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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너에게 가는 길
작가 : 사파이어
작품등록일 : 2019.11.10

우주에는 ‘넵툰’이라는 청록색의 신비로운 행성이 있다. 그 곳에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그의 딸 ‘라미아’가 거대한 왕국을 이루며 살고 있다.
우주에서는 삶이 무한하고, 아름다움도 사그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반복되는 삶에 우울증에 빠진 ‘라미아’가 아버지에게 ‘지구’로 보내달라고 간청하는데, 아버지는 심하게 반대를 하다 결국 3년 안에 돌아오라는 약속을 하며 허락한다.
‘라미아’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되면서 어떤 범상치 않는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데...

 
13회
작성일 : 19-11-10 23:15     조회 : 193     추천 : 0     분량 : 9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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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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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젯밤에는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비를 쏟아 붓더니, 오늘은 바다 위로 쉴새 없이 번개가 내리치고 있었다. 소리 없이 내리는 번개는 생각보다 사람들의 주의나 시선을 끌지 못하는 듯 했다.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할머니가 밖으로 나와 낡은 의자에 앉아 가만히 하늘을 쳐다 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갑자기 뭔가에 놀란 듯 허겁지겁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을에서 한 번 도 본 적 없는 남자가 번쩍거리는 번개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천천히 마을 입구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남자는 키가 크고 말끔하게 잘생긴 얼굴에 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소매를 걷어 거의 팔꿈치까지 말아 올린 하얀 셔츠가 제법 잘 어울렸다. 하지만 하얀 셔츠 사이로 그의 몸의 일부분인 것 같은 어두운 기운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어두운 기운은 그림자처럼 그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그는 영화에서 나올 법할 아주 잘생긴 남자의 전형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작은 얼굴에 이목구비는 뚜렷했고, 흔히 보기 힘든 매우 서구적인 생김새였다. 그의 얼굴을 본 여자가 있다면 멀리서도 시선이 갈 법했다. 그의 화려한 외모는 그를 따라오는 어두운 기운 따위는 보지 못하는 장님으로 만들어주기에 충분했다.

 홍채현이 바닷가에 앉아 있다 좀 춥다고 생각하고 일어나려는 순간, 갑자기 남자가 다가와 따뜻한 커피를 내밀었다.

 “기분이 우울해서 혼자 바다에 놀러 왔는데, 저처럼 혼자인 사람이 또 있네요.”

 “아…… 전 괜찮아요.”

 “마셔요. 몸을 좀 녹여줄 거에요.”

 “고맙습니다.”

 커피는 정말이지 방금 내린 것처럼 따뜻했다. 그녀의 손부터 따뜻한 기운이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그제서야 홍채현은 옆에 앉은 남자를 찬찬히 살펴 보았다. 그는 아주 잘 생겼다. 하지만 어쩐지 경계심이 생기는 외모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의 차림새에서 풍겨져 나오는 화려함 때문인지, 지나친 그의 호의 때문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그는 삼라바와는 정반대로 혈기가 있는 피부색과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가 삼라바보다 훨씬 더 차갑게만 느껴졌다. 홍채현은 그가 준 커피를 마시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름이 뭐에요?”

 “저 홍채현이요. 그 쪽은요?”

 “전 김레오예요.”

 “김레오? 예쁜 이름이네요.”

 남자는 활짝 웃었지만, 홍채현은 남자를 보며 겨우 미소를 지었다.

 “저 며칠 간은 근처에 머무를 건데 내일도 만나서 함께 걸을래요?”

 “글쎄요, 제가……”

 “그냥 같이 걷는 것만요. 여기에 아는 사람도 없고 외로워서 그래요.”

 “그래요, 그럼.”

 “고마워요. 이 시간, 바로 여기에요.”

 남자는 여전히 환한 미소를 보이며 사라졌다. 홍채현은 그가 사라지자 가슴이 마구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 알 수 없었던 이 감정이 설렘이었을까, 그녀는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홍채현씨, 어디 갔다 와요?”

 삼라바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홍채현은 삼라바의 무표정한 얼굴에 특별히 나쁜 의미가 없다는 것을 어느새 잘 알고 있었고, 무뚝뚝한 그에게서 진심을 느낀 적도 많았지만, 언젠가 한 번쯤은 제대로 된 그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런 날이 올까?

 “그냥 산책 좀 했어요.”

 그녀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고 가장 구석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삼라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혹시 밖에서 누구 만났어요?”

 “누구요?”

 “김정기 친구라든가 아니면 어떤 사람이든요.”

 “뭐, 사람이 거의 없던데요.”

 홍채현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런데 삼라바, 당신은 누구를 보고 가슴 떨린 적 있어요?”

 “글쎄요…… 그건 갑자기 왜요?”

 “그냥 누군가를 보고 가슴이 막 두근거렸는데, 이게 어떤 감정인지 잘 모르겠어요.”

 “가슴이 뛰는 건…… 흔히 말하는 사랑의 감정일 수도 있고, 두려운 감정일 수도 있죠.”

 “두렵다고요? 처음 본 사람이 두려울 수도 있나요?”

 “처음 본 사람이라…… 그렇다면 사랑의 감정일 가능성이 크긴 하겠네요.”

 홍채현은 사랑의 감정에 대해서도 이토록 무심히 말하고 있는 삼라바의 태도에 어쩐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표정 없는 얼굴이 진짜 자신에 대한 마음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들었다. 정말 좋아하는 사람 앞에 선다면 어느 누가 그 감정을 숨길 수 있을까.

 “하지만…… 처음 본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죠. 홍채현씨, 자신의 직감을 믿어요. 당신은 강한 사람이니까.

 너무 화려한 영화의 시작은 비극적인 끝을 예고하기도 하죠. 늘 슬프고 아프고 격정적인 것만이 사랑이 아니에요. 생각보다 안정적이고, 편안하고, 한결 같은 것이라 정작 없으면 죽을 것 같기도 한 게 사랑이니까요.”

 “그럼 진짜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어떻게 알죠?”

 “한 번 만나보는 방법 밖에 없지 않을까요? 천천히 알아봐요. 너무 조급하게 판단하려고 하지 말고요.”

 홍채현은 삼라바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아무래도 그는 아무 마음의 동요도 없는 듯 했다. 그녀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운 대로 내일 다시 한 번 그 남자를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정말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어제의 그 남자가 서있었다.

 “홍채현씨, 나와 주셨네요.”

 “네.”

 오늘은 그녀의 가슴이 조금은 가볍게 콩닥콩닥 뛰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기분 나쁜 떨림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홍채현은 남자를 보며 밝게 웃었다. 산들바람이 머리카락을 가볍게 날리고 있었다.

 “아, 그런데……”

 “왜요?”

 “이제 보니 얼굴에 상처가 있네요. 예쁜 얼굴에 어쩌다가.”

 남자는 갑자기 인상을 찌푸렸다. 잔뜩 인상을 쓴 그의 얼굴은 험상궂기까지 했다. 홍채현은 오늘도 긴 머리로 오른쪽 뺨을 철저하게 가리고 나왔지만, 머리카락을 얼굴에 고정할 수 없으니 상처를 완벽하게 가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얼굴 전체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황급히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홍채현씨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사, 사랑이요?”

 사실 홍채현은 남자가 그녀 얼굴의 흉터를 지적한 순간부터 남자가 하는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오른 손으로 끊임없이 얼굴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네, 사실 저…… 홍채현씨한테 첫 눈에 반했어요. 나와 결혼해줄래요?”

 “뭐라고요? 결혼이요?”

 “아니, 결혼을 전제로 만나자는 거지, 당장 결혼하자는 건 아니에요.”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잘 모르겠다고요?”

 그는 화가 난 것 같았다. 뭐가 그리 급한 것일까. 홍채현은 갑자기 그가 무섭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홍채현씨, 사랑은 그런 것 같아요. 그 사람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내가 어떻게 되든 그 사람이 행복을 찾아 떠나게 할 거에요. 아니, 나를 떠나간다고 해도 그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면 떠나게 허락해주겠다고요. 그 사람이 떠남으로써 인해 내가 죽게 되더라도 말이죠.”

 홍채현은 그가 마치 외워 온 대사를 멋있게 하려다가 기억이 뒤죽박죽이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는 신사 같았던 사람이 갑자기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주절거리고 있었다. 그는 가면이라도 쓴 것 같았다. 웃는 얼굴로 듣기 좋은 말들을 쏟아 냈지만, 어쩐지 그가 하는 말이 그녀에게는 정반대로 들렸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런데 오늘 몸이 좀 안 좋은데…… 이제 그만 갈까요?”

 “홍채현씨, 내 말을 듣긴 한 거에요? 아니면 내가 한 말에 대해 할 말이 없는 거에요?”

 “미안해요. 지금은 아무 말도 못하겠어요.”

 홍채현은 서둘러 집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때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살결을 파고 드는 것 같이 온 몸에 찌릿한 느낌이 났다. 남자가 홍채현의 어깨를 강하게 잡고 있었다.

 “뭐 하는 거에요?”

 “홍채현씨, 우선…… 우선 내 말을 더 들어봐요.”

 남자는 그녀의 어깨를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홍채현은 그제서야 그의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두운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의 오른쪽 뺨이 마치 불에 덴 것처럼 심하게 열이 나는 것이 느껴졌다. 홍채현은 온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레우키포스, 이번엔 남자인가?”

 홍채현은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삼라바, 또 자네인가? 더 이상 나와 다프네 사이에 끼어 들지마. 이건 우리 둘만의 일이니까.”

 김레오라고 말했던 남자는 순식간에 레우키포스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홍채현의 눈에도 온통 까만 색깔의 옷을 입고 망토에 달린 커다란 모자로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도록 가린 레우키포스의 진짜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홍채현은 자신도 모르게 슬금슬금 뒷걸음질쳤다.

 “레우키포스, 이제 그만 다프네를 놓아줘.”

 “삼라바, 주제 넘게 나서지마. 네가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여? 나…… 나는 수천 년을 한결 같이 기다려왔어. 제대로 먹지도,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살았어. 난 단 한 번도 다프네를 잊은 적이 없었다. 늘 내 기억 속에 살아 있었어. 그러다가 드디어 그녀를 만나게 됐는데, 뭐? 놓아줘? 난 이제 절대 다프네를 놓지 않을 거야. 다프네는 내가 데리고 가겠다.”

 레우키포스의 눈에서 검붉은 눈물이 주룩주룩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분노가 온 몸을 감싸면서 레우키포스의 몸 전체가 마치 불타는 것처럼 뻘겋게 달아올랐다.

 “다프네를 어디로 데리고 가겠다는 거야? 다프네는 인간이야. 지구를 벗어나는 순간 죽는다고.”

 “다 방법이 있어.”

 “헛소리 하지마. 지구 밖으로 나가는 순간 다프네는 죽어.”

 “그렇지 않아. 다프네는 죽지 않아.”

 어느 순간부터 삼라바와 레우키포스, 다프네가 있는 자리를 중심으로 거대한 모래바람이 불어 바깥의 세상과 완전히 차단된 밀실을 형성했다. 마치 우주의 블랙홀 안에 들어온 것만 같이 모래바람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 세상에는 세 명 밖에 없었고, 아무도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는 덫에 영원히 갇혀 버린 듯 했다.

 “다프네에게 네가 남긴 상처를 봐. 너는 이미 다프네를 죽였어.”

 “무슨 소리야?”

 “다프네의 오른 뺨을 봐. 네가 남긴 상처인데 역시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있군.”

 삼라바의 말에 레우키포스는 급히 고개를 돌려 다프네를 쳐다 봤다. 다프네의 뺨에 새겨진 끔찍한 상처가 선명하게 보였다. 레우키포스는 상처를 보니 온 몸이 움찔거렸다. 정면에서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소름이 끼치는 모습이었다.

 “네가 우여곡절 끝에 환생해 파르나소스 숲으로 다시 돌아갔을 때 기억나?

 그 때 다프네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지.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던 너는 결국 그 일대의 월계수 나무들을 모조리 불태워 버리고 난 후에야 파르나소스 숲을 떠났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의 화는 수그러질 줄 몰랐어.”

 타오르는 분노 속에서 환생을 했지만, 사실 레우키포스는 다프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찾아갔던 것이 아니었다. 레우키포스는 다프네가 그리웠다. 그래서 다프네를 용서하고 싶었다. 그녀가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와 함께 이번에는 자신의 존재를 기억해주길 바랬다. 레우키포스가 진정으로 원했던 건 그것뿐이었다.

 “넌 결국 다프네를 죽였어.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병에 걸린 다프네가 월계수 나무로 변했지만, 너는 그 사실을 모르고 다프네가 영영 떠났다고 생각해 그녀를 죽도록 절망하고 원망했어. 그리고 그 비정상적인 원망과 분노를 모두 월계수 나무에 쏟아 붓고야 말았지. 그녀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화상 자국을 남긴 것도 모자라 결국 모든 월계수 나무 영혼들을 죽였다고. 다프네와 함께.”

 “그럴 리 없어…… 절대로. 나는 아무 것도 안 했어.”

 “거짓말……”

 홍채현이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레우키포스는 당황한 얼굴로 홍채현을 쳐다 봤다. 홍채현은 계속해서 자신의 오른쪽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다프네. 홍채현은 삼라바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자신을 불렀던 다프네란 이름을 기억했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다프네라는 존재가 정말 자신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홍채현은 제발 아니기를 바랐다. 그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라면 너무 억울하고 슬플 거 같았다.

 “삼라바, 내가 그런 게 아니라고. 애초에 네 아버지 아폴론이 다프네를 그렇게 만든 거야.

 아폴론만 아니었으면 다프네가 그런 저주를 받지 않았을 거잖아. 다프네를 불행으로 몰아넣은 것이 바로 아폴론이야. 그리고 그 아들인 너도 그 책임으로부터 아주 자유롭다고 말할 수는 없어.”

 삼라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삼라바도 자신의 아버지를 오랫동안 원망했었다. 아버지 아폴론은 스스로를 과신하고 다른 이들을 과소평가했다. 그래서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했고, 사랑했던 여인 다프네는 저주 같은 운명의 소용돌이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삼라바는 다프네에게 더욱 큰 연민을 느꼈던 것인지도 몰랐다.

 삼라바와 레우키포스를 감싸고 있는 모래바람은 둘의 힘의 균형에 의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팽팽하게 양쪽 끝으로 당겨져 원을 그리고 있었다. 삼라바가 일으킨 비구름에도 레우키포스가 만들어 낸 불길은 쉽게 잡혀지지 않았다.

 레우키포스가 검정색의 망토 안에서 거대한 낫을 꺼내 들었다. 어두운 은빛으로 날카롭게 빛나고 있는 낫의 몸체를 보자마자 홍채현은 새파랗게 겁에 질렸다. 당장이라도 이 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삼라바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럴수록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어떤 환경의 변화나 감정의 변화에도 냉정함을 유지하는 것이 삼라바의 정체성이자 특기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과거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되살아나 빠르게 뒤죽박죽 섞이고 있었다. 아버지 아폴론의 자만심과 다프네의 죽음, 그리고 삼라바가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죽음, 악몽과 같았던 자신의 죽음과 새로운 삶, 그가 지금 이 순간 꼭 지켜내야 하는 수많은 것들에 대한 온갖 번민이 그의 정신을 세차게 흔들고 있었다. 게다가 두려움에 소스라치게 떨고 있는 홍채현이 바로 그의 곁에 있었다.

 지금 그가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레우키포스를 처단하는 일? 홍채현을 피신 시키는 일? 라미아를 지키는 일?

 마침내 두 힘의 균형이 깨지면서 레우키포스의 거대한 낫의 뾰족한 한 쪽 끝이 삼라바의 손을 뚫고 들어왔다. 삼라바는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

 “하하하하.”

 레우키포스의 비열한 웃음소리가 바다 너머까지 울려 퍼졌다.

 “아니, 삼라바.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라미아도 아카마스 앞에서는 무력해지던데, 여기 자네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있기라도 한 거야? 천하의 삼라바가 평정심을 잃다니, 이거 실망인데?”

 삼라바가 쓰러지는 순간 눈을 질끈 감았던 홍채현이 깜짝 놀라 눈을 떠 삼라바를 바라봤다. 삼라바와 레우키포스는 여전히 서로를 노려 보고 있었다.

 냉정하게만 느껴졌던 삼라바가 평정심을 잃었다니 그게 무슨 뜻일까? 정말 그녀에게 마음이 있기라도 한 걸까? 그래서 이 모든 위험을 자처하고 이 곳에 있는 것일까? 홍채현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홍채현은 그녀의 사랑을 지켜야 했다. 더는 그냥 포기하고 마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그 때, 삼라바가 그녀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주 절박한 순간에 자신을 가장 강한 존재로 만들어줄 수 있는 초능력 같은 무기가 모든 사람에게 있어요. 단, 자신을 믿는 걸 포기하지만 않으면 돼요.”

 홍채현은 삼라바가 틀린 말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에게 초능력 같은 무기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거대한 레우키포스 앞에 혼자이고, 그녀 곁에서 그녀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홍채현은 열심히 주변을 살폈다. 바닷가 모래 사장에는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기껏해야 사람들이 버리고 간 냄새 나는 쓰레기 더미와 잘려진 나뭇가지 몇 개뿐이었다. 홍채현은 그 중에서 가늘고 긴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손에 쥐었다. 혹시라도 놓치면 안 된다. 그녀는 자신에게 등을 지고 삼라바를 바라보고 있는 레우키포스에게 달려 갔다. 그리고 나뭇가지의 날카로운 쪽으로 그의 등을 찔렀다.

 “으아악.”

 레우키포스는 고성을 지르며 등 뒤를 바라봤다. 수천 년 전의 다프네와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홍채현이 그의 앞에 서있었다. 그는 힘없이 무릎을 꿇고 앞으로 쓰러졌다. 그의 눈에서 검은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다프네, 다프네…… 당신이 어떻게 또……”

 쓰러진 레우키포스를 보며 뒷걸음질 치고 있는 홍채현의 손에서 익숙한 나무의 진한 향기가 풍겨져 나왔다. 홍채현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렸다.

 레우키포스는 죽는 순간 생각했다. 자신을 다시 살려낸 포세이돈의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그에게 주어진 두 번째 삶에서 그가 그토록 원망했던 존재는 사실 다프네가 아닌 포세이돈이었다. 그는 한 번의 죽음이 그의 마지막 결말이었어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그랬다면 그는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원치 않게 반복되는 기억 속에 살며 괴로워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를 무참히 죽이지도 않았을 것이고, 가장 사랑하는 존재로부터 평생의 원망의 대상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그는 천천히 꺼져 가는 생명을 느끼며 다시 태어난다면 세 번째로 주어진 삶에서는 더 잘 살 수 있을까, 상상해보았다. 그 때는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건 아닐 것 같다. 그는 이미 두 번째 삶에서 소중했던 기회를 저버렸다. 그는 이제 더 이상은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가 몇 번을 다시 산대도, 그는 속절없이 같은 길을 갈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본능이고,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었다. 삶이 온통 비극인 운명.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던 먼지 바람은 어느새 사라지고, 다시 반복적으로 몰아치는 바다의 파도 소리가 들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맑은 하늘이 바닷물에 반사되어 빛나고 있었다. 레우키포스는 먼지와 뒤섞여 부질없이 사라져 버렸다. 다시 없을 아주 까만 점들이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날라가 버렸다.

 멀찌감치 서있던 삼라바가 홍채현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홍채현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방금 있었던 일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반복적으로 떠올랐다. 그러다 겨우 삼라바가 내민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하얀 원피스에 온통 모래가 붙어 있었다. 그녀는 치마를 털어내야 한다는 것도 잊어 버렸다.

 “홍채현씨.”

 “그 사람…… 진짜…… 진짜 죽은 거에요? 저 어떡해요……”

 “홍채현씨가 해냈어요. 괴물을 물리친 거에요.”

 “괴물이요? 사, 사람이 아니에요?”

 “뭐. 귀신이나 유령쯤으로 해두죠. 어쨌든 이번엔 홍채현씨가 내 생명을 구해줬네요. 고마워요.”

 홍채현의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레우키포스가 마지막으로 이야기했던 그녀에 대한 삼라바의 마음이 자꾸 떠올라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삼라바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지금은 참기로 했다.

 “어서 집으로 가요.”

 삼라바는 아직도 떨고 있는 홍채현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라미아와 김정기가 집 앞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또 레우키포스가 나타났었던 거야? 멀리서 모래 폭풍이 생겼다 사라지는 걸 봤어.”

 “응, 맞아. 우리가 결국 레우키포스를 처치했어.”

 “그럼 이제 다 끝난 거야?”

 “그래.”

 그들은 서로의 어깨를 안으며 토닥이며 이내 따뜻한 집으로 들어갔다.

 맛있는 음식을 차리고 즐거운 이야기를 하는데도 파티의 분위기는 나지 않았다. 그들은 표정이 굳은 채로 이른 시간부터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모두가 다가오는 이별을 직감하고 있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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