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전 강남의 한 음식점에서 일어났던 묻지마 살인사건. 범인이 남긴 흔적은 사건 현장에 떨어져 있던 25cm 주방용 칼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주변의 CCTV, 목격자 등 아무런 증거도 없자, 일부에선 치밀한 계획범죄란 의문이 제기되었지만, 경찰은 우발적인 범죄라고 일단락 지었습니다. 하지만 어제 새벽 3시경 강북의 한 편의점 직원이 같은 방식으로 흉기에 찔린 채 사망했습니다. 현장에서 발견된 것은 같은 크기에 흉기 하나뿐이며, 지문이나 범인의 모습 등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어 강남의 묻지마 살인이 연속 범죄로 번질 가능성에 대해...’
창현과 동식은 집에 걸린 TV를 보다 서로 얼굴을 마주 봤다.
“그림자 짓이야. 분명해!”
동식은 주먹으로 소파를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창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미치기라도 한 건가?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저런 짓을...”
“아니 강북엔 파수꾼이 없나? 대체 뭘 하고 있던 거야?!”
동식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화를 냈다.
“우리도 못 막았잖아. 저들은 이미 우리의 존재를 알고 있어. 우리를 가지고 놀고 있다고.”
“아니 우리한텐 세계 최고의 파수꾼이 있다며, 그 사람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설마 서혜진한테도 안 되면서 세계 최고라고 떠들고 다니는 거야?”
“곧 투입되겠지. 우선 저 뉴스로 인해 이제 모든 파수꾼들이 알았을 거야. 그림자 놈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우리 역시 이제 최선을 다해야 해.”
*****
‘들어와.’
감정 없이 딱딱한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최용현은 한숨을 한 번 몰아쉬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원목을 통째로 다듬은 고급스런 책상 앞에 한 남자가 앉아있었다. 희끗희끗하지만 짙은 눈썹을 한 원재희였다.
최용현은 원재희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입을 열었다.
“그림자 놈들이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원재희는 아무런 대답도 않은 채 멀뚱히 최용현을 보고만 있었다. 계속 해보라는 뜻이었다.
“최근 강남과 강북에서 일어났던 살인사건에서 그림자의 소행일 것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들이 나왔습니다. 또한 현장에서 그림자의 일원들을 발견했다는 보고입니다.”
“그 증거라는 것이 뭐지?”
“꿈에서 나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인을 해서 저희 파수꾼들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원재희는 책상에 턱을 괴며 말했다.
“그래서?”
“그림자 측에서 제일 높은 능력을 가진 사람은 서혜진으로 추정 중입니다. 아시다시피 이번 사건이 일어난 강북을 맡고 있는 파수꾼은 저희 NSR에서도 10위권 안에 드는 파수꾼이었습니다. 그 파수꾼 역시 농락당할 수준으로 서혜진의 능력이 성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때문에 그녀의 힘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최용현의 입에서 그녀라는 단어가 나오자 원재희의 표정이 변했다.
“아직은 일러.”
“하지만 이번엔 좀 다릅니다. 저렇게 대놓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백남수가 사라지기 직전 밖에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
“고작 2명이다. 고작 2명 죽었다고 그녀를 데려다 쓸 수는 없다.”
원재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10위권 안에 드는 실력으로 안 되면 더 높은 능력을 가진 사람을 데려다 써.”
“하지만..”
“고작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를 이번 일에 투입시키기엔 대외적으로 우리가 잃는 손해가 너무 크다. 너도 충분히 알 텐데. 그녀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라. 그러라고 널 그 자리에 앉힌 것이니까.”
*****
강북의 편의점 직원까지 살해당하고 나자 세간의 이목은 모두 이번 살인사건으로 쏠렸다. 경찰은 동일범의 소행이라기엔 증거가 부족하다는 쓸모없는 이야기만 반복해서 해대자 SNS에서 말도 안 되는 소문들이 뜬구름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일부에선 경찰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야! 김형식 너 공조 수사하라는 지시 못 들었어?”
“예예 들었습죠.”
“근데 아직도 강북에 정보 안 넘기고 뭐 해?!”
“그쪽에서 넘어와야 우리도 줄 거 아닙니까. 기브앤 테이크.”
“지금 그쪽 전환데 어제 이미 넘겼다는데?”
“개수작 떨지 말라고 하세요. 강북구 놈들한테 밥그릇 뺏긴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뭐? 아직도 안 왔다고? 이 새끼들이 진짜?!”
실내는 말 그래도 쑥대밭이었다. 천장에 강력반이라고 적힌 네모난 명패 아래에는 책상 5개가 ㄷ자 모양으로 놓여있었다. 각 책상 위에는 네 명의 남자들이 앉아있었는데 그중 두 명은 울려대는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고 다른 두 명은 연신 노트북을 두들기고 있었다. 각 책상 위에는 문서들이 어지러이 널브러져 있었고, 왼쪽 벽면에 서 있는 화이트보드 위에 사진과 문서들이 잔뜩 붙어있었다. 김형식 형사의 휴대폰에는 기자들의 전화가 쉬지 않고 걸려왔다.
“아니 근데 이 새끼들은 대체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고 전화를 하는 거야?”
형식은 거칠게 휴대폰의 배터리를 뽑아버렸다. 그리고 화이트보드로 다가가 사건 현장의 사진들을 보며 말했다.
“아니 뭐가 있어야 잡을 거 아니야. CCTV도 없어. 지문도 없어. 목격자도 없어. 족적도 안 나와. 이 새끼는 귀신이야 뭐야?”
그리고는 뒤돌아서 열심히 노트북을 두들기고 있는 후배 형사에게 말했다.
“야 이형사. 강북구는 뭐 나왔대? 하긴 나왔으면 공조 명령에 개 거품 물었겠지.”
“예. 뭐 없는 모양입니다. 같은 브랜드 칼에 길이도 같다는 게 전부랍니다. 뭐 지문이나 다른 건 없고요.”
“아니 귀신이 죽인 거야? 뭐 아무것도 없어?”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화장실 가는 편의점 직원을 죽였다는데 근처에 CCTV가 그렇게 많은데 어떻게 하나가 그놈을 못 잡았을까요. CCTV가 어디 있는지 모르고서 그게 가능할까요?”
“그러게. 어떤 높은 자리에 있는 싸이코 새끼가 사람 죽이는데 재미 들린 거 아냐?”
말하고 있는 형식의 뒤통수를 검은색 결재 파일이 후려치고 지나갔다.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기어가서 뭐라도 집어와 인마.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미쳤다고 그런 짓을 하냐?”
형식의 뒤통수를 후려친 사람은 강력반의 반장이었다.
“그러니까 싸이코인 거죠. 어때요 반장님 설득력 있지 않아요? 서울시에 CCTV 위치를 알고 있는 고위공무원이 살인에 맛 들려서 사람들을 죽이는 거예요. 어때요?”
“나한테 죽고 싶냐? 당장 안 튀어 나가?!”
반장은 결재서류를 흔들며 형식에게 다가오자 형식은 잽싸게 뛰쳐나갔다. 그 뒤를 후배 형사가 따라붙었다.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 마치 오랜 합을 맞춰온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잠시 뒤 노란 테이프가 잔뜩 둘러진 건물 앞에 낡은 SUV가 투덜투덜 소리를 내며 나타났다. 차에서 김형식과 후배 형사인 이형사가 내렸다. 김형식은 건물을 한 번 올려다보고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이미 흔적도 없다고 세상에 다 까발려놨는데 이제 와서 우리가 뒤진다고 뭐가 달라질게 있나. 안 그래?”
“뭐 그래도 한 번 둘러보는 것 정도야 나쁘지 않겠죠.”
“에휴. 내 팔자야.”
이미 꽤 많은 시간이 흐른 사건 현장은 곧 예전의 화장실로 돌아갈 것이었다. 그전에 마지막으로 놓친 것이 없는지 확인하러 온 것이다.
노란 테이프 안으로 들어가 화장실 문을 열었다. 진한 화학약품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형식은 코앞을 손으로 휘저으며 말했다.
“어휴. 냄새. 난 아무리 봐도 그 자식이 수상하거든.”
“누구 말입니까?”
“있어. 그 NSR인지 국가보안 뭐시인지 그놈들.”
“아 그 예전에 잡혀 왔다가 풀려난 그 사람이요?”
형식은 이형사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너도 봤겠지만, 개인정보가 락이 걸려있어. 대체 연구소에서 뭣 때문에 그런 어린놈을 데려다가 쓰냐고. 나이도 28밖에 안 됐는데. 더구나 그 같이 다니던 그 이동식인가 USB인가 그놈도 락이 걸려있더라니까?”
“그 남자랑 같이 있던 그 어려 보이는 친구 말입니까?”
“그래. 뭐 엄청난 수제들이라도 되는 거야? 그래서 뭐 국가기밀이라도 연구하고 있는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일반인들 개인정보를 경찰에서 열람 못 하게 할 일이 없잖아.”
“그 NSR이란 기관이 정확히 뭘 하는 기관입니까?”
“난들아냐. 이름이 국가보안기술 연구소라는데 뭘 하는 곳인지 알 수가 없어. 뒤져봐도 흔한 정보도 찾을 수도 없고 근처에 가도 들어갈 수조차 없는 곳이야.”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