."

 "저도 그렇게 잘 드실 줄은 몰랐어요. 맥주 한 잔?"

 "아뇨, 배가 너무 불러서."

 

 그렇게 말하면서도 남진은 방금 해치운 시금치 크림 커리의 짭조롬한 뒷맛을 음미했다. 하민의 극찬은 단순히 과장이나 애정의 과시가 아니었다. 특히나 버터와 마늘을 발라 굽고 파슬리를 뿌린 난의 바삭한 부드러움은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주희는 남진이 음식을 먹는 모습을 진귀한 것 보듯 지켜보다가 졸리다며 어디론가 사라졌고, 조리대에서 구경하던 사장은 박수를 쳤다.

 

 "자주 오게 생겼네요."

 "그렇게 드셔놓고 또 안오시면 사장님 섭섭하실걸요."​

 

 가게 틈의 골목. 담배를 물자 라이터를 든 손이 불쑥 다가왔다. 감사, 뭘요. 기분좋은 포만감을 만끽하며 연기를 뿜어내는데, 카레점 쪽 벽의 쪽문이 벌컥 열렸다.

 

 "장하민 너 임마, 친구 생겼다고 치사하게 혼자 피기냐."

 "앗! 주희 챙기실 것 같아서-"

 "걔 자. 가게 마감하고 집으로 데려가야지."​

 

 카레점 사장이다. 머리를 높이 묶고 검은 앞치마 위에 패딩을 걸친 그녀는 담배를 꺼내물었다. 가게 안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사장도 키가 굉장히 컸다. 남자 중키인 남진과 비슷할 정도로. 키 큰 사장과 거대한 점장, 거인국에 온 기분이었다.

 

 "그 쪽은 뭐, 여기 학생?"

 "아뇨."

 

 근처에 대학이 둘이나 있어 학생이냐는 질문을 듣는 일이 흔했다. 남진은 이어질 질문에 방어적으로 맞설 태세를 취했다.

 

 "우리 주희 귀엽죠?"

 "예?… 예."

 "나는 걔 볼 때마다 정말 신기하다니까. 내가 어떻게 천사를 낳았을까."

 

 남진이 벙찌자 하민이 그쵸그쵸, 하고 말을 받았다. 사장은 세상만사 무념한 표정으로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딸을 예찬하고 애정어린 험담을 했다. 겉보기에는 라이더 자켓을 걸치고 500cc 오토바이로 뻥 뚫린 도로를 질주할 것만 같은데.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젊은 얼굴, 남편은? 쓸데없는 의문들이 떠올라 남진은 고개를 저었다. 다들 각자의 사정이 있겠지. 그것은 냉막한 예의와 동시에 저항일 수도 있었다. 이 거리를 읽지 않고 날것으로 두려는.

 

 "맛있었어요?"

 "예. 엄청."

 "되게 잘 먹던데."

 "살면서 그렇게 맛있는 카레는 처음 먹어봐서."

 

 사장은 폭발적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치켜올라간 눈매와 날카로운 턱선이 언뜻 히스테릭하게 보였는데, 웃는 얼굴은 꽤 부드러웠다.

 

 "야, 이 친구 재밌다."

 "그쵸? 제가 괜히 데려온 게 아니라니까요."

 "느낌이 약간 나같아."

 "사장님보단 남진씨가 더 재밌긴 해요. 아까는 윤호한테 통성명을 하자고…"

 

 높아지는 웃음소리, 남진은 벌겋게 달아오른 고개를 돌려 도로를 달리는 차들로 향했다. 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담배를 피우고 있는걸까. 그것도 웃음거리가 되어가며.

 

 "아, 그래. 남진씨? 이름이 이게 맞나."

 

 사장이 앞치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남진에게 건넸다.

 

 "우리 가게 쿠폰이예요. 도장 다섯 개에 난 하나, 열다섯 개 모으면 커리가 공짜."

 "저 오늘 돈 안냈는데요. 저쪽한테 주셔야."

 "자주 오라고. 우리집 커리는 일주일에 세 번 먹어도 안 질리거든요. 장하민 피셜이니까 너무 믿진 말고."

 

 시원시원한 말투. 쿠폰을 받아 뒷장을 돌려보니 유니온 잭을 배경으로 상호명이 적혀있었다. 하민이 나도 있어요! 하고 자신의 쿠폰을 흔들어보였다. 저 뒷장에는 오성홍기.

 

 가게 안에는 만국기가 걸려있더니, 쿠폰 뒷면에는 나라별 국기다. 무슨 의미일까?

 

 "감사합니다. 자주 올게요."

 

 묻지 않았다. 궁금증은 이유없는 가려움과 같으니까. 의식하지 않으려고 하면 결국 잊혀질 것이다.

 

 ​

 

 -

 ​

 

 "안 물어봐요?"

 "뭘요."

 "국기요."

 

 사장은 마감을 위해 가게로 들어가고, 슬슬 귀가하려는 남진의 뒷통수를 향해 하민이 던진 질문이었다. 바닥을 쓸던 하민은 재떨이를 종량제 봉투에 털며 물었다.

 

 "궁금해하는 것 같던데."

 "별로."

 "말해줄까요?"

 "아뇨."

 

 짧은 웃음소리가 포슬포슬했다. 봉투를 묶은 하민은 허리를 쭉 펴고 남진을 내려봤다. 남진은 약간 주눅이 들어 시선을 피했다. 얼굴만 보고 있으면 그가 거구라는 것을 잊게 된다. 단지 키만 큰 것이 아니라, 옷 아래의 흉포한 근육이 생경하게 느껴지는 어깨와 팔뚝의 자태. 하루이틀로 만들어지는 몸이 아니었다. 이 남자는 대리점을 열기 전 어떤 일을 했을까?

 

 "왜, 왜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내일 시간 있어요?"

 "왜요?"

 "윤호 쾌유 기념으로 조립식 캣타워를 주문했거든요. 근데 제가 뭐 조립하고 그런 데엔 영 젬병이라서요."

 

 혹시 도와주시면 안될까요? 쓰레기 봉투를 쥔 손을 모아쥐고 눈을 반짝이는 꼴이, 잠깐이나마 겁먹었던 것이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인상을 쓰고 걸음을 옮기자 쫄래쫄래 따라왔다.

 

 "사장님이랑 같이 하세요."

 "예전에 사장님이랑 같이 x케아 선반 조립하다가 굉장한 결과물이 나왔죠. 결국 열받은 사장님이 다 부숴버리는 걸로 끝났어요."

 "시간 없어요."

 "내일도 오늘같은 시간대에 오시면 될 것 같아요. 오후쯤? 오전엔 꽤 바쁘거든요."

 "뻔뻔하시긴."

 "지옥에 던져놔도 악마랑 친구 먹을 법 하죠?"

 

 발이 멈췄다. 생각이 되다 만 짧은 것들이 퐁퐁 솟았다가 뒤엉켰다. 느리게 돌아보자 하민은 천진하게 웃으며 대리점을 가리켰다.

 

 "내일 봐요. 윤호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솥뚜껑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보인 하민은 나무 문을 열고 사라졌다. 남진은 그것을 지켜보다가, 거리의 가로수에 잠시 시선을 두고,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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